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잠깐 스쳐가는 말씀 한 조각

말씀 한 조각 만으로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000. 성경 각권 소개

신약성경 각권 소개 (드라마 바이블, 바이블 프로젝트)

아리마대 사람 2023. 1. 5. 00:05

신약성경의 각권을 소개하는 자료입니다.

먼저 "드라마 바이블"이라는 앱에서 제공하는 성경 각권 소개자료를 참고했습니다.

"드라마 바이블"은 성경을 기록부분과 대화부분으로 이루어진 드라마로 구성하여 대단히 재미있게 성경을 읽을... 아니, 들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스마트폰 앱인데, 이 앱에는 성경 각권에 대한 소개자료가 포함되어 있어서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이 자료는 FWIA 대표이시고 전 횃불트리니티 구약학 교수이신 김윤희 박사님께서 작성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바이블 프로젝트"에서 제공하는 성경 각권 소개자료를 참고했습니다.

"바이블 프로젝트"는 누구든 어디에서나 성경 이야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성경에 대한 애니메이션 및 관련 자료를 제작하는 비영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입니다. 바이블 프로젝트에서 제공하는 성경 각권에 대한 동영상은 대단히 재미있게 성경을 읽으... 아니, 보면서 배울 수 있도록 하며,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신약 개요 New Testament - YouTube

 

************ 마태복음 ************

 

마태복음은 제목에서도 시사하듯 예수님의 제자 마태사도에 의해 쓰여졌습니다. 로마의 클레멘트, 폴리캅, 터툴리안, 오리겐 등 많은 교부들도 그가 저자라고 증거합니다. 흥미롭게도 다른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을 소개할 때 이름만 나열하는데, 마태복음에서만 유독 ‘세리마태’라고 하면서 이름 앞에 ‘세리’를 붙이고 있습니다. 이는 마태 본인의 부끄러운 직업을 나타내려는 겸손한 의도로 보입니다. 그의 직업에 걸맞게 마태복음에는 ‘두 드라크마 관세, 네 드라크마 동전, 달란트’(마 17:24, 27; 18:24) 등 마태에게 익숙한 돈 단위에 대한 다양한 용어들이 등장합니다. 마태가 저자인 것을 뒷받침 해주는 추가적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신약의 첫 번째 책답게 독자들을 구약으로부터 연착륙을 시키려는 듯 전반적으로 유대적 성향이 강한 분위기와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졌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며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1:17)라고 기록하는데, 세 간격이 약 1,000년, 400여년, 600년임을 생각해 볼 때 ‘열네 대’라는 숫자에 끼워 맞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라는 숫자는 그 숫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바꾸는 주석 방법인 게마트리아라는 관점으로 보면 ‘다윗’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시작부터 예수님이 유대의 왕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 이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50회이상 구약을 직접 인용하고, 75회정도 구약의 사건들을 암시함으로 유대인이 대상이었음을 뒷받침합니다.

또한 마태복음에는 유대인들이 자주 쓰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표현이 15번 나옵니다(5:16, 45, 48; 6:1,9: 7:11,21; 10:32,33; 11:25; 12:50; 16:17; 18:10,14,19; 23:9). 마가복음에서는 한번, 누가복음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은 것과 선명하게 대조됩니다. 하나님이라는 표현 대신 이러한 우회적 표현을 쓴 것도 전형적으로 하나님의 이름 부르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유대적 사고를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 대신 주로 ‘천국(Kingdom of Heaven)’을 쓴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구조도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오경을 염두에 둔 듯,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섯 군데에 모아서 구성했습니다. 5-7장의 산상수훈, 10장의 전도여행을 보내시며 주신 가르침, 13장의 천국에 대한 비유 모음, 18장의 공동체와 용서에 대한 가르침, 23-25장의 종말에 대한 가르침과 경고 등 다섯 개의 강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가르침의 사역에 초점을 맞춘 것 또한 마태복음의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 5장에서는(21, 27, 31, 33, 38, 43절)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을 반복하는데, 모세는 그렇게 가르쳤지만 나는 이렇게 가르친다고 하면서 마태가 예수님을 ‘모세보다 위대하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대비시켜, 예수님은 새로운 모세이실 뿐 아니라 구약의 모세의 권위를 훨씬 뛰어넘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모세의 율법을 폐하시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오셨다고 말합니다(5:17).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율법을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모세의 율법보다 우위에 있음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태복음이 유대적 성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복음의 보편성’ 또한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그분을 경배하기 위해 페르시아로부터 온 동방박사 사건은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은 예수님은 유대인만의 메시아가 아닌 만민의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천국의 비유에서도 밭은 ‘세상’을 가리킨다고 가르치십니다(13:31). 2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아 다른 이들에게 주실 것이라 말씀하심으로(43절),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만민에게 보편성’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4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만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16:18; 18:17), ‘모든 족속들을 향한’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으로 서신을 끝맺는 것 역시 복음의 보편성을 잘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복음은 특정한 자 또는 특정한 민족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것임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마태복음은 강한 유대적 요소에 복음의 보편성이 더해진 복음서라 요약할 수 있습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마태복음 1~13장 개요 Matthew 1-13 - YouTube

◇ 바이블 프로젝트 마태복음 14~28장 개요 Matthew 14-28 - YouTube

 

************ 마가복음 ************

 

마가복음의 저자는 마가로 알려져 있으며 다른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신학적 기록입니다. 그런데 12사도에 속하지 않은 마가가 어떻게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들을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는 초대 교부들의 기록과 전통을 살펴보았을 때 베드로에게 전해 받은 것이라는 설명이 가장 적절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13절에서 마가를 “내 아들 마가”라 지칭하는 것과 예수님의 공적 사역이 베드로를 부르신 사건부터 시작된다는 것도 그러합니다. 14장에서 마가복음에만 기록된 한 청년을 저자인 마가로 보는 흥미로운 견해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 당하시는 것을 보고 베로 된 홑이불을 두르고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자 벗은 몸으로 도망갔던 그 청년 말입니다(14:51-52). 물론 이를 증명할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청년이 마가라면 자신의 창피한 과거를 가감 없이 적절한 곳에 소개한, 변화된 자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로마에서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썼다는 견해가 유력한데, 그 증거로 간간이 본문에 유대인들의 관습에 대해 설명해 주는 부분을 들 수 있으며(7:3-4; 15:42), 여러군데 아람어 표현을 헬라어로 번역한 부분들이 헬라어를 쓰는 이방인이 대상임을 설명해줍니다(3:17; 5:41; 7:11, 34; 15:22, 34 등). 예를 들면, ‘달리다굼’이라는 아람어를 ‘소녀여 일어나라’로 번역해 줍니다. 마가복음은 4복음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되었으며, 다른 복음서를 기록하는데 참고 자료로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을 학자들은 ‘마가복음 우선설’이라고 부릅니다.

마가복음은 여러 가지 특징이 있는데, 긴 설교보다는 행동 중심으로 복음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사건들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며, ‘즉시’처럼 신속성을 나타내는 부사들이 자주 사용됩니다. 실제로 ‘움직임을 의도하는 동사’가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풍성하게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를 강조하며, 복음을 들은 후 사람들의 결단이 매우 중요하고 시급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신속성과 함께 긴급성과 위급성도 동시에 강조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마가복음은 섬김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 사건을 향해 모든 것이 움직여 간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마가복음의 초점은 ‘제자도’입니다.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복음에 적대적인 환경에 살다 보니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제자도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 들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고 복음서를 열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세례 당시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더러운 귀신도 인정했으며,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 본 백부장도 그렇게 고백합니다(1:11; 3:11; 15:39). 이러한 예수님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염두에 두고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치시고 돌보신지를 보여줌으로써 당시의 이방인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의 참 제자가 되도록 도전하는 ‘제자도’를 강조합니다. 한 예로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주셨음에도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질책하시며 마음이 둔해져 깨닫지 못하는 그들의 믿음이 수로보니게 이방여인의 믿음보다 못하다고 대조 시키면서 제자들에게 믿음을 가르치십니다.

또 다른 특징으로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분량이 적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용이 빈약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자 마가는 많은 사건들을 요약하여 전개시키는데, 예를 들어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는 예수님의 마귀 시험장면을 길게 다루고 있지만, 마가복음에서는 1장12-13절 두절로 짧게 다룹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전도여행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길게 가르치신 부분도 마가복음에는 6장 7-13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건의 묘사가 천편일률적으로 간략한 것만은 아닙니다.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록을 보면, 기적이 일어난 장소의 잔디의 색이 푸르다고 묘사한 것은 마가복음밖에 없습니다(6:39). 8장에서는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칠 때 한 번에 고치시지 않고 두 단계를 거치시는 ‘자세한’ 묘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가는 전반적으로 요약을 함으로써 인간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향해 움직이시는 예수님의 움직임에 의도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가복음은 마태복음과 90%정도가 중복됩니다. 신약을 통독하면서 ‘왜 이리 똑같은 얘기가 계속 나오지?’라고 느꼈다면 예리한 관찰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용이 유사할지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차이점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신학적 의도가 그 안에 담겨있음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발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복음으로 옮겨가면 내용중복이 50% 정도로 급격하게 줄어든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두는 것도 복음서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마가복음 개요 Mark - YouTube

 

************ 누가복음 ************

 

누가는 헬라어 이름으로, 저자 누가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 기독교인입니다. 그는 복음서를 기술하는데 높은 수준의 헬라어를 사용한 것을 보아 상당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누가복음은 모든 복음서 중 가장 포괄적이며, 분량도 신약에서 가장 많으며, 또 다른 저서인 사도행전까지 더하면 그의 저술 분량이 신약의 약 1/4에 해당되므로, 누가는 신약에서 제일 중요한 저자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꼭 그가 이방인이라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누가복음의 가장 큰 특징은 ‘복음의 보편성’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서두에 나오는 데오빌로처럼 기독교에 우호적인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 예언의 성취로 제시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사와 세상의 역사를 연결시킴으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부각시키며 전개됩니다. 예를 들어 1장 5절의 “유대 왕 헤롯 때에,” 2장 1절의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3장 1절의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등의 표현을 보면 세속적 역사와 연결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할 때에도 마태복음 1장에 나오듯 아브라함에 귀결시키기보다는, 아담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과 궁극적으로 연결시킴으로써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보편성을 잘 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보편성은 유대인과 대조되는 개념인 이방인을 포함시키는데 머물지 않습니다. 죄 지은 여인(7:36-50), 선한 사마리아인(10:29-37), 탕자(15:11-32), 세리 삭개오(19:1-10), 23장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 당했던 회개한 강도에 이르기까지(39-43) 사회적 소외계층을 총망라합니다. 당시 남성보다 못한 취급을 받던 여성들이 특별히 부각되어 있는 것 또한 보편성을 잘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등장하는 마리아, 엘리사벳, 안나(1-2장) 등은 물론, 7장의 나인성 과부(7:11-17), 8장에서 경제적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긴 여인들(8:1-3), 10장에서 만나는 마리아와 마르다(10:38-42)등 수많은 여성이 중심이 되어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을 향한 저자의 유별난 관심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비교했을 때 누가복음은 세 가지 큰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중요한 순간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눈에 띕니다. 3장에서 요단강 세례 때(3:21), 5장에서 하루 일과 후(5:16), 6장에서 열 두 제자를 선택하시기 전(12), 9장에서 베드로의 고백과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 말씀하시기 전(18), 변화산에서(28-29), 10장에서70인의 전도여행 보고 때(21), 11장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시기 전(1), 22장의 겟세마네 동산에서(39-46), 23장에서 십자가 위에서 두 번 기도하실 때(34, 46)등 누가는 예수님을 기도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뿐 아니라 기도에 대한 두 개의 비유(11:5-13; 18:1-8)도 누가복음에만 나오며, 22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점 또한 다른 복음서와 차별성이 있습니다(31-32).

둘째, 성령의 역사가 강조된 측면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세례요한의 탄생,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설명하는데 성령의 역할이 특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성령 충만한 세례 요한(1:15), 성령을 통한 마리아의 잉태(1:35), 엘리사벳의 고백(1:41-42), 스가랴의 세례 요한 작명(1:67) 등 모든 것이 성령님의 특별한 역사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시므온은 죽기 전에 주의 구원을 볼 것을 약속 받았는데, 실제로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하신 분도(2:25-27) 성령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셨고(4:1), 그 후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오셨다고(4:14)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냄을 받은70인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뻐하셨고(10:21),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성령의 임재를 약속하십니다(24:49). 모든 일이 예외 없이 성령의 인도와 역사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셋째,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강조 또한 간과할 수 없습니다. 9장부터 19장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하시고(51)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44). 이 부분을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복음서와의 차별점이 유난히 많은 부분이기도 한데, 예루살렘과 연계해 성전을 강조하고자 하는 누가의 의도가 드러납니다. 그러한 의도는 누가복음이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24:52후-53)로 끝나는 부분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이 마지막 부분은 누가의 두 번째 저서인 사도행전의 시작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누가는 기도와 성령과 하나님을 만나는 상징적 장소인 성전을 강조합니다. 누가복음을 통해 우리의 기도생활과 성령의 역사하심과 하나님과의 교제와 교통하심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누가복음 1~9장 개요 Luke 1-9 - YouTube

◇ 바이블 프로젝트 누가복음 10~24장 개요 Luke 10-24 - YouTube

 

************ 요한복음 ************

 

요한복음은 비록 본문에서 요한이 저자임을 밝히고 있지 않으나 본서의 저자가 예수님의 제자가운데 한 사람이며, 최후의 만찬 때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을 팔 자가 누구냐고 질문한 자이며(21:20),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로 자주 등장하는(13:23; 19:26; 20:2; 21:7) 그 자가 기록했다고 말하므로(21:24) 사도요한이 가장 유력한 저자임을 알려줍니다. 폴리캅, 이레네우스, 클레멘트 등 초대교회의 교부들도 세베대의 아들인 사도요한이 에베소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했다고 증거합니다.

요한복음은 20장 30-31절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쓴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점에서 다른 복음서와 구별이 됩니다. 방금 인용한 말씀에서도 2번이나 나온 ‘믿다’라는 동사가 바로 요한복음의 핵심 단어이며, 통틀어 98번이나 나옵니다. 즉,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려고’ 기록한 복음 전도서입니다.

요한복음의 수신자는 유대인들이나 유대인 개종자들로 봅니다. 요한복음이 신약의 모든 책들 중에서 구약을 가장 폭넓게, 가장 많이 암시하고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약을 아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줌으로써 모르고 있던 의미를 깨닫게 하고자 의도한 책이라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입니다. 구약을 모른다고 요한복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구약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을 때 더 풍성하고 깊은 이해가 가능하도록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요한복음에 대해 "어린아이가 헤엄치며 놀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한가 하면, 코끼리가 익사할 정도로 깊다"라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라 불리는 다른 세 개의 복음서와 여러 면에서 다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묘사할 때 그분이 메시아라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을 피하거나, 그분의 신성에 대해 매우 완곡하게 표현하거나, ‘인자’라는 호칭과 같은 매우 미묘한 표현들을 사용합니다. 마치 읽는 이들에게 ‘당신은 이런 분을 누구라고 하시겠습니까?’라고 반문하는 듯합니다. 공관복음은 논리를 펴는데 있어 귀납적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요한복음은 연역적 접근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합니다. 서문부터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1:1-18), 창조자이시며(3절), 성육신하신 분이며(14절), 독생하신 하나님이심(18절)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비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담대하며 적극적으로 표현합니다. ‘모세를 믿었으면 나를 믿었으리라‘(5:46)부터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8:58)는 표현까지 거침없이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I am)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시는데(4:25-26; 8:24, 28, 58; 13:19 등), 이것은 구약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표현입니다(출 3:14). 예수님이 ‘내가 곧 하나님이다’라고 주장한 이 표현이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으로 다가왔을까 상상해 보십시오.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그러한 관점에서 그분의 가르침을 이해하며, 그분을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크게 둘로 나누어 1장부터 12장까지를 ‘표적의 책’(The Book of Signs)으로 13장부터 21장까지를 ‘영광의 책’(The Book of Glory)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표적의 책은 7개의 표적으로 유명합니다. 가나의 물을 포도주로 바꿈(2:1-11), 가버나움에 있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4:46-54),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치심(5:1-9), 5천명을 먹이심(6:5-14), 물위를 걸으심(6:16-21), 눈먼자를 고치심(9:1-7), 베다니의 나사로를 살리심(11:1-45)의 기적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임을 알리고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반면 ‘영광의 책’에서는 최후의 만찬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그리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의 기독론으로 알려진 ‘7개의 나는(Seven I am)~이요’라는 표현도 유명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사용하신 7개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비유적 표현들로, “나는 생명의 떡이요”(6:35), “나는 세상의 빛이요”(8:12), “나는 양의 문이요”(10:7), “나는 선한 목자요”(10:11, 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요”(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14:6), “나는 포도나무요”(15:1, 5)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우리가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보통 초신자들에게 요한복음을 먼저 읽기를 권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을 믿고 영생을 얻기를 바라는 사도요한과 동일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요한복음 1~12장 개요 John 1-12 - YouTube

◇ 바이블 프로젝트 요한복음 13~21장 개요 John 13-21 - YouTube

 

************ 사도행전 ************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복음의 저자와 동일합니다. 인칭에 신경을 쓰고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어느 부분에서 인칭이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3인칭으로 전개되다가 ‘우리’라는 1인칭으로 바꾸어 이야기를 풀어가는 곳이 나오는데, 이 부분들은 저자인 누가가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에 직접 참여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다른 곳과 구분하여 1인칭 복수인 ‘우리’라는 표현을(소위 ‘we’ passage라 알려짐) 사용한 것입니다. 이런 구절들이 사도행전 전체에서 97절이 나옵니다(16:10-17; 20:5-21:17; 27-2장). 골로새서 4장 14절의 ‘의사’인 누가와 동일인물로 알려져 있는 누가는 이 책의 저자일 뿐 아니라, 사형집행을 앞둔 사도바울의 곁을 끝까지 지켜주기도 한 사람이었습니다(딤후 4:11). 사도행전은 누가가 누가복음에서 밝혔듯 ‘자세히 미루어 살피는’(눅 1:3) 노력을 통해 얻은 자료들과 자신의 여행 기록을 더해 엮은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도행전은 기독교의 중심이 유대인 주도의 예루살렘에서 이방인 세계의 중심인 로마로 이동해 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령의 주권적 역사와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기독교를 일종의 유대주의의 완성이라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함으로, 새로 시작하는 기독교의 합법성을 주장합니다. 이를 통해 애당초 부당하게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님 이시기에 그 분을 쫓는다는 이유로 박해 받는 것은 정당치 않음을 주장하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또한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불식시키고, 데오빌로와 같은 고위층 기독교 초신자나 구도자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호의적으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이러한 변증적 의도 외에도 사도행전에는 다른 강조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장과 확산을 경험하고 있는 교회와 구성원들을 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저항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은 무산될 수 없으며 이 땅에 시작된 교회는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을 확신하게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자신감’은 이것을 읽는 모두에게 미래를 향한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제일 유명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는 1장 8절 말씀은 사도행전의 틀과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땅끝까지 복음의 지경을 넓혀 가는 모습이 사도행전 전체 핵심 내용입니다. 성령의 주권과 간섭 하에 어떤 박해와 훼방이 있어도 복음 사역은 지속적으로 성공함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은 이야기를 풀어가는 주요 대목마다 6장 7절의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 하니라”와 같은 ‘승리를 축하하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예: 9:31, 12:24; 13:48; 16:5; 19:20; 28:31 등).

또한 사도행전에서는 두 명의 특별한 사도를 대비하여 다룹니다. 사도베드로와 사도바울입니다. 사도행전을 13장을 기점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전반부에는 베드로 사도가, 후반부에는 사도바울의 역할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유사한 사건들을 통해 두 사도를 의도적으로 대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사람을 고침’(성전 미문 앞, 3:2-8; 루스드라, 14:8-12), ‘특이하고 특별한 치료 능력’(베드로의 그림자까지, 5:15;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 19:12), ‘마술사를 제압’(사마리아의 시몬이라는 마술사, 8:9,18; 바보에서 바예수라는 유대 마술사, 13:6), ‘죽은 이를 살림’(욥바에서 도르가, 9:36-40; 드로아에서 유두고, 20:9-12), ‘기적적으로 옥에서 풀려남’(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짐, 12:7; 빌립보 옥중에서 지진과 함께 매인 것이 다 벗어짐, 16:26) 등 두 사도는 유난히 유사한 사건이나 기적을 행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이방인의 사도이자 교회를 확장한 사도바울의 권위를 베드로의 권위와 대등하게 보여주고자 한 의도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결론이 맺어지지 않은 상태로 급격하게 끝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울이 2년 동안 로마 감옥에 갇힌 채 황제 가이사 앞에서 재판 받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마지막 장면입니다. 누가는 사도바울이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신학적 의미에서 보자면 이것은 당시 초대교회에서 시작한 세계복음화를 후대 교회가 이어 완성시켜야 한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성령의 역사는 지속되며, 그것을 믿고 도전하는 이들을 통해 사도행전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모두는 ‘사도행전 29장’을 계속해서 써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사도행전 1~12장 개요 Acts 1-12 - YouTube

◇ 바이블 프로젝트 사도행전 13~28장 개요 Acts 13-28 - YouTube

 

************ 로마서 ************

 

로마서는 사도바울에 의해 쓰여졌습니다. 로마서 내용에 따르면 바울은 여러 번 로마 방문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가지 못했습니다(1:13; 15:22-24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로마교회를 방문하고 싶다는 사실을 말했으며, 로마 성도들에게 자신의 방문을 준비시키고자 이 서신을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서신이 쓰일 당시는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의 끝무렵에 들어선 때였습니다(행 20:1-5). 주후 57 또는 58년경 고린도에서 썼을 것입니다(롬 16:1참고). 그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예루살렘의 성도들 중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모금 사역 중이었습니다. 그는 전도 여행 중 많은 사람들로부터 로마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로마서 16장에 언급되어 있는 수많은 성도들의 이름은 직접 로마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곳의 교회에 대하여 잘 알 수 있도록 도와준 이들일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 방문이 멀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자 비서 격인 ‘더디오’를 통해 로마서를 작성하여 보내게 된 것입니다(롬 16:22).

무엇보다 로마서는 그가 로마 교회를 방문하기 앞서 그곳의 성도들이 믿음에 굳게 설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1:11, 15). 또한 방문 후에 계획하고 있었던 스페인(서바나) 선교의 재정적 후원을 받으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15:24, 28). 유대기독교인들을 돕기 위해 모금하는 상황이었기에 이방인이 다수였던 로마교회의 기독교인들에게 자칫 오해를 살 수 있었습니다. 이를 염두에 둔 듯, 사도바울은 인종까지도 초월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을 강조합니다.

로마서의 특징을 논하기 전에 먼저 다루어져야 하는 것은 ‘과연 누가 로마 교회를 세웠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로마서를 보면 사도바울이 로마 교회를 세우지 않았음은 자명합니다. 그렇다고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베드로 사도가 로마 교회를 세운 것도 아닙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역사적 사료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로마의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Suetonius)가 주후 49-50년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 때 ‘그리스도(Christus를 Chrestus라고 잘못 기록)’라 불리는 자의 선동으로 로마에서 폭동이 일어나 로마에 살던 유대인들을 로마 밖으로 다 축출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참고: 행 18:2). 이러한 비기독교인 역사가의 기록은 폭동의 주동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오해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로마 교회는 사도들이나 로마인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기보다는,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 개종자들이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한 후 로마로 돌아와 세운 것이라 결론 내리는 것이 가장 합당합니다(행 2:10).

로마서 1장 12절의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는 표현에 나타나듯, 로마서는 ‘복음의 성격‘에 대한 거대한 논문과 같은 책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를 논문이라고 본다면 논문의 주제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일 것입니다. 핵심구절은 1장 17절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입니다. 이는 종교개혁가인 마틴루터를 변화시킨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에 나타난 ’의로움, 믿음, 삶’이라는 세 개의 핵심 주제는 로마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인간의 죄성에 대해 로마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3:10)라고 명확하게 지적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현재 모습입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행위나 유대교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길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입게 되는 길입니다(3:24).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3:22). 하나님께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들을 위한 속죄물로 보내주신 것, 그것이 기쁜 소식 즉, 복음의 핵심입니다. 믿음을 통해 어느 누구나 의롭다고 칭함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이신칭의’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서신은 단순히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12장부터는 믿음이 어떻게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가를 강조합니다. 한 마디로 ‘의를 입은 자’로서 걸맞은 행함을 매일의 삶 속에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12-15장). 삶과 분리된 교리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인 ‘동사형 믿음’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로마서 앞 부분에서 의인이 ‘믿음으로만 산다’고 한 말을 믿음 후에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받는다는 의미로 오해한 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이 필요합니다. 로마서의 뒷부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3:14)라고 하면서 우리의 ‘삶’이 예배임이 강조되어 있음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12:1).

◇ 바이블 프로젝트 로마서 1~4장 개요 Romans 1-4 - YouTube

◇ 바이블 프로젝트 로마서 5~16장 개요 Romans 5-16 - YouTube

 

************ 고린도전서 ************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지협에 위치한 고린도는 지중해의 동서를 연결하는 묘한 지형으로 인해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 중심지로서 물질적인 번영을 누린 도시입니다. 현대에도 이 두 곳을 연결하는 고린도 운하는 세계 3대 운하(수에즈, 파나마) 중 하나로 절경을 이룹니다. 고린도는 서쪽으로는 이오니아해와 이탈리아로 향하는 레카이온 항구, 동쪽으로는 아테네를 바라보면서 에게해로 나갈 수 있는 겐그레아 항구가 있어 각각 아시아와 이탈리아로 연결되었습니다. 또한 1세기 중엽 해방된 노예, 퇴역군인, 상인, 무역상 등이 고린도로 흘러 들어왔고 잡다한 인종들이 모여 살면서 활기 넘치는 신흥도시의 모습을 띠고 있었으며 물질주의적 사치스러움이 넘치는 도시였습니다. 아프로디테신전을 비롯하여 여러 신전들과 종교창녀들로 인해 관능적 생활방식과 방탕한 삶을 즐기는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고린도는 사도바울의 두 번째 선교여행의 중심지로 그곳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렀으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만나게 됩니다(행 18:11). 그렇게 탄생한 고린도교회는 비교적 부유한 교인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으나 교인 대부분은 도시 중심가에 거주하는 최하층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쓰기 이전 사도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적어도 한 통의 편지를 교인들에게 보냈는데, 안타깝게도 그 편지는 신약성경에 들어있지 않습니다(5:9). 사도바울은 이렇게 원거리로 서신을 주고 받으며 목회를 했고, 고린도전서는 그가 에베소에 머물면서 쓴 것으로(16:8) 주후 54-55년경으로 추정됩니다.

고린도전서를 쓴 직접적 발단이 된 두 가지를 서신의 내용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1장 11절의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이 사업차 에베소에 갔다가 바울을 방문해서 고린도교회가 여러 가지 분쟁으로 풍비박산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전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고린도교회에서 보낸 일행(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이 가져온 헌금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16:17) 그들이 가져온 서신에 담긴 여러 의문들에 대한 답변을 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자주 등장하는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7:1, 25; 8:1; 12:1; 16:1)와 같은 표현들은 바울이 어떤 질문에 대해 답을 주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고린도 교회는 권력 투쟁과 연관된 문제로 인해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교인들 사이에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들이 편애하는 사도들을 중심으로 당을 지어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와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다투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 ‘고린도 사람처럼 행하다’라는 말이 ‘성적으로 부도덕하다’는 의미의 대명사였는데, 이러한 세속적으로 퇴폐한 생활방식과 성적 문란함이 교회에도 침투해 있었습니다. 그들 안에 의붓어머니와 동거하는 근친상간의 문제가 있었으며, 창녀와 관계를 맺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고린도전서는 다른 어떤 서신보다도 성(性), 결혼, 이혼, 독신 등 성윤리에 대해 자세히 다룹니다.

그 외에도 교우들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 툭하면 이교도 법정에 가서 소송하는 문제(6장), 우리나라와 같이 고사나 제사가 만연한 문화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는 문제(8장), 먼저 온 자들이 성만찬에서 배를 채워서 뒤늦게 온 가난한 자들은 만찬에 참여하지 못하고 음식이 없어 굶는 형식적 예배의식의 문제(11장), 부활신앙을 부인하는 자들의 문제(15장) 등 각양 각색의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으며 고린도전서는 이런 이슈들을 하나하나 다루어 나갑니다.

교단을 나누고 교회와 교인들을 분열시키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가르침은 고린도전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주제입니다. 사도바울은 서로를 유익하게 하려고 은사를 준 것임을 주지시키며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가르치는데, 그것이 ’사랑장’으로 유명한 13장입니다. 그는 영적 은사를 구하며 살되, 그 모든 것이 ‘덕을 세우기 위해’(14:26) 그리고 사랑의 영 안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학문적인 이슈들이 아니라 자신들이 처한 문화 속에서 매일 당면하는 문제들에 대해 성경적인 답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어떻게 신앙을 삶에 적용할 수 있는지 알려주고, 때로는 친절하게 때로는 꾸짖으며 조언을 주기에 고린도전서는 신약에서 가장 실용적인 책으로 꼽히며 실천신학의 보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겉으로는 그들의 문제가 현대의 교인들이 세속적인 환경에 살면서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과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어 보이나, 내용을 살펴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또한 고린도전서를 통해 실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기를 바랍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고린도전서 개요 1 Corinthians - YouTube

 

************ 고린도후서 ************

 

사도바울은 3차 선교여행 도중 마게도냐에서 고린도후서를 씁니다. 내용으로 보아 고린도전서와 시간차가 크지 않을 때 쓰여졌을 것입니다. 서신 교환을 통해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일이 실패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편지에서 원래 그들을 방문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었다고 밝힙니다. 그러나 방문이 성사되지 않았고, 대신 디도를 통해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디도가 그들에게 전달한 이 서신은 신약성경에는 없는 것으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이라는 7장 8절의 표현 때문에 ‘근심의 편지 또는 비통한 편지(sorrowful letter)’라고 불립니다. 그 편지에서 제시한 해결책이나 요구 사항들을 교회가 기쁘게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디도로부터 전해 받은 사도바울은 기쁨을 전함과 동시에 자신이 교회에 대해 안도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고린도후서를 쓰게 됩니다(1-7장). 또한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인들을 돕기 위한 모금 참여를 독려하며(8-9장) 자신을 ‘대적하는’ 소수의 무리를 향해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하기 위한 목적도 포함되어 있습니다(10-13장).

고린도후서는 서신 자체가 독특하고 뛰어난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신의 경지를 뛰어넘어 마음을 진솔하게 털어놓은 이야기로서의 독백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희석되지 않은 언어로 토로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자신의 의도를 오해하는 그들을 향해 가슴 아픔을 표현하며, 그들 간에 다툼을 일으키는 이들을 혹평하기도 하며, 자신의 개인적 고통을 통해 경험하는 하나님의 축복과 성숙하게 하심을 찬양하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놀랍게도 복음의 진수를 절묘하게 결합시켰다는 면에서 ‘훌륭한 문학 작품’이라는 표현이 전혀 과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방문하는 대신 서신을 보내기로 결정했다고 말한 후 사도바울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마음을 나누는데, 그 내용의 핵심은 자신이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약속된 새 언약(렘 31:31-34; 겔 36:22-32)을 논하는 것이 고린도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새 언약의 핵심은 돌판에 새겨진 외적인 율법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이며(렘 31:33),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입니다(겔 36:27). 그 결과 사도바울을 포함한 하나님의 일꾼들은 ‘그리스도의 향기’(2:15)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옛 언약은 유효하지 않다고 말하며 새 언약의 영광을 논하면서 복음에 대한 가르침을 더합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차이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가장 커다란 차이일 것입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4:18).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외적인 것을 주장하는 일에 마음이 쏠려 있었으며, 10-12장에서 언급된 ‘큰 사도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의 잘못은 단순히 사도로서 사도바울의 권위에 도전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전해준 복음의 진수를 왜곡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새 언약에서 새로운 마음이 그토록 중요한 개념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도로서의 권위를 통해 서신의 마지막까지 강하게 경고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약하고자 함이 약함으로 이해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13:4)는 것이 그가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옳은 자인가’가 아니라 ‘옳은 것 즉 선한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13:7). 서신에서 그들을 향해 강한 어조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들을 넘어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세우기 위함이며 그것이 바울에게 주신 사도의 권한임을 분명히 합니다(13:10). 우리도 이 서신을 읽으며 새 언약 안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세움을 받기를 원합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고린도후서 개요 2 Corinthians - YouTube

 

************ 갈라디아서 ************

 

‘갈라디아‘는 어느 특정한 도시나 장소가 아니라 사도바울의 1차 선교여행에서 소아시아지역에 속한 어떤 지역을 지칭합니다. 이런 면에서 특정 교회에 쓰여진 다른 서신과 차이가 있습니다. 서신의 내용이나 사도행전과의 연관성을 통해 볼 때 갈라디아서는 사도바울의 서신들 중 가장 먼저 쓰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 지역의 교회들은 거짓 가르침을 전파하며 ‘유대주의자’(Judaizers)로 불리는 교사들로 인해 신앙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 ‘유대주의자’라고 불리는 무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일반 유대인들과는 다르게 초기 기독교 내에 있었던 특정한 유대인 무리였습니다. 그들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지키거나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율법에 온전히 헌신하는 것이 그리스도에게 회심했다는 최고의 표시라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를 ‘그리스도 + 모세주의’라는 종교적 체계로 만들려고 시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믿음 + 철저한 율법 준수’라는 주장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완성된 구원의 충분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동시에 윤리적 삶의 원동력이 되는 성령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통렬히 반박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신앙+율법주의’ 사상을 새 메시지이자 다른 복음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복음은 절대로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그리스도 + 모세’ 형식인 율법체계에서 나온 운동이라 여기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할 것이 아니라 단지 ‘그룹에 속할 것’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떠나 너무나 쉽게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에 넘어간 교회들을 바로 잡기 위하여 이 서신을 씁니다. 그러다 보니 갈라디아서를 쓸 때 사도바울의 감정이 얼마나 격했는지 서신의 시작부터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다른 서신과는 달리, 갈라디아서에는 소위 ‘외교적’이라 할 수 있는 ‘칭찬 문구’가 전혀 없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상황이 ‘실망’을 뛰어넘어 ‘의로운 분노’의 감정’까지 불러일으켰음을 나타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향한 사도바울의 격한 감정은 5장 12절에서 ‘할례를 요구하는 이들이 할례 정도가 아니라 칼이 더 깊이 들어가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한다’는 과격한 표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서신의 끝부분에 ‘이후로는 누구든지 이런 일들로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6:17)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이러한 감정의 진솔함과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갈라디아서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의 주장 중 특히 할례(2:3; 5:6; 6:12)와 음식에 대한 법을 다룹니다. 음식에 대한 것은 무엇을 먹느냐와 누구와 먹느냐(2:11-14)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러한 율법을 이방인들에게도 요구하는 것은 민족주의적, 인종적 편견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율법에 대한 무효함을 논한다고 해서 율법의 조문이나 도덕적 규칙의 선한 기능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함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것을 더하여 기독교를 변질시키기 때문에 율법주의를 배척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문제는 초대교회가 초창기에 겪어야 했던 문제였습니다. 교회에 이방인들이 많아지면서 이방인들과 율법과의 관계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과감하고도 확실한 답을 제시해줍니다. 우리 또한 거기에 대한 확실하고도 명료한 답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겠습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갈라디아서 개요 Galatians - YouTube

 

************ 에베소서 ************

 

에베소서는 사도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쓴 옥중서신입니다. 로마제국 아시아 지역의 주요도시인 에베소는 해상과 육상의 무역로가 교차되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터어키 서부해안에 있던 항구도시입니다. 특히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풍요의 여신 아데미 신전이 그 위용을 자랑하여 항상 수많은 순례자들이 각 지역에서 모여들었으며, 신전 주변에는 숙박업을 하거나 기념품을 파는 자들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현대에도 에베소 유적지는 끊임없이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루는 곳입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에베소교회는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3년을 머물면서 눈물로 목양한 교회입니다(행 20:31).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사도바울이 오래 머물렀기에 개인적으로도 특별한 관계를 지닌 교회이며, 사도바울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가 그곳에서 사역을 할 정도로 지속적으로 사도바울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곳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에베소서가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에베소 교회의 특정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해당되는 특정한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그 당시 어디서나 관심을 가질만한 일반적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많은 교회들이 서로 회람하며 돌려 읽도록 의도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3년이라는 세월을 사역했음에도 다른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 일반적으로 나오는 지인들을 향한 인사가 에베소서에는 없다는 사실때문에 이러한 추측은 더욱 힘을 얻습니다.

에베소가 당시 소아시아 여러 교회들의 중심이었고 주위 교회들의 모교회였으며 로마제국의 주도시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이 추측은 타당합니다. 아마도 골로새서와 빌레몬서를 가지고 두기고(엡 6:21-22)가 골로새를 향해 지나가는 길에 에베소에 있는 교회들에게 에베소서를 전했을 것입니다. 성경의 순서상 나중에 나오기는 하지만 골로새서를 읽어 본 사람들이라면 골로새서의 많은 부분이 에베소서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 또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있었을 때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열 두 명쯤 되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고(행 19:1-7), 두란노 서원에서 바울이 날마다 주의 말씀을 가르쳤으며(행 19:8-10), 병을 치료하고 악귀를 쫓는 놀라운 기적을 행했으며(행 19:11-12),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자복하고 마술 책을 불사르는 일들이 일어납니다(행 19:17-20). 또한 데메드리오라하는 은장색의 주동으로 ‘아데미’여신의 이름을 외치며 소동을 일으켜 바울을 대적하는 일도 당합니다(행 19:23-41).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있는 이방 기독교인들의 위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가르칩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원래부터 준비된 하나님의 계획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야 사도들에게 알려졌으며, 이처럼 창조 전부터 계획된 새로운 방향에 대해 설명하고자 이 서신을 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한 하늘의 능력을 부여 받았는데, 그러한 특권에는 내적으로는 거룩한 삶, 외적으로는 복음의 전파라는 선교적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 또한 강조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쓴 서신들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동사와 명사를 합쳐 107번 사용하는데, 그 중 19번이 에베소서에서 나옵니다. 무려 전체의 6분의 1에 해당되는 분량입니다. 에베소서는 앞 부분부터 사랑으로 시작해서(엡 1:4, 6) 사랑으로 끝납니다(엡 6:23-24).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에베소 교회를 향해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책망하십니다. 어디서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견책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사랑'을 그토록 강조했건만 결국 그 첫 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가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첫 사랑은 어떠한지가 따끔하게 다가오는 부분입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에베소서 개요 Ephesians - YouTube

 

************ 빌립보서 ************

 

빌립보서는 사도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쓴 옥중서신입니다. 빌립보는 사도바울이 마게도냐 사람이 와서 도와달라는 환상을 보고 간 마게도냐 지방의 첫 도시였으며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유럽 대륙의 첫 교회였습니다(행 16장).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역의 동쪽, 에게해의 북쪽 끝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빌립보에서 바울은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 그녀의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치료한 것으로 인해 많이 맞고 감옥에 갇힌 후 거기서 만난 간수를 구원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그 지역에 있는 도시에 갔으나 박해와 추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독특한 인연 때문인지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특별히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에 그들은 쓸 것들을 공급하며 옥바라지를 도왔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그런 정성을 감사히 여겨 일종의 ‘감사 카드’처럼 빌립보서를 썼으며 다른 편지에서도 그런 사실을 언급합니다(빌4:16; 고후 11:9). 그러기에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내용이 교리적이라면, 상대적으로 빌립보서는 간증적이고 실천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그들의 이러한 사랑과 헌신에 대한 사도바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으며 빌립보 교회를 향한 감사와 칭찬이 가득합니다. 바울은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려서 성도들의 걱정을 덜고 자신으로 인해 맺어진 열매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특히 그가 자신의 상황을 알려주는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온전한 헌신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함이라”는 1장 20절의 고백 속에서 사도바울이 복음에 대해 어떤 자세로 살았는지, 죽음을 앞에 두고 무엇에 최고의 소망을 두고 살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의 선물을 가져온 이는 에바브로디도입니다. 그는 죽을 병에 걸려 모든 이들을 염려시키다가 회복합니다(빌 2:25-30). 그가 나은 후, 그를 빌립보로 돌려 보내며 보내준 선물에 대한 감사와 함께 그들 가운데 있는 다툼이나 경쟁심과 같은 내부적 갈등(2:3-4; 4:2) 및 ‘유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를 담아 서신을 보냅니다. 또한 디모데의 빌립보 방문 예정과 자신 또한 방문하고 싶다는 소원을 알리며, 교회 내부적으로 갈등을 겪는 상황에서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줄 것을 격려하고 권면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쓴 것 입니다.

빌립보서는 크리스천 삶에서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기쁨’의 중요성입니다. 빌립보서에서는 ‘기쁨’이라는 단어가 명사형과 동사형을 합쳐 10번이상 쓰였습니다(1:4, 18[2번], 25; 2:2; 2:17-18[4번], 28; 3:1; 4:1, 4 [2번]; 4:10). 바울 서신뿐 아니라 신약 성경 전체의 어떤 책보다도 기쁨과 감사에 대해 언급이 많습니다. 사도바울이 감옥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렇게 기쁨과 감사에 넘친다는 것은 그의 믿음이 얼마나 깊은지 잘 드러내줍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기도(1:4)와 사역의 열매(4:1)에서는 물론, 고통과 죽음을 직면하는 상황에서도(2:17) ‘기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믿는 자들에게도 믿음으로 주님과의 교제 안에서 기뻐할 것을 격려하고 있습니다(1:25; 3:1; 4:4). 사도바울이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3:17)는 말씀은 ‘기뻐하라’는 문맥에서 나온 것입니다.

둘째는 성도간의 교제와 연합의 중요성입니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1:27)고 권면합니다.

빌립보서는 주후 61-63년경 쓰여졌고, 옥중 서신들 중 가장 나중에 쓰여졌습니다. 서신 속 ‘복음이 온 시위대 안에 전파되었다’는 표현이 사도바울이 옥에 갇혀 지낸 때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음을 시사하기 때문입니다(1:13). 삶에서 '기쁨'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까? 빌립보서를 읽고 힘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빌립보서 개요 Philippians - YouTube

 

************ 골로새서 ************

 

골로새서는 사도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쓴 옥중서신입니다. 주후 60-62년 2년 동안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쓰여졌으며 에베소서도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습니다. 두기고가 바울로부터 골로새서, 에베소서, 빌레몬서를 받아 각 목적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골로새는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약16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인구가 많고 번화한 도시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 3년이나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주변 교회의 지도자들은 다 바울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행19:10). 그런 의미에서 사도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니지만 간접 설립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사역하던 에바브라는 바울의 제자였는데, 골로새 교회를 개척하였고 빌레몬 오네시모 아킵보등이 교인이었습니다(몬 23, 골 1:7, 4:9 ,17). 사도바울은 골로새뿐 아니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 등 근방 교회의 개척 및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골 1:7; 4:12-13). 그는 골로새교회를 방문하기 원했으나 실제로는 한번도 방문하지 못했음을 서신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1:4, 8; 2:1).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골로새 교회의 리더인 에바브라가 그를 방문합니다. 에바브라는 바울에게 골로새 교회가 영적으로 진보하고 있다는 사실과 교회가 직면하고 있던 두 가지 위험에 대해 알립니다. 첫 번째는 이방인이 주를 이루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삶이 회심 전의 방식으로 빠르게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3:5-11), 두 번째는 그들이 이단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특히 두 번째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가르침을 펼쳐가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첫 번째 문제에 대한 답으로 귀결됩니다. 이단 문제의 핵심은 기독론(Christology)과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해 잘못 알고 있던 소위 ‘골로새 이단(the Colossian heresy)’들의 주장을 논박합니다. 이 이단들의 정확한 정체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영지주의적 가르침과 더불어, 이교의 철학자들 또는 철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유대인들, 심지어 에세네의 금욕주의자들이라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으나 딱 집어서 어떤 것이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초등학문”(2:8)을 가르치고 천사를 숭배하며(2:18), 금욕주의자(2:21)였던 것을 보아 당시 교회들을 괴롭힌 '원시 영지주의(Proto-Gnosticism)’의 한 지류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이단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합니다. 그러기에 골로새서는 성경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정확하게 가르치고 선포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것의 해답을 찾습니다.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한 적절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인 그를 통해 세상이 창조되었으며, 그의 희생적 죽음과 부활의 능력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이단의 중심이 되는 인간 철학과 종교 위험에 대한 경고도 함께 나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깊이 있게 이해할 때 골로새의 성도들이 옛 삶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과 성숙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도전을 줍니다. 이는 현대철학과 세속주위와 이단의 가르침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골로새서 개요 Colossians - YouTube

 

************ 데살로니가전서 ************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니아 지역의 수도로, 로마와 현대의 이스탄불인 도시를 거쳐 유럽의 동쪽을 연결하는 당시 군사용 상업용 도로망인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에 위치한 매우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약 20만 명이 살고 있었으며 헬라인들이 많았으나, 발단된 도시에는 늘 유대인 사업가들이 있었으며 특히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 회당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라는 도시의 이름은 카산더 장군의 부인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누이인 데살로니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입니다. 또한 데살로니가는 제 2차 세계대전 때 나찌가 그곳에 살고 있던 약 6만명의 유대인을 죽인 곳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이곳에 어떻게 사도바울이 교회를 세우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사도바울은 최소한 3번의 안식일 동안 유대인 회당에서 강론하며 사역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행 17:2-4). 그러나 그의 성공을 시기하는 유대인들의 소동으로 인해 디모데만 그곳에 남겨 놓고 혼자 베뢰아로 급히 도피하게 됩니다(행 17:10). 데살로니가 2장을 보면 사도바울은 그 짧은 기간 동안에도 손수 일을 하며 그들을 위해 사역을 했으며(2:7-11), 사역기간 중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 빌립보 교회로부터 두 번 재정적 지원을 받기도 합니다(빌 4:16). 사도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유사한 저항에 부딪혀 아덴으로 이동했을 때 거기서 디모데를 만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다시 데살로니가로 보냈다가(살전 3:1), 나중에 고린도에서 합류하게 됩니다(행 18:5). 이러한 성경의 기록을 토대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다녀온 디모데의 보고에 근거하여(살전 3:6-7)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전서를 썼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문제의 근원은 사도바울이 그곳에 머문 기간이 매우 짧았으며, 그런 것 치고는 양질의 교리적 가르침을 주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 간에 생긴 오해와 함께 발생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 입니다. 간단히 말해 데살로니가전서는 갑작스레 두고 떠나온, 어린 교회를 돕기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서신을 보면 그의 짧았던 방문에 대한 안타까움이 베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들을 간절히 보기 원한다는 말이 수 차례 나옵니다(2:8, 17-28; 3:10-11). 그들을 두고 갑자기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며, 다시 돌아가고자 했으나 그럴 수 없는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합니다(2:17-18). 또한 그들에 대한 궁금함이 디모데를 그곳으로 보낸 이유라는 것도 분명히 말합니다(3:1-5). 특별히 3장 10절의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라는 표현을 통해 양육에 대한 사도바울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심한 핍박 속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디모데의 보고에 따라 그들을 칭찬하며 “더욱 많이 힘쓰라”며 진보하기를 도전합니다(4:1).

서신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그들의 이해였습니다. 사도바울이 그곳에 짧게 무르면서 행한 가르침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것이 오해를 낳았고, 그것이 잘못된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었기에 재림 전에 죽은 자들은 그들의 죄에 대한 처벌을 받은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졌습니다. 재림 전에 죽은 자들은 재림 때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으며(4:13이후), 사도바울은 우리가 ‘휴거’라고 해석하고 있는 부분을 통해 재림하시는 주님과 그들이 하나가 될 것을 분명히 합니다(4:16-17).

또한 재림을 염두에 둔 ‘주의 날’을 논하며 깨어서 살 것을 도전합니다(5:6). 깨어 산다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 영역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개인적인 삶과 공동체적 삶의 영역에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4:1-12; 5:12-22). 이방인들의 무분별한 성적 기준을 따르려는 그리스도인들과(4:4이후) 교회 지도층과 평신도 간의 계층적 긴장(5:12이후)등의 영역에 있어서의 개선까지도 포함합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삶의 지침 구절로 그토록 유명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가 나옵니다. 재림이 궁금한가요? 말세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궁금합니까? 데살로니가전서는 거기에 대한 답과 도전을 줍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데살로니가전서 개요 1 Thessalonians - YouTube

 

************ 데살로니가후서 ************

 

사도바울이 보냈던 데살로니가전서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데살로니가후서가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데살로니가후서는 종말에 대한 오해로 인해 생기는 고질적 문제에 대한 첫 처방이 약효를 발휘하지 못하자 내린 두 번째 처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는 전서를 쓴 후 적어도 1년 안에 답을 한 것으로, 주후 5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며 사도바울의 초기 서신에 속합니다(행 18:5).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 다음 후서의 순으로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편지를 통해 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이 갈수록 심해져 희생자들이 절망에 빠지고 있다는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의 서신을 빙자한 거짓 서신들과(살후2:2) 잘못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이 점차 증가하는 것으로 보아 종말의 시기가 이르렀다고 믿게 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오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처한 자신의 삶을 회피하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하던 일까지 그만두고 재림만 기다리는 상황이 데살로니가전서를 쓸 때보다 훨씬 더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전서와 비교해 보면 그들을 향한 격려와 칭찬은 매우 짧습니다. 대신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주어지는 상급과 처벌에 대해 가르치면서 성도들이 핍박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그리고는 종말에 대한 주제로 급하게 넘어가는데, 그 이유는 도가 지나친 수준의 때 이른 종말론적 기대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습니다. 먼저 보낸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가르친 말씀 때문에 지나친 종말적 기대로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뎃전 4:13-18). 이러한 분위기에 취한 그들을 향해 사도바울은 종말, 즉 주의 날이 도래하기 전에 나타나야 하는 증거가 있다는 것을 가르침으로써 문제에 접근합니다(2장 1-12절). 전서에서의 말이 오해를 낳을 수 있었기에 균형을 잡아주기 위한 가르침이 더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재림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임박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면서 그들이 일상과 생업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며 산다는 것이 일상적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님을 말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질서와 균형을 다시 잡고자 합니다. 사도바울의 어조도 전서에 비해 매우 강경합니다. 한 예로 데살로니가전서 4장과 5장에서는 의무를 태만히 하는 사람들을 점잖게 꾸짖지만(뎃전 4:10-12; 5:12-13), 후서 3장에서는 그의 말에 순종하지 않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3:14)고 권하면서 매우 강하게 야단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뎃후 3:6-15). 또한 끝부분에 서신의 진실성을 강조하고자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3:17)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통해 당시에 이들을 혼동케 하는 거짓 편지도 나돌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 사도바울의 개척교회 교인들도 종말론 때문에 많은 혼돈을 겪고 우왕좌왕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에도 종말론으로 교회들이 시끄러웠던 역사가 많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에는 그에 대한 오해들을 풀어줄 사도바울의 정통적인 가르침과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데살로니가후서 개요 2 Thessalonians - YouTube

 

************ 디모데전서 ************

 

목회 서신이라 불리는 디모데전서는 당시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었던 디모데를 향해 쓴 서신입니다(1:3). 사도 바울은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디모데에게 가장 오랫동안 사역한 도시인 에베소를 맡겨놓았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인간 디모데는 루스드라라는 곳에서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믿음이 있던 어머니를 통해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배운 사람이었고(딤후 1:5; 3:15), 사도바울과 인연을 맺기 전에도 다른 믿는 자들로부터 ‘칭찬 받는 자’(행 16:2)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디모데는 끝까지 변치 않고 사도바울 제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한 신실한 사람이라는 좋은 모델로 남아 있습니다.

그가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에베소는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온갖 그리스 철학자들과 그 철학을 업고 등장하는 다양한 기독교 이단들이 서서히 싹 트고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또 아데미라는 여신을 수호신으로 여기고 그녀를 위해 세운 거대한 신전을 도시의 자부심으로 여기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24절에 기록된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라는 표현을 통해 당시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의 관광객들도 남아 있는 에베소 유적지의 규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입니다. 복음 사역을 펼치기에 결코 쉽지 않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상황에 있는 디모데를 향하여 가르침에 굳건이 서서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지시합니다(1:18; 6:12).

하나님의 가족들로 구성된 교회는 이 세상과 많은 면에서 구별되어야 합니다. 감독이라고도 불리던 장로(목사도 장로의 일부임)는 교회의 리더역할을 감당하며 질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숙함과 본이 되는 삶을 요구하고 있으며 특히 가르치는 일을 잘하는 이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3:2). 신약이라는 정경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구전, 즉 말로 전해지는 상황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가르치는 자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함께 섬기는 집사들도 선택하는 데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성도 간에도 하나님의 집에 속한 가족들이기에 서로를 존중하며 예의 있게 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배 또한 질서의 하나님의 모습을 담아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는 신약에서 가장 논쟁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 나옵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11절),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12절),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15절) 등은 겉으로 보기에 “남성우월주의적”이며 심지어 “여성 비하적”이라고 비난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21세기적 시각일 뿐 전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들은 당시 역사적 상황과 에베소라는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아데미라는 여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곳이라 여사제 또는 종교창녀가 많았을 것이기에 그들과 의도적으로 구분하기 위해 유난히 여자들에게 외적인 단정함을 강조한 것입니다(2:9). 또한 히브리 문화나 헬라 문화에선 여자가 가르치는 일이 전혀 허락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여자와 남자가 하나님 앞에서 차별이 없다는 것을(예를 들어 갈 3:28) 가르치던 기독교라 하더라도 당시의 그런 문화적 상황에서 너무 급하게 여자들이 리더의 위치에 올라가는 것은 결코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해산함”이라는 부분은 정관사가 있기 때문에 단순 해산이 아니라 ‘원시복음’이라 불리는 창세기 3장 15-16절과 연결하여 이해되어야 하는데, 메시아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하와에게 약속되었던 자손의 탄생’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목회서신에서는 예외 없이 한 가지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바로 복음 전파라는 큰 틀에서 모든 것을 볼 것을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큰 틀을 염두에 두고 디모데전서를 포함한 목회서신들을 읽는다면 많은 부분이 더욱 명쾌해질 것이며 당시 사도바울과 그의 제자들이 복음전파를 위해 쏟은 애정과 열정이 우리에게 깊은 감명과 도전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디모데전서 개요 1 Timothy - YouTube

 

************ 디모데후서 ************

 

목회 서신이라 불리는 디모데후서는 성경에 기록된 사도바울의 13개 서신 중 가장 마지막에 쓰여진 것입니다. 서신의 시작 부분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이라고 말하는데, ‘생명의 약속’이라는 표현이 서신 끝부분에 있는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4:6)와 겹치면서 읽는 우리로 하여금 그가 자신의 죽음과 그 이후의 약속을 말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디모데후서가 다른 목회서신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이유를 이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이 시기에 사도바울의 사형 집행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의기소침해지면서 사도바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디모데를 향한 사도바울의 애뜻한 마음을 전하는 후서의 글이 그러한 심정을 엿보는 거울 역할을 합니다(1:4). 힘들어 하는 디모데를 향해 사도바울은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1:8)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디모데의 성격은 디도와는 반대로 여리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디모데전서 5장을 23절에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하는 것은 그가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하게 만들고, 다가오는 사도바울의 죽음 때문에 기가 죽은 듯해 보이는 것을 통해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그를 향해 두려움을 이기고 담대하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충성된 사람들”을 잘 세워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은 중요했습니다(2:1-2). 그러나 이들의 역할이 단순히 가르치는 것만은 아닙니다. 삶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하며, 특히 디모데는 리더로서 본이 되어야 했습니다(1:13). 모든 리더들은 자신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는 다양한 그릇들이 있듯, 각자 다양한 쓰임을 받습니다. 그릇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의 “용도”는 우리가 어떻게 준비하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2:21)고 말합니다.

또한 리더는 성경으로 무장되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3:16)고 가르칩니다. 그런 사도바울이기에 죽음을 앞에 둔 처지에서도 겨울이 가까이 오니(4:21) 따뜻한 옷과 함께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4:13). 이것이 어떤 책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에 책이 굉장히 귀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아마도 그 책은 그가 가장 아끼는 성경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사도바울은 끝까지 성경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서신의 끝으로 갈수록 죽음을 앞에 둔 사도바울의 비장함과 심적 외로움, 섭섭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배신한 ‘거짓 친구’인 데마라는 제자를 언급하는데, 데마가 세상을 사랑해서 사도바울을 버렸다고 말합니다(4:10).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사도바울을 버리고 떠나버린 그를 향한 섭섭함이 배어나옵니다. 그와 함께 있던 그레스게와 디도도 사역 차 다른 곳으로 가버려 누가만 함께 있다고 말합니다. 디모데에게 올 때 마가와 함께 오라고 말합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이면서 선교 여행 중 사도바울과 바나바를 다투게 만든 장본인 이기도 합니다(행 15:37-39). 이러한 마가를 향해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4:1)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데마의 배신과 온전한 회복을 이룬 마가는 대조를 이룹니다. ‘인생은 관계’라는 말이 있는데, 사도바울도 마지막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대 사도이지만 그도 한 사람의 인간이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 인생의 관계들은 어떠한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디모데후서 개요 2 Timothy - YouTube

 

************ 디도서 ************

 

디도서는 사도바울이 개척된 지 얼마 안된 그레데의 신생 교회의 리더인 디도에게 보낸 목회서신입니다(1:5, 목회서신 참고). 그레데는 일반 발음으로 크레타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스의 13주 가운데 하나이며 그리스에서는 가장 큰, 지중해에 위치한 아름다운 섬입니다. 디도는 이방인이었다가 기독교인이 된 자 입니다. 이는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이 헬라인 디도를 억지로 할례 받지 않게 했다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갈 2:1-10).

디도의 성품과 성격에 관해서는 고린도후서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 8절에서 디도는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호되게 꾸짖는 내용이 담긴 ‘눈물로 쓴 편지’(고후 2:4)를 교회에 전달한 제자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바울과 교회 사이에서 발생한 심각한 분쟁에서 조정자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편지의 내용이 얼마나 통렬했는지는 고린도후서 2-7장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마음 상태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불안하고 안절부절못한 상태로 고린도교인들의 소식을 기다립니다. 마침내 7장7절의 표현에 따르면 디도가 기쁜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고 나서야 그는 안심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성격의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고린도교회로 향했던 사람이 디도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디도의 모습은 그의 사역지인 그레데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디도서 1장 12절에서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는 부정적이며 거친 묘사를 통해 그곳이 얼마나 영적으로 척박하고 힘든 곳인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레데는 로마 제국의 정복 후 로마 정부에 항거하여 자주 민란을 일으켰던 곳이기도 해서 항상 불안하고 무질서하며 어수선했습니다. 이렇게 쉽지 않은 곳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리더들을 세우기에는 디도처럼 강하고 담대한 성격의 소유자가 어울립니다. 디모데후서에서 보여진 디모데의 ‘두려워하는 성격’과는 대조가 됩니다. 어떤 성격이 좋다 나쁘다기보다는 다양한 모습의 리더가 세워짐을 보게 합니다.

이렇게 쉽지 않은 곳에 세워진 교회였기에 리더를 제대로 세우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리더의 자격은 디모데전서에 나온 내용과 매우 유사합니다. 디모데가 사역하고 있는 에베소나 디도가 사역하고 있는 그레데는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세력들(1:10, 11; 2:15; 3:10)이 어디나 있었기에 기본적으로 교리적 자질을 갖춘 리더들을 세워야 했습니다. 또 그 신앙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세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1:9). 그레데의 역사적 배경과 기질을 염두에 두고 볼 때 누구를 헐뜯거나 싸움질을 하지 말고 온순한 사람이 되어서 모든 사람을 온유하게 대하도록 가르칠 것을 강조합니다(3:1-2). 이런 맥락에서 사도바울은 그레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른 교훈이 왜 필요하고, 높은 수준의 도덕적.사회적 행동이 왜 필요한지를 역설합니다(2:1-10; 3:1-3). 한 마디로 모든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 그 곳을 변화(transformation)시키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예: 2:14).

서신을 쓴 또 다른 목적은 바울이 니고볼리라는 곳에서 디도와 만나기를 요청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서신에서 아데마나 두기고가 그레데에 도착할 것인데 그들에게 그곳 교회를 맡기고 자신과 니고볼리에서 만나자는 뜻을 전합니다(3:12). 디도는 우리에게 사도바울이 직면했던 어려운 문제들의 해결사로, 어려운 곳에 교회를 세우는 강한 리더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디도가 그레데의 첫 번째 주교(bishop)가 되어 사역을 하다가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줍니다. 디도는 또 한 사람의 자랑스런 믿음의 선배입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디도서 개요 Titus - YouTube

 

************ 빌레몬서 ************

 

빌레몬서는 바울이 로마의 옥에 갇혔을 때 쓴 옥중서신에 속합니다(옥중서신 참고). 서신의 시작부분을 통해 볼 때 빌레몬은 집안의 가장이고 압비아는 그의 부인이며 아킵보는 아들이라는 의견이 유력합니다. 그들은 집안 전체가 집을 교회로 내놓은 채 신앙에 열심이었습니다. 빌레몬의 종으로 있다가 그의 돈과 물건을 훔쳐 도망친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15-16, 18-19절). 오네시모는 주인에게 들키지 않고 쉽게 숨을 수 있으며 매력적인 도시인 로마로 가게 되었고, 그 후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바울을 만나 신앙을 갖게 됩니다(10절). 바울은 그를 제자로 양육하면서 그에게 사역을 감당할 귀한 열정과 은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사도바울을 시중드는 귀한 일꾼으로 바뀐 것입니다.

빌레몬서는 한 때 죄인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완전히 새 사람이 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로 받아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 빌레몬에게 쓴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를 받아줄 것을 요청하는 이유는 오네시모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을 만 난 후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의미대로 ‘유익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11절). 사도바울은 오네시모를 그의 법적 주인인 골로새의 빌레몬에게 돌려보냄으로써 빌레몬이 그를 주 안에서 다시 형제로 맞이할 기회를 주고자 합니다(16절). 또 가능하다면 그 후 자유인이 된 그가 자신 곁에서 사역하게 하려고 의도합니다(14, 20-21절). 이것을 위해 사도바울은 오네시모가 그에게 입힌 재정적 손실을 친히 감당하겠다고 말합니다(18절). 빌레몬이 사도바울에게 입은 ‘영적 빚’을 은근히 언급하면서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21절).

이렇게 볼 때 빌레몬서는 주인에게서 도망친 한 노예를 위한 바울의 탄원을 담은 극히 개인적인 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웅대한 신학을 담은 그의 다른 서신과는 달리 빌레몬서에는 바울이 평소 가르쳤던 교리와 신학을 뒷받침하는 그의 인격과 사랑이 잘 담겨 있습니다. 도망친 일개 노예를 형제로 대접하면서 그가 용서받게 하기 위하여 참을성 있게 간곡히 허락을 구하는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빌레몬서를 읽으면서 이런 질문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주 안에서 형제로 맞고 사역을 위해 그를 다시 바울에게로 돌려보내라는 요청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상식적으로 추론하건대 바울의 요청은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만약 빌레몬이 바울의 요청을 거절했다면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을 담은 이 서신이 우리에게 정경으로 남지 않았을 것이며, 빌레몬은 마음이 단단하고 교만하며 모순적인 인물로 교회사에 남았을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용서받은 오네시모는 나중에 훌륭한 주교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빌레몬서는 사랑과 용서의 힘을 보여주는 작지만 소중한 책입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빌레몬서 개요 Philemon - YouTube

 

************ 히브리서 ************

 

히브리서를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저자가, 신앙을 포기해야 하는 위험에 처한 1세기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쓴 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히브리서 저자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을 내놓고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나바 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유독 구약의 제사에 대한 비유가 많이 나오는데다 바나바가 레위족이었다는 연결점이 한몫을 한 것입니다(행 4:36). 그러나 오리겐이라는 학자가 히브리서 저자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라고 말한 바 있을 정도로 저자 문제는 결론을 내리기 힘듭니다.

당시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신체적인 공격,’ ‘약탈’ 등의 위험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믿음 때문에 감옥에 갇혔고,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조롱을 받기도 했습니다(10:32-34). 이런 상황에서도 많은 이들이 모든 어려움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나,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초기의 충성으로부터 ‘뒤로 물러나’ 배교자가 되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타협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이 서신은 이렇게 심한 시험과 박해를 겪고 있던 모든 사람에게 진리의 정박지에 믿음의 닻을 튼튼히 내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꾸준히 유지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하고 안정된 상태로 나아가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2:1; 3:6; 6:1). 그러기에 서신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대속하심, 제사장직에 대한 훌륭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저자의 권면 중에서 가장 우선되는 것은 인내입니다. 저자는 수신자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의 인물 중 그들이 위대하게 여기는 아브라함과 모세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그가 ‘오래 참았다’는 것을 상기시키며(6:15), 모세는 비록 보이지 않을지라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놀라울 만큼 참을 수 있었음을(11:27) 언급합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인내를 따를 자는 없습니다. 그분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으로 인해 혹독한 시험과 적의에 찬 반대를 참을 수 있었습니다(12:2-3). 저자는 무엇보다도 선지자(1:1-2), 제사장(1:3하), 왕(1:8-14)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제시합니다. 그분을 통해 주어진 것은 유대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좋은’ 요소들이 가득하다고 주장합니다. ‘구원에 속한 더 좋은 것’(6:9), ‘더 좋은 언약’(7:22), ‘더 좋은 약속’(8:6), ‘더 크고 온전한 장막’(9:11), ‘더 좋은 제물’(9:23), ‘더 좋은 부활‘(11:35) 등의 표현을 통해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분명히 합니다. 성소를 논하는 부분에서도, 이들에게 보이는 성소는 하늘에 있는 성소의 그림자이며 모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통해 이것 또한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예수님께 드려진 희생제사는 구약의 어떠한 제사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완전히 다릅니다. ‘단번에’ 라는 표현을 통해 구약에서 날마다 드리는 제사와 구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단번에’ 자신을 드렸고(7:27),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9:11) ‘단번에’(9:11, 26, 28) 드리셨으며, 믿는 이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며(10:2), ‘거룩함’(10:10)을 얻게 되는 희생제물이 되셨음을 가르칩니다.

저자는 이러한 더 좋은 것을 알고 난 후 다시 옛 것으로 돌아가 버리는 행위는 무엇보다 어리석은 일이며, 엄청난 책임과 형벌을 자초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그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며(6:6),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10:29)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이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고 반문합니다(10:29). 결국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며(7:25),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구원을 온전케 하기 위해 두 번째로 나타나실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믿고(4:3; 10:39), 순종하며(5:9), 끝까지 견고하게 잡는(3:6, 14) 이들이 되어야 한다고 격려합니다. 히브리서는 특히 현재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성도님들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히브리서 개요 Hebrews - YouTube

 

************ 야고보서 ************

 

야고보서의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하나,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형제이면서 예루살렘교회의 리더였던 사도 야고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쓰여진 연대는 저자에 대한 의견만큼이나 추측이 다양하기에 확실하게 말하기 힘듭니다.

야고보서의 스타일은 서신 형태지만 공석에서 성도들에게 읽혀지도록 쓰여진 현대의 강의나 설교를 듣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서신의 수신자는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목회할 때 있었던 형제, 자매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사방으로 흩어져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야고보가 담임 목사의 심정으로 서신을 쓰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에 대한 핍박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1장). 서신은 그러한 핍박의 외부적 요소보다는 그들 간에 생겨나는 내부 문제들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합니다. 그들 가운데 졸부들이 생겨났고(2장과 5장), 신앙은 형식화 되어가고 있었으며(2장), 경제적인 이유로 성도 간에 차별이 생겨나면서 그들 사이에 사랑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2장). 이러한 모습은 현대교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서로를 향한 독설(3장)과 교제 상실(4장)까지 더해져 형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기독교가 공동체로 서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야고보는 이런 모습들을 책망하며 교회가 회복해야 할 본래의 성숙한 모습들을 강조합니다. 야고보서는 아무리 거룩한 교회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세속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우리는 이러한 동일한 일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야고보서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사도바울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롬 3:28)고 주장했는데, 야고보사도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4)라고 말해서 겉으로 보기에 서로 대치된 주장을 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문맥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두 사도는 서로 다른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유대교의 주장을 향해 ‘오직 믿음’을 주장하고 있는 반면, 야고보 사도는 구원 받은 자들이 지나치게 실천이나 행함을 무시하여 믿음을 단지 교리를 인정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구원받았지만 삶과 행위가 불신자들보다 못한 모습으로 전락해가는 자들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구원을 얻기 위해 한 행동은 무용하다고 보는 것이고, 야고보는 믿고 나서 그에 걸맞은 행동이 없다면 구원을 얻었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이 지목하는 칭의(justification)는 구원의 시작 단계, 곧 죄와 사망의 영역에서 거룩함과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 나타나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초기 단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말합니다. 반면에 야고보 사도는 히브리적인 개념으로 마지막 때에 궁극적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선언(declaration)’을 의도한 것으로 평소 삶에서 믿음을 얼마나 행동으로 실천했는지 여부에 따라 마지막 심판 때에 최후의 평가가 내려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야고보사도는 열매도 없고 행동도 없는 그리스도인, 소위 ‘무늬만’ 기독교인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은 서로 보완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관점 차이를 신학적 용어로 설명하자면, 바울은 ‘의로움의 전가’(imputation)를 말하고 있고, 야고보는 ‘의로움의 선언’(declaration)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지나치게 공부만 하고 놀지 않는 아이에게는 ‘좀 놀아라’라고 조언하면서, 놀기만 하는 아이에게는 ‘공부 좀 해라’라고 말한다고 해서 의견이 바뀐 것이 아니라는 주장과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서로 강조점이 다를 뿐이지 균형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면에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더라도 루터의 종교개혁 때, 구원에 대해 잘못된 이해가 지배적이었던 상황에서 ‘믿음‘에 강조를 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말씀들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었기에 루터는 야고보서를 그다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종교 개혁 시대가 지나고 새롭게 개혁되었던 웨슬리 시대의 교회가 다시금 생명력을 잃어버리자 ’행함‘에 강조를 둔 야고보서 말씀이 부각되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면(칭의) 칭의의 신분에 걸맞은 삶을 사는 것(행함)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의 메시지는 행함의 신학을 많이 잃어버린 현대교회에 많은 경종과 울림을 줄 것입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야고보서 개요 James - YouTube

 

************ 베드로전서 ************

 

베드로전서의 저자인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바벨론’에서 이 서신을 쓰고 있다고 말합니다(5:13). 요한계시록에도 등장하고 그 당시 폐허였던 느브갓네살 제국의 이전 수도인 바벨론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텐데, 그렇다면 과연 어디를 의미하는 것일까 생각하게 합니다. 신약의 다른 곳에서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서 마가가 로마에 있었다는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골 4:10; 몬 24), 베드로가 마가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므로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바벨론은 로마를 가리키는 암호 같은 이름이었다고 유추하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또한 종말론적으로도 바벨론은 믿는 자들을 탄압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을 것입니다.

서신의 수신자들은 현대로 말하자면 터키에 속한 타우루스 산 북쪽 다섯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입니다(1절). ‘흩어진’이라는 헬라어 단어에서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나왔으며 당시에는 예루살렘밖에 사는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베드로 서신에서 ‘천국을 떠나 사는 모든 믿는 자들’을 은유적으로 일컫는 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서신의 내용에 따르면 이들은 박해를 받고 있었으며, 네로 황제 때(주후 54-68)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단지 바울의 순교를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네로 박해 바로 전인 주후 64-65년 전에 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이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무시 당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어려움과 박해를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으며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며 그렇게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 서신을 쓴 것입니다. 사도베드로의 따뜻한 격려와 실질적인 가르침은 세속적인 문화적 갈등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의 모든 믿는 자들에게도 깊은 통찰력을 줍니다. 베드로전서는 적대적인 이방 땅에 파송된 그리스도의 대사들에게 쓰여진 안내서라고 이해하면 좋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올바른 모습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앞으로 다가올 영원한 영광에 대한 관점으로 현재 당하는 고난을 생각해 보라고 권면합니다. 영원에 비한다면 이 세상의 고난은 ‘잠깐’이라는 것입니다(1:6; 5:10). 그러기에 고난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주도적인(proactive)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단순히 관점을 변화시켜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극복하라고 권면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우리의 신앙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셨기에 우리도 그의 고난을 생각하며 이겨나가야 한다는 핵심적인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고 제시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면서 당하게 되는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며, 다가오는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그 기간은 ‘잠깐’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도베드로는 구약 속 하나님의 백성들과 현재 교인들과의 유사성을 부각시킵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교회도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거룩이 요구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가 핍박과 고난을 받는 것은 악한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고난은 신앙 생활을 해나가는 여정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이 경험했던 삶은 구약과 신약을 성경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현재 기독교인들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의를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집트에 살았던 요셉이나 바벨론에 살았던 다니엘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라는 사실을 다시금 분명히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신의 수신자들을 ‘거류민(aliens)과 나그네(strangers)같은’(2:11) 사람이라고 칭하는 부분이 더욱 더 우리에게 와 닿습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베드로전서 개요 1 Peter - YouTube

 

************ 베드로후서 ************

 

베드로후서의 주제는 ‘종말이 다가옴에 따라 어려움에 처하게 된 믿는 자들의 신실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서신을 쓸 때 서신의 수신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으로 인해 긴박한 위험에 처해 있었으며(2:1-3), 베드로가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1:14 “…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그가 순교한 시기는 일반적으로 주후 68년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3장 15-16절(“…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에서 이미 다수의 바울 서신이 발행된듯한 표현을 쓰고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베드로는 후서를 자신이 죽기 전 60년대 어느 시점에 전서와 같은 장소인 로마에서 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서신을 ‘둘째 편지’(3:1)라고 부르는 것을 볼 때 후서의 수신자는 전서의 수신자와 동일한 그리스도인 그룹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베르도후서에서는 베드로전서와 달리 환란과 핍박보다 이단으로 인한 가르침의 위험성이 더 큰 이슈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향하여 믿음에 대한 근거를 다시 기억나게 하며(1:12-13),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변함없이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이 서신을 썼습니다(1:15). 이들을 유혹하고 있는 이단들은 골로새서에서도 보았듯 초기 영지주의적 요소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육체는 어차피 더러운 것이기에 일종의 도덕무용론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의 영향력 하에 교인들 중 거룩하지 못한 옛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즉각적인 심판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삶을 인정하신다는 가르침이 돌아다녔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즉각적 심판을 하시지 않는 이유는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의 증거이며 강림이 늦춰진 것은 모든 이들이 회개하는 시간을 주고자 함이라고 가르칩니다(3:9).

베드로는 첫 번째 서신과 유사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고대하며 기다리라고 조언합니다. 인용하는 모든 구약의 구절들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소망과 신뢰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분의 재림이 확실히 있기에 백성들은 그것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베드로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전서와 달리 변화산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경험에 특별한 관심을 부각시킵니다(1:17-18). 존귀와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중요한 주제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유다서 4-18절의 내용 대부분이 베드로후서에도 담겨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둘 중에 어느 서신이 먼저 쓰여졌다거나 배후에 공통된 출처의 자료가 있다는 등 학자들이 다양한 주장을 하지만 어느 것이 맞는다고 확실히 결론 내리기는 힘듭니다. 오히려 단순히 수신자들이 처한 상황이 유사하기에 같은 내용이 담겼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베드로후서 개요 2 Peter - YouTube

 

************ 요한일서 ************

 

요한일서는 저자의 이름이 본문에 전혀 나오지 않으나 전통적으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직접 경험했다고 서신 앞 부분에 기록한 사도요한에 의해 쓰여졌다고 봅니다(요일 1:1-2). 서신의 권위로 보나 초대 교부들의 기록으로 보나 저자가 사도요한이라는데 큰 이견이 없습니다. 요한일서는 서신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다른 신약 서신들과는 달리 서신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 않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또 서신을 보낸 구체적인 장소나 대상이 전혀 나와있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당시 서서히 영향력이 커지고 있던 독특한 이단의 가르침을 직면하고 있던 기독교인들을 향해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이들 이단은 ‘적그리스도들’(2:18-26)이라 불렸으며 ‘영은 거룩하고 육은 악하다’라는 단순화된 이원론으로 성육신에 대한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초기 영지주의(proto-Gnosticism)입니다. ‘초기 영지주의’라고 말하는 이유는 서신이 쓰여질 당시 영지주의가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2세기 중반에 가서야 이들은 온전한 시스템을 갖추게 됩니다. 이들의 영향력에 저자가 내세운 영적 싸움의 전략적 특징은 대단히 목회적이며 전투적입니다. 그는 서신의 수신자들을 ‘나의 자녀들’(요일2:1), ‘사랑하는 자들’(요일 2:7)이라고 부르며,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2:26),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3:7)고 분명하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단들의 문제점을 세 가지의 초점으로 열거하면서 세 가지 테스트를 통해 이단인지 아닌지 여부를 결정하라고 말합니다. 첫째는 이단들의 신학적인 문제입니다.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는 자들은 이단입니다. 그들은 거룩한 영이 더러운 육으로 올 수 없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둘째는 도덕적 영역에서 의로운 행동이 사라진 불순종적인 삶의 모습을 지적하는 점입니다. 자신들은 ‘특별한 지식(Gnosis)’을 지녔다고 주장하며 자신들 가운데 있는 죄성자체를 부정하는 자들은 이단입니다. 셋째는 사회적 영역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그들에게는 형제를 사랑하는 모습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요한일서는 유독 형제사랑을 강조합니다.

요한일서의 역사적 배경을 다루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른 서신에 비해 역사적 상황과 연결할 수 있을 만한 정보가 극히 미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볼 때 세린투스와 그의 가르침인 세린투스주의(Cerinthianism)와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세린투스는 사도요한이 마지막 시간을 보낸 곳인 에베소 사람이었고, 그의 가르침이 요한일서에서 묘사한 이단의 가르침과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세린투스파와 그의 가르침에 관해서는 교부 이레니우스를 통해 전해지는데, 이레니우스는 사도요한의 제자로 알려져 있으며 에베소에서 활동했습니다. 그 당시 에베소에는 세린투스의 영향력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이레니우스와 세린투스 사이의 다음의 일화가 그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느 날 이레니우스가 목욕탕에 들어가다가 세린투스가 그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이곳을 빨리 피하자. 이곳에 진리의 원수인 세린투스가 있으니 지붕이 무너질지 모른다”고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세린투스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그는 예수가 다른 인간과 똑같은 존재로 세상에 태어났으며 차이점이 있다면 다른 사람보다 더 의롭고, 신중했고 지혜로웠다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세례 시에 ‘그리스도’가 비둘기의 모습으로 임하였으며, 그 후 예수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선포했고, 기적을 행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기 직전에 ‘그리스도’는 예수님을 떠나 버렸고 그래서 결국 예수 혼자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와 예수를 분리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는 영이기 때문에 고통을 받을 수 없다는 논리로, 예수의 모든 고난에 그리스도가 동참하지 않았다는 이단적 주장을 펼쳤던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요한일서 5장 6절의 말씀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의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예수님이신 동시에 그리스도이신 한 분의 모습으로 ‘세례’와 ‘수난’의 죽음을 받으셨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초기 영지주의라는 이원론적인 주장을 폈던 이단을 염두에 두고 요한일서를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형제사랑을 강조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는 유명한 말씀도 우리에게 울림과 도전을 줄 것입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요한1~3서 개요 1-3 John - YouTube

 

************ 요한이서 ************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의 두 서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당시 그리스도인 전도자들은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러 다녔는데, 종종 여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자인 램지(W.M. Ramsay)에 의하면 당시 여관은 더럽고 이와 벼룩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유명했으며, 여관 주인은 대체로 탐욕스럽고 사람들에게 존경 받지 못하는 직업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당시의 여관은 오늘날과는 아주 달라서 전도자들이 여행하면서 머물 곳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도 사도행전과 로마서에서 빌립보에서는 루디아에게, 데살로니가에서는 야손에게, 고린도에서는 가이오에게, 가이사랴에서는 빌립에게, 예루살렘에서는 나손에게 신세를 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행 16:15; 17:7; 롬 16:23; 행 21:8, 16).

요한이서는 이러한 당시의 상황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순회 사역자들을 영접해야 하는 일 자체가 위험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요한이서와 삼서는 이 같은 잠재된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는데, 순회 사역자 중 어떤 사람을 환영하고 강단에 세워야 하며, 어떤 사역자는 허락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이서가 이단적 순회 사역자를 구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요한삼서는 순회 사역자를 잘 영접하고 환영하는 것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요한이서는 신약에서 분량이 가장 짧은 책으로, 파피루스 한 장에 다 쓰였을 것입니다. “장로인 나는”이라고 소개하면서 저자가 수신자들이 잘 알고 존경하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연장자로서의 권위와 사도적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요한일, 이, 삼서의 저자가 모두 사도요한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순례 사역자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진위를 검증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에 ‘부녀와 그의 자녀들’(1절)이 수신자이며, 이것은 교회를 향한 표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요한이서에서는 진짜와 가짜 사역자를 구별하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요한일서에서처럼 그들의 메시지에서 기독론을 검증해 보는 것입니다. 예수를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로 인정하는지 아닌지의 여부가 중요한 검증 기준이 됩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그들의 동기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 진정한 순회 전도자들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과 비교를 위해 12제자들의 가르침을 모아 놓은 디다케(Didache)라는 1세기 말의 문서에는 더 세밀한 사역자 구별 요령이 흥미롭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들은 하루, 필요하다면 이틀까지 머물 수 있으나 만약 3일을 머물면 가짜 선지자이며, 다른 곳으로 떠날 때 여행에 필요한 만큼 먹을 것을 받을 수는 있으나 금전을 요구한다면 가짜이며, 성령의 영감에 따라 말한다고 하면서 다른 이들을 위한 모금 외에 추가 금전을 요구한다면 가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진짜 사역자들은 머물고 도움 받을 자격이 있으나, 일반 기독교인은 3일 이상을 거저 대접받을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만약 장시간 머물려고 한다면 스스로 벌어서 먹으라고 말해야 하며, 만약 이를 거절한다면 그리스도를 팔아먹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요한1~3서 개요 1-3 John - YouTube

 

************ 요한삼서 ************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의 두 서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당시 그리스도인 전도자들은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러 다녔는데, 종종 여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자인 램지(W.M. Ramsay)에 의하면 당시 여관은 더럽고 이와 벼룩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유명했으며, 여관 주인은 대체로 탐욕스럽고 사람들에게 존경 받지 못하는 직업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당시의 여관은 오늘날과는 아주 달라서 전도자들이 여행하면서 머물 곳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도 사도행전과 로마서에서 빌립보에서는 루디아에게, 데살로니가에서는 야손에게, 고린도에서는 가이오에게, 가이사랴에서는 빌립에게, 예루살렘에서는 나손에게 신세를 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행 16:15; 17:7; 롬 16:23; 행 21:8, 16).

요한이서는 이러한 당시의 상황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순회 사역자들을 영접해야 하는 일 자체가 위험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요한이서와 삼서는 이 같은 잠재된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는데, 순회 사역자 중 어떤 사람을 환영하고 강단에 세워야 하며, 어떤 사역자는 허락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이서가 이단적 순회 사역자를 구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요한삼서는 순회 사역자를 잘 영접하고 환영하는 것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요한삼서는 가이오라는 수신자에게 쓰여진 개인 서신이며 요한이서와 동일하게 “장로인 나는”이라고 보낸 이를 밝힙니다.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를 비교해 보면 메시지의 초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삼서는 이서와 유사하게 손님을 접대하는 것과 관련하여 진리와 사랑이라는 이슈를 다룹니다. 하지만 이서는 잘못된 가르침을 주는 사역자들을 집에 들이지 말라고 경고하는 반면, 삼서는 손님 접대하기를 거부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접대마저 방해하는 일과 그 일에 앞장서고 있는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에게 경고를 주는 내용입니다. 이런 면에서 요한이서와 삼서는 손님 접대라는 주제를 상호 보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서에서 가이오의 가정 교회는 손님을 대접하는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으나, 디오드레베라는 분리주의자에 의해 도전과 반대를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단을 경계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자신의 권위와 성을 쌓고 있었으며, 선한 지도자들을 맞이하여 대접하는 것을 금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단이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단이었다면 요한이 그를 이단으로 명시했을 테지만, 그러한 증거는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교만(9절)과 망령되어 폄론하는 것(10절)과 그의 행동이 악하다고 지적하고 있을 뿐입니다(11절).

◇ 바이블 프로젝트 요한1~3서 개요 1-3 John - YouTube

 

************ 유다서 ************

 

유다서는 저자를 “예수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라고 밝힙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은,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가 쓴 것으로 봅니다(요 7:5; 행 1:14). 수신자는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않으나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집트, 소돔과 고모라, 천사장 미가엘, 모세, 가인, 발람, 아담의 칠대손 에녹 등 유다서에 구약의 내용이 풍부하게 등장한다는 점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유다서는 문체가 역동적이며 암초, 목자,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 캄캄한 흑암, 열매 없는 가을 나무, 바다의 거친 물결, 유리하는 별들 등 은유적이고 문학적 표현들이 많이 나온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3개씩 나열한 문장표현 방식’도 특징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종, 형제, 유다’(1절), ‘긍휼, 평강, 사랑’(2절), ‘경건하지 아니하여,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4절),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8절) 등의 3개씩 묶어 표현하는 방식이 많이 나옵니다. 또한 유다서는 비정경적인 유대 문학인 에녹일서와 ‘모세의 승천’이라는 현존하지 않지만 초대교부를 통해 알려진 책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도 특징입니다.

편지를 쓰는 목적에 대해서는 3절에서 ‘우리가 누리는 구원에 관하여 벌써부터 편지하려는 차에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권해야 할 필요가 더 느껴져서 썼다’라고 밝힙니다. 짧은 서신이지만 저자는 이단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이단을 향해 경고와 강한 정죄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유다서를 기록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의 배경과 유사하게 이단의 가르침을 유다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다서 또한 ‘초기 영지주의(proto-Gnosticism)’적 요소를 지닌 이단을 다루고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한마디로 신플라톤주의를 기본 철학으로 하여 그 위에 잡다한 사상들을 마구 뒤섞어 놓은 이단이었습니다. 따라서 형태나 양식에 있어 아주 다양한 부류가 등장합니다. 요한일서와는 달리 유다서에 나타나는 영지주의적 이단은 그런 여러 부류 중 특별히 육체와 관련한 도덕무용론에 가까운 ‘방탕 영지주의(libertine Gnosticism)’적 요소를 강조했던 자들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육체란 악한 것이며 어떻게 사용하던 구원과 관계가 없기에, 방탕하고 부도덕하게 사는 것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성도들을 미혹시키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유다서를 읽어야 이해가 잘 됩니다. 유다서는 25개 구절 중 최소 15개의 구절이 베드로후서 2장과 겹칩니다. 둘 다 유사하거나 동일한 용어를 사용해 거짓 교사들의 주장에 논박하는 것을 볼 때, 같은 이단을 대상에 두고 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유다서 개요 Jude - YouTube

 

************ 요한계시록 ************

 

신약의 시작인 4복음서가 예수님의 초림에 초점을 맞추고, 마지막으로 계시록이 예수님의 재림에 초점을 맞추며 신약이 끝나는 것은 의도적인 배열이라 생각됩니다. 계시록은 단순히 신약의 마지막 책일 뿐만이 아니라 신구약의 예언적 성취와 묵시록적 열쇠를 푸는 신구약 전체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책입니다. 계시록은 서문에서 이 글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칭하고 있으며 형식 면에서는 서신의 양식으로 펼쳐집니다.

발신자는 사도요한이며 수신자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라고 밝히고 있으며, ‘은혜와 평강’(1:5)으로 시작해 ‘예수그리스도의 은혜’(22:21)로 마무리 됩니다. 쓰여진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로마의 열한 번째 황제였던 도미티안(Domitian) 때에 밧모섬에 사도요한이 유배되어 있었다고 한 초대 교부의 기록을 통해 주후 95-96년으로 추측합니다. 밧모섬은 에게 해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 인구 약 3천 명인 조그마한 섬으로, 성요한 수도원과 요한이 계시록을 썼다는 동굴과 요한이 사용했다는 세례 터도 있어 기독교인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책 전체가 현재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과 우리 인간이 사는 땅의 구분이 사라질 것을 말하고 있다는 면에서 믿지 않은 자들에게는 다가올 심판에 대해 경고를 주고, 믿는 자들에게는 거룩한 삶을 살 것을 격려하면서 예수님의 재림은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함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계시록은 상징적 묵시록적 표현들이 많이 나온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숫자들도 상징적으로 풀이됩니다. 4는 땅의 수, 7과 10은 온전한 수, 12는 하나님 백성의 수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2,000은 12를 10의 3제곱한 수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상징적 표현들이 많아 해석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며, 특히 구약을 바탕으로 이야기 하기 때문에 구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면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분법적인 묵시록적 관점이 가득한 것도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와 용과 짐승에 속한 자, 이 두 종류만 존재합니다. ‘땅에 거하는 자’와 ‘하늘에 거하는 자’가 대조를 이루기도 합니다. 음녀 바벨론(17장)이냐 어린양의 신부 새 예루살렘(21:1-22:5)이냐에 대한 선택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논리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계시록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당해야 했던 고난과 순교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악을 이기신 것을 강조하며, 모든 믿는 사람들이 고난과 순교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참 제자로 살아갈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짐승을 따르는 자들의 비참한 최후와 어린양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모습을 대비시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중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계시록의 목적지는 가장 끝부분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일곱 교회를 향해 ‘이기는 자들’이 되어 새 예루살렘에 들어올 것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더 이상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는 곳입니다. 용과 그의 무리들 그리고 그들을 좇던 모든 이들을 온전히 다 멸망으로 들어가게 한 후,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는 곳으로 변합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의미에서 성전으로 묘사되며(21장), 회복된 에덴으로도 묘사되어 있습니다(22:1-5). 그분의 얼굴을 보며 영원히 거할 수 있는(22:4) 그곳을 향한 초대가 바로 계시록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미래를 말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러한 미래를 염두에 두고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매우 현재중심적인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종말론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공통적 특징이기도 합니다. 계시록은 종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예수를 믿는 모든 자들이 ‘그분의 참 제자답게 살아가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 바이블 프로젝트 요한계시록 1~11장 개요 Revelation 1-11 - YouTube

◇ 바이블 프로젝트 요한계시록 12~22장 개요 Revelation 12-22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