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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창세기

창세기 22장

아리마대 사람 2017. 1. 9. 16:30

************  창세기 22장 ************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Some time later God tested Abraham. He said to him, "Abraham!" "Here I am," he replied.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부르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이미 잘 알고 계셨고, 그렇기에 이미 아브라함을 부르신 바있다.

(창세기 12:1)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책하신 사람인 아브라함을 굳이 "시험하시려고" 부르신다. 그렇다면, 이 시험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더 잘 알기 위해서 행하시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시험하실 필요가 없다.)

어쩌면, 우리에게 아브라함을 소개시키시고, 아브라함을 통해 무언가를 보여주시고, 알려주시기 위한 시험일런지 모른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아'하고 부르셨고,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나',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라는 의미이다. 이 대답이 있기에 2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가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Then God said, "Take your son, your only son, Isaac, whom you
love, and go to the region of Moriah. Sacrifice him there as a burnt offering on one of the mountains I will tell you about."

하나님께서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을 주셨는데, 특별히 시험의 장소를 모리아 땅의 한 산으로 지정하셨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시험의 장소를 지정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 장소는 삼일을 이동해야 하는 거리에 위치한 곳이었다.

단순히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을 겪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 장소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굳이 장소를 지정하실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장소를 지정하셨고, 그 장소는 9절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구체적인 지점이었다.

독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야 하는 지점이 매우 상세하게 지정되어 있다는 것은 그 장소가 단순한 장소가 아님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장소는 곧, 하나님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장소와 명백히 맞닿아 있다.

성경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안다면, 이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또한, 이와 같이 상호 연관된 의미를 지닌 사건이 시간을 두고서도 연관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시각과 마침이시다.

(요한계시록 22:13)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Early the next morning Abraham got up and saddled his donkey. He took with him two of his servants and his son Isaac. When he had cut enough wood for the burnt offering, he set out for the place God had told him about.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지시받은 장소로 이동한다. 2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것이 명백하다.

아침이 올 때까지 아브라함이 어떤 밤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갖은 고민과 회의와 원망과 질문이 교차하는 밤을 보냈는지, 오직 순종만을 생각하며 잠을 이루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 일찌기 일어나 순종을 시작한다.

이러한 순종의 과정을 지켜볼 때, 아마도,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를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4 제 삼 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on the third day Abraham looked up and saw the place in the distance.


5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He said to his servants, "Stay here with the donkey while I and the boy go over there. We will worship and then we will come back to you."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Abraham took the wood for the burnt offering and placed it on his son Isaac, and he himself carried the fire and the knife. As the two of them went on together,


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Isaac spoke up and said to his father Abraham, "Father?" "Yes, my son?" Abraham replied. "The fire and wood are here," Isaac said, "but where is the lamb for the burnt offering?"

이삭은 '불과 나무'가 갖추어져 있다고 말했지만, '칼'도 이미 갖추어진 상태였다. 없는 것은 오직 하나, 번제에 쓸 어린 양뿐이었다. 번제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제물로 쓸 어린 양일 것이다. 그 어린 양이 없다는 점에 관해서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질문했다.


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Abraham answered, "God himself will provide the lamb for the burnt offering, my son." And the two of them went on together.

너무나 당연하고, 또한 영리한 아들의 질문에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고 대답한다. 번제할 제물에 관해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대답을 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헤아리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이 대답은 허튼 말이 아니었으며, 그의 말은 13절에서 이루어진다. 


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When they reached the place God had told him about, Abraham built an altar there and arranged the wood on it. He bound his son Isaac and laid him on the altar, on top of the wood.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이르렀다. 이를 통해 생각해 볼 때, 2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는 매우 구체적이고 명확한 한 지점임이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아브라함은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은 후, 아들 이삭을 결박한다.

(창세기 21:5)

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아브라함은 백 세에 이삭을 보았다. 그 후 이삭이 자라서 삼 일을 이동하고, 번제 나무를 지고 산을 오르고, 번제할 어린 양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라면 어린아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린이 내지는 청소년 무렵 쯤으로 자랐을 것이다. 조금의 눈치라도 있다면, 번제할 어린 양이 없는 상황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기까지의 시간 동안 아버지가 하려는 행동을 짐작하고서는 어떻게든 결박되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거나 아버지를 밀치고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기까지 이러한 상황의 발생여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부자 간의 나이를 고려할 때 이삭이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했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삭의 아버지는 이삭보다 백 세가 많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삭은 의외로 순순히 결박당했을 수가 있으며, 만일 그렇다면 이는 이삭이 아버지를 전적으로 존경하고 신뢰했거나, 어리석을 만치 순진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Then he reached out his hand and took the knife to slay his son.

아무리 눈치가 없는 아이라도 결박당하여 단 나무 위에 눕혀진채 칼이 눈 앞에서 왔다갔다 한다면 번제할 어린 양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삭도 자신의 아버지가 칼을 잡고 자신을 잡으려는 그 때에는 (이 때 쯤이면 그 전에 이미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번제할 어린 양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았을 것이다. 절체절명의 이 순간, 이삭이 어떠한 반응을 나타내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브라함이 이와 같이 믿기 어려운 순종을 보인 것에 대해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통한 자손의 약속을 믿었고 이삭이 죽더라도 다시 살아날 것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준다. 다음에 설명할 이유(아브라함과 이삭이 가리키는 바)를 생각해보면 이 설명은 형태적으로도 아름답고 설득력이 있다.

(히브리서 11:18-19)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그 순간, 아브라함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한" 그 순간을 집중해서 바라볼 때...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택하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그와 언약을 세우셨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 이유를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아브라함은 단순무식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지극히 단순한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뜻이 인간의 역사 가운데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그것도 사랑하는 독자를, 그것도 백 세에 얻은 귀하디 귀한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듣고 다음날 아침 일찌기 일어나 지시받은 땅으로 향한다. 이 단순한 기질은 유전적으로 그의 자손인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해졌다.

이스라엘 민족은 구약의 시대를 보내고 신약의 시대를 통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온 민족이고, 율법을 지키고 살아온 민족이며, 절기와 말과 글을 잃지 않고 살아온 민족이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온 민족이다.

그들은 단순함에서 비롯된 어리석음으로 인해 때로는 하나님께 불평과 불만을 쏟아놓다가 징계를 받기도 했고, 하나님을 대신할 우상에 빠지기도 했고, 율법을 지키는 데에만 열중하다가 사람이 만든 전통과 관습에만 얽매여 사는 형식주의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함에서 비롯된 고집과 순종과 충성으로 인해 유일신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아왔고, 율법을 버리지 않고 살아왔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전통(절기와 관습)과 말과 글을 보존해왔고,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 그들은 전 세계에 각처에 흩어져서 낯선 환경 가운데에서 살아야 했을 때도, 언약에 실망하고 포기하고 잊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긴 시간이 흘러도 이를 잊지 않고 고집스럽게 지켜내며 살아왔다.

나라를 잃은 민족이 나라의 정체성은 상실한 채로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적어도 역사책에서 그러한 예를 발견한 적이 없다. 때때로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고립된 부족이 고유한 전통을 지키며 사는 경우를 보곤 하지만, 그것은 외부와 단절되고 고립된 환경의 사례에 불과하다. 심지어 그런 부족도 문명의 영향을 받으면, 곧 동화되면서 전통과 관습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그들의 고집과 순종과 충성으로 인해 '조상들의 땅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전통을 반드시 지켜라'라는 유언을 대대로 전해 왔고, 지켜 왔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20세기에 이르러 전 세계에 흩어진 그들을 약속의 땅에 다시 모으시고, 무너졌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역사 가운데에 다시 세우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말씀의 신실함과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역사 가운데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사명을 감당하였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단순한 모습을 통해 진정으로 아름다운 믿음을 보여주었고, 그가 그런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 택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아브라함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시뮬레이션하고, 미리 알린 사람이다. 그의 성품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꼭 필요한 성품이었고, 하나님의 역사를 실현시키는 데 꼭 필요한 성품이었다. 그의 성품은 그로 하여금 '아들을 번제로 드려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만들었다. 기꺼이 아들을 바치는 그의 성품. 그것은 그가 단 하나의 흠도 없이 완전하게 하나님께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단 하나의 흠도 없이 완전하게 인간을 사랑하여 그 아들을 기꺼이 죽음에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 계획, 비밀을 미리 보여주고, 미리 알려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처음 죄를 지은 순간, 이미 인류 구속의 계획을 알게 하셨다.

(창세기 3:15)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인류 구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먼저 보여준 사람이 아브라함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인류 구속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 요한이 있었다.

(마태복음 3:3)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3:16)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요한복음 1:15)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크게 높여 말씀하셨다. 그는 선지자보다 나은 사람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자로서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며, 세상의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이라고 높이셨다.

(마태복음 11:7-11)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아브라함은 이미 믿음의 조상으로 불려지고 있지만, 또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보여준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요한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못지 않게 큰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에서는 형태적인 아름다움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제단에 바쳤고, 아브라함이 의도한 대로 제단에서 죽은 바와 다름없었던 이삭은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을 전할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품었으므로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증거가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류에 대한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내어 주셨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통한 인류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였으며 십자가에서 죽어 장사지낸 바 되었으나 다시 살아나셔서 모든 믿는 자에게 부활 소망의 증거가 되셨다.

땅에 살았던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자 그림자였다.

(히브리서 8:5)
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이 한 구절은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시간표에서 참으로 귀하고 중요한 순간을 기술하였다고 생각된다.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But the angel of the LORD called out to him from heaven, "Abraham! Abraham!" "Here I am," he replied.

여호와의 사자가 하브라함을 불렀을 때, 아브라함은 다시 한 번, 1절과 같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에서 여기에 있는 '나'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나'이자 '당신의 말씀을 지키고 있는 나'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대답은 '당신이 무엇을 시키시든지 순종하는 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호와의 사자는 아브라함을 멈추기 위해 아브라함을 불렀고, 아브라함은 자신을 부르는 그 부름에 대답하였다. 이 대답의 의미는 더 큰 순종의 준비인 것이다.

백 세에 낳은 아들까지도 드리는 아브라함의 대답. 그와 같은 순종을 보여준 아브라함의 대답은 그저 '내가 여기 있나이다'에서 그치는 대답이 아니다.

이 대답은 어린 사무엘이 엘리가 자신을 부른 줄 알고 했던 대답과 동일하며, 자신을 부르시는 분이 누군지를 깨달은 사무엘은 완성된 형태의 대답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를 넘어서 '말씀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라는 대답이다.

(사무엘상 3:10)

10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니는 또한 하나님의 보좌를 본 이사야가 했던 대답과 동일한 대답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를 넘어서 '나를 보내소서'라는 대답이다.

(이사야 6:8)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아브라함의 대답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였지만, 그의 대답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내가 듣겠나이다, 그리고 내가 순종하겠나이다'라는 온전한 대답이었음에 틀림없더고 생각한다.


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Do not lay a hand on the boy," he said. "Do not do anything to him. Now I know that you fear God, because you have not withheld from me your son, your only son."

여호와의 사자가 전한 말씀은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라고 아브라함을 인정하는 말씀이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 자신이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숨겨놓는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그의 아들 그의 독자'까지도 드리는 정도가 아니다. 아브라함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음을, 그의 독자는 그가 백 세에 낳은 아들었음을 잊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아끼지 않고 드린 것이 실은 자기 자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아끼지 아니하는 순종은 자신이 죽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십자가에서 죽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살았기에  이와 같은 순종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갈라디아서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릴 것으로 아브라함이 생각하였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11:19)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이와 같이 생각한 까닭은 명백하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통해 자손을 주실 것이며, 오직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자손만이 아브라함의 씨라 불릴 것임을 말씀해 주셨고,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말씀을 굳건하게 믿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21:12)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믿음을 보여 주었다. 그는 그의 믿음에 의지하여 그의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함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함을 완전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함을 통해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완전하게 보여주셨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그의 독자까지도 아끼지 않고 보여준 완전한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며, 그렇기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하늘에 올려드렸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그의 독자까지도 아끼지 않고 완전한 사랑을 보여주셨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통해 인간에 대한 완전한 구원을 이 땅에 이루셨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Abraham looked up and there in a thicket he saw a ram caught by its horns. He went over and took the ram and sacrificed it as a burnt offering instead of his son.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이를 따르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한 가지 명제의 실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것은 '죄인은 죽는다'는 것이다. 아담이 범죄하였기에 그의 후손인 사람은 죄의 속성을 지니고 태어나 살다가 죽는 운명을 따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삭이 결박되어 제단 나무 위에 놓이고 아브라함이 칼을 잡고 이삭을 잡으려 하는 순간까지 죄인인 인간의 죽음의 필연성은 수학의 명제와도 같이 이 사건과 세계를 지배한다.

그러나, 이 순간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아브라함을 불러 이삭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아브라함을 인정하신다. 그러나, 아브라함에 관해 하나님께서 모르셨을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모르셨을까? 적어도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을 듣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출발할 때는 이미 아시지 않으셨을까? 분명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야 아신 것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또한 주목해야 할 사항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라는 말씀이다. 사람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여, 곧 하나님을 사랑하여 백세에 얻은 독자까지도 드리려는 모습...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의 운명에 대역전이 일어날 것이 확정되는 말씀이다.

이 순간, 이 사건을 한 편의 연극에 비유할 때,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연기하던 아브라함과 이삭의 역할은, 누군가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독자도 아끼지 않는 부자(父子)의 역할로 순식간에 변화한다. 그리고,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는 말씀은 '내가 내 아들 내 독자까지도 네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이제야 내가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 줄을 알겠느냐'라는 말씀으로 승화된다.

그리고, 다시 아브라함과 이삭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 온다. 아브라함은 쭐이 수풀에 걸린 한 숫양을 발견하고,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린다. 이것은 너무도 명확하게, 본래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대신하여 죽는 숫양,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So Abraham called that place The LORD Will Provide. And to this day it is said, on the mountain of the LORD it will be provided."

아브라함이 이 땅의 이름을 정확히 '여호와이레'라고 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는 모세에게 처음 알려주신 이름이며,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이 이름을 알지 못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6:2-3)
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아브라함이 알고 있던 하나님의 호칭은 '전능한 하나님 (엘 샤다이)'이다.

(창세기 17:1)

1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과 너무도 친밀했고, '여호와'라는 호칭에 너무나 익숙했던 창세기의 저자가 '여호와이레'라는 말로 기록하기 전에는 오히려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 이레'라는 말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점은 의 이 사건이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지점인 '여호와이레'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영생을 이루시기 위해 진행하시는 역사, 성경에 기록된 역사의 모든 것을 완전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주관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The angel of the LORD called to Abraham from heaven a second time

이삭을 대신한 숫양을 번제로 드림으로써 이 일이 마무리되는 것 외에 또 다른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맹세'였다.


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and said, "I swear by myself, declares the LORD, that because you have done this and have not withheld your son, your only son,

맹세는 더 큰 대상을 가리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어린 아이들은 어른을 가리켜 맹세할 수 있으나, 어른들이 어린 아이를 가리켜 맹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 큰 대상만이 그 맹세를 이루어지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신다. 하나님께는 더 큰 대상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자신이 알파와 오메가이자, 처음과 마지막이자, 시작과 마침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는 다시 한번 아브라함에게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이 말씀하신다.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앞에는 분명히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여'라는 말씀이 생략되어 있을 것이다.

자, 하나님께서 자신을 경외한 아브라함에게 어떤 맹세를 주실까?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I will surely bless you and make your descendants as numerous as the stars in the sky and as the sand on the seashore. Your descendants will take possession of the cities of their enemies,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바는 우선, 아브라함의 육신을 통해 태어날 자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번성할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이는 명백히 창세기 1장에서 사람에게 주신 복과 동일한 약속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복을 줄 것을 맹세하신 것이다.

(창세기 1:28)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대적의 문을 얻을 것을 맹세하셨으니 이것은 그의 자손들의 수가 많으며, 그들이 승리하는 삶을 살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and through your offspring all nations on earth will be blessed, because you have obeyed me."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을 맹세하셨다.

천하 만민에게 복을 줄 아브라함의 후손...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 속에서 결박되어 단 위에 눕혀져 칼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운명의 사람들을 단번에 살리는 숫양의 역할을 감당할 아브라함의 후손...

이 날, 이 때에 이삭이 눕혀졌던 그곳에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아브라함의 후손...

아브라함의 아들이자 아브라함의 독자인 이삭과 마찬가지로 본래 누군가의 아들이자 누군가의 독자이신 아브라함의 후손...

그 분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세상에 오실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맹세하셨다.

하나님의 이 맹세는 그분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또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철썩같이 지켜 행했기 때문에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선포된 것이다.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Then Abraham returned to his servants, and they set off together for Beersheba. And Abraham stayed in Beersheba.


20 이 일 후에 혹이 아브라함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밀가가 그대의 동생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Some time later Abraham was told, "Milcah is also a mother; she has borne sons to your brother Nahor:


21 그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동생은 부스와 아람의 아비 그므엘과
   Uz the firstborn, Buz his brother, Kemuel (the father of Aram),


22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Kesed, Hazo, Pildash, Jidlaph and Bethuel."


23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처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Bethuel became the father of Rebekah. Milcah bore these eight sons to Abraham's brother Nahor.


24 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더라
   His concubine, whose name was Reumah, also had sons: Tebah, Gaham, Tahash and Maac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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