책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드디어 가을이다. 온 몸을 휘감던 더위에 지치고 지친 채로 철푸덕 주저앉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바라고 바라던 가을이 왔다. 겨울이 봄꽃을 시샘하듯 여름은 낙엽이 못마땅했는지 그리도 콧김을 내뿜으며 힘들게 하더니만 이젠 더이상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물러간 듯 싶다. 아침 최저기온은 15도 이하, 낮 최고기온은 20도를 살짝 넘는 날씨에 제법 쌀쌀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기다리고 바랬던 가을이 왔다.
새해를 맞이할 때는 추위에 몸이 긴장한 탓인지, 혹은 겨울이면 눈을 뭉치고 놀던 기억 때문인지 새해 다짐을 그리도 꾹꾹 눌러담지만... 가을을 맞이할 때는 한 해의 대부분을 보내는 동안 그 다짐이 바랜 탓인지, 혹은 한여름 더위에 시달린 탓인지 그러한 긴장까지는 느끼지 못한 채로 이 땅에서의 여러 해를 거친 경험을 따라 곧 다가올 겨울과 그 다음 해 봄을 직감하며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커피 한 잔 마시듯 생각하게 된다.
가을이다 싶어지면... 사과대추를 좋아하는 아내의 영향인지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대추 한 알이 태풍 한 가득, 땡볕 한 가득 품고 붉게 영글어 가듯, 나도 살아온 지난 시간들을 내 속에 품고 영글어지고 싶다.
또한 가을에는... 학생 시절 국어 수업시간을 통해 '나도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라는 궁금증과 기대를 갖게 만들었던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봄부터 울었던 소쩍새도, 먹구름 속에서 울었던 천둥도... 그리움도, 아쉬움도, 가슴 조이던 서투름과 설익음도... 그 모든 것들을 지나 이제는 더 이상 가슴 졸이지 않는 가을의 노오란 국화 꽃과 같이 되고 싶다.
그렇게 대추알처럼, 국화 꽃처럼 익어가고 싶다.
그렇게, 그렇게 영글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걸음으로 행하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 어제보다 오늘 더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고 싶다.
(고린도전서 4:16)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계절이 가을에 접어들었음뿐만 아니라 인생 또한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려주는 변화들을 느끼며 생각해 보니... "내 삶의 가장 젊은 날은 바로 오늘"이라는 말처럼 앞으로 살아갈 날 동안 분명히 내 겉사람은 낡아질 것임을 또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조금은 유감스럽기도 하지만 이 또한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법칙이니 순종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론 굳이 유감스럽지 않아도 되는 것은... 나이 들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세상의 것들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는 것이고, 나이 들어 잘 들리지 않는 것은 세상의 소리들에 귀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소리만 들으라는 것이고, 나이 들어 정신이 깜박깜박하는 것은 나에게 상처준 사람을 기억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평안하게 살라는 축복이라는 말처럼 더 평안한 삶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도 생겨나기 때문이다.
나의 주변과 나의 시간이, 나의 세상이 온통 가을을 맞이함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두어걸음 앞의 삶을 잠시 생각해 본다.
언젠가는, 아니 어쩌면 조만간에 다가올지도 모를 두어걸음 앞의 삶의 모습을 커피 한 잔 마시듯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노인대학을 소재로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노인대학에 새로 전학 온 할머니로 분장한 강유미와 할아버지로 분장한 남자 개그맨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할아버지: '남자 친구 살아있냐?'
할머니: '나랑 사귈라면 진도가 빨라야 한다. 밀당하다가 죽는 애들이 너무 많아서...'
개그감각에 박수를 치면서도, 방송용 표현으로서는 좀 과하지 않나 싶다가도... 한편으론 현실일지도 모르는... 말그대로 웃픈 개그라고 생각되었는데... 마치 이런 독한 개그와도 같은 책의 제목은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다.
이는 일본의 정형시인 '센류' 형식의 '실버 센류'를 모아둔 책이다. 센류는 풍자나 익살을 특색으로 하며, 5-7-5의 총 17개 음으로 된 짧은 시를 가리킨다. '실버 센류'는 노인들의 일상과 고충을 유쾌하게 담아낸 센류로서 2001년부터 일본에서 매해 열리는 센류 공모전의 이름이기도 하다. 책은 그동안의 11만 수가 넘는 센류 응모작 중에 선정된 여든여덟 수를 추려 담아 출간한 것이며, 초고령 사회가 된 일본의 축소판이자 메시지집이라고 소개되었다.
재치에 박수를 치게 되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먹먹해지는... 노화된 현실의 당사자인 노인분들이 직접 썼기에 감히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말그대로 웃픈 시들이다.
■ 1부
# 당일치기로 / 가보고 싶구나 / 천국에
# LED 전구 / 다 쓸 때까지 / 남지 않은 나의 수명
# 종이랑 펜 / 찾는 사이에 / 쓸 말 까먹네
# 아무 맛 없는 / 싱거운 조림 / 실은 며느리의 배려
# 세 시간이나 / 기다렸다 들은 병명 / "노환입니다"
# 개찰구 안 열려 / 확인하니 / 진찰권
# 2세대 주택 / 지었지만 아들한테 / 색시 안 오네
# 여자 모임이라 / 말하고서 향하는 / 데이케어센터
# 일어나긴 했는데 / 잘 때까지 딱히 / 할 일이 없다
# 넘어질 뻔해서 / 뒤돌아봤더니 / 아무것도 없는 길
# 자명종 / 울리려면 멀었나 / 일어나서 기다린다
# 연명치료 / 필요 없다 써놓고 / 매일 병원 다닌다
# 레이디 가가보다 / 화려하구나 / 우리 집 레이디 바바 ('바바'는 '할머니'의 일본어임)
# 이 나이 되니 / 너무 많아 / 다 먹을 수 없는 콩 (일본에서는 입춘 전날 자기 나이만큼 콩을 먹는 풍습이 있음)
# 할아버지 / 저 세상 특산물은 / 어디서 사요?
# 국민연금 / 부양 가족에 넣고 싶다 / 개와 고양이
# 손가락 하나로 / 스마트폰과 나를 / 부리는 아내
# 깜빡한 물건 / 소리 내어 말한 뒤 / 가지러 간다
# 영정 사진 / 너무 웃었다고 / 퇴짜 맞았다
# 물 온도 괜찮냐고 / 자꾸 묻지 마라 / 나는 무사하다
■ 2부
# 생일케이크 / 촛불 불고 나니 / 눈 앞이 캄캄
# 만보기 숫자 / 절반 이상이 / 물건 찾기
# 뒤를 돌아보니 / 개가 배려해주는 / 산책길
# 비밀번호 / 카드가 많아져서 / 뒷면에 적는다
# 몇 줌 없지만 / 전액 다 내야 하는 / 이발료
# 두 사람의 연애담 / 처음 들은 / 장례식 날 밤
# 남은 날 있다고 / 생각하며 줄 서는 / 복권 가게 앞
# 이것도 소중해 / 저것도 소중해 / 그러자 쓰레기 방
# 마중은 / 어디서 나오냐고 / 손주가 묻는다 (마중은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가리킴)
# "미련은 없다" / 말해놓고 지진 나자 / 제일 먼저 줄행랑
# "강아지 왔네" / 손주 맞이하니 / 떠나는 배춧잎
# 눈에는 모기를 / 귀에는 매미를 / 기르고 있다
# "연세가 많으셔서요" / 그게 병명이냐 / 시골의사여
# 쓰는 돈이 / 술값에서 약값으로 / 변하는 나이
# 아루코 모임 / 알코올 모임으로 / 잘못 들었다 ('아루코'는 '걷기'의 일본어임)
# 자원 봉사 / 하는 것도 받는 것도 / 늙은 사람
# 젊게 입은 옷 / 자리를 양보받아 / 허사임을 깨닫다
# 청력 검사로 / 잴 수 없는 / 온갖 비밀 다 듣는 귀
# 내용보다 / 글자 크기로 / 고르는 책
# 입장료 / 얼굴 보더니 단박에 / 할인해 줬다
■ 3부
# 생겼습니다 / 노인회의 / 청년부
# 찾던 물건 / 겨우 발견했는데 / 두고 왔다
# 아내의 푸념 / 끄덕끄덕 하다 보니 / 내 얘기구나
# 이봐, 할멈 / 입고 있는 팬티 / 내 것일세
# 동창회 / 식후에는 / 약 설명회
# 허리보다도 / 입에 달고 싶은 / 만보기
# 노인의 사랑 / 반했든 노망이든 / 한자는 같다
# 일어섰다가 / 용건을 까먹어서 / 다시 앉는다
# 분위기 보고 / 노망난 척해서 / 위기 넘긴다
# 손주 목소리 / 부부 둘이서 / 수화기에 뺨을 맞댄다
# 무농약에 / 집착하면서 / 내복약에 절어 산다
# 자동 응답기에 대고 / 천천히 말하라며 / 고함치는 아버지
# 전에도 몇 번이나 / 분명히 말했을 터인데 / "처음 듣는다!"
# 손주 돌아가니 / 아내와 적막하게 / 숭늉 먹는다
# 할멈, / 개한테 주는 사랑 / 나한테도 좀 주구려
# 데지카메는 / 무슨 거북이냐고 / 할머니가 묻는다 ('데지카메'는 '디지털 카메라'의 일본어이며, '카메'는 '거북이'의 일본어임)
# 이름이 생각 안 나 / '이거' '저거' '그거'로 / 볼일 다 본다
# 오랜만에 보는 얼굴 / 고인이 연 이어주는 / 장례식장
# "젊어 보이시네요" / 그 한마디에 / 모자 벗을 기회 놓쳤다
# 손주의 과자 / 딱 하나 받고 / 배춧잎 준다
# 요즘은 / 대화도 틀니도 / 맞물리지 않는다
# 심각한 건 / 정보 유출보다 / 오줌 유출
# 자, 출전이다 / 안경 보청기 / 틀니 챙겨라
# 서로를 돌보며 / 다시 한번 싹트는 / 부부애
■ 4부
# 똑같은 푸념 / 진지하게 듣는 건 / 오직 개뿐
# 아내는 여행 / 나는 입원 / 고양이는 호텔
# 정년이다 / 지금부턴 아닌 건 / 아니라고 말해야지
# 조수석에 앉은 아내 / 옛날 상사 / 뺨친다
# 사랑인 줄 / 알았는데 / 부정맥
# 빨리감기 하고 싶다 / 우리 마누라 / 푸념과 잔소리
# 자기 소개 / 취미와 지병을 / 하나씩 말한다
# 늙은 두 사람 / 수금원에게 / 차를 대접한다
# 우리 마누라 / 한때는 요정 / 지금은 요괴
# 심란하구나 / 손주가 보고 / 좋아하는 구급차
# 안약을 넣는데 / 나도 모르게 / 입을 벌린다
# 일어섰는데 / 용건을 까먹어 / 우두커니 그 자리에
# 아내는 비만 / 수발들 일 생기면 / 나는 비참
# 홀딱 반했던 / 보조개도 / 지금은 주름 속
# 손자 증손자 / 이름 헷갈려 / 전부 부른다
# 좋은 의사를 / 병원 대기실에서 / 추천받았다
# 비상금 / 둔 곳 까먹어서 / 아내에게 묻는다
# 경치보다 / 화장실이 신경 쓰이는 / 관광지
# 혼자 사는 노인 / 가전제품 음성 안내에 / 대답을 한다
# 희수(喜壽)지만 / 은사 앞에서는 / 아직 여고생
# 석 달 전 / 가르쳐 준 장기로 / 손주에게 졌다
# 손을 잡는다 / 옛날에는 데이트 / 지금은 부축
# "요전에 말이야" / 이렇게 운을 뗀 / 오십 년 전 이야기
# 이 나이쯤 되면 / 재채기 한 번에도 / 목숨을 건다
드디어 가을이다. 그간 나이만큼의 가을을 맞이해왔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그래서 갑작스런 일이 없다면, 아마 앞으로도 여러 번의 가을을 더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동안 맞이해 온 횟수만큼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리고 나도 저 '실버 센류'의 내용들을 현실로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 때에는... 그 때에도 여유를 지닌 삶을 살고 싶다.
단지 노화된 현실을 비관하지 않는 정도나 노화된 현실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정도의 여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후회없이 살았다고 뿌듯해 하며 하나님께서 주실 의의 면류관을 기대하기까지 하는 여유를 지닌 삶을 꿈꾸어 본다.
(디모데후서 4:7-8)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어릴 적 국어 수업시간에는 국화 꽃과 같은 어른이 되기를 바랬는데... 중년이 되고보니 이젠 노인이 된 후, 그리고 그 이후의 의의 면류관을 기대하게 된다.
아, 진짜 나이를 먹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