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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성경 각권 소개

구약성경 각권 소개 (드라마 바이블, 바이블 프로젝트)

아리마대 사람 2019. 9. 5. 15:19

 

구약성경의 각권을 소개하는 자료입니다.

먼저 "드라마 바이블"이라는 앱에서 제공하는 성경 각권 소개자료를 참고했습니다.

"드라마 바이블"은 성경을 기록부분과 대화부분으로 이루어진 드라마로 구성하여 대단히 재미있게 성경을 읽을... 아니, 들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스마트폰 앱인데, 이 앱에는 성경 각권에 대한 소개자료가 포함되어 있어서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이 자료는 FWIA 대표이시고 전 횃불트리니티 구약학 교수이신 김윤희 박사님께서 작성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바이블 프로젝트"에서 제공하는 성경 각권 소개자료를 참고했습니다.

"바이블 프로젝트"는 누구든 어디에서나 성경 이야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성경에 대한 애니메이션 및 관련 자료를 제작하는 비영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입니다. 바이블 프로젝트에서 제공하는 성경 각권에 대한 동영상은 대단히 재미있게 성경을 읽으... 아니, 보면서 배울 수 있도록 하며,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구약/타나크 개요 TaNaK/Old Testament - YouTube

 

************ 창세기 ************

 

창세기는 '시작'에 관한 책으로 구약 신학의 기초가 됩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시작해 이스라엘의 족장인 요셉의 죽음으로 마칩니다. 우주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하여 한 인간의 죽음으로 마치므로 탄생과 죽음, 매크로한 스케일과 마이크로한 스케일이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은 이 두 스케일 모두에 관심을 갖고 관여하고 계심을 보여줌으로, 크고 광대하신 동시에 세밀하고 자상하신 분으로 소개됩니다.

창세기의 히브리어 제목은 첫 단어를 따서 ‘태초에’로 지었습니다. 반면 헬라어 번역본 제목은 ‘게네시스’인데, 이 단어는 발생, 기원, 근원, 원천, 출생, 혈통 등의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서는 모든 것의 기원, 시작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창세기는 우주의 시작, 인류의 시작, 죄의 시작, 구속사의 시작, 언약의 시작, 족장 역사의 시작,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의 시작, 12지파의 조상의 시작 등 갖가지 시작에 대해 다룹니다. 우리말 제목인 ‘창세기’는 ‘세상의 창조에 관한 기록’이란 뜻으로 지어졌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의 주권자이심을 선포합니다. 그 중에 인간은 특별하게 창조되었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특별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신분, 남녀, 인종에 관계없이 존엄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고대 근동 메소포타미아의 창조론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들 신화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이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할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생태계를 조성해주십니다. 이렇게 해주시는 이유는 인간에게 복 주시기 위함입니다. 창세기는 또한 죄의 근원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복의 근원이신 창조주를 거부하고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처럼 되려는’ 욕망으로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창조주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 바로 죄의 근원입니다.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집니다. 먼저 1-11장은 ‘족장이전 시대 원역사’(The Primeval history)를 다룹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심을 강조하며 인류전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인류가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기원을 잘 보여줍니다. 동시에 죄와 심판의 주제를 다룹니다. 최초 인류의 죄의 시작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납니다. 그 이후 인간의 세계에는 최초의 살인, 홍수전에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 바벨탑사건 등이 일어나며 죄와의 전쟁이 계속됩니다. 죄와 함께 죽음과 심판이 불가피하게 됩니다.

최초의 인류는 에덴에서 추방되었고, 가인은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었고, 인류는 홍수로 멸절의 위기를 맞이했으며, 바벨탑은 언어의 혼잡으로 무산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계획도 시작됩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치명타)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창세기 3장 15절의 내용은 궁극적으로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가 오실 것임을 알리는 최초의 복음 또는 원시복음(proto-evangelium)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뱀은 신약에서 ‘사단’으로 해석됩니다(롬16:20; 계 12:9). 홍수속에서도 노아의 방주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바벨탑 사건 속에서도 셈의 자손에서 나온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는 ‘심판 속의 구원’이라는 주제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12-50장은 ‘족장사’를 다루며 하나님께서 말씀의 능력으로 특별한 사람들을 택하시고 부르는 구속사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주보다는 지역에, 인류보다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야곱의 12아들들의 스토리를 다룸으로써 어떻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선택되고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기원을 소개합니다. 그 속에 12지파 중 유다지파에서 미래의 왕-메시아인 구속자가 오실 것이라는 예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번성과 복의 축복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하신 언약 속에도 변함없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번성하여 그들이 복을 받을 것이고, 그를 통해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러한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창세기 전면에 흐르는 기본신학이 됩니다. 인간의 약함에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그의 언약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류에게 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도 유다의 자손에서 나온 메시아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녀가 됨으로써 그 복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창세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복에 참여하시는 모두 되시기를 축원하며 ‘모든 것의 시작’인 창세기의 세계로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창세기 1~11장 개요 Genesis 1-11 - YouTube

◇ 바이블 프로젝트 창세기 12~50장 개요 Genesis 12-50 - YouTube


************ 출애굽기 ************

 

출애굽기라고 하면 찰톤 헤스톤 주연의 ‘십계’라든가 드림웍스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이집트왕자’의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출애굽기 1장을 펴면 야곱의 70명 가족들이 이집트로 이주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큰 민족을 이룬 장면이 시작됩니다. 한 국가를 이룰 만큼 불쑥 성장한 이스라엘 민족을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데까지 400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창 15:13).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민족은 이집트의 바로 밑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기원전 16세기부터 11세기에 이르는 신왕국 시대에 속해 있었으며 가장 번영한 시기였습니다.

출애굽기의 헬라어 제목은 ‘에스-호도스’로, ‘탈출’이라는 뜻입니다. 영어성경도 그 영향을 받아 ‘엑소도스’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반면 우리말 성경은 좀더 친절하게 ‘이집트로부터의 탈출기’임을 밝혀 ‘출애굽기’로 지었습니다. 출애굽기는 구원, 시내산 율법, 성막이라는 주제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이집트에서의 구원을 다루는 첫 번째 부분인 1-18장은 야웨가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는 계시의 중대한 기점을 제공합니다. 이 분은 창세기에서 가르쳐준 창조주이시며, 만국의 주권자 되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탈출하며 야웨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동시에 우리도 그분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집트에서의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전형으로, 구약 구속사의 정점을 찍습니다. 열 가지 재앙은 이집트의 거짓 신들과의 우주적 대 접전으로 이집트의 모든 신들에 대한 심판이요, 이집트민족과 만방에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합니다. 이 부분은 첫 유월절, 홍해가 갈라짐,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물이 남과 같은 표적과 기사로 가득합니다. 출애굽 1세대만큼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경험한 세대는 없습니다.

두 번째 부분인 19-24은 시내산 율법을 다룹니다. 이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백성이 되는 시내산 언약식을 체결하고 이에 맞추어 율법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국가의 근간이 되는 십계명과 함께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판례법을 주십니다. 이것으로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신으로 모신 고대 근동의 다른 나라들처럼 신과 율법을 가진 정식 국가로 탄생하게 되며 여호와의 선택된 성민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시는 19장의 현현장면은 그분의 거룩하심을 보이시고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우리도 함께 그분을 경외하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마지막 부분인 25-40장은 성막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막을 지으라는 지시와 함께 실제 성막을 완성하여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한 장면으로 마치게 됩니다. 성막은 백성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만나는 예배의 방법을 예비해주신 것입니다. 성막은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출애굽기의 주제는 여호와의 구원의 능력, 율법으로 대변되는 하나님 백성들에 대한 거룩한 요구, 성막으로 상징되는 교제와 예배의 초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신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사역과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모세는 인류의 구원자 예수님의 그림자이며, 출애굽기의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인류를 향한 구속사역의 그림자입니다. 대 제사장 아론은 만민의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의 그림자이며, 만나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요 6:48). 십자가 사건은 유월절을 기념하는 절기에 일어났으며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 친히 우리 모두를 위한 영원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요 1:29; 고전 5:7). 또한 성막에서 지성소와 성소사이에 쳤던 휘장은 예수그리스도의 육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휘장의 장벽은 없어지고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담대히 지성소에 나아갈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얻게 되었습니다(마 27:51, 막 15:38, 눅 23:45; 히 10:19-20).

출애굽기의 핵심 구절을 고른다면 모세가 바로에게 반복해서 요구한 ‘내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3:12, 18; 4:23; 5:1, 3; 7:16; 8:1, 20; 9:1, 13; 10:3, etc.) 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죄와 속박과 고통에서 벗어나 새 모세이신 예수님을 따라 나서 여호와만 섬기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고, 그분의 자녀가 되어야겠습니다. 바로 오늘, 그것을 결단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출애굽기 1~18장 개요 Exodus 1-18 - YouTube

◇ 바이블 프로젝트 출애굽기 19~40장 개요 Exodus 19-40 - YouTube

 

************ 레위기 ************

 

매주 레위기로 설교를 하면 교인수가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그만큼 레위기는 성도들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책에 속합니다. 또한 구약 통독을 열심히 하다가도 주로 레위기에서 막혀버립니다. 그러나 레위기는 신약에서 40번이상 언급될 정도로 중요하며, 특히 신약의 히브리서는 레위기를 모르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신학적으로 중요한 책입니다. 레위기라는 제목은 ‘레위인에 관련된 사항들’이라는 의미인데, 레위 제사장들에게 주는 지침서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레위기는 출애굽기의 연속입니다. 출애굽기가 성막의 완성으로 끝나고, 자연스럽게 레위기는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레 1:1)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며 모세에게 성막에 관계된 제사법의 규정과 성결된 삶을 살기 위한 성결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를 반영하여 레위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1-16장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제사법을 다루고 있으며, 17-27장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성결법을 다룹니다. 레위기의 주제를 요약하자면 ‘거룩한 예배와 거룩한 삶’입니다. 핵심 단어인 ‘거룩’은 90번이상 사용되었으며, 핵심구절은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19:2)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거룩한 예배와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것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임재를 경험하고 축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레 26:1-13). ‘거룩’이란 의미는 ‘구별됨’이란 뜻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위기에서는 유난히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는데 많은 관심을 쏟습니다.

제사법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의 다섯가지 제사의 의례와 절차 등을 다룹니다. 감사제, 서원제, 낙헌제는 모두 화목제에 속합니다. 11-15장의 정결법은 제의적 정결에 관심을 두며 음식, 출산, 악성피부병, 유출병을 다루며 종교적 부정함과 정결함을 다룹니다. 질병, 출산, 오염, 감염, 죄, 시체 등이 부정함을 가져오는 원인이며, 제의적인 정결례와 희생제물을 통해서만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일년에 한번 대 제사장만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속죄하는 대 속죄일이 제사법의 피날레는 장식하는데, 이 날을 유대인들은 ‘욤 키푸르’라고 부릅니다. 이렇듯 레위기는 온통 동물 피의 제사로 가득한 책으로, ‘피’라는 단어도 90번이상 쓰였습니다.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17-27장은 거룩함을 요구하는 법들을 따로 모아놓고 있어 이를 성결법전이라 부릅니다. 이 부분의 핵심구절이 바로 그 유명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19장 18절 말씀입니다. 또한 레위기는 유월절, 무교절, 칠칠절, 나팔절, 대 속죄일, 초막절과 같은 절기에 대해서도 자세히 가르칩니다. 이런 절기들은 여호와가 하신 일을 상기시키므로 절기들을 지킬 때마다 하나님과 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일년내내 여호와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또한 7일째 안식일과 7년째 안식년 그리고 7년이라는 기간이 일곱번 반복되고 나서 50년째에는 희년을 선포하라는 규정도 나옵니다.

레위기에서 매번 드리는 동물제사는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단회적이고 영구적인 제사와 대조를 이룹니다(히 10:1-18; 롬 5:6-11).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단번에 정결하게 되었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을 얻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더 이상 레위기의 음식규례와 정결법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됨으로 이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레위기를 자세히 묵상할수록 예수님께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 그 넓이와 깊이를 실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레위기의 동물제사는 모든 죄를 다 해결할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의도적으로 짓는 고의적 범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온전히 깨끗케 하십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우리를 은혜의 홍수로 이끄는 레위기 읽기에 도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레위기 개요 Leviticus - YouTube

 

************ 민수기 ************

 

민수기는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연속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성막을 완성하고, 레위기에서 제의제도를 완비한 후, 이제 민수기에서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공식적인 준비를 합니다. 민수기 1장을 통해 백성들이 아직 시내광야에 머물러 있으며 이집트에서 나온 지 2년째가 된 2월 1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민수기의 히브리성경 제목은 ‘광야에서’이며, 이 제목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38년 광야생활의 대부분을 기록하고 있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말 성경은 ‘백성들의 수를 센다’는 뜻으로 민수기(民數記)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는 두 차례에 걸친 인구조사와 그 외 많은 숫자 목록(3:15-31; 7:10-83; 28-29장; 31:32-52)에 중점을 둔 것이며 헬라어와 라틴어 성경의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민수기라는 제목에 걸맞게 민수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과 26장의 두 번에 걸친 인구조사에 따라 1-25장에서는 출애굽 첫 세대의 실패를 기록합니다. 26-36장은 출애굽 2세대에게 거는 기대를 보여주며 그들의 긍정적인 모습을 기록합니다. 새 세대를 거느릴 새 지도자의 교체도 이때 일어납니다. 새 지도자는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민수기를 기록한 목적은 4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순종할 때의 축복을 알려줍니다. 민수기 1-10장은 인구조사와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조직과 진을 배치하고 전쟁대열로 정렬하는 등 모든 것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진행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출애굽 1세대는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정말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순종할 때 모든 것은 순조로웠습니다.

둘째,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을 기록하며 그들이 왜 악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없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끊임없는 불순종. 불평, 불만, 불신, 반역, 원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만나에 불평했고, 아론의 제사장직에 불만을 가졌고, 모세의 리더십에 반기를 들었으며, 계속적으로 물 부족 문제를 부르짖었고, 먹을 것이 없다고 노정이 힘들다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만족과 감사, 여호와에 대한 신뢰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끊임없는 언약에 대한 불순종과 우상숭배와 불신은 축복의 기회를 상실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출애굽 1세대는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특권을 빼앗기고 맙니다. 12명의 정탐군 중 10명의 믿음 없는 보고를 믿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어 결국은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나중에는 모세와 아론도 순간적인 불신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 당합니다(민 20장). 그들의 죄의 결과는 믿는 우리에게 거울이 되게 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입니다(고전 10:1-11). 우리도 이러한 태도를 유지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예비하신 축복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로우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출애굽 제 2세대인 새 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심으로 오래 전 아브라함과 맺은 땅에 대한 언약을 지키십니다. 여호와는 말하는 나귀까지 동원하여 발람술사에게 경고를 주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발람의 3번의 저주를 3번 다 축복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이렇게 민수기는 인내하시는 하나님, 공급해주시는 하나님, 중보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보호해주시는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등 하나님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격이 없지만 여호와는 여전히 그들의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남으십니다.

지리적으로만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광야에 머물러 있다가(10:12) 바란광야로 이동해 가며(10:12) 마지막 40년째에는 요단 건너편, 여리고 맞은편에 위치한 모압평지에 이르게 됩니다(22:1; 36:13).

민수기 21장에는 범죄하여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모세가 장대위에 만들어 단 놋뱀을 믿음으로 쳐다본 자들은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민 21:9).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본인도 십자가에 달려야 하며 누구든지 인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 3:14-15). 이렇듯 민수기는 우리에게 영적 교훈과 도전을 주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날마다 삶의 광야생활에서 믿음 없는 자들처럼 불신. 불만, 불평, 원망하다가 광야에 쓰러지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모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민수기 개요 Numbers - YouTube

 

************ 신명기 ************

 

유대인들에게 신명기의 핵심구절을 선택하라고 하면 6장 4-9절을 꼽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첫 단어가 ‘쉐마’라는 히브리어 단어로 시작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쉐마’로 부릅니다. 이는 ‘들으라’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사도신경이라면, 쉐마는 유대인들의 신앙고백이며, 자녀교육의 근간이며, 율법의 요약체입니다.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은 정기적으로 쉐마를 암송하며 ‘필랙터리’라는 조그마한 가죽상자에 이 말씀을 넣은 뒤 이마와 팔에 묶고 다닙니다.

출애굽을 이끈 3명의 영웅 중 아론과 미리암은 광야에서 이미 죽었습니다. 그들은 외로운 모세의 리더십에 직, 간접적으로 큰 힘이 되어주었던 자들입니다. 모세도 곧 그들의 뒤를 따를 처지입니다. 가나안 땅을 멀리서만 안타깝게 바라보아야 하는 모세로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시기였을 것입니다. 신명기는 지도자 모세가 새 세대에게 주는 마지막 고별 메시지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노장 지도자인 모세가 그들에게 자식을 떠나 보내는 아비의 심정으로 축복을 빌어주고 잘 살도록 당부 하는 아름다운 책입니다. 신학자들은 신명기를 ‘구약 신학의 중심점’으로 보았으며 ‘가장 신학적인 책’이라고도 평가했습니다.

40년이라는 세월이 차서 애굽에서 나온 제 1세대는 다 죽고, 제 2세대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여리고 맞은 편 요단가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모세는 젊은 새세대에게 가나안 땅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광야 세대가 범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잘 지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율법 전반에 걸쳐 설명을 해주고 있는데, 그것이 신명기의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명기는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 특히 출애굽의 역사와 그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를 상고하면서 이미 준 율법들을 고찰하며 보충하기도 하고 재해석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일종의 율법의 주석역할을 하기도 하고 상황화 함으로써 그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율법을 잘 적용하도록 도와줍니다. 순종에 따른 축복과 불순종에 따른 저주를 강조함으로 우상을 멀리하고 하나님만 섬기고 경외하며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순종하도록 호소합니다(신 27-28장). 새 세대와 언약을 재확인 하려는 의도로 언약-조약 형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명기(申命記)라는 제목은 ‘되풀이 신’자를 써서 ‘하나님의 계명을 되풀이 해서 자세히 기록한 책’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며 다음과 같은 4가지 답을 줍니다(10:12-13). (1)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fear). (2)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라(walk and love). (3)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serve). (4)네 행복을 위하여 준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keep). 이렇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네 가지 영적인 원리(사영리)가 신명기의 핵심입니다.

신명기는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오경의 결론인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구약역사서에 신학적 근간이 되는 책이기도 합니다. 또한, 신구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책에 속하기도 합니다. 구약에서만 350번이상, 신약에서도 190번이상 인용됩니다. 예수님도 사탄의 3번의 유혹을 모두 신명기를 인용함으로써 물리치셨습니다.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예수님께서는 바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는 쉐마 절을 인용하십니다(막 12:28-30).

신명기는 ‘한분 하나님, 한 백성, 한 성전’을 강조합니다. 가나안 민족들처럼 다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많은 신전이 필요 없다고 말하며 중앙 성전 하나만 고집합니다.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예배장소의 단일화를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강조하는 ‘이름의 신학’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된 문맥은 항상 헌신과 관계를 요하며, 그분의 소유권을 의미하며, 임재하심을 의미하며, 여호와께서 언약에 대해 신실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토라로 대변되어 있고 토라에 정경의 권위를 부여합니다. 고대 근동의 신들은 주로 일관성이 없고 변덕이 심하기 때문에 신자들은 늘 불안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뜻을 명확하게 밝히고 지켜야 할 사항을 말씀으로 요구하셨기 때문에 이것이 행운이요 자비의 표현이며 속박이 아니라 자유의 계시로 여겨졌습니다. ‘ 이렇듯 율법에 대해 긍정적 이해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학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음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이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순수하게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도 종교적인 의무가 아닌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기를 바라십니다.

신명기는 부담 없이 QT(Queit Time) 시간에 묵상하면서 읽는 것이 최고입니다. 보석과 같은 메시지를 무수히 발견할 것입니다. 모세의 메시지에 많은 은혜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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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수아 ************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원래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을 가진 호세아인데 모세가 이름을 바꾸어줍니다(민 13:8, 16). 여호수아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예수’가 됩니다. 구약의 예수가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그 이름대로 여호와께서 가나안 정복을 성취해주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집트로부터의 구원을 완성합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5권의 책을 오경이라 부르는데, 오경이 ‘여호와의 약속’의 책이라면 여호수아는 그 ‘약속의 성취’의 책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여호와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임을 가르쳐줍니다.

이렇듯 여호수아서는 오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면,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가릅니다. 유월절 문설주의 피로 장자들이 죽음을 면했다면, 라합 집의 붉은줄은 그 집안의 사람들을 살립니다. 12명의 정탐군중 2명이 좋은 보고를 했다면, 여호수아는 2명의 정탐군을 보내 좋은 보고를 받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민족을 이끌기 전, 불붙는 가시떨기나무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다면, 여호수아는 가나안 전쟁을 시작하기 전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납니다. 모세는 출애굽전에 유월절을 보내며, 여호수아는 정복 전에 유월절 절기를 보냅니다. 모세는 10재앙과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보여주신 3가지 기사를 합해 13가지 표징을 행하며, 여호수아는 첫 정복전에 여리고 성을 총 13번 돕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이 불순종 했을 때 모세가 중보기도를 하듯, 여호수아도 아이 전쟁의 실패 후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기도를 합니다. 여호수아는 제 2의 모세로 활약합니다. 오경의 여호와가 창조주이시기에,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와는 원하는 국가에게 땅을 줄 수 있는 권리가 있으신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역사서에 속하며,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여호와의 일하심을 보여주기 때문에 신학적역사라고도 불립니다.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나, 대략 주전 15세기말 내지 13세기로 보는 두 견해가 주류를 이룹니다. 마지막에 여호수아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여호수아가 죽은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책이 완성되었다고 봅니다.

바알신을 섬기는 가나안 백성들의 음란한 문화는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 가나안 땅 백성들을 진멸하라는 명령은 그들의 죄에 대해 심판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함을 유지하려는 두 가지 목적을 모두 달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직접 진두지휘하시고,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행해지는 전쟁을 ‘거룩한 전쟁’(Holy War) 또는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난 것도 이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여리고성을 도는 것도 이 전쟁이 단순한 국가간의 침략이 아닌 ‘여호와의 전쟁’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동시에 이 전쟁은 돌이킬 수 없는 가나안의 죄에 대한 심판이며 하나님의 공의를 만천하에 선포하는 전쟁입니다. 그러기에 전쟁의 승리 비결이 군사력이나 무기에 있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여부’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에 임한 리더인 여호수아에게 군사전략이 아니라 ‘율법책을 입에서 떠나지 말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그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요구하십니다(수 1:8). 율법을 지키면 모세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여호수아와도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서는 바로 이것이 전쟁의 승리 비결임을 가르쳐주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는 1-12장의 정복, 13-21장의 분배, 22-24장의 여호수아의 고별사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정복부분에서는 여리고 전쟁을 비롯하여 아이성과의 전쟁, 기브온 거민의 사기극, 마지막에는 점령한 31개 성읍명단이 나옵니다. 분배부분에서는 12지파 모두에게 분배를 마치면서 ‘여호와께서 주리라 맹세하신 온 땅을 다 주셨고 약속하신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했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21:41-43). 여호수아의 고별사 부분의 핵심은 ‘여호와만 섬기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경건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훌륭한 모델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쟁 후에 이스라엘에게 주신 안식은, 신약에서는 우리가 들어갈 영원한 안식과 연결됩니다(히 4:8-9). 우리모두는 지금 영적 전쟁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 본받아 앞으로 갔지만’, 현대의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을 본받아’ 믿음과 순종을 통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영적 전쟁에서 열심히 싸워야겠습니다(엡 6). 여호수아서를 읽고 힘 내서 승리하는 삶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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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기 ************

 

사사기라는 제목은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셨다’(2:16)라는 본문 말씀에서 연유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세우신 사사들은 침략자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내는 ‘구원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영적 리더라기보다는 군사적 리더였습니다. 철병거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1:19) 주전 14-11세기 또는 12-11세기에 해당하는 후기 청동기와 철기시대 초기가 사사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의 저자는 알 수 없는데, 이스라엘이 정착한 지 300년이 흘렀다는 입다의 말에 따르면 어떤 한 사람이 보고 경험한 것을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11:26). 유대전승은 사무엘을 저자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사사기 내용 중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18:30)라는 표현이 바벨론 포로기를 염두에 둔 것이라면, 사사기가 실제 완성된 시기는 적어도 포로시기이거나 그 이후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사무엘 저작설은 가능성이 희박해집니다.

역사적으로 사사기는 여호수아 죽음 이후의 시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이후로는 강력한 권위를 가진 1인 지도자가 없었으며, 영적으로 여호수아 시대와 대조되는 시대가 오게 됩니다. 여호수아 시대의 사람들이 다 죽은 후에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가 생겨난 것입니다(2:10). 즉, 전세대의 신앙교육이 실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가 믿음과 순종으로 승리했다면, 사사시대는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시대’로 바뀌며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의 정착이후 나머지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는 임무를 다하지 못한 다음 세대의 실수는 신앙적으로 타협하고 타락한 배교의 시대를 열게 됩니다. ‘여호와 중심의 나라’가 아닌 ‘가나안화된 혼합종교’의 나라가 됩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하는 대신 그들과 함께 거주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됩니다.

사사기에는 반복되는 뚜렷한 구조가 있습니다. 먼저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방의 압제자의 손에 넘기십니다. 백성들이 여호와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으면,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적의 손에서 구원할 사사들을 일으키시며, 사사들이 치리하는한 평화가 유지되는 패턴입니다. 그러나 사사들이 죽으면 백성들은 다시 악순환의 고리를 반복합니다. 심지어 이전보다 더 악한 모습으로 하향 곡선을 그리며,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호는 점점 침몰해갑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번번히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부르짖는 백성들에게 사사들을 세우신 것은 순수히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며 반복하여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죄→ 이방인들의 압제 → 부르짖음→ 사사를 통한 구원→ 평화의 주기를 반복하면서 12명의 사사들이 소개됩니다. 12지파를 의식하여 12사사를 소개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체적인 죄를 강조합니다. 그 중에서 옷니엘, 에훗, 바락(과 드보라), 기드온, 입다, 삼손 6명의 대사사의 스토리가 위의 패턴을 쫓아 소개됩니다. 각각의 독특한 이야기들이 덧붙혀지지만, 기본 틀은 동일합니다. 나머지 6명, 삼갈, 돌라, 야일, 입산, 엘론, 압돈은 스토리가 소개되지 않기 때문에 소사사로 불립니다. 대사사들은 뒤로 갈수록 점점 불완전함을 드러냅니다. 기드온의 아들은 왕이 되려다가 문제를 일으키며, 입다는 경솔한 맹세를 하며, 삼손은 나실인의 운명을 따르기보다는 블레셋 여인들과 끊임없이 염문을 뿌립니다. 또한, 개인의 보복으로 블레셋을 무찌르는 것처럼 보이는 삼손은 영웅인지 문제의 인물인지 혼돈될 정도의 모습으로 대사사의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사사들 모두를 도구로 사용하셨고, 이들이 치리하는 동안에는 평온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영의 활동이 사사기에서 두드러지는 부분도 주목해야 합니다.

12명의 사사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마지막 17-21장은 결론에 해당합니다. 결론에서는 4번에 걸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다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실제로 그런 이스라엘의 모습을 개인, 지파, 레위인들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면서, 경건한 왕의 필요성을 부각시킵니다. 그러면서 사사기는 우리에게 ‘과연 그 왕이 누구인가?’를 질문하게 만듭니다. 사사들보다 더 훌륭한 영적 리더가 나온다면 나라가 더 안정되고 이상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줍니다. 이렇게 사사기는 다음의 왕정시대를 대비하며, 오실 왕을 준비합니다. 기대하던 왕이 가깝게는 다윗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왕이신 메시아를 바라보도록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사들은 모두 오실 메시아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메시아는 우리를 악의 세력에서 구원해주실 진정한 ‘구원자’되실 것이며, 유일한 ‘사사’가 되실 것입니다. 사사기를 묵상하며 우리가 혹 지금 개인 또는 국가적으로 사사시대의 악순환 싸이클의 어딘가에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며, 하나님께 은총을 구하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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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룻기 ************

 

룻기는 어떠한 책일까요? 시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하는 며느리들에게 주는 경고 메시지일까요? 불행하고 가난한 과부라도 마음씨만 고우면 부자남편 만나 잘 살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스토리일까요? 아니면 어느 이방여인과 이스라엘 남자가 한눈에 반하게 된 러브 스토리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다윗의 조상들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들은 어떻게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는 옛날 조상들 이야기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룻기의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요?

룻기는 작자 미상입니다. 기록 연대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윗의 이름이 마지막에 나온 것으로 보아 적어도 다윗 시대이거나 그 이후에 기록된 것은 확실합니다. 유난히 대화문이 많아서 연극으로 만들기에 좋은 문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목가적 분위기의 단편소설 같은 느낌도 있습니다. 룻기에는 보리추수와 밀추수가 언급되는데, 따라서 그 계절과 관련된 절기인 칠칠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모두 회당에 모여 룻기를 읽는 전통이 있습니다.

룻기의 배경은 사사 시대입니다. 사사 시대는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암흑과 무질서, 부도덕, 영적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룻기에는 단 한 명의 악인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고부갈등은 커녕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를 봉양하겠다고 따라 나섭니다. 노사관계의 갈등은 커녕 보아스와 그의 일군들은 만나자마자 서로 축복의 인사부터 나눕니다. 과부인 이방여인을 무시하기는 커녕 보아스는 룻에게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온갖 배려를 해줍니다. 엑스트라로 등장하는 친족조차도 자신의 ‘기업 무를 의무’를 다하려다가 힘에 부침을 깨닫고 할 수 없이 보아스에게 책임을 양도합니다. 이들 모두가 사사 시대의 사람들 같지 않게 선한 행동을 합니다. 죄악 된 시기에 보석 같은 이들의 이야기가 바로 룻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룻기의 주요 등장 인물은 나오미, 룻, 보아스 세 사람입니다. 그 중에서도 룻은 단연 돋보입니다. 이는 룻에게 계속적으로 따라 붇는 ‘모압여인 룻’이라는 타이틀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여인이 아니라 이방여인이며 더군다나 과부입니다. 구약에서 ‘고아, 객, 과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비와 동정에 의해서만 생존할 수 있는 사회적 약자요, 극빈곤층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자들입니다. 룻의 경우는 이방여인 과부로서 늙은 과부인 시모를 모셔야 하는 최악의 조건을 지녔는데,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스스로 감당하기로 자원합니다. 그녀는 앞으로 펼쳐질 삶에 대해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교 행위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하지만 이방 여인 룻은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자처하는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룻은 나오미를 위하여 자손을 만들어주기를 원했으며, 나오미는 룻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기를 원하고, 보아스는 이런 룻을 기특하게 보고 기꺼이 모든 것을 수용하기로 결정합니다. 보아스는 ‘친족’으로서 할 수 있는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뛰어넘어 엘리멜렉의 자손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자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원하신 삶의 모습입니다. 세 사람의 아름다운 삶의 결과로, 그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다윗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은 서로에게 유익을 주기를 원함으로, 결국 온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는 중심에는 놀랍게도 이스라엘 여인이 아닌 모압여인 룻이 있었습니다.

구약 중에서 여성의 이름이 제목이 된 책은 단 2권입니다. 하나는 에스더이며 그녀는 이스라엘 여인입니다. 그러나 룻은 이방여인이요, 과부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제목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입장에서는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방 여인 룻이 이스라엘 여인보다 훨씬 더 고귀하게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룻기에서의 하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고 또한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이방인이든 이스라엘 백성이든 차별을 두지 않고 은혜 베푸심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룻기를 잠언 뒤에 배열합니다. 룻기에서 보아스가 룻에게 ‘현숙한 여인’(3:11)이라고 말하는데, 잠언 31장의 ‘현숙한 여인’의 모델이 바로 룻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룻이라는 여인이 왜 현숙한 여인으로 불렸는지를 질문하며 룻기를 통해 이 놀라운 여인을 만나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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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상 ************

 

현재 사무엘상하는 두 권으로 나뉘어 있으나 원래는 한권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사사기 말기부터 다윗 말기까지를 다룹니다. ‘왕이 없다’는 이야기로 마치는 사사기를 염두에 둔 듯, 사무엘은 킹메이커로서 왕정시대를 엽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인 동시에 제사장, 선지자의 역할을 맡은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가 왕정시대의 창립에 지대한 공을 세웠기에 책의 제목도 사무엘의 이름을 따서 지어집니다. 사무엘서는 사무엘, 사울, 다윗 3명의 중심인물로 내용이 전개됩니다. 시대 배경은 주전 11세기 후반부와 10세기 초까지이며, 철기시대에 해당됩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 구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유대전승에 따르면 사무엘상은 사무엘이 기록했고 사무엘하는 선지자 나단과 갓이 기록했다고 보지만, 확실히 말하기는 힘듭니다.

1-7장은 사무엘이 주인공입니다. 모세의 스토리에서 모세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듯, 사무엘스토리에도 사무엘 어머니 한나이야기가 나옴으로써 사무엘이 중요한 인물임을 가르쳐줍니다. 사무엘은 당시 제사장이었던 엘리와 그의 아들들과 대조를 이룹니다. 사무엘은 여호와를 섬기나 엘리의 아들들은 여호와 앞에서 악합니다(2:12-26).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만, 엘리는 듣지 못합니다(3장). 엘리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은 당시의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상을 대변합니다.

엘리제사장의 아들들은 여호와의 언약궤가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 믿고 블레셋과의 전쟁에 언약궤를 가져옵니다. 하지만 전쟁도 패하고 언약궤도 빼앗기고 맙니다. 이 과정에서 같은 날에 엘리는 뒤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고, 그의 아들들은 전쟁에서 죽고, 그의 며느리는 아이를 낳다 죽는데, 그 아기의 이름은 ‘이가봇’이며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상징하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겼을 때에 하나님은 다곤신상을 두 번이나 엎어뜨림으로써 자신이 다곤보다 강한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또한 독한 종기재앙으로 아스돗 사람들을 치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결국 언약궤는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집니다.

8-15장의 주인공은 사무엘과 사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되기를 거절하는 악한 행위로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왕정제도를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자신들을 전쟁터로 인도할 왕이 없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믿어서 왕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죄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간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하시고, 사울을 초대 왕으로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왕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사무엘이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제사를 드리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의 실추를 통해 두 번이나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 앞에서 왕으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등장하게 된 인물이 다윗입니다.

16-31장은 사울과 다윗을 다루는데, 그 안에서 두 사람의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외모’가 기준이 되고, 다윗은 ‘마음의 중심’이 기준이 됩니다. 사울은 골리앗의 말을 듣고 두려워하나,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골리앗을 무찌릅니다(17장). 사울이 여호와의 영이 떠나고 악령으로 고통 받을 때에, 다윗은 수금으로 사울을 위로하고 그 악령을 쫓아냅니다. 사울은 블레셋의 전쟁을 계기로 다윗을 죽이려 하나, 다윗은 계속적으로 블레셋에게 승리를 거둡니다. 사울은 시기심과 편집증으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아다니고, 다윗은 이런 상황에도 여호와를 의지하며 도망다닙니다. 요나단, 미갈 등 사울 주위의 사람들은 점점 그를 멀리하나, 다윗은 요나단, 미갈을 비롯하여 백성들에게 점점 사랑을 받습니다. 사울은 왕으로서의 리더십을 점점 잃어가나, 다윗은 왕으로서 점점 준비가 되어갑니다. 사울은 엔돌에 신접한 여인의 말을 듣지만(28장), 다윗은 선지자의 말을 듣습니다(22장).

사무엘상에서는 다윗이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왕위를 주신 점을 강조합니다. 사울은 증오심으로 계속 다윗을 죽이려 하고, 단창을 던지고, 밤중에 생포하러 미갈의 집에 사람을 보내고, 유다광야를 뒤지고 다닙니다. 반면 다윗은 그런 사울을 두번이나 죽일 수 있었으나 손을 대지 않습니다(24, 26장). 사울은 결국 길보아 전쟁에서 자살함으로 다윗이 그의 죽음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또한 길보아 전쟁에서 요나단을 비롯한 사울의 아들 대부분이 전사함으로, 사울의 사위인 다윗은 왕위를 얻을 자격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렇게 사무엘상은 사울왕의 몰락으로 막을 내립니다. 사울은 영적으로 둔한 자였으며, 다윗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 됩시다. ‘다윗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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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하 ************

 

현재 사무엘상하는 두 권으로 나뉘어 있으나 원래는 한권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사사기 말기부터 다윗 말기까지를 다룹니다. 유대전승에 따르면, 사무엘하는 선지자 나단과 갓이 기록했다고 보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사무엘하에는 다윗시대의 관습을 설명해주는 내용이 나오는데(삼하 13:18), 이것은 이러한 관습이 익숙하지 않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과 동시대 사람인 나단과 갓이 썼을 가능성은 낮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서를 쓴 저자는 분명 책에 나오는 야살의 책(삼하 1:18)과 같은 자료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또한 다윗시대에 사관이 있었던 기록이 있고(8:16), 역대상에 사무엘, 나단, 갓이 다윗의 행적을 기록한 자료들이 있다고 나오는 것으로 보아(대상 29:29), 국가 기록보관소나 도서관 같은 곳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익명의 저자가 다윗 시대 한참 후에 이런 기록들을 사용하여 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무엘하는 전체가 다윗에 대한 스토리입니다. 다윗의 왕으로의 등극, 다윗의 언약, 다윗의 쇠퇴, 이렇게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가장 먼저, 1-6장은 다윗이 왕으로 등극하는 과정을 다룹니다. 사무엘상은 길보아 전쟁에서 블레셋과 싸우다가 사울과 요나단을 비롯한 그의 아들들이 전사하는 것으로 마지막을 마칩니다. 사무엘하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애가로 시작함으로써 다윗이 사울의 죽음에 관계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사울을 죽였다고 말한 아말렉인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였다는 죄목으로 처형했으며(1장), 사울의 남은 아들 이스보셋을 죽인자도 처형했으며(4장),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을 암살한 요압에게 책임을 물어 죽였고(3:28-39; 왕상 2:28-34),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도 잘 대해 줌으로써 다윗이 왕위 찬탈자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윗을 왕위에 앉힌 분은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헤브론을 기지로 사울가와 전쟁을 마치고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30세의 나이에 옹립되어 주전 1010년에서 970년까지 40년간 통치합니다. 이때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며, 여호와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옵니다.

7장은 다윗의 언약을 다룹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안치할 성전을 짓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다윗의 집을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면서 다윗과 언약을 세우는데, 이것이 신학적으로 사무엘서의 하이라이트라 볼 수 있습니다. ‘다윗언약’은 앞으로 전개될 구약전체의 중요한 뼈대를 형성합니다. 다윗언약은 하나님의 비조건적 언약으로서, 다윗의 후손을 통해 이어지는 영원한 다윗의 왕조와 나라를 약속하십니다. 다윗의 후손은 누구일까요? 솔로몬일까요? 아니면 그보다 더 먼 미래에 오실, 다윗의 혈통에서 난, 메시아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실까요? 이처럼 사무엘서는 우리 모두가 ‘다윗의 후손’이 누구일지 궁금해 하며 구약성경을 읽어나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8-24장은 다윗의 쇠퇴를 다룹니다. 다윗이 자신의 충신인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하여 임신을 시키고,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한 살인교사죄를 저지른 이후부터 그는 쇠퇴하기 시작합니다(11장). 이때부터 다윗 집안의 재화가 끊이지 않습니다. 간음한 여인의 아이가 죽고, 다윗의 아들 암논은 이복누이를 강간하고, 누이의 오빠 압살롬은 암논을 보복살해하고, 또한 압살롬은 다윗에게 모반하여 왕국을 뺏고 백주에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며, 본인도 죽임을 당하는 비극이 연달아 일어납니다. 사무엘하 마지막에서 다윗은 인구조사를 하여 여호와앞에 자기과시의 범죄를 저지름으로써 다시 한번 하나님의 진노를 자처하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이 모든 죄를 철저히 회개합니다. 시편 32편과 51편은 그의 이러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다윗에게 재화 가운데서도 밧세바에게는 아들 솔로몬을 주셔서 다윗의 왕조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또한, 인구조사후에는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을 구매함으로 후에 성전건축 자리를 예비하게 하십니다.

다윗은 그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경외하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였으며,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신앙의 귀한 선배입니다. 그의 일생동안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시 32:10)라는 고백을 실제로 보여준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하여금 영원한 왕국을 세우겠다는 언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사무엘하 묵상하시며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를 배우고, 다윗처럼 회개하고, 다윗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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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상 ************

 

열왕기는 ‘왕들을 열거한 기록’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왕들의 통치를 기록한 데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원래는 한 권의 책인데 헬라어로 번역을 하면서 분량이 많아, 둘로 나눈 전통에 따라 열왕기상하로 구분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예레미야가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 할 만한 증거가 불충분합니다. 더군다나 예레미야는 그의 마지막을 애굽에서 보냈습니다(렘 43:1-8). 따라서 저자 미상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열왕기는 다윗왕 통치 말엽인 주전 10세기 초부터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 감옥에서 풀려나는 560년인 6세기 중반까지, 4세기에 걸쳐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과 분열 왕국의 과정과 분열된 두 국가의 왕들의 이야기를 신학적 관점에서 조명한 역사서입니다. 저자는 이 방대한 왕정 역사를 솔로몬의 행장(왕상 11:41),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왕상 14:29; 15:31; 왕하 1:18; 10:34; 13:8, 12), 유다왕 역대지략(왕상 14:29; 15:7; 왕하 8:23; 12:19; 14:18; 24:5) 등과 같은 다양한 자료들을 참고하여 기록했습니다.

열왕기는 다음 3가지 질문에 답하고자 쓰여졌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었는가? 북이스라엘은 왜 멸망하게 되었는가? 남유다는 왜 멸망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할 때는 오경에 나오는 언약과 율법에 얼마나 신실했는지가 기준이 됩니다. 여호와 한 분께만 충성했는지, 이방신을 섬기지 않았는지, 율법의 말씀을 잘 지켰는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곳에서만 예배를 드렸는지, 성전에 우상을 들여놓지는 않았는지, 산당을 폐지했는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의 말을 청종했는지 등이 기준입니다. 순종했을 때는 복을 받지만, 불순종했을 때는 저주를 받는 것이 언약의 조건입니다.

열왕기는 오경, 특히 그중에서도 신명기 법이라는 렌즈를 통해 평가하여 두 국가가 멸망하게 된 이유를 밝힘으로써 역사에서 교훈을 얻게 하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수백년간 축적된 그들의 죄를 지적함으로써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었음을 가르쳐줍니다. 궁극적으로 이것을 통해 이미 포로 생활을 하고 있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부모가 자녀를 야단치고 벌을 주었는데, 왜 벌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가르쳐준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열왕기는 왕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킵니다. 얼마나 잘못이 많기에 포로 생활까지 갔는지를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열왕기는 통일 왕국 솔로몬의 등극과 통치, 분열 왕국과 북이스라엘의 멸망, 남유다의 멸망 이렇게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열왕기상 1-11장은 솔로몬의 왕위 계승과 통치를 다룹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성전 건축입니다. 솔로몬의 초기 모습은 아주 이상적인 왕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이방 아내들이 수입한 다신들을 수용하고 배교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분열 왕국의 계기가 됩니다. 급기야 솔로몬의 아들 대에 와서 주전 931년에 르호보암 중심으로 2지파를 가진 남유다와, 여로보암 중심으로 10지파를 가진 북이스라엘로 나라가 분열하게 됩니다. 표면적으로는 솔로몬의 폭정, 과도한 세금에 대한 반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무능함이 원인이었지만, 실제로는 솔로몬의 죄로 인한 영적 심판이 주원인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2장부터 열왕기하 17장까지는 분열 왕국과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다룹니다. 두왕국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동시대 왕들의 통치를 번갈아가며 기술합니다. 남유다에서는 19명의 왕들과 1명의 여왕까지 도합 20명의 통치자가 나옵니다. 북이스라엘에서는 모두 19명 왕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도 오므리의 정적 디브니를 포함시키면 도합 20명이 됩니다. 남북에서 각 20명의 통치자들이 다스리는 왕들의 이야기가 열왕기서입니다. 이때부터 선지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며 그들과 왕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불행하게도 북이스라엘은 단 한 명의 의로운 왕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급기야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살아 남은 남유다는 136년 뒤인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남유다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면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열왕들의 시기에 엘리야, 엘리사를 비롯하여, 이사야, 호세아, 아모스, 미가, 하박국, 스바냐, 예레미야 등의 선지자들을 보내 회개를 촉구했으나 대부분 이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도 열왕기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유다의 왕 여호야긴의 석방은 잿더미 속에 남은 불씨처럼 유다 왕조가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다윗자손에서 오실 메시아의 희망이 남아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묵상하시면서 열왕기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열왕기상하 개요 1-2 Kings - YouTube

 

************ 열왕기하 ************

 

열왕기는 ‘왕들을 열거한 기록’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왕들의 통치를 기록한 데서 붙여진 제목입니다. 원래는 한 권의 책인데 헬라어로 번역을 하면서 분량이 많아, 둘로 나눈 전통에 따라 열왕기상하로 구분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예레미야가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 할 만한 증거가 불충분합니다. 더군다나 예레미야는 그의 마지막을 애굽에서 보냈습니다(렘 43:1-8). 따라서 저자 미상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열왕기는 다윗왕 통치 말엽인 주전 10세기 초부터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 감옥에서 풀려나는 560년인 6세기 중반까지, 4세기에 걸쳐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과 분열 왕국의 과정과 분열된 두 국가의 왕들의 이야기를 신학적 관점에서 조명한 역사서입니다. 저자는 이 방대한 왕정 역사를 솔로몬의 행장(왕상 11:41),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왕상 14:29; 15:31; 왕하 1:18; 10:34; 13:8, 12), 유다왕 역대지략(왕상 14:29; 15:7; 왕하 8:23; 12:19; 14:18; 24:5) 등과 같은 다양한 자료들을 참고하여 기록했습니다.

열왕기는 다음 3가지 질문에 답하고자 쓰여졌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었는가? 북이스라엘은 왜 멸망하게 되었는가? 남유다는 왜 멸망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할 때는 오경에 나오는 언약과 율법에 얼마나 신실했는지가 기준이 됩니다. 여호와 한 분께만 충성했는지, 이방신을 섬기지 않았는지, 율법의 말씀을 잘 지켰는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곳에서만 예배를 드렸는지, 성전에 우상을 들여놓지는 않았는지, 산당을 폐지했는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의 말을 청종했는지 등이 기준입니다. 순종했을 때는 복을 받지만, 불순종했을 때는 저주를 받는 것이 언약의 조건입니다.

열왕기는 오경, 특히 그중에서도 신명기 법이라는 렌즈를 통해 평가하여 두 국가가 멸망하게 된 이유를 밝힘으로써 역사에서 교훈을 얻게 하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수백년간 축적된 그들의 죄를 지적함으로써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었음을 가르쳐줍니다. 궁극적으로 이것을 통해 이미 포로 생활을 하고 있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부모가 자녀를 야단치고 벌을 주었는데, 왜 벌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가르쳐준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열왕기는 왕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킵니다. 얼마나 잘못이 많기에 포로 생활까지 갔는지를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열왕기는 통일 왕국 솔로몬의 등극과 통치, 분열 왕국과 북이스라엘의 멸망, 남유다의 멸망 이렇게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열왕기상 1-11장은 솔로몬의 왕위 계승과 통치를 다룹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성전 건축입니다. 솔로몬의 초기 모습은 아주 이상적인 왕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이방 아내들이 수입한 다신들을 수용하고 배교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분열 왕국의 계기가 됩니다. 급기야 솔로몬의 아들 대에 와서 주전 931년에 르호보암 중심으로 2지파를 가진 남유다와, 여로보암 중심으로 10지파를 가진 북이스라엘로 나라가 분열하게 됩니다. 표면적으로는 솔로몬의 폭정, 과도한 세금에 대한 반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무능함이 원인이었지만, 실제로는 솔로몬의 죄로 인한 영적 심판이 주원인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2장부터 열왕기하 17장까지는 분열 왕국과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다룹니다. 두왕국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동시대 왕들의 통치를 번갈아가며 기술합니다. 남유다에서는 19명의 왕들과 1명의 여왕까지 도합 20명의 통치자가 나옵니다. 북이스라엘에서는 모두 19명 왕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도 오므리의 정적 디브니를 포함시키면 도합 20명이 됩니다. 남북에서 각 20명의 통치자들이 다스리는 왕들의 이야기가 열왕기서입니다. 이때부터 선지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며 그들과 왕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불행하게도 북이스라엘은 단 한 명의 의로운 왕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급기야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살아 남은 남유다는 136년 뒤인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남유다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면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열왕들의 시기에 엘리야, 엘리사를 비롯하여, 이사야, 호세아, 아모스, 미가, 하박국, 스바냐, 예레미야 등의 선지자들을 보내 회개를 촉구했으나 대부분 이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도 열왕기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유다의 왕 여호야긴의 석방은 잿더미 속에 남은 불씨처럼 유다 왕조가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다윗자손에서 오실 메시아의 희망이 남아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묵상하시면서 열왕기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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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상 ************

 

역대기는 사무엘서나 열왕기서와 마찬가지로 원래 한 권의 책이었는데 후대에 둘로 나뉘었습니다. 헬라어 번역 성경에서 역대기의 제목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서 생략된 사건을 보완해준다는 의미에서 ‘생략된 사건들’로 붙여졌습니다. 반면 히브리어 제목은 ‘날마다의 행적들’로, ‘연대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도 그러한 의도를 반영하여 ‘대대로 이어 내려온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역대기’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역대기의 저자는 학사 에스라로 알려져 있으나 충분한 증거는 없습니다. 책이 제사장적 요소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제사장이나 레위인 가운데 한 명이 썼을 것으로 추측하며, 이를 역대기 사가라 부릅니다. 이 역대기 사가는 오경, 사무엘과 열왕기 등의 역사서, 예언서, 시편의 자료들을 참고로 했습니다. 그 외에도 아히야의 예언, 선견자 잇도의 묵시, 스마야와 잇도의 족보책, 사무엘, 나단, 갓의 글,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 열왕기 주석, 솔로몬의 글, 다윗 왕의 역대지략, 족보 기록, 서신과 공식 문서, 군대 인명록, 연설문, 노래, 기도문 등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다양한 자료들을 사용하여 역대기의 독특한 신학과 목적을 가지고 기록했습니다.

역대기는 아담의 족보부터 시작해서 페르시아의 고레스 칙령이 선포된 주전 538년 시기까지를 다룹니다. 역대상 29장 7절에 나오는 ‘다릭’이라는 화폐 단위가 주전 515년 이전에는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화폐 유통 기간까지 생각한다면 많은 학자들은 역대기 저작 시기를 주전 4세기로 봅니다. 구약에서 가장 늦게 쓰여진 책에 속하며 히브리 정경의 요약이자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대기를 읽는 자들은 이미 포로 생활 이후의 디아스포라 세대이거나 재건 시대의 세대일 것입니다. 이들의 질문은 더 이상 ‘왜 하나님이 자신들을 포로로 보냈느냐’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열왕기서의 관심사입니다. 오히려 이들은 포로 생활로부터 오래 지났기 때문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야 했으며, 자신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뿌리와, 이제 자신들은 무엇을 하며 어떤 희망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역대기는 바로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지루하게 느껴지는 역대상 1-9장의 족보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자신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답입니다. 그리고 역대상 10장부터 역대하 36장까지의 역사는 자신들이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입니다. 역대기는 3가지 요소를 강조합니다. 바로 ‘다윗과 다윗 왕조, 제사장, 성전’입니다. 다윗과 다윗 왕조가 중요한 이유는 다윗 왕조를 영원히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다윗과의 언약’ 때문입니다. 나라도 없는 상태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언약의 약속은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다윗의 후손인, 다윗보다 더 위대한 왕이 오셔서 세울 영원한 나라를 염원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기는 다윗의 후손들인 유다 왕조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다윗 왕조의 족보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넘어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것을 통해 역대기는 오실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는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분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포로 시대 이후 유대 공동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성전 중심의 예배 공동체, 즉 영적 공동체를 다시 형성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자들이 레위 제사장이기에, 역대기에서는 이들의 역할과 족보에 초점을 맞춥니다.

역대기에서 성전은 또 다른 중심 주제입니다. 포로기 이후 세대는 성전을 세울 재건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역대기 마지막 장은 페르시아 왕인 고레스가 ‘유다 백성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을 건축하라’는 칙령을 내리는 것으로 극적으로 마칩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셨다는 증거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초라한 성전이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그분의 영광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이것은 국가의 회복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대한 관심은 자신들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대이자, 성전을 세우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던 다윗과 솔로몬에게로 이어집니다.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하는 자였으며, 솔로몬은 실제 성전을 건축한 주인공입니다.

역대기의 핵심 구절은 역대상 7장 14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이것은 성전 건축을 완료한 후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약속해주신 말씀입니다. 동시에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하나님의 메시지이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이 회개하면 죄를 사하여 주시고 그 땅을 고쳐주실 것입니다. 역대기를 묵상하실 때에 개인, 가정, 국가의 회복이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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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하 ************

 

역대기는 사무엘서나 열왕기서와 마찬가지로 원래 한 권의 책이었는데 후대에 둘로 나뉘었습니다. 헬라어 번역 성경에서 역대기의 제목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서 생략된 사건을 보완해준다는 의미에서 ‘생략된 사건들’로 붙여졌습니다. 반면 히브리어 제목은 ‘날마다의 행적들’로, ‘연대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도 그러한 의도를 반영하여 ‘대대로 이어 내려온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역대기’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역대기의 저자는 학사 에스라로 알려져 있으나 충분한 증거는 없습니다. 책이 제사장적 요소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제사장이나 레위인 가운데 한 명이 썼을 것으로 추측하며, 이를 역대기 사가라 부릅니다. 이 역대기 사가는 오경, 사무엘과 열왕기 등의 역사서, 예언서, 시편의 자료들을 참고로 했습니다. 그 외에도 아히야의 예언, 선견자 잇도의 묵시, 스마야와 잇도의 족보책, 사무엘, 나단, 갓의 글,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 열왕기 주석, 솔로몬의 글, 다윗 왕의 역대지략, 족보 기록, 서신과 공식 문서, 군대 인명록, 연설문, 노래, 기도문 등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다양한 자료들을 사용하여 역대기의 독특한 신학과 목적을 가지고 기록했습니다.

역대기는 아담의 족보부터 시작해서 페르시아의 고레스 칙령이 선포된 주전 538년 시기까지를 다룹니다. 역대상 29장 7절에 나오는 ‘다릭’이라는 화폐 단위가 주전 515년 이전에는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화폐 유통 기간까지 생각한다면 많은 학자들은 역대기 저작 시기를 주전 4세기로 봅니다. 구약에서 가장 늦게 쓰여진 책에 속하며 히브리 정경의 요약이자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대기를 읽는 자들은 이미 포로 생활 이후의 디아스포라 세대이거나 재건 시대의 세대일 것입니다. 이들의 질문은 더 이상 ‘왜 하나님이 자신들을 포로로 보냈느냐’가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열왕기서의 관심사입니다. 오히려 이들은 포로 생활로부터 오래 지났기 때문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야 했으며, 자신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뿌리와, 이제 자신들은 무엇을 하며 어떤 희망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역대기는 바로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지루하게 느껴지는 역대상 1-9장의 족보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자신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답입니다. 그리고 역대상 10장부터 역대하 36장까지의 역사는 자신들이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입니다. 역대기는 3가지 요소를 강조합니다. 바로 ‘다윗과 다윗 왕조, 제사장, 성전’입니다. 다윗과 다윗 왕조가 중요한 이유는 다윗 왕조를 영원히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다윗과의 언약’ 때문입니다. 나라도 없는 상태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언약의 약속은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다윗의 후손인, 다윗보다 더 위대한 왕이 오셔서 세울 영원한 나라를 염원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기는 다윗의 후손들인 유다 왕조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다윗 왕조의 족보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넘어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것을 통해 역대기는 오실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는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분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포로 시대 이후 유대 공동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성전 중심의 예배 공동체, 즉 영적 공동체를 다시 형성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자들이 레위 제사장이기에, 역대기에서는 이들의 역할과 족보에 초점을 맞춥니다.

역대기에서 성전은 또 다른 중심 주제입니다. 포로기 이후 세대는 성전을 세울 재건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역대기 마지막 장은 페르시아 왕인 고레스가 ‘유다 백성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을 건축하라’는 칙령을 내리는 것으로 극적으로 마칩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셨다는 증거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초라한 성전이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그분의 영광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이것은 국가의 회복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대한 관심은 자신들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시대이자, 성전을 세우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던 다윗과 솔로몬에게로 이어집니다.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하는 자였으며, 솔로몬은 실제 성전을 건축한 주인공입니다.

역대기의 핵심 구절은 역대상 7장 14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이것은 성전 건축을 완료한 후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약속해주신 말씀입니다. 동시에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하나님의 메시지이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이 회개하면 죄를 사하여 주시고 그 땅을 고쳐주실 것입니다. 역대기를 묵상하실 때에 개인, 가정, 국가의 회복이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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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라 ************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는 주전 5-4세기 페르시아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시대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포로기이후 생존자들과 후손들이 어떻게 신앙공동체를 이루었으며, 각자 처한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갔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과연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을 기억하고 계신지, 과거 언약의 약속들이 과거에만 묻혀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현재에도 유효한 것인지, 어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앞으로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등에 대한 많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 세 권의 책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해줍니다.

역대기는 주전 538년 고레스 왕이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대하 36:23)라고 하는 말로 마칩니다. 그리고 역대기의 끝 부분이 에스라서의 도입부가 됩니다. 에스라서는 고레스 왕이 칙령을 발표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페르시아 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귀환시키시고 성전을 복구하게 하는 이 고레스칙령은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것은 오래 전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70년의 포로생활 마감에 대한 예언의 성취입니다(렘 29:10-14; 25:11-13; 30:18-21). 또한, 150여년 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예언의 성취이기도 합니다(사 44:28; 45:1-5).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기 백성들을 잊지 않으셨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여호와는 자기백성을 향한 관심이 있으며, 그들을 돌보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은 제2의 출애굽을 의미하며, 성전 건축에 대한 허락은 과거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적공동체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비록 솔로몬 시대처럼 화려한 성전은 아니나, 여호와께서는 여전이 그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또한 고레스 칙령을 통해 오래 전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은,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에 국한된 분이 아니며 세상의 주관자들을 주관하시는 분이시자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보여줍니다.

에스라서의 제목은 책의 주인공의 이름을 딴 것 입니다. 에스라는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이며 학사로 율법에 능통한 자입니다. 유대전통은 에스라를 저자로 지목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페르시아왕 아닥사스다 1세때입니다(주전 464-423). 에스라서는 성전재건의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1-6장, 에스라의 개혁을 다루는 7-10장으로 크게 둘로 나뉘어집니다.

다윗의 후손인 스룹바벨을 리더로 귀환한 자들이 성전의 기초를 놓습니다. 그러나 주변 민족들의 방해로 작업이 중단됩니다. 그리고 18년이 지난 후,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활동으로 성전건축이 재개되며 주전 515년에 완공됩니다. 586년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솔로몬의 성전이 파괴된 때로부터 정확히 70년이 지난 후에 성전이 다시 완공된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70년포로생활의 상징적 마감으로 봅니다. 이 성전은 스룹바벨의 지휘 하에 완공되었다고 해서 스룹바벨 성전이라 부르기도 하고, 제 2성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에스라의 개혁을 다루는 제 2부는 에스라에 대해 잠깐 소개하는 부분만 빼고는 모두 1인칭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즉, 에스라가 직접 쓴 회고록입니다. 에스라가 백성들을 이끌고 귀환한 때가 주전 458년으로, 성전이 완성된 지 57년 후입니다. 그는 학사이자 종교지도자로서 율법을 가르치는 사명을 담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사회적 지침임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말씀에 따라 이방민족들과의 통혼의 심각성을 깨닫습니다. 이들은 포로기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었던 죄들을 반복합니다. 이방여인들과의 통혼은 우상숭배와 배교로 달리는 지름길입니다. 백성들은 에스라의 지도에 따라 죄를 고백하고 그들과의 결혼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연루되었던 자들의 명단을 제시함으로 에스라서는 끝이 납니다.

이것은 포로기 이후 귀환한 백성들의 문제가 다시 심각해지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이제는 정신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학사 에스라를 통해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십니다. 에스라서는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이런 일을 반복하셔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동일한 죄를 반복하며 살고 있지 않은지, 삶의 과감한 개혁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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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헤미야 ************

 

주전 5-4세기 페르시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는 연대로 봤을 때 구약에서 거의 마지막인 사건들을 다룹니다. 이 세 권의 책은 이스라엘 포로기이후 생존자와 후손들이 어떻게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각자 처한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갔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본래 한 권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주류이나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시대와 사건적으로 에스라서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두 사람은 동시대 사람으로, 에스라가 종교지도자라면 느헤미야는 평신도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포로기 이후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공동체에 개혁을 실행한 파트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464-423 B.C.) 제 20년인 주전 445년에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보수를 위해 예루살렘 총독으로 자원합니다. 페르시아 왕의 술관원이라는 고위직을 마다하고 고국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흔히 말하는 한직으로 자원을 한 셈입니다. 느헤미야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위로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성벽을 보수함으로써 이름의 의미대로 유다백성에게 큰 위로를 주는 인물이 됩니다. 느헤미야에는 그가 직접 쓴 1인칭으로 된 회고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느 1-7장; 11-13장). 에스라, 느헤미야의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너무나 의견이 분분하여 결론짓기 힘들지만, 적어도 회고록 부분은 본인들이 기록한 것이 확실합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다루는 1-7장과 영적 개혁을 다루는 8-13장 두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성벽재건부분은 전체가 느헤미야가 1인칭으로 쓴 회고록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벽이 완성되는 52일 동안의 외적, 내적 방해요소와 박해에 대해 다루며 그 모든 것을 돌파해나간 느헤미야의 리더십이 돋보입니다. 산발랏, 도비야, 게셈으로 대표되는 외부 반대세력들은 모반, 위협, 조롱, 협박, 심리적 정신적 압박, 뇌물거래, 음모, 술수, 사기저하, 유혹, 비난, 거짓 소문, 속임수 등 온갖 책략을 동원하여 성벽보수를 방해하는 공작을 폅니다. 느헤미야의 대표 정책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라는 4장 9절 말씀에 잘 드러납니다. 느헤미야는 기도와 현실적 대안으로 그들에게 맞섭니다. 하나님께 100% 의존하는 믿음과 인간의 책임감 100% 최선이 만난, 현실에 뿌리 박은 그의 믿음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믿음의 본이 됩니다.

8-13장은 제사장 에스라와 함께 느헤미야의 개혁을 다룹니다.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책을 낭독하고 가르침으로 시작됩니다(8:8). 백성들은 언약을 갱신하고 율법의 말씀에 따라 이방여인들과 통혼을 하지 않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기로 하고, 성전세를 내고, 제단에 사용할 나무를 바치고,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후원하기로 다짐하고 헌신합니다.

느헤미야는 총독생활 12년을 마치고 바벨론으로 돌아갔다가 두번째 임기를 수행하기 위해 주전 433년에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옵니다. 그는 백성들이 다짐한 언약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안식일을 어기고, 성전을 더럽히고, 레위인들을 돌보지 않고, 통혼하는 모습들을 발견하고 재개혁을 단행합니다. 통혼을 파기하여 민족의 단일성을 보존하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반열을 다시 세우고, 예배를 회복하고 안식일을 성수하는 등 개혁하는 모습으로 느헤미야서는 끝이 나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언약갱신의 중요성, 말씀의 중요성, 기도의 중요성, 리더십의 중요성, 예배 회복의 중요성 등 많은 영적인 원리를 가르쳐줍니다. 또한 느헤미야의 개인적인 리더십을 통해서도 배울 점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마지막 장은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초라한 모습과 그들의 거듭되는 영적 실패를 보여줍니다. 느헤미야 개인은 하나님께 신실하지만, 포로기 이후 귀환한 공동체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신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언젠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돌아오고 순종할 날을 고대하게 만듦으로 마치게 됩니다. 메시야가 오셔야 그러한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느헤미야는 메시야의 그림자이며,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실 메시야를 고대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합니다. 느헤미야서를 묵상하며 각자의 삶에 적용할 점들을 찾아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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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더 ************

 

구약 중에서 비교적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에스더서는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제목을 붙였습니다. 에스더는 바벨론의 여신인 이쉬타르(Ishtar)에서 이름이 연유되었다고 보는 이들이 많은데, 그 이유는 이쉬타르가 사랑과 전쟁의 여신으로 책에서의 에스더의 역할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왕에게 ‘사랑’을 받아 왕후로 발탁되었고(2:17),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한 전쟁에서는 수산도성의 전쟁을 하루 더 연장하여 300명을 추가로 도륙할 정도로 전쟁의 여인으로 변모합니다(9:13). 그러기에 에스더가 실제 이름이라기 보다는 그녀의 별명으로 보기도 합니다. 에스더의 히브리어 이름은 ‘하닷사’(에 2:7)이며, ‘도금양 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서는 저자를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모르드개가 저자라고 생각했으며 , 에스라나 느헤미야가 저자일 가능성도 제시되어 왔습니다. 확실한 것은 저자가 페르시아의 관습이나 당시 궁전의 사정, 수산궁의 지리에 매우 익숙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페르시아 궁중 기록을 입수할 수 있었던 유대인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에스더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페르시아의 다리오 1세의 뒤를 이은 아하수에로(486-465 B.C.) 왕의 치리 기간입니다. 그의 그리스식 이름은 크세르크세스입니다. 이 제국이 가장 팽창한 시기에는 동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의 일부, 이라크, 소아시아 전체 지역, 서쪽으로는 현재의 팔레스타인 전역과 아라비아 반도 이집트와 리비아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치리하던 때에는 세계도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중국에는 공자가 있었고(551-479 B.C.), 아테네에서는 민주 정치의 기초를 마련한 정치가 페리클레스(ca. 495-429 B.C.), 시인이자 극작가인 소포클레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수학자인 피타고라스의 이름이 알려져 있었으며, 고대 올림픽이 시작된 지도 이미 200년 이상 흐른 시기였습니다. 서양의 정치, 철학, 수학, 운동, 예술, 문학의 유산이 아테네를 중심으로 꽃을 피우는 동안, 그 당시 동양의 거대한 제국이었던 페르시아 왕국의 아하수에로는 주전 480년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 원정을 나서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합니다. 그 후 아하수에로 왕은 플라타이아 전쟁에서의 패배를 끝으로 원정에서 돌아와 궁에서 향락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주전 465년 후궁들 사이의 음모로 인해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에스더 1장은 아하수에로 왕이 그리스 원정을 떠나기 전의 준비 과정과 일치하며, 에스더를 왕비로 뽑은 시기는 그가 그리스 원정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시기와 일치합니다. 많은 여인들을 전국에서 모으는 장면도 아하수에로가 하렘에서 세월을 보냈다는 역사적 정황과 일치합니다.

이렇게 세상이 변화를 겪고 발전하고 있을 때에,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제국에서 다양한 인종속에 섞여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이름 없고 미미한 족속에 불과했습니다. 에스라-느헤미야가 본국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을 다루고 있다면, 에스더는 귀환하지 않기로 선택한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에스더서는 과연 하나님은 이러한 정국에서도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데, 저자가 독자로 하여금 과연 에스더의 하나님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스토리를 통해 발견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더서의 중요 주제와 목적 중 하나는 부림절의 기원과 제정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에스더서는 오경에 기록되지 않은 유일한 절기를 지키는 데 대한 신학적인 권위를 부여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에스더서에 나오는 유대인 말살을 계획했던 ‘하만’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매년 부림절을 기념하며 에스더서를 읽을 때마다 ‘하만’의 이름이 나오면 야유를 보냅니다. 그들은 뼈아픈 역사를 통하여 에스더서의 하만뿐 아니라 유대인들을 괴롭힌 많은 하만들을 기억합니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히틀러라는 하만입니다. 세계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언제 어디에서 또 다른 하만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것을 생생히 기억하며, 오늘도 ‘유다인은 놓임과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에스더서의 구원의 역사에 희망을 걸며 부림절을 기억합니다. 에스더서는 우리도 위기에 직면했을 때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신뢰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본서를 읽는 매력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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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기 ************

 

욥기를 누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에 뚜렷한 단서가 없기 때문에 알기 힘듭니다. 욥이 썼다는 이론부터 엘리후, 모세, 솔로몬, 히스기야, 이사야, 예레미야까지 다양한 인물이 저자라는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욥기가 쓰여진 저작연대도 주전 13세기부터 2세기에 이르기까지 견해가 다양하며 어느 것이 맞다고 결론을 내리기 힘듭니다. 제목은 에스더처럼 주인공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욥은 ‘박해받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욥이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도 이론이 분분하나, 집안의 가장이 자녀를 위해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 역할을 하는 것과 욥이 140세를 훌쩍 넘어 오래 산 것으로 보아(42:16) 아브라함 같은 족장시대라고 보는 견해가 대세를 이룹니다. 욥의 고향인 우스의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예레미야 애가 4장에 “우스땅에 사는 딸 에돔아”라는 표현으로 보아 에돔 근처 사해 남쪽 광야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애 4:21).

욥기는 산문, 시, 독백, 대화, 탄식 논쟁, 송사, 찬양, 지혜적 교훈, 청원, 등 사용된 문학적 형태가 다양합니다. 또한 욥기는 문학적 구성이 탄탄하며 신학적 논쟁의 깊이가 깊은 책입니다. 전체 구조는 서론, 욥의 세 친구들과의 세 번에 걸친 논쟁, 엘리후의 스피치와 여호와의 스피치 그리고 결론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서론 격인 1-2장에서는 천상의 대화를 소개해 줌으로써 독자들이 욥이 당하는 고통의 이유에 대해 알고 욥 전체를 보는 특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욥과 욥을 위로하러 온 친구들 사이의 대화를 간접적으로 듣고 그들의 말을 평가할 수 있는 유리한 관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38-42장에 나오는 여호와의 스피치를 통해 하나님의 관점에 대해 듣고 모든 것을 정리하며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된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문학적으로 탁월하면서도 ‘고난’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철학적으로 깊이있게 신학적으로도 정교하게 잘 조명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기는 많은 것을 가르쳐주지만 그 중에서 세 가지 주제를 선택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욥기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지혜자들의 견해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죄의 증거라는 정통 교리를 가지고 변론함으로 욥의 고난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보여줍니다. 동시에 인간이 겪는 고통의 신비를 통찰하는 인간지혜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교리적 틀에 입각해 하나님을 그 교리에 자동적이고 반사적으로 반응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지식을 전하는 것을 고발하며 인간지혜의 왜소함을 드러냅니다.

둘째, 고난에 대한 통찰을 보여줍니다. 욥도 처음에는 고난에 대해 당시의 정통교리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친구들의 변론에 동의하지 않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공정한 재판을 받기 원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피고인 자리에 앉히고 자신의 의로움으로 하나님의 공의여부를 따지고자 합니다. 독자들은 욥의 고통, 슬픔, 분노, 혼돈, 무죄의 주장 등 그의 모든 말과 행동에 공감하면서도 하나님을 올바로 대변하지 못하는 욥의 한계 또한 보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욥은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정의를 심판할 만큼의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산 것은 창조주에 대한 당연한 도리이며 반응이지 상급을 주장할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 욥기는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임을 가르쳐줍니다.

또한 욥기는 고난은 많은 목적을 이룬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고난은 성도를 단련하여 순금같이 만드는 중요한 과정입니다(욥 23:10). 고난의 신학은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부르시는 부름입니다. 또한 사탄은 하나님의 혜택을 받지 않고도 하나님께 충성과 사랑을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던지며,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부산물을 탐내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의를 추구하며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단의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알려주기 위해 욥에게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악을 반박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도구로, 성도에게 주시는 특권이기도 합니다. 정통교리와 다르게 의인도 고난을 받는다는 것, 외적인 축복 없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욥의 위대함입니다.

셋째, 욥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가르쳐줍니다. 욥기는 욥이라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무고한 자가 고통을 당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주시지 않습니다. 단지 창조주의 능력과 목적을 알려주고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십니다. 그분의 정의를 의심하지 않고 그분은 항상 정의로우심을 신뢰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고난이 있다면 욥기를 읽으며 하나님을 깊게 만나시고 그 분을 더욱 신뢰하며 힘을 얻으시는 시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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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

 

구약의 다른 책들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목소리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중심에는 여전히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기에 시편 전체의 장르가 시이면서 악보 없는 찬송가라고 하기도하고, 기도라고도 불리며 유대교와 기독교의 예배와 찬양에 독보적인 책으로 자리잡아 왔습니다.

시편은 히브리어로 ‘테힐림’이고 ‘찬송’이라는 뜻이며, 헬라어로는 ‘현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이라는 뜻의 ‘프살모이’ 즉, ‘찬미가’라고 하여 오늘날 시편의 영어이름(Psalm)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우리성경은 ‘시모음집’이라는 뜻으로 ‘시편’이라 지었습니다. 시편은 절반 가량을 다윗이 차지하고 있어 때로 ‘다윗의 시편’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시편이 다윗에 의해 쓰여진 것만은 아닙니다. 다윗의 시 73개, 모세의 시 1개(90), 솔로몬의 시 2개(72, 127), 고라의 자손들의 시 10개(42, 44-49, 84-85, 87), 아삽의 시 12개(50, 73-83), 헤만의 시 1개(88), 에단의 시 1개로(89), 모세의 시부터 포로기간을 배경으로 하는 시까지 1,000년이상 오랜 세월을 거쳐 쓰여진 시들을 다양하게 수록하고 있습니다. 50개의 시는 저자에 대한 언급이 없어 ‘고아시편들’로 불리기도 합니다.

시편은 크게 다섯권으로 나뉘는데, 1권은 1-41편, 2권은 42-72편, 3권은 73-89편, 4권은 90-106편, 5권은 107-150편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토라가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반영한 것이며, 시편도 토라와 같은 권위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각 권의 마지막 시편은 각 권 전체의 내용을 대표하면서 다음 권으로 이어주는 ‘봉합시편’ 역할을 합니다. 시편 1-2편은 표제어 없이 시편 전체의 서론 역할을 합니다. 마지막 5권에는 소위 말하는 ‘순례의 시’와 ‘할렐루야 시’가 있습니다. 120-134편에 해당하는 순례의 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며 부른 노래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내용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염원하며 메시아가 오실 것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부른 노래입니다. 할렐루야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라는 뜻으로, 146-150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을 맺는 것으로 유명하며 시편 전체의 피날레로서 결말을 웅장하게 마칩니다.

시편의 유형은 크게 찬양시, 탄식시, 감사의 시, 지혜의 시 이렇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찬양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공동체를 초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통치를 찬양하고, 그분의 창조세계의 주권을 찬양하며 시온에 거하심을 찬양합니다. 탄식시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부르짖으며, 개인과 국가의 위기 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간구합니다. 그리고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경배로 마칩니다. 감사의 시는 보살핌과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주심에 대해, 탄원이 응답 받았을 때에 대해 감사의 화답을 드립니다. 지혜의 시는 지혜 문학적 관심들 즉, 악인의 번영과 같은 이슈에 대해 고민하고, 삶의 성공을 추구하고, 의로운 자와 악한 자가 대비되는 등의 문제로 씨름하는,교육적 의도를 가지고 있는 시들입니다.

많은 시편들이 표제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의 시’나 ‘고라자손의 시’처럼 관련되어 있는 개인이나 집단을 명시하기도 하고,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갈 때 부른 노래’처럼 그 시에 관계된 역사적 사건들의 배경을 주기도 합니다. 때론 시의 양식으로 ‘지휘자를 따라 현악기에 맞춰 부른노래’처럼 음악반주에 대한 지침도 나옵니다. 그러나 어떤 전문 용어들은 오늘날 그 뜻을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믹담’은 ‘속죄’의 의미일 가능성이 있고, ‘마스길’은 ‘교훈을 위하여’라는 의미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시의 중간중간에 나오는 ‘셀라’라는 단어는 시편에서 71번이나 사용되는데, 그 의미에 대해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습니다. ‘항상, 영원히’ 또는 ‘고양시키다’라는 뜻으로 보기도 하고, 소리를 크게 하라는 악상기호로 보기도 하고, 찬미를 위해 엎드리라는 예배시의 지시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로 음악에서의 ‘일시멈춤’이라는 의미로 보고 막간을 이용하여 현악기를 간주하거나 묵상을 위한 멈춤의 시간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입니다.

시편에는 구약의 모든 신학적 생각들이 집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메시아가 오셔서 통치하실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 차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다윗이 부각되어 있는 것입니다. 시편은 장례식에서도 어울리고, 결혼식에서도 어울리며, 슬플때, 기쁠때, 억울할 때, 감사할 때, 도움이 필요할 때, 두려울 때 등 상황에 관계없이 우리의 기도와 찬양과 예배에 항상 위로와 힘을 주는 책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구약을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는 분은 시편부터 시작하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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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언 ************

 

잠언은 우리에게 지혜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지혜서입니다. 삶과 믿음 사이의 갈등 속에서 상식과 믿음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신랄한 문구와 실용적인 아이디어로 우리를 새로운 수준의 의식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합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검증된 진리만을 기록했다 것이 잠언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어떤 학자는 잠언을 ‘압축된 삶의 경험’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문학은 한꺼번에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묵상을 통해 한구절 한구절 서서히 음미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잠언 1장 1절에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는 말씀에서 ‘솔로몬의 잠언’ 또는 ‘잠언’이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잠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마샬’은 ‘비교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지혜와 어리석음, 의인과 악인, 생명과 죽음 등 대조적인 것들을 비교함으로써 진리를 전달합니다. 반면 우리말에서 ‘잠’이라는 한자어는 병을 고치는데 쓰는 ‘침’이라는 뜻과 ‘경계하다’라는 뜻으로, 잠언은 ‘침과 같이 톡 쏘는 가르침’이며 살아가는데 경계가 되는 금언, 격언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잠언은 저자에 따라 7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첫부분인 1-9장은 ‘솔로몬의 잠언’입니다. 두번째 부분은 10장부터 22장 16절까지로, 다시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저자를 밝힙니다. 세번째 부분은 22장 17절부터 24장까지로, ‘지혜있는 자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네번째 부분은 25장부터 29장까지로, ‘솔로몬이 쓴 것이지만 유다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라’고 밝힙니다. 솔로몬 왕과 히스기야 시대가 200년 이상 차이가 나므로 잠언이 오랜 기간에 걸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섯번째 부분인 30장은 ‘아굴의 잠언,’ 여섯번째 부분인 31장은 ‘르무엘 왕의 말씀’인데,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아굴과 르무엘이 솔로몬의 별명이라고 여겨 잠언 거의 전체를 솔로몬이 쓴 것으로 간주하기도 하는데, 확실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일곱번째 부분은 31장 10-31절까지로, 익명의 ‘현숙한 여인’이 나옵니다. 잠언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이 여인은 지혜가 의인화 된 것인데, 그녀는 지혜의 원리에 따라 살며 ‘여호와를 경외함’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완벽하게 조화로운 삶을 사는 모범이 됩니다. 솔로몬이 열왕기상에서 말한 3,000개의 잠언 중 300-400개가 구약 잠언에 수록되었으므로, 잠언에서 그의 공이 가장 큰 것만은 확실합니다(왕상 4:32). 이렇게 솔로몬을 주요 저자로 선택한 것은 그가 상식과 하나님이 주신 어마어마한 지혜와 하나님의 말씀까지 가진 이상적인 인물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1장 2-7절에 잠언의 목적이 7가지로 잘 나와 있습니다. 지혜와 훈계를 알게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정의와 정직을 행하도록 훈계를 주며,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하며, 젊은이들에게 지식과 분별력을 갖게 하며, 지혜있는 자에게는 학식과 명철과 지략을 더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는 7절은 잠언의 핵심구절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이 잠언의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잠언은 삶의 기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규정된다고 가르칩니다. 그 바탕 위에서 도덕적인 이해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이 세상을 잘 살기 위한 지혜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기 위한 지혜를 가르쳐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삶의 세세한 이슈들을 토라의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다루어져 있습니다.

실제로 잠언은 다양한 삶의 이슈들을 다룹니다. 악한 무리와 어울리는 것의 대가, 훈계와 보상,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미련한자의 말로, 훌륭한 인격의 가치, 위선적 믿음, 무절제의 위험, 사업윤리, 이웃과의 관계, 결혼관계, 음탕함, 거짓과 속임, 교만함의 위험, 나태와 게으름, 말을 조심하는 것, 불의한 저울, 보증을 서는 문제, 수다, 다툼, 오만, 험담, 명예훼손, 미움, 비방, 사기, 시기, 술취함, 뇌물, 자족함, 식탐, 분노, 실패, 가난, 부유함, 관대함, 검소, 인내 등 광범위한 주제들을 다룹니다. 어떤 학자의 말대로 잠언은 ‘영원을 살수 있는 건강한 인격으로 준비시키고 성장시키는 책’입니다. 그러기에 아비의 훈계, 어미의 훈계라는 수식이 나오며 가정에서 아이들과 함께, 특히 청소년과 함께 읽으며 인격을 성장시키기에 좋은 책으로 추천합니다.

다만 잠언을 읽을 때 이것은 지혜로운 안내서이지 율법과 같은 절대적 명령의 선포는 아니라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잠언이라는 쟝르를 잘 이해하고 읽어야 잘 못 적용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10:4)라는 말씀은 일반적인 삶의 원리를 이야기한 것이지 절대적이고 예언적인 선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지런해도 여러 다른 요인들 때문에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지혜의 말씀이지만 지혜롭게 읽지 않으면 오히려 지혜롭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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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도서 ************

 

일단 전도서라고 하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씀이 떠오르는데, 이 말로 시작해서 이 말로 마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1:2; 12:8). 실용적인 지혜의 말씀인 잠언을 읽다가 전도서를 읽게 되면 혼란이 옵니다. 하지만 이것이 성경을 읽는 재미라 볼 수 있습니다. 두 권의 책이 삶의 전반의 균형을 잡아주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잠언만 읽으면 안되고 전도서도 함께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서의 히브리어 제목은 ‘코헬렛’인데, ‘설교자 또는 회중 앞에서 말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말 성경은 코헬렛을 ‘전도자’로 번역했던 교회전통에 따라 ‘전도서’로 제목이 남게 되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전도자’ 대신 ‘설교자’라는 말을 씁니다.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고 하며 시작됩니다. 전통적으로 전도자는 솔로몬이며, 재위기간 말년에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책에는 실제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마틴루터는 전도자가 솔로몬이 아니며, 후대사람이 헛된 것을 쫓다 죽은 솔로몬을 생각하며 전도자를 솔로몬으로 이해하도록 만들었다고 봅니다. 또한 많은 학자들이 후대의 사람들이 무명작가가 쓴 이 책에 권위를 더하기 위해 지혜의 대표격인 솔로몬을 내세웠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전도자가 실제 솔로몬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지만, 전도서의 저자는 전도자가 솔로몬으로 이해되도록, 솔로몬이 연상되도록 썼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럼 전도서의 저자는 누구일까요? 1장 12절부터 12장 7절에서 전도자는 자신을 ‘나 전도자는, 내가’ 등의 1인칭으로 지칭합니다. 그러나 책의 서론과 결론을 이루는 나머지 부분에서는 또 다른 익명의 지혜 선생이 ‘전도자가 이르되’와 같이 3인칭으로 전도자를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전도서에는 전도자의 말과 이 익명의 지혜선생의 말이 공존합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전도서를 읽으며 전도자의 인생철학을 논평하도록 인도받습니다. 즉, 전도서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전도자의 메시지와 익명의 지혜선생의 메시지를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익명의 지혜선생의 메시지가 전도서 본문의 앞뒤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프레임을 이룬다고 하여, 학자들은 그를 ‘프레임 서술자’라고 부릅니다.

먼저 전도자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삶은 ‘헛되다’입니다. ‘헛되다’는 말을 마흔번 넘게 사용하여 어떤 학자의 표현처럼 ‘헛된 인생 예찬론’을 펼칩니다. 이것이 그가 ‘해아래 모든 것’을 인간지혜와 세상의 관점을 가지고 관찰한 결과입니다. 삶의 모든 업적이 헛되다고 지적합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아 지혜도 헛되고(1:13-18; 2:12-17), 일에서는 가진 재주로 이웃의 시기를 받으니 일도 헛되고(2:18-23; 4:4-6), 쾌락을 누려보았으나 그것도 헛되고(2:1-2), 부자는 부요함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니 부를 누리는 것도 헛되고(2:3-11; 5:10-6:9), 권력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으나 그것도 헛되며, 그 외 재물을 모으는 것, 장수하는 것, 유한한 생명 등 헛됨을 말합니다. 그는 때를 분별할 수 없는 수고도 헛되고, 죄악과 불의 등으로 인해 삶이 무의미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면 이 헛된 세상에서 어떻게 살라는 말씀입니까? 전도자는 완전히 비관론자는 아닙니다. 여섯 번에 걸쳐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 또한 알았다’고 하며, 삶에서 소소한 것을 즐기고 노동으로 수고한 것을 누리는 것이 소중하다는 인생철학을 논합니다(2:24-26; 3:12-14, 22; 5:18-20; 8:15; 9:7-9). 여기에 동의하시는지요?

마지막 부분에 진짜 전도서를 쓴 익명의 저자의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그는 한계가 있는 인간 지혜로 인생을 보면 전도자의 말이 맞다고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지적합니다. 해 아래에만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해 위의 것을 찾아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이 12장 8-14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저자는 인간의 본분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리가 없다면 전도자 말대로 우리의 삶은 헛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지혜로 인생을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헛됨을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인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서! 21세기라는 불확실한 시대에 가장 21세기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매력적인 책입니다. 인생? 진짜 헛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전도서를 묵상하신 후에 여러분을 끝장토론으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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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 ************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아가서 1장 2절 말씀입니다. 어머나 망측스러워라!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어린 사슴 같구나.” 은혜가 다 날아가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아가서 4장 5절 말씀입니다. 이렇듯 아가서는 노골적인 성적 묘사, 도발적이고 생생한 이미지의 사용, 관능적이고 육체적 친밀함의 묘사, 열정적인 감정의 표현 등으로 많은 사람들을 당황시킨 책입니다. 유대인들의 경우 30세 이전에는 아가서를 읽지 못하도록 하기까지 합니다. 뿐만 아니라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같구나”(7:4)와 같은 아가서의 표현은 그만큼 예쁘다는 말인지 튼튼하게 생겼다는 말인지 우리와는 미적 감각이 달라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해석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포함되어야 하는지의 여부까지 구약 성경에서 아가서만큼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책도 없습니다.

“솔로몬의 아가라”라는 1장 1절 말씀부터 해석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솔로몬의’ 라는 부분을 ‘솔로몬에 의한, 솔로몬에게, 솔로몬을 위한, 솔로몬에 관한’ 등으로 다양하게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썼다는 것인지, 솔로몬에게 헌정한 것인지, 솔로몬을 주인공으로 하여 지어졌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아가서는 솔로몬이 지은 천 다섯 편의 노래 중 하나로, 젊은 시절에 지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솔로몬의 실제 사랑 이야기인지조차 확실치 않습니다.

아가서의 히브리어 제목은 ‘노래 중의 노래’라는 뜻으로 ‘가장 위대한 노래’라는 최상급 표현을 썼으며, 우리말 성경은 ‘아름다운 노래’라는 의미로 아가서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아가서에 관한 해석은 그 역사가 깁니다. 가장 인기 있는 해석은 초기 유대 학자들이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본 것입니다. 알레고리라는 문학적 형태는 표면적 의미 뒤에 숨겨진 영적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유월절에 아가서를 읽었습니다. 유월절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의 역사를 기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아가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새롭게 경험하게 하는, 일종의 충격 요법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동일한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그리스도와 교회를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해석은 19세기까지 가장 인기가 있었습니다. 반면 모형론적인 해석은 구약의 결혼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형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개신교인들에게 가장 편안한 해석일 것입니다. 아가서를 합창단이 동반되는 고대 드라마의 연극 대본으로 보고, 왕이 젊은 여인을 유혹하지만 여자는 고향의 목동을 사랑한다는 삼각관계의 이야기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주인공이 3명이 되어 해석이 더 복잡해집니다. 어떤 학자는 아가서를 장례식에서 사용된 노래로 보기도 하는데, 삶과 사랑이라는 가장 강력한 힘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내용입니다. 대조적으로 아가서가 여러 편의 혼례 시를 모은 결혼 시집으로써 결혼식에서 사용되었다는 이론도 있습니다. 이와 연관하여 솔로몬이 이집트 바로의 딸과 결혼할 때 쓴 노래가 아가서였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가서를 ‘신혼부부의 책, 신혼여행의 노래’로 부르기도 합니다. 또한 바벨론의 농경신을 숭배하는 의식 같은 제의에 아가서가 쓰였다는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은근한 비유를 사용한 성교육적 책으로 보기도 합니다. 최근에 많은 학자들은 아가서를 남녀간의 자연스러운 사랑의 이야기로 보고,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결혼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이 강조된 연애 시로 보면서 책의 교훈을 받아들이는데, 이 해석이 대세입니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아가서를 이해하고자 다양한 접근을 통해 노력해왔으나 아직도 많은 의문점이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학자들간에 아가서에 대한 논의는 진행중입니다.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아가서를 단순히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가서를 지혜 문학서의 장르로 보고, 그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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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

 

헨델의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아 공연을 보면 이사야를 많이 인용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 제 1부 예언과 탄생에서 나오는 합창곡 ‘우리를 위해 한 아기 나셨다’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라는 이사야 9장 6절 말씀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책 또한 이사야입니다. 이사야는 분량이 많아 대 선지서로 불리며 양만큼 신학적 깊이가 있는 예언서로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이사야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이사야서 전체의 주제인 동시에 예언서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름에 담긴 의미처럼 이사야는 국제정세가 어지러운 때에 다른 나라에 의존하지 말고 구원의 능력이신 여호와만을 믿고 의지하도록 촉구합니다. 이사야는 주전 8세기 후반의 선지자로 유다의 웃시야 왕이 사망한 해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 그 이후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왕 시대에 걸쳐 활동합니다. 이때는 신앗수르 제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그들의 팽창정책으로 서서히 침략의 기운이 맴돌던 때입니다.

이사야를 읽다 보면 40장부터 문체, 분위기, 신학적 관점, 메시지가 확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1-39장과 40-66장, 이렇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39장은 처음부터 이스라엘과 열방을 향한 심판과 비난의 메시지로 가득합니다. 40장 이후부터는 ‘위로하라, 위로하라’고 시작하며 용서와 구원,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야기합니다. 1-39의 시대배경은 앗수르입니다. 시리아의 르신왕과 이스라엘의 베가왕이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군을 형성하는데 남유다가 참여를 거절합니다. 이에 대해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이 동맹군을 형성하여 남유다를 치고 자신들이 원하는 새 임금을 세우려 하는데, 이것을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라고 부릅니다(734-732 B.C). 이사야는 당시 아하스왕(735-715 B.C.)에게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앗수르와 동맹을 맺지 말 것을 충고하나, 믿음이 없는 아하스는 결국 앗수르의 디글랏벨레셀 3세(745-727 B.C.)에게 도움을 청하여 앗수르의 속국이 되고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게 됩니다(왕하 16:10-18 참고).

이사야 36-39장은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왕(715-686 B.C.)때의 사건을 다룹니다. 히스기야 왕이 반-앗수르 정책을 폈기 때문에 이번에는 앗수르왕 산헤립이 유다왕국을 침공합니다(701 B.C.). 아하스왕과는 대조적으로 믿음의 사람인 히스기야는 기도로 부르짖으며 여호와를 의지함으로 산헤립을 물리치고 앗수르로부터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게 됩니다. 이 일이 있기 전 히스기야의 치명적 병이 기도로 기적적으로 치유되고 생명이 연장되면서 당시 신생 도시국가였던 바벨론왕 므로닥발라단(721-710 B.C.)이 회복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보내는데, 히스기야는 이들에게 국가의 보고를 다 보여주는 어리석은 행보를 합니다. 이에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이 히스기야의 후손을 침략할 것을 예언합니다. 이 사건을 전환점으로 40장 이후부터는 바벨론 왕국을 배경으로 바벨론 포로생활과 미래의 구원과 해방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왕국의 건설의 메시지를 전하며 새하늘과 새땅의 종말론적 새로운 미래를 예언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특별한 종을 사용하시리라는 ‘종의노래’가 유명한데(42:1-7; 49:1-9; 50:4-11; 52:13-53:12), 이 종은 오실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특히 종의 노래에 나오는 이사야 52-53장에는 성만찬때 자주 인용하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 .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5-6)라는 유명한 말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사야는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The Holy one of Israel)라고 20번이상 칭하며, 당시의 죄악 된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와의 거룩한 속성을 잘 대조시킵니다. ‘만군의 여호와’도 40번이상 사용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여호와를 지칭하는 또 다른 표현인 ‘구속자’라는 말은 13번 쓰였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주권적 은혜를 강조합니다(41:14; 43:14; 44:6, 24; 47:4; 48:17; 49:7, 26; 54:5, 8; 59:20; 60:16; 63:16).

이사야가 궁중에서 왕과 귀족계층들에게 사역을 했다면 동시대에 미가 선지자는 일반 서민들에게 사역을 했습니다. 8세기때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다른 선지자들은 아모스와 호세아가 있습니다. 2세기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사야는 히스기야 다음 왕인 므낫세왕에 의해 톱으로 반쪽으로 잘려서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전체가 66장인 이사야는 처음 39장과 뒷부분인 27장으로 나뉘는데, 신구약 성경 66권중 구약이 39권이고 신약 27권인 것과 숫자가 같아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더불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 앗수르, 바벨론, 바사왕국에 대한 예언, 동정녀 탄생, 임마누엘, 대속적 죽음과 같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어떤 구약책보다도 방대하고 심오한 신학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신학의 깊은 연못에 잠겨 많은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이사야 1~39장 개요 Isaiah 1-39 - YouTube

◇ 바이블 프로젝트 이사야 40~66장 개요 Isaiah 40-66 - YouTube

 

************ 예레미야 ************

 

예레미야는 유다가 멸망으로 치닫는 어두운 시대에 전달하고 싶지 않은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비운의 선지자였습니다. 바로 ‘나라가 멸망할 것이니 침략하는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악된 유다를 심판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포로생활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갈등했고,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와 갈등했고, 자기 민족인 유다백성들과 갈등했습니다. 그리고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며 눈물이 마르지 않았기에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렘 9:1).

이사야가 8세기 선지자라면 예레미야는 7세기와 6세기 중반까지 활동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요시야왕 13년인 주전 627년부터 예루살렘이 망해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586년까지 40년 이상 사역을 합니다. 요시야왕은 훌륭했던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8세에 왕이 되어 31년간 국가를 통치하며 영적개혁을 단행합니다.

당시 국제무대에서는 나보폴라살이 626년에 신 바벨론 제국을 건설하여 앗수르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 612년 수도인 니느웨의 멸망으로 앗수르가 완전히 기울어지면서, 신 바벨론 제국이 패권을 쥐게 됩니다. 바벨론 세력의 확장에 위협을 느낀 이집트의 바로왕 느고 2세는 바벨론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주전 609년에 갈그미스 전투를 하러 북진하게 됩니다. 이때 반-앗수르적 입장이었던 유다의 요시야왕이 이집트 군대가 지나가는 길을 막고 므깃도에서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고 맙니다. 이때부터 유다도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요시야왕의 아들 여호아하스는 이집트로 끌려가 죽고(왕하 23:31-34; 렘 22:10-12), 이집트는 요시야왕의 또 다른 아들인 엘리아김을 왕위에 앉힌 뒤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꿉니다.

주전 605년에 갈그미스에서 이집트와 바벨론이 또 다른 접전을 치르는데, 이집트가 패하고 바벨론이 유다까지 침공하게 됩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의 성전 기구 얼마와 소수의 왕족과 귀족을 데리고 갑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도 이때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단 1:1-6). 여호야김의 아들인 여호야긴이 왕이 되었을 때, 바벨론은 주전 597년에 다시 예루살렘을 2차로 침공합니다. 느브갓네살은 성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의 보물, 왕과 그의 어머니를 비롯해 예루살렘의 백성과 지도자, 용사 만 명, 장인과 대장장이 등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포로로 끌고갑니다(왕하 24). 이때 선지자 에스겔도 함께 끌려가게 됩니다.

이후 여호야긴의 숙부 시드기야를 왕으로 앉히지만 그도 예레미야의 권고를 무시하고 친 애굽 정책을 펴다가 느부갓네살의 3차 침공을 받게 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 성전은 훼파되고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혀 포로로 잡혀가고 유다라는 나라는 망하게 됩니다. 이때가 586년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조선 말기처럼 우울하고 불운한 때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누구도 듣지 않는 메시지를 계속 전해야 했습니다. 이렇듯 예레미야는 열방속에서 일하시는 여호와, 역사의 주인이신 여호와를 잘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상징행동으로도 유명합니다. 상징행동이란, 상징적 행동을 통해 메시지를 더 드라마틱하고 인상적으로 전하는 방법입니다. 구약에는 약 30여개의 상징행동이 나오는데, 그 중 절반가량이 예레미야에 나오므로 그는 액션예언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허리띠를 통한 상징행동(13장), 자신의 삶을 통한 상징행동(16장), 깨진 항아리를 통한 상징행동(19장), 멍에를 통한 상징행동(27-28장), 경작지 매입을 통한 상징행동(32장), 큰 돌을 통한 상징행동(51장), 책에 돌을 메어 유브라데강에 던져버리는 상징행동 등이 있습니다. 토기장이 비유를 통한 상징행동은 유명한데(18장),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계심을 가르쳐 줍니다. 또한 예레미야는 결혼하는 것, 자녀를 갖는 것, 조문가는 것,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 당하는 삶으로 보여주는 상징행동을 통해 심판의 긴급성을 전합니다.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도록 요구 받은 선지자 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다 우울한 것만은 아닙니다. 다른 예언서에서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도 주십니다. 그들이 70년이 지나면 포로생활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합니다. 또한 ‘새언약’의 메시지는 구약신학에 기여한 바가 가장 뛰어난 메시지 입니다. 옛 언약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지만, 새언약은 옛 언약을 대체하는 개념으로,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질 것이며 하나님께서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실 언약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는 본인의 피와 살, 즉 십자가의 죽음으로 새언약을 수립하십니다(눅 22:20; 고전 11:25). 이제는 율법이 아닌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1장 10절에서 여호와께서는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는’ 메시지를 전하는 자로서 예레미야를 부르십니다. 이 모든 것을 삶으로, 메시지로 감수해낸 그는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대변자입니다. 이제부터 예레미야서와의 긴 여행을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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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애가 ************

 

예레미야 애가의 히브리어 제목은 ‘애카’로, 우리말로는 ‘슬프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1장, 2장, 4장이 시작되는 첫 단어이자 장례곡의 첫마디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애도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애가는 슬픈 노래라는 의미입니다. 제목자체가 ‘예레미야 애가’로 되어 있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예레미야가 저자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을 실제로 목격한 익명의 저자가 썼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많이 있습니다.

애가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며,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고, 여호와의 성전이 훼파된 것을 애도하여 지은 시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학에도 ‘성을 위한 애가’가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탄식시들은 고대의 종교적, 문학적인 전통이기도 합니다. 또한 애가는 개인과 국가 차원에서 나라 잃은 슬픔을 발산하고 실망, 분노, 죄책감, 애통, 절규 등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얻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한 왜 이러한 신의 버림이 있었는지 되짚어 보며 공동체가 함께 통회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야만 미래의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애가는 바벨론 포로생활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최대한 슬픈 감정을 실어 시로서 표현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만큼 예술적이며 문학적인 구성과 기교면에서 뛰어난 책은 없습니다. 모두 다섯 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어,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다섯 권으로 된 토라를 상기시키기 때문에 ‘고통의 토라’라고도 불립니다. 각 장이 동일하게 22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22는 의도적인 숫자입니다. 이는 히브리어 알파벳이 모두 22자이기 때문이며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완전한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3장은 66절로서, 22절의 3배입니다. 자연스럽게 3장이 책의 문학적, 신학적 중심 역할을 하며 저자가 3장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애가는 하나님의 진노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경고를 경고로만 끝내지 않고 실제로 행하신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바벨론이 160번 이상 언급되지만 애가에서는 바벨론이 일체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는 유다가 망한 것이 바벨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죄 때문임을 지적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임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에 있어서도 신실하십니다.

그러나 애가는 심판의 메시지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자는 3장에서 회개하면 회복시켜 주실 것에 대한 희망을 표현합니다. 자기백성을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에 믿음을 표현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 . .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 . . ”(3:22-24)는 애가에서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장을 3배 분량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그들의 슬픔은 말로 다 할 수 없으나 그들이 여호와로 인하여 가져야 하는 희망은 슬픔의 3배, 즉 측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슬픔보다는 희망이 훨씬 크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력으로 아브월 9일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파괴를 애도하는 절기를 지내는데, 그때 금식하며 애가를 읽습니다. 아브월은 현대력으로 7-8월에 해당됩니다. 또한 어떤 유대인들은 매주 금요일마다 애가를 읽기도 합니다. 그들은 애가를 읽으며 자신의 죄를 되돌아 보았을 것입니다. 동시에 회개하면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신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고 돌아보신다는 희망을 가지고, 미래의 영광스러운 회복을 꿈 꾸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또한 애가를 읽으며 각자의 죄, 우리나라의 죄를 돌아보며 회개와 통회의 시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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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겔 ************

 

에스겔과 다니엘은 포로로 끌려가 예언을 했던 자들입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은 유다를 3번에 걸쳐 침공하는데, 1차 침공인 주전 605년에 다니엘이 끌려갔고, 2차 침공인 주전 597년에 유다왕 여호야긴과 권세 있는 자들과 지도자들과 용사 만명을 끌고 갈 때 함께 끌려간 자가 에스겔입니다(왕하 24:10-17). 이때는 아직 3차 침공이 일어나지 않은 때이며, 에스겔은 11년 후에 포로지에서 고국의 멸망소식을 듣게 됩니다. 서른 살이었던 그는 주전 593년 즉, 여호야긴왕이 잡혀간지 5년째 되는 해에 포로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제사장이었던 그가 예언자가 됩니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는 의미인데, 유다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에 포로로 끌려가 있는 유대인들과 함께 거하며 그들을 격려하고 강하게 한 그의 사역에 잘 맞는 이름입니다.

에스겔서는 유일하게 책 전체가 1인칭으로 기록된 예언서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개인적인 관점을 들어볼 수 있다는 독특한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에스겔서는 연대기록이 아주 정확한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3번에 걸쳐 정확한 날짜와 달, 연대를 기록하고 있으며, 주전 593년에 첫 말씀을 선포하고, 570년에 마지막 예언을 기록합니다(29:17).

에스겔서는 예루살렘이 586년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망한 소식을 기점으로, 메시지가 달라집니다. 예루살렘이 망하기 전에 에스겔은 유다의 불순종을 지적하고 예루살렘에 임한 심판의 경고를 주며 회개와 믿음을 촉구합니다. 평화와 축복을 외치는 거짓 선지자들을 따르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1-24장). 그러나 예루살렘이 망한 후에 그는 희망의 예언자로 변신합니다. 백성들을 위로하며 평화와 축복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미래의 구원의 회복과 영광을 말합니다(33-48장).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뼈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될 것을 예언합니다. 또 다른 환상을 통해 새로운 성전과 예루살렘 성읍의 회복을 보여줍니다. 그 성읍의 이름은 ‘주님께서 거기 계시다’는 뜻의 ‘여호와 삼마’로 부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라는 표현이 60번이상 나옵니다. 여호와는 구원이든 심판이든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행하시는 분이며, 언약을 지키는 분이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90번이상 ‘인자’로 부르십니다. 이것은 그가 아무리 많은 환상을 볼지라도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한 인간이며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 한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에스겔은 구약 묵시문학에 큰 공헌을 합니다. 신비한 환상적 체험, 영에 이끌린 여행들 (8:1-4; 40:1-4),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고 돌아오는 장면들(8-11장; 43장), 종말론적 주제와 조화를 이룬 독특한 상징들, 해석과 예언이 곁들여진 역사의 상징적 되풀이(17:3-24)등 후기 유대 묵시 문학의 길을 닦은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다양한 문학양식, 장르, 표현기법을 통해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합니다. 포도나무(15장), 독수리들(17장), 암사자들(19장), 오홀라와 오홀리바(23장), 가마솥등 수많은 알레고리를 사용합니다. 또한 아내가 죽었으나 애곡하지 않거나, 390일은 왼쪽으로 눕고 40일은 오른쪽으로 눕거나, 머리를 삭도로 밀어 저울에 달아 나누어 놓거나, 행장을 메고 어두운데 벽을 뚫고 나가는 등 온갖 상징적 행동을 통해 드라마처럼 생생하게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런 기이한 행동들과 그가 본 예언적 환상들로 인해 에스겔을 비현실적이고 정신분열증이 있는 선지자로 취급하고, 그를 심리적으로 분석한 학자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광대와 같은 역할을 서슴없이 합니다. 그리고 마치 충격요법을 사용해 죽을 병에 걸린 환자에게 해독제를 주는 것처럼 자신의 독특한 삶과 행동을 통해 마음이 굳은 유다민족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에스겔의 최선은 하나님의 최선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그는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장례애도가, 역사와 신학이야기, 소송형식의 신탁, 잠언, 비전, 우화, 인용, 맹세, 속담, 격언 등의 다양한 문학 형식을 동원합니다.

에스겔서는 신약에 직, 간접적으로 60회 이상 인용되며 대부분 계시록에서 발견됩니다. 그룹이 이끄는 전차를 타고 나타나신 하나님의 장엄한 환상으로 시작해서, 새마음과 새영을 주는 새언약의 약속을 비롯, 새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환상까지, 에스겔은 우리를 완전히 다른 영적 세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의 삶이 바닥을 치고 있다면 에스겔이 본 비전들을 생각하며 큰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 비전은 바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우리를 위한 비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에스겔 1~33장 개요 Ezekiel 1-33 - YouTube

◇ 바이블 프로젝트 에스겔 34~48장 개요 Ezekiel 34-48 - YouTube

 

************ 다니엘 ************

 

다니엘서는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제목을 붙였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을 반영하듯, 책은 종말론적인 심판의 메시지와 열방에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메시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귀족의 자제인 다니엘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침공한 주전 605년에 정치 인질로 바벨론에 끌려가게 됩니다. 그는 그때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환상을 봅니다. 바벨론이 망한 후에도 페르시아를 섬기며 페르시아 왕 고레스 3년에 다시 환상을 보게 됩니다. 이때가 주전 536년이므로 그는 거의 70여년 동안 이방 땅에서 두 나라와 여러 이방 왕들을 섬기며 높은 위치의 관직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은 에스겔과 동시대인인데, 에스겔서에서도 여러 번 다니엘의 이름이 언급됩니다(겔 14:14, 20; 28:3).

다니엘서는 예언적 묵시 문학에 속합니다. 묵시는 ‘계시’ 또는 ‘감추었던 것을 드러내는 것’을 뜻하며 헬라어로는 ‘아포칼립시스’입니다. 묵시는 주로 하나님의 계획과 신비를 계시하는 문학이며, 인류 역사의 종말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또한 상징적 용어와 숫자를 동원하며 초현실적 이미지, 미래의 환상을 많이 사용하는 문학적 장르이기 때문에 때론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다니엘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한데, 많은 보수 학자들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다니엘서의 예언을 인용하시며 그것을 다니엘이 말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다니엘을 저자로 봅니다(마 24:15).

다니엘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6장은 다니엘이 경험한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하고, 7-12장은 다니엘이 본 환상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구조적 관점으로 관찰해 보자면, 전반부 1-5장과 후반부 6-12장이 주제에 있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장과 6장은 다니엘이 주변의 압박을 거부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사건을 다룹니다. 이런 면에서 다니엘은 포로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본이 됩니다. 타협할 것과 타협하지 말 것에 대한 좋은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줍니다. 2장과 7장은 4개의 제국을 다룹니다. 3장과 8장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을 중단시키는 왕들에 대해 다룹니다. 4장과 9장은 각각 7년의 형벌과 70이레의 형벌 계획에 대해 다룹니다. 5장과 10-12장은 각각 장차 임할 종말에 대해 다룹니다.

다니엘은 모든 열방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잘 보여줍니다. 다니엘 전반부에서는 역사적 서술을 통해 하나님이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어떻게 지켜주시는 지 보여줍니다. 그리고 포로기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처럼 행한다면 하나님이 동일하게 지켜주실 것이라는 위로를 줍니다. 반면 다니엘 후반부의 환상들은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칩니다. 메시아의 지도하에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도래하기 전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방의 나라들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처럼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구원하고 형통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방 제국들의 흥망성쇠는 열방의 국가들은 임시적이고 제한적이나, 하나님 나라는 영원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줍니다. 마지막에는 악한 세력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다니엘의 묵시는 박해자들에게 멸망을 선언함으로써 고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신약에 계시록이 있다면 구약에는 다니엘이 있습니다. 두 책은 환상, 예언, 상징, 종말의 메시지를 다루기 때문에 신비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세상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마지막에 승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오늘도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악에게 지지 말고 승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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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세아 ************

 

구약에서 12권의 소선지서를 ‘12서’(The Twelve)라고 부르는데, 그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책이 바로 호세아서입니다. 선지자 호세아가 활동한 시기는 이스라엘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뉜지 200여년이 훌쩍 지난 때입니다. 호세아는 이사야보다는 조금 앞서서, 아모스보다는 조금 늦게 북이스라엘에서 사역하게 되며, 남유다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아왕 시대,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시대에 활동합니다. 이때가 주전 8세기인데, 30-40년 후면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치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국가영토 팽창정책으로 나라전체가 번영을 누리고 있었던 터라, 백성들은 심판이 머지 않았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왕하 14:25, 28), 그들의 사회도덕적 부패는 날로 극심해져 갔으며(호 4:2, 18; 6:8-9; 7:1), 영적으로는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점점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이러한 관계를 어떻게든 되돌리고자 애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택하셨는데, 바로 호세아의 불행한 결혼에서 불륜을 저지르고 다른 남자를 따라간 아내를 되찾아 오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도록 하신 것입니다. 메시지의 핵심은 자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호세아]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호 3:1)라고 명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간음한 아내를 되찾아 오며 느낀 아픔으로, 호세아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자기 아내에 대한 호세아의 애정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애정을 상징합니다. 역으로 호세아 아내의 간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간음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파기를 상징합니다.

호세아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3장은 호세아와 불륜녀 고멜과의 결혼생활에 빗대어 메시지를 전하며, 나머지 4-14장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죄와 심판의 메시지를 다룹니다. 호세아 1장은 호세아 전체에 대한 서론일 뿐 아니라 12권 소선지서 전체의 서론 역할을 합니다. 즉, 북이스라엘은 죄를 짓고 망할 것이지만 남유다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며, 언젠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어 약속의 땅에 거하게 될 것이라는 계획을 제시합니다. 또한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고 그들의 메시아-왕 다윗을 찾을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하는데, 이러한 종말론적 계획은 소선지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기도 합니다(호 3:5).

호세아 선지자는 “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있는 거품 같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마리아는 수도로서 여로보암 2세이후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기까지 6명의 왕 중 4명은 살해를 당하고 마지막 왕은 앗수르에 잡혀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그야말로 호세아는 폭풍전야에 경고의 사역을 한 것입니다.

그들의 죄의 핵심은 혼합종교입니다. 여호와만 섬기라는 십계명의 말씀과 타협하여 가나안의 다신들, 그 중에서도 엘과 아세라 여신 사이에 태어난 바알신을 숭배했습니다. 그가 비와 폭풍의 신이며 풍요와 생식력을 주는 재생산의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끊임없이 바알신과 매춘행위를 했으며, 술 취함(4:11, 18), 종교의식적인 성적 축제(4:13-14), 음행, 간음(4:17; 11:2), 산당 등의 용어들은 종교적 변절행위를 상징합니다.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호 4:12)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오지 않고 나무우상에게 묻는 모습을 보시고 자신을 버리고 음행 했다며 진노하십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을 37번에 걸쳐 에브라임으로 불렀는데 이것은 북쪽의 가장 지배적인 지파였던 에브라임에서 유래된 것이며, 벧엘은 우상숭배의 본거지로 자주 거론되며 북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용어로도 사용됩니다.

‘구원’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호세아는 의도적으로 과거 이집트에서의 구원의 이미지 속에서 미래에 오실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예언합니다. 메시아는 새로운 모세로서, 과거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한 것처럼 다시 미래에 이들을 포로생활에서 구원할 것입니다. 호세아는 그들의 죄를 통렬하게 비판하며, 심판을 알리고 회개를 촉구하지만, 마지막 장에서 여호와는 치유와 관계의 회복과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헌신적, 인내적 사랑’의 진수입니다. 그분은 우리모두에게도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초대하십니다. 호세아는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분별하라고 도전합니다. 즉, 소선지서의 12권은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만이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말씀들을 잘 깨닫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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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엘 ************

 

요엘은 ‘여호와[야웨]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아주 경건한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이름을 반영이라도 하듯, 요엘의 핵심 말씀은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알리라’(2:27; 3:17)입니다. 다른 소선지서들과 다르게 그가 활동했던 시대의 왕들의 이름이나 연대를 알 수 있는 정보를 주지 않아 9세기부터 2세기에 이르기까지 학자에 따라 요엘이 기록된 연대를 다양하게 제시해왔습니다. 요엘서가 호세아와 아모스 사이에 끼여 있으므로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그들과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성경 본문이 연대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면 그 자체를 존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요엘서는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엘서의 중요특징과 공헌한 점으로 4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강조입니다. 이것은 종말에 심판의 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책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1:15; 2:1, 11, 31; 3:14). 2장에서 여호와의 날에 공격이 있을 거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군대가 메뚜기 떼로 표현된 것인지, 메뚜기 떼가 군대로 표현된 것인지 묘하게 얽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메뚜기이든 실제 군대이든 이 모든 것을 진두 지휘하시는 분이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이것을 무찌를 자는 없습니다.

둘째, 1장에서 ‘메뚜기 재앙’을 사용하여 선명하고 설득력 있게 ‘여호와의 날’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1:4). 한 종류의 메뚜기 떼만 덮쳐도 남아나는 것이 없는데, 네 종류의 메뚜기 떼가 계속해서 덮쳐 그나마 남아있는 것을 먹어 치운다면 그야말로 초토화되고 말 것입니다. 고대 근동사회뿐 아니라 작가 펄벅의 「대지」라는 작품에도 나타나듯, 중국과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메뚜기 떼의 습격은 농작물에 치명적 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심판의 날을 메뚜기 재앙으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입니다. 특히 고대 근동에서는 이러한 재앙을 신의 노여움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어떻게든 여호와의 진노를 풀어드리기 위해서라도 요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셋째, 요엘서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에게 중요한 예언서입니다. 신약의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날 교회가 태동하던 때에 베드로사도가 전한 메시지에서 인용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요엘서입니다. 다락방에 모여있던 무리들에게 성령이 강림해서 그들이 각기 여러 나라의 방언을 말하매 당시 오순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무리들이 놀라 어찌된 일인지를 묻기 시작합니다. 이때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하며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오순절 사건이 요엘 예언의 성취임을 다음의 유명한 말씀으로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 .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2:28-32). 당시 베드로의 메시지로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은 자가 3천이나 됩니다. 사도바울도 로마서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며 구원의 보편성을 선포합니다(롬 10:13).

넷째,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백성들, 장로들, 어린이와 젖 먹는 자와 신랑 된 자와 신부 된 자를 모으고 그들과 함께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울고 회개하면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는 메시지로 호소하는데, 이 말씀이 요엘서의 터닝포인트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하면 메뚜기 떼의 피해를 보상해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회복과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회개의 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시는 이유는 그 분이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기 때문’이라고 요엘선지자는 알려줍니다(2:13). 우리에게도 언제나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시작되는 요엘서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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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모스 ************

 

오늘날 기독교가 당면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비 할 필요성, 예배의 문제와 잘못된 우선순위를 바로잡는 것, 사회약자를 무시하는 것, 거룩하지 않은 삶 등 많은 이슈들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주전 8세기의 선지자인 아모스가 당시 북이스라엘을 향해 부르짖었던 비판의 내용이 오늘날 우리사회에 비추어 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모스서는 우리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영적 현실을 조명해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책입니다.

아모스서는 12서 또는 소선지서 중에 세 번째 책이지만 ‘글을 남긴 선지자들’(Writing Prophets) 중에 연대로는 첫 번째에 속하며, 아모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호세아, 이사야, 미가 등의 유명한 다른 선지자들과 함께 8세기에 속한 선지자중 한 명입니다. 신문을 보면 현대의 정치상, 사회상을 들여다 볼 수 있듯, 8세기의 ‘하나님 일보(?)’인 선지서들을 읽어 보면 당시의 정치상, 사회상, 도덕상 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다 왕 웃시야(792-740 B.C.)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793-753 B.C.) 때입니다. 이 두 군주의 통치기간은 40년 이상이었으며 공존관계를 유지하며 상업활동을 했고, 각각 전쟁에서의 승리와 영토확장의 결과로 이전에 없던 경제적 부와 번영을 누린 황금기였습니다. 아모스서의 내용을 보아도 당시는 부와 물질주의가 팽배한 풍요로운 시기였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왕하 14:17-15:7)). 국제적으로는 이집트와 앗수르가 외적으로 큰 힘을 쓰지 못하고 있던 때라 외세의 위협이 별로 없어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였습니다.

아모스는 ‘지진 전 이년'에 메시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기록된 것은 이미 지진을 겪은 후였습니다. 미국의 9/11 테러(2001년)가 상당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우리에게 여전히 끔직한 기억으로 남아있듯, 아모스 시대의 지진도 모든 사람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아 당시의 큰 뉴스거리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심지어 200여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에 스가랴 선지자도 이 지진을 언급할 정도로 대단한 지진이었습니다(슥 14:15). 만약 이 지진이 야딘이라는 고고학자가 하솔성읍에서 발견한 지진의 흔적과 시대가 일치한다면 주전 760년경이 아모스의 사역시기에 속합니다. 아모스는 바로 이 지진을 겨냥해서 지진 이년 전 '땅이 떤다,' '하나님께서 땅을 만져 녹게하신다'(8:8; 9:5; 비교 6:11; 9:1)는 표현으로 지진을 심판의 경고로 예고합니다.

아모스는 '드고아의 목자'로 소개되는데, 드고아는 예루살렘에서는 남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입니다. 그는 남유다 사람이지만 북이스라엘에 파송받은 자비량-선교사-예언자이며, ‘사회정의를 외치는 하나님의 대변자’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5:7, 15, 24; 6:12). 이것을 반영하는 유명한 구절로, 그가 외친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가 있습니다(5:24). 그는 과감하게 북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상류층에 맞서 사회적, 도덕적 타락과 붕괴, 정치파탄과 영적인 배교를 지적하며 다가올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아모스가 당시 우상숭배의 본거지인 벧엘의 부패한 제사장이요 정치꾼인 아마샤에게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 . .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7:14-15)라고 말한 구절은 유명합니다. 이 말은 자신이 선지자 학교를 나온 전문 선지자도 아니고, 현대로 말하자면 신학교를 나오지도 않았고, 교단에 속하지도 않은 평신도이기 때문에 종교적 이해관계에 얽힌 기득권층이 아니어서 떳떳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만큼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타락도 대단했습니다. 아모스라는 이름은 ‘무거운 짐을 진 자’라는 뜻으로, 그는 이름을 반영하듯 혼자 북이스라엘에 대한 무거운 영적인 짐을 지고 고군분투했습니다. 유대전승에 따르면 아마샤 제사장 아들이 아모스를 막대기로 쳐서 죽였다고 알려져 있어, 박해를 당하다가 순교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모스는 문장과 문학적 기교가 뛰어나며, 책의 구성도 탁월합니다. 아모스의 마지막 부분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신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다윗 왕가에 대한 약속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메시아를 통해 구원과 회복을 이루어주실 것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며, 신약의 사도행전에서도 이 말씀이 인용됩니다(암 9:11-12; 생 15:16-17).

호세아가 하나님의 ‘사랑의 설교자’라면 아모스는 하나님의 ‘정의의 설교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인들은 결코 사회의 불의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는 것이 아모스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사회정의! 기독교인들이 책임져야 한다!’가 그의 구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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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바댜 ************

 

오바댜는 구약에서 가장 분량이 적은 책으로, 신약의 유다서와 비교될 수 있습니다. 유다서처럼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으며, 신약에서 한번도 인용이 안 될 정도로 신약 저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책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책이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과 구원을 가르치는데 강력한 메시지를 줍니다.

오바댜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종’ 또는 ‘여호와를 예배하는 자’입니다. 구약에서 12명 정도의 동일한 이름이 나오지만, 이 책을 쓴 저자가 누구였고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느 시대 사람이었는지는 책에서 밝히고 있지 않아 추측만 무성합니다.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시대인 9세기부터(왕하 8:20-22)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6세기까지 시대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으나 확실치 않습니다. 그냥 책의 서두에 ‘오바댜의 묵시라’고만 하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보다는 책 전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말씀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바댜는 에돔에게 심판을 경고하는, ‘국가적 경고’의 예언서입니다. 에돔족속과 유다 자손의 분쟁관계는 이삭의 아내인 리브가의 뱃속에서 두 아들이 싸울 때로 역사가 거슬러 올라갑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는 두 형제의 분쟁에 대한 예언은 야곱이 그의 형의 장자권을 빼앗음으로 시작됩니다(창 25:29-34). 에서가 야곱이 준 붉은 죽을 원했다고 해서 ‘붉다’는 뜻의 ‘에돔’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 그것이 민족의 이름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에서는 사해 남동쪽에 위치한 세일산에 가서 정착하게 되는데 ‘세일’의 발음이 ‘털이 많다’는 뜻의 에서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이후에 두 형제는 화해를 하지만(창 32, 33장), 이들의 자손인 이스라엘과 에돔족속은 계속적인 전쟁을 치르며 원수관계로 남습니다(예: 삼상 14:47; 삼하 8:13-14; 왕상 11:14; 22:47; 대하 25:11-12; 28:17; 시 137:7).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라는 시편 137편 7절의 말씀은 에돔과 유다의 관계를 단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을 기뻐했고 그것을 바랬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에서 에돔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는 이방 민족의 상징적 대표로 선택 되었으며, 실제로 구약에서는 다른 어떤 이방민족보다도 에돔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가장 많이 나옵니다(예: 사 11:14; 34:5-17; 63:1-6; 렘 9:25-26; 25:17-26; 49:7-22; 겔 25:12-14; 암 1:11-12 등). 주전 6세기와 5세기 초 아라비아 북쪽에 살던 나바테 아랍인들이 페트라를 수도로 하고, 에돔인들을 쫓아냄에 따라 에돔인들은 나바테인들 속에 흡수되거나 유다 남쪽지역에 거주하게 되는데, 그 지역을 헬라어로 ‘이두매’ 즉, ‘에돔사람의 땅’이라 부릅니다. 마가복음 3장 8절에 보면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바댜는 ‘심판과 구원’이라는 핵심 주제를 3부로 나누어 전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 안티-에돔적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에돔의 멸망을 예언합니다. 에돔은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으로 인해 심판 받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그의 형제국가인 유다에게 한 포악한 행동들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에돔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열방을 대표하며 ‘여호와의 날’ 즉, 심판의 날에 그들이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의 분노의 잔을 마시고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무서운 심판을 경험할 것입니다(16절).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오바댜를 읽으며 하나님 때문에 받는 박해가 있다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갚아주시고 위로해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둘째, ‘여호와의 날’에 이스라엘은 회복될 것이며 열방을 심판하는 도구가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에 대한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러나 셋째, 마지막 때에 열방을 향한 여호와의 구원의 메시지도 던지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우주적 통치자로서 에돔이 심판을 받지만 메시아의 시대가 열리면 결국 열방이 여호와께 속하므로 이들도 구원과 회복을 경험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작지만 강렬한 메시지가 집약되어 있는 책이 바로 오바댜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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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나 ************

 

요나서는 여러모로 특이합니다.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살아남은 것, 박넝쿨이 신기하게 빨리 자란 것, 악한 니느웨백성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요나의 한마디 메시지로 다 회개한 것,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도망가려는 발상을 하는 등의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에 따라 요나서를 ‘풍자이야기’로 보기도 하고, 교훈을 담은 ‘우화’로 보기도 하고, ‘상징적 비유’로 보기도 하고, 종교적 진리를 전달하는 ‘미드라 쉬’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통 보수주의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보셨기 때문에 요나서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입니다(마 12:40-41).

책의 주인공이 요나이기는 하나 저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책이 쓰여진 연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요나는 열왕기하 14장 25절에 여로보암 2세(793-753 B.C.)때 활동했던 8세기의 선지자로 소개됩니다. 호세아, 아모스도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을 것입니다. 요나가 북이스라엘 국가에 한 예언대로 여로보암 2세는 과거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속했던 많은 영토를 회복함으로 전래 없는 경제적 부흥과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많은 학자들은 요나가 니느웨에 가기를 거부한 것을 통해 그를 국수주의적이고 배타적 신앙을 가진 자라고 평가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이방나라의 선교사로 보낸 것은 이런 편협한 신앙을 고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또한 니느웨가 침체기를 겪고 있어 잠잠하지만 언제 또 북이스라엘을 점령할지 모른다는 데 대한 두려움도 요나가 가기를 거부한 이유로 작동했을 것입니다.

니느웨는 고대 앗수르 제국의 수도로서, 티그리스강 상류, 이라크의 현대도시인 모술의 외곽에 위치해 있습니다. 바그다드로부터 북으로 약 40km 떨어진 모술은 티그리스강의 서쪽에 있는데 강만 건너면 니느웨입니다. 현재 폐허로 남아있는 니느웨의 주위는 과거 장방형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그 길이는 10km가 넘었습니다. 성벽은 외벽과 내벽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내벽은 높이가 30m이며 너비가 15m여서 4대이상의 쌍두마차가 그 위를 한꺼번에 달릴 수 있었습니다.

요나서는 첫째, 하나님의 주권을 가르쳐줍니다. 요나서에서 여호와는 처음과 마지막에 주도권을 가지시고 말씀하시며(1:1-2; 4:11), 요나에게 ‘일어나라’고 2번 명하시며(1:2; 3:2), 큰 바람을 바다가운데 보내시며(1:4), 큰 물고기를 예비하시며(1:17), 물고기에게 명해 요나를 토하게 하시며(2:10), 니느웨의 회개를 보시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며(3:10), 박넝쿨을 예비하시며(4:6), 벌레를 예비하사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며(4:7),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사 요나 머리에 쪼이게 하십니다(4:8). 이 모든 것을 주도하신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지는 못합니다. 요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뜻을 이루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이방인 사공들이 부르짖을 때에 기도를 들으셨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했을 때에도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여호와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응답하십니다. 이방인이든 선지자든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요나는 차별을 원했지만 여호와는 차별을 두지 않으시는 분임을 가르쳐줍니다.

셋째,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선교의 통로가 되도록 부르셨으나 거부하는 요나를 통해 그 사명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스라엘은 신실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반항하는 선지자를 통해서라도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2:9)라는 요나의 고백은 본서의 주제를 잘 나타냅니다. 덕분에 니느웨는 심판의 위기를 면하게 됩니다.

넷째, 오바댜와 비교해 보면, 오바댜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나라는 심판을 받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반면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나라는 심판이 계획되었을 지라도 그것을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여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열방을 향한 원리를 가르쳐줍니다.

다섯째, 요나를 향한 교훈과 질책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교훈과 질책을 주십니다. 요나서의 절정은 마지막 4장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박넝쿨로 인한 안위는 취하면서 니느웨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시는 것에 대해 분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제거하셔서 베풀었던 은총을 철회하시며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의 권리를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총은 원하면서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다른 민족에게 가는 것에는 불만을 갖지는 않았는지 요나서를 읽으며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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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가 ************

 

미가는 ‘미가야’의 약어로,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가서는 이러한 이름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7:18)라는 질문을 하며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능력과 용서하시는 여호와의 양면을 모두 보여줍니다. 미가 선지자는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 주전 8세기 후반에 활동했으며, 이사야 선지자와 동시대 인물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모레셋 사람이며, 유다와 북이스라엘 두 나라 모두에게 메시지를 전한 선지자입니다.

미가 선지자의 시대로부터 약 백 년이 지난 예레미야 시대에, 장로들이 미가서 3장 12절을 인용하며 미가도 당시 예레미야와 비슷한 내용을 예언했었다고 말함으로써 예레미야가 목숨을 건진 사건이 있었습니다(렘 26:17-19). 이것은 선배 선지자 덕분에 후배 선지자가 위기를 모면한 경우이기도 하지만, 미가서가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존되어왔으며 인정되어 왔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고 한 미가서 5장 2절은 예수님의 탄생지를 예언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마태복음에서 헤롯왕은 동방박사의 방문을 받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 예수님의 탄생지를 찾아보라고 했는데, 그들이 미가서를 보고 베들레헴을 찾아냅니다. 이것 때문에 헤롯은 나중에 동방박사들이 그냥 돌아간 것을 알고, 베들레헴과 그 지경에 있는 2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다 죽이는 참사를 일으킵니다.

미가는 앗수르라는 나라가 한창 북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협하던 시기에 활동했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살만에셀 왕에 의해 주전 722년에 망하게 됩니다(왕하 17장). 또한 유다의 히스기야왕 때는 앗수르왕 산헤립이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정복을 시도하지만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합니다(왕하 19장). 미가가 활동한 시기는 이렇게 국제정세가 불안하고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8세기초의 경제적 부흥은 계층간 분열을 일으켰고, 사회의 도덕적 부패로 이어졌으며, 시장경제는 불의로 가득했으며, 상류층의 부정과 죄악은 심판의 메시지를 자초했습니다. 미가서는 이러한 사회를 바라보며 정의를 부르짖고, 진실된 도덕성의 각성과 예배의 회복을 강조합니다.

미가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다음의 6장 8절입니다: ”. . .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렇듯 미가 선지자는 사회 부조리와 도덕의 붕괴와 피상적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것 때문에 도시들이 황폐해질 것이며 주민들은 결국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합니다(1:10-16). 또한, 하나님께서 땅의 풍요를 거두어 가시고 사회, 경제적으로 심판을 꾀하실 것이며(6:13-16) 나라 전반에 걸쳐 총체적으로 손보실 거라고 전합니다.

그러나 심판의 메시지가 절망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라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인애를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로 마지막을 마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미가와 이사야는 자주 비교가 됩니다. 미가는 서민을 위한 사역을 했으며, 이사야는 주로 수도권의 왕과 귀족층을 위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둘 다 앗수르의 침략을 예언했으며, 앗수르에게 유다는 구원받지만 바벨론에게는 망할 것을 예언합니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예배가 형식적이고 종교적인 의식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미가서의 사회상은 현재 우리의 사회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사회, 일터, 정부, 나라가 될 때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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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훔 ************

 

나훔의 주제는 ‘악의 상징인 앗수르 나라의 심판’과 ‘멸망의 선포’입니다. 나훔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위로’라는 뜻이며 책의 내용과 연관이 있습니다. 유다를 계속 괴롭혀왔고 북이스라엘을 정복한 무서운 적국 앗수르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큰 ‘위로’의 메시지를 나훔이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가 멸망하는 것을 보며 “내가 어디서 니느웨(“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3:7)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니느웨의 멸망을 동정의 눈으로 볼 자는 아무도 없다는 조롱의 말입니다. 여기에서도 나훔 선지자의 이름을 상기시키는 ‘위로’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니느웨는 오래 전 요나가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회개함으로 위기를 넘깁니다. 그러나 1세기가 지나고 다시 죄악이 가득해져 나훔이 예언할 시대가 되었을 때, 그들은 전혀 회개하지 않습니다. 나훔은 그들의 멸망이 이제 불가피하다고 예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니느웨의 구원에 불만을 품었던 요나가 구약성경 중에서 가장 사랑했을 책이 ‘나훔’일 것이라는 농담도 있습니다.

나훔의 활동연대가 정확히 나와있지 않지만, ‘니느웨의 멸망’을 알리는 경고의 메시지이므로 니느웨가 멸망한 주전 612년 이전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또한 본문에 이집트의 도시 노아몬이 앗수르에 의해 이미 파괴된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3:8-10), 그 사건은 주전 663년에 일어났으므로 나훔은 주전 663년과 612년 사이에 활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몬은 이집트의 태앙신인 ‘아몬의 성읍(“노”)’이라는 뜻으로, 주전 2000년부터 663년까지 이집트의 중심 도시로서, 특히 상부이집트(Upper Egypt)의 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노아몬의 헬라어 이름은 테베(Thebes)였으며, 나중에 룩소로 불립니다. 노아몬은 나일강을 중심으로 동쪽에서 태양이 떠오르므로, 동쪽에 카르낙 신전과 룩소 신전 등 거대한 신전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반면, 서쪽에는 주로 왕과 여왕들의 무덤이 있고 유명했던 합셰수트 장제전도 있어 세계 최고의 유적도시로 꼽히면서 현재 이집트의 주요 관광명소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오래된 역사와 전통과 위용을 자랑했던 노아몬도 앗수르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저자는 이 사건을 통해 노아몬의 운명이 앗수르 자신의 운명이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소선지서 중에서 다른 이방 국가들에 대한 심판을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는 책은 하박국, 오바댜, 나훔입니다. 이들은 전형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혀왔던 나라들을 다룹니다. 하박국은 바벨론에 대해, 오바댜는 에돔에 대해, 나훔은 앗수르에 대해서 다룹니다. 특히 대부분의 선지서는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반면, 나훔은 그런 것이 전혀 없고 심판을 선포하는 메시지로만 끝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또한 니느웨성의 멸망에 대해 시각, 청각적으로 실감나고 생동감 넘치는 묘사를 한다는 것도 이 책의 특징입니다: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하는 병거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3:2-3)등의 표현은 한때 여러 세기 동안 고대 근동을 휩쓸며 많은 성읍들을 피로 물들이고 시체를 더미로 쌓아놓고 자랑했던 니느웨가 자신들이 한 것을 똑같이 고스란히 당하는 처참한 광경을 묘사합니다. 그들은 피부를 벗겨 성벽에 바르고, 사람 머리통을 모아 기둥을 만들고, 얼굴과 신체의 일부를 자르고 내장과 식도를 꺼내 길을 덮는 등 야만적이고 잔인한 행위를 하고 통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 때에는 니느웨에서 시체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는 거리를 다닐 수 없을 만큼 전멸할 것임을 예언합니다.

나훔서에서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는 종말론적인 악의상징으로, 여호와를 대적하는 모든 악은 궁극적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현재는 폐허로 남아있지만 1842년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하면 니느웨는 약 30만 명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너비 42m, 깊이 18m인 호수가 성벽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튼튼했던 니느웨가 주전 612년에 메대와 바벨론 연합군에 의해 점령당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한 국가에 국한된 신이 아닌 열방의 운명을 결정짓는 주권자이심을 보여주며, 악에 대해 보복하고, 심판하는 여호와의 속성을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인내를 무능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악한 자에 대한 심판은 곧 의로운 자에게 베푸는 구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나훔은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1:15)의 메시지를 전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에너지와 저력을 주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 명예회복을 시켜주신다는 큰 위로를 줍니다. 이미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들은 어떠한 심판이 와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나훔을 읽으며 많은 ‘위로’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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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박국 ************

 

나훔이 앗수르의 멸망을 다루었다면, 하박국은 바벨론의 멸망을 다룹니다. 둘 다 이스라엘 적국들의 멸망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정보가 없습니다. 그의 이름은 ‘껴 안는 자’라는 뜻으로, 하나님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어려운 문제를 껴안고 씨름하고,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껴안는다는 의미에서 본문과 연결시켜 볼 수 있습니다. 하박국은 선지서에 속하지만 쟝르로는 지혜문학서나 시편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앗술바니팔은 주전 668년에 앗수르 왕국이 최고의 영화를 누리는 시기에 등극합니다. 그러나 곧 650년대 중반부터 내란과 이집트의 반란 등이 터지면서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고, 627년 그가 사망하고 갈대아 인들이 신바벨론 독립국가를 세우고 나보폴라살이 그 왕이 되어 결국 앗수르를 멸망시키며, 신 바벨론 제국은 후에 느브갓네살에게 넘겨집니다. 유다에서는 이때가 요시야왕이 영적 개혁의 깃발을 들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앗수르의 힘이 기울어 가는 시기에 사역을 시작합니다.

갈대아인들은 원래 바벨론 남부에 살던 주민을 지칭하던 말인데, 이들이 앗수르의 도시였던 바벨론을 통치하게 되면서 갈대아라는 말과 바벨론이라는 말이 동일시 됩니다(사 43:14).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악한 갈대아인들을 도구로 삼아 유다를 심판하실 것을 예언하는 것이 하박국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과의 질의응답식 대화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그는 악한 유다를 심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더 악한 바벨론 왕국을 사용하여 유다를 심판하시겠다는 답을 주십니다. 거기에 대해 그는 어떻게 그러실 수 있냐며 또 다른 의문을 제시합니다. 사악한 국가가 번영하는 것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대해 정하신 때를 기다리면 사악한 나라 바벨론도 자신들의 죄값으로 궁극적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믿는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며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라는 유명한 말씀을 주십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때를 기다리고 말씀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하박국의 이 말씀은 신약의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3번에 걸쳐 인용됩니다(롬 1:17; 갈 3:11; 히 10:38).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은 구약이 원조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대화와 만남은 하박국을 변화시킵니다. ‘처음에 그는 의심과 혼돈을 갖고 질문을 시작하지만, 끝날 때는 헌신과 확신으로 마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지만 마지막은 하나님께 드리는 중보기도로 마칩니다. 근심은 예배로 전환되며, 두려움은 믿음으로 승화되며, 공포는 신뢰로 바뀌며, 절망은 희망으로, 비통은 경배로 바뀝니다. 질문으로 시작하지만 마지막은 감탄사로 마칩니다. ‘왜?’라는 질문은 ‘누구!’라는 답으로 해결됩니다. ‘왜 이런 문제들이 있는 겁니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누가 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는지’에 대한 고백으로 마칩니다. 그 주관자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박국은 거룩하신 하나님(1:12; 3:3), 반석이신 하나님(1:12), 만국의 주권자 되신 하나님(1:6; 3:6, 12),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2:1-2),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3:13, 19),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2:3)등 다양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우리에게도 익숙하고 애송되는 이 구절로 마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

이 노래는 하박국 선지자가 절체절명의 국가적 멸망의 위기에 놓여있었을 때 부른 것입니다. 곧 바벨론이 쳐들어 올 것이고 나라는 황폐해질 것이고 많은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갈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는 온몸이 떨리는 경험을 하지만, 기뻐할 이유 하나를 발견합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신뢰하는 자들에게 소생하는 힘과 활력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호와를 신뢰하기로 작정합니다. 현재 절망의 늪과 덫에 있는 것처럼 느끼신다면 이 찬양의 기도를 통해 우리모두가 하박국 선지자와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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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바냐 ************

 

스바냐라는 책의 제목은 선지자 스바냐의 이름을 따서 지었으며, ‘여호와께서 숨기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는 2장 3절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이름입니다. 그는 4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를 가장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선지자입니다: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세 사람의 이름은 익숙하지 않지만, 히스기야가 우리가 아는 유다왕 히스기야가 맞다면 스바냐는 왕족출신입니다. 예레미야와는 활동시기가 거의 비슷합니다.

스바냐는 유다가 므낫세왕의 55년에 걸친 장기간의 통치(697-642 B.C.)를 벗어나 아몬왕 이후 요시야왕 시대(640-609 B.C.)에 사역을 시작합니다. 스바냐가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니느웨가 망한 주전 612년 이전에 그의 사역이 이루어졌습니다(습 2:13). 므낫세는 악한 왕의 대명사였으나 요시야왕은 의로운 왕입니다. 요시야왕이 뒤늦게 영적 개혁을 단행하지만 이미 유다가 영적으로 너무 오랜 시간 타락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유다를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계획을 변경시키기에는 늦었습니다. 스바냐는 이런 상황에서 종말의 날인 ‘여호와의 날’을 예언하며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준비시킵니다.

스바냐는 사회와 종교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백성들을 올바로 이끌어야 할 지도자들을 오히려 백성들을 뜯어먹고 살육하는 맹수로 비유합니다. 방백들은 먹이를 찾아 다니며 부르짖는 사자와 같고, 정의를 실천해야 할 재판장들은 밤의 이리로 둔갑해 대낮에 해야 할 재판을 뇌물과 비리를 통해 밤중에 결론을 내는 자들입니다. 악한 일은 처리를 어찌나 깔끔하게 하는지, 이튿날 아침까지 남겨두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범죄를 퇴치하는 자들이 아니라 범죄의 프로페셔널입니다. 종교지도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여 먹고 사는 자들이며 계시의 말씀을 자신의 의견으로 대치하는 자들이며 오히려 성소를 더럽히는 자들입니다.

‘여호와의 날’로 불리는 종말의 날에는 하나님의 백성들만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열방들이 심판대에 오릅니다. 본문에 언급된 블레셋, 모압, 암몬, 구스, 앗수르는 전형적으로 유다를 괴롭혀온 나라들로, 모든 열방들을 대표하여 기록된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심판이 진행이 될 것입니다(1:2). 그러나 모든 심판은 파괴와 멸망이 아니라 모든 죄악을 제거하는 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3:11, “. . . 제거하여 네가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라”).

일단 심판으로 정리가 된 후에는 여호와께서 열방과 유다 백성들을 구원하고 모든 명예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타협하지 않는 신실한 자가 될 것을 격려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지나고 나면 그들은 보호를 받을 것이고 구원의 기쁨을 노래할 것입니다(“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 지어다,” 3:14).

스바냐는 유다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날’을 준비시키면서 구원의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을 격려하기 위하여 쓰여졌습니다. 스바냐에서 ‘남은 자’는 신실한 자를 가리킵니다(2:9; 3:13).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기업을 주실 것입니다(2:9). 현대에서 ‘남은 자’는 상황에 관계없이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 승리한 자를 의미합니다. 힘들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세상과 타협하거나, 신앙의 계속적인 성장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남은 자’의 대열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말씀을 붙들고 복음을 위해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사명을 완수하는 자이며, 그것이 ‘남은 자’의 모습입니다. 스바냐를 묵상하며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숨김을 얻는’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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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개 ************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포로기 이후 페르시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구약 선지문학입니다. 학개와 스가랴는 동시대 인물로, 페르시아의 3번째 왕 다리오 1세(522-486 B.C.)때에 서로 힘을 합쳐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독려합니다. 다리오 1세는 역사적으로 주전 490년에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군과 싸워 군사적 수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의 전술적 전략에 밀려 패배한 왕입니다. 그때 아테네의 한 병사가 승리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뛰어가 ‘승리했으니 항복하지 말라’는 소식만 알리고 절명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날 마라톤 경기가 그때 뛴 거리인 42.195km가 되었습니다. 다리오 1세의 아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로, 고대 페르시아의 왕위를 그리스식으로 표현한 ’크세르크세스’는 ‘영웅들의 통치자’란 뜻입니다. 이 왕이 구약에 나오는 에스더의 남편이자 히브리식 발음으로 아하수에로(486-465 B.C.)왕이라는데 대체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학개는 예언의 메시지를 전한 날자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구약에서 가장 연대가 정확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리오왕 통치기간 제 2년 여섯째 달 초하루, 일곱째달 21일, 아홉째 달 24일까지 약 4개월에 걸쳐 여호와께서 주신 4번의 메시지를 기록합니다. 이때가 주전 520년입니다. 그 당시 스룹바벨은 유다의 총독이었으며 여호수아가 대 제사장이었습니다.

학개는 무거운 임무를 맡았습니다. 다른 선지자는 메시지만 전하면 되었는데 학개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야 했습니다. 바로 66년전에 파괴된 성전을 재건하는 일입니다. 포로기 이후 페르시아 시대 때에 제국에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디아스포라들이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학개는 각자 자기 집 짓기에만 바쁘고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한 백성들에게 동기부여를 하며 그들에게 영적인 우선순위를 확립하도록 일깨워줍니다. 성전 건축은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를 회복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왕국과 메시아시대의 도래를 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이 어려웠던 것은 성전건축 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았기 때문임을 보여줍니다. 단 23일만에 이처럼 즉각적이고 실천적 반응을 일으킨 설교는 드뭅니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 제사장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선지자의 메시지를 청종하며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같은 달 24일에 즉각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감동시키신 결과입니다(1:15). 그들의 이러한 반응은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도 모범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우선순위를 잘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학개의 메시지를 현대에 교회건축에 대한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 그대로 대입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당시의 성전의 의미와 현대의 교회건축은 전혀 다른 영적인 의미와 무게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개는 네 번에 걸친 메시지를 통해 성전건축을 촉구하며 축복의 약속과 다윗왕국의 회복과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예언합니다.

에스라 6장에 보면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려 성전 건축할 재정과 제사드릴 제물을 공급해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덕분에 다리오왕 제 육년 아달월 3일에 성전 건축을 마쳤다는 기록이 나옵니다(스 6: 14-15). 학개에서 메시지를 시작한 날이 다리오왕 제 2년이므로 4년만에 성전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때가 주전 516년이므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586년으로부터 정확히 70년이 지난 후 성전이 다시 지어진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때를 70년의 포로생활이 상징적으로 마감된 때로 봅니다. 이 성전은 스룹바벨의 리더십 하에 완공되었다고 해서 스룹바벨 성전이라 부릅니다. 학개는 ‘나의 축제일’이라는 의미인데, 이름 그대로 성전을 완성해서 축하하게 되었습니다. 첫번째 성전은 솔로몬 성전, 두번째 성전은 스룹바벨 성전, 세번째 성전은 신약시대 헤롯 성전이라 부르는데, 결국 이 모든 성전들은 다 파괴되어 현재까지 예루살렘에 성전은 건축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오히려 현재는 유대인들의 성전 터 장소에 회교도의 3대 성지 중 하나인 모하메드가 승천했다고 전승되며 황금돔이라 불리는, 무슬림 바위사원이 세워져 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습니다.

학개가 외쳤던 성전건축의 역사가 언제 다시 재개될지가 관심사입니다. 그때는 바로 이 황금돔 자리에 성전이 세워져야 하는데, 그러러면 무슬림들이 여호와를 믿고 따르는 그날이 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날이 올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학개서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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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가랴 ************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포로기 이후 페르시아 시대를 배경으로 구약 선지 문학을 이룹니다. 학개와 스가랴는 동시대 인물로, 페르시아의 세 번째 왕인 다리오 1세(522-486 B.C.)때에 서로 힘을 합쳐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독려합니다. 스가랴의 사역은 학개의 사역이 시작된 지 2개월 후에, 즉 다리오왕 ‘제 이년 여덟째 달’, 주전 520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므로써 시작됩니다(슥 1:1). 그의 마지막 사역이 기록된 연대는 다리오왕 ‘제 사년 아홉째 달 사일’이므로(슥 7:1), 그가 예루살렘에서 성전이 완성되는 약 2년 동안 계속 사역했으며, 스가랴 9-14장의 내용을 보아 성전이 완성된 후에도 계속 사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학개는 백성들에게 성전을 짓도록 동기 부여를 한 반면, 스가랴는 그들에게 회개와 영적인 개혁을 촉구합니다. 스가랴는 성전건축이 완료되었을 때 합당한 예배를 드리도록 백성들을 준비시키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학개는 당시 총독이자 리더였던 스룹바벨을 오실 메시아의 예표로 제시한 것으로 마치는데, 스가랴는 진정한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합니다. 스가랴의 메시지의 주제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왕국과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소선지서 중에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가장 많은 책입니다. 구약 전체에서 이사야 다음으로 메시아적 목자-왕에 대한 이야기와 예언이 많이 나옵니다. 신약에서는 70회이상 스가랴를 직접 인용하거나 암시하는데, 대부분이 계시록에서 발견됩니다.

스가랴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포로기 이후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핵심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페르시아의 통치하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조국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많은 것들이 기대 이하였습니다. 성전은 돌무더기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고, 가뭄 때문에 농작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각자 먹고 살기에 급급하여 공동체 의식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셨던,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향한 언약이 이루어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원수국가들의 패망, 이스라엘의 명예와 영광의 회복, 메시아가 통치하는 다윗 왕권의 회복 등 모든 것이 요원해 보였습니다. 그 와중에 학개와 스가랴가 힘을 합쳐 성전건축을 촉구하면서 모든 것에 활기를 띄기 시작합니다. 스가랴는 이름의 의미처럼 여호와께서 여전히 언약을 ‘기억하신다’는 것을 알려주고, 메시아의 오심과 그가 다스리는 왕국의 도래를 예언하면서 백성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심고, 그들을 영적으로 준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구약에서만 32명정도의 스가랴가 등장할 정도로 흔한 이름이기 때문에 혼돈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가 베레갸의 아들이며 잇도의 손자임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느헤미야는 잇도를 레위에 속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어, 스가랴가 선지자인 동시에 레위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스 5:1; 6:14; 느 12:16). 또한 그는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5만 명 중 한 사람입니다.

스가랴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 부분을 이루는 1-8장은 ‘메시아의 왕국을 위한 준비’를 다루고, 두 번째 부분을 이루는 9-14장은 ‘메시아의 오심을 통한 이스라엘의 구원과 통치’를 다룹니다. 첫 번째 부분은 여덟 개의 환상으로 유명합니다: 여덟 개의 환상은 붉은 말탄자의 환상(1:7-17), 네 뿔과 네 대장장이들(1:18-21), 측량줄을 잡은자(2:1-13),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옷(3:1-10), 순금등잔대와 두 감람나무(4장), 날아가는 두루마리(5:1-4), 에바바구니 가운데 앉은 여인(5:1-11), 네 대의 병거(6:1-8)입니다. 이 환상들에는 묵시적이며 비유적인 표현들로 가득한데, 그래서 스가랴서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두 번째 부분은 오실 왕-목자 메시아에 의한 이스라엘의 미래의 구원과 승리를 보여줍니다. 스가랴는 여호와의 날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성결될 것을 고대하면서 에스겔, 다니엘서와 견줄 만큼 묵시적이고 종말론적인 메시지로 가득합니다. 마치 신약에 있는 계시록의 일부를 보는 듯 합니다. 특별히 스가랴 4장 6절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주님의 성령으로 성결될 우리모두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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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라기 ************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포로기 이후 페르시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구약 선지문학입니다. 말라기의 정확한 연대는 나와 있지 않지만 학개의 사역으로 성전이 완성된 후에 쓰여진 것만은 확실합니다. 성전에 관련된 메시지가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전 450-400년 사이에 활동한 예언자라고 추정하기도 하고, 그 이전인 주전 500-475년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한, 말라기는 외국인과의 통혼문제, 이혼문제, 제사장직의 남용문제, 성전 봉사문제, 십일조문제 등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에스라, 느헤미야서와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에스라, 느헤미야와 비슷한 시대의 사람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말라기의 이름은 ‘나의 사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말라기가 선지자의 이름이 아니라 3장 1절의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 . “에서 연유된 제목이라 보고, 이 책을 익명의 예언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3장 1절에 여호와께서 보내시는 사자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 보내집니다. 선지자 말라기도 ‘하나님의 사자’로서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의 왕국을 준비하는 역할을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페르시아의 거대한 제국 내에서 보잘것없이 조공을 바치는 지방처럼 남아있었습니다. 과거 찬란했던 이스라엘의 축복과 영광은 사라진 지 오래 되었고 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아왕국의 도래는 요원해 보였으며, 가까운 미래의 희망마저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의 하나님을 찾기보다 다시 낙담과 불신의 태도를 보입니다(비교: 사 59:9-11).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선민사상은 희미해져 갔고,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또다시 언약백성으로서의 자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과거의 잘못을 깨닫고 교훈으로 새기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기보다는 다시 한번 죄의 톱니바퀴 속으로 들어가 똑같은 죄들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그의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경고를 줍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 마지막 경고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말라기와 같은 선지자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고 말라기를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침묵이 시작됩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그들은 학개, 스가랴, 말라기가 죽은 후에 성령이 이스라엘을 떠났다고 믿었습니다(Osefta Sotah 13.2). 그러기에 말라기를 통해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메시지를 듣는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말라기에서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그분은 위대한 왕이시며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11).

말라기 전체는 서론, 여섯 번의 논쟁, 마지막 경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히 여섯 번의 논쟁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반문하며, 하나님이 다시 그들에게 답변하는 형식으로 토론을 하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책 구조의 핵심을 이루는 논쟁적이고 단언적인 형식 그리고 쟁론과 질문을 통해 대화하는 형식은 말라기의 독특한 문학기법일뿐 아니라,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입니다. 이러한 수사학적 질의 응답 형식은 후기 랍비학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강해 교육의 선구로 평가됩니다.

말라기는 우상에 대해(2:10-12), 이혼에 대해(2:131-16),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언약의 윤리에 기초한 사회정의를 실천하지 않은 것에 대해, 또한 제사장 계급과 사회지도계층을 향해 강력하게 경고하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메시지의 핵심은 포로기 이후에 귀환한 백성들의 영적인 삶과 그들의 생활 속의 부패를 지적하며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결코 악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심판할 것임을 알려줍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모세의 율법에 순종하고 의로운 삶을 살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을 경고합니다.

특별히 첫 번째 논쟁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변했지,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그분의 사랑은 결코 변치 않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변해도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말라기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어떤 학자는 말라기의 책 제목을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God’s Unchanging Love)’이라고 짓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구약 선지서의 마지막인 말라기에서 너무나 오래 기억하고 싶은 메시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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