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잠깐 스쳐가는 말씀 한 조각

말씀 한 조각 만으로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 삶의 모습

이어령 박사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손경민 목사 "가장 귀한 삶"

아리마대 사람 2022. 9. 29.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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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서점을 둘러보다가... 이어령 박사님의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소개하는 코너에서 본 시가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이다. 제목이 아이러니하다. 무신론자라면 기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를 읽고 나면 더 이상 아이러니하지는 않다. 무신론자였던 사람이, 그래서 아직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신론자란 얼마 전까지 완전한 무신론자로서의 삶을 살아왔던,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온전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작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았으니 하나님 앞에 꽃 한 송이 바친 적이 없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자신이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살았으니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는 하나님없이 살아왔던 삶의 관성효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꼿꼿하다. 혹시 자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없어도 실망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꼿꼿함 속에서 미세한 균열의 징조가 발견된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모르신다'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신다'라고 말한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비록 지금은 생각해내지 못하지만, 오래 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무신론자인 그가 언제 하나님을 만났을까? 그는 자신이 무신론자로서의 삶의 시작하기 전, 아주 오래 전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셨을 때를 말하고 있다. 자신을 만드시고 세상에 태어나 살게 하셨지만 자신이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살았으니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꼿꼿함은 실은 무신론자로 살아왔던 삶에 대한 계면쩍음이 아닐까? 무신론자였던 그이지만 이제는 그가 완전한 무신론자가 아님이 드러난다. 그는 지금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신 분이심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하나님 앞에 꽃 한 송이 바친 적이 없는 삶을 고백하는 그 솔직함을 품고.
그는 무신론자였다. 자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고, 하나님도 그렇게 알고 계실 것이고, 아마도 다른 사람들도 그가 무신론자인 줄로 알고 있겠지만... 실은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 아무도 알지 못할 밤이면 살그머니 하나님 가까이 다가가서 그 분이 살아계신지 숨소리를 들으려고 했다고. 그리고 실은 듣고 있다고.
또 너무 외로울 때면... 비록 아주 가끔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어쩌면 자주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고. 혹시 자신을 기억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지금 그는 아주 작은 희망을 품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어쩌면, 어쩌면...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자신을, 너무 외로워서 조심스럽게 하나님께 기대고자 했던 자신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처음에는 입을 떼기가 몹시도 어려웠지만 하나님을 어떨결에 고백하게 된 그는 이제는 자그마한 용기가 생겨나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관해 말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세상의 창조주이심을.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궁금했던 점을 하나님께 여쭤본다. 아마도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생각하던 그때에도 실은 가슴 깊은 곳에 품고 있던 묵은 질문일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저 많은 별들을 만드셨는지...
물고기들과 새들을 만드시고 그것들이 움직이는 걸 보셨을때 기분이 얼마나 좋으셨는지...
아니, 그보다도 먼저, 온 세상이 캄캄하던 맨 처음의 시간에 정말 말씀만 하셨는데 빛이 생겨났는지...
하나님께 가슴 속 묵은 질문을 드리는 이 시간, 그 자신을 구성하는 그의 존재의 모든 요소는 하나님이 정말로 창조주이심을 느끼고 있다.

확신의 감동은 그의 시선을 그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향하도록 이끈다.
그는 시인이고 시를 쓰며 살아간다. 시를 쓰는 것은 그의 삶이다. 시를 쓴다는 말은 그에게 살아간다는 말과 동일하다. 시를 쓰는 일밖에 모르는 그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시를 쓰며 살아가는 줄 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시를 쓴다는 말은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삶은 고통 가운데 놓여있다. 자신의 가슴을 찢고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고 있다.
무신론자였던 그는 그 이유를 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 무신론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기댈 하나님이 없고, 기도할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빛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태초 이전과 같은 캄캄한 어둠 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무신론자가 아닌 그는 그들이 너무나 안쓰럽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기에 도움을 구한다. 말씀만으로도 빛을 만드신 분께.
그러나 무신론자였던 그는 무신론자인 그들의 마음 속에 빛을 창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감히 말씀드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낸 방법은 무신론자라고 소개하고 있는 자신이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도구로 써 달라고 하나님께 부탁드린다. 눈물 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하셨던 것처럼 작은 빛, 반딧불같은 아주 작은 빛 하나라도 만들어 줄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그는 이제 더 이상 무신론자가 아닐 뿐더러 하나님의 창조주이심과 그분의 사랑까지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사실을 나누어주고 싶어한다.

이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그는 캄캄한 밤이 아닌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외로와서 견디지 못할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여쭈어 본다.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도 되겠느냐고.
하나님 앞에 꽃 한 송이 바친 적이 없는 자신이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도 되겠느냐고.
어쩌면 하나님이 기억조차 하지 못하실지도 모르는 자신이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 되겠느냐고.
때 묻은 자신의 손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옷자락 끄트머리라도 감히 만져볼 수 있겠냐고.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초라한 자신이지만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고백을 그렇게 조심스럽게 꺼낸다.
그리고 그동안은 비록 하나님께 꽃 한 송이 바친 적이 없었지만, 이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해보겠다고 말씀드린다.
자신이 할 줄 아는 것은 시를 쓰는 것 뿐이니 그저 하나님을 말하는 아름다운 시 한 줄이나마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하나님을 확신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까지 해보겠노라고 고백하기에 이르른 그는 마침내 입을 열고 소리내어 부른다.
"하나님..."

무신론자로 살아왔던 시간들에 대한 계면쩍음으로 인해 자신을 무신론자로 소개하는 모습에 공감하면서 생각해보니...
이 땅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산다고 말하는 이들도 어쩌면 실질적으로는 무신론자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잘 알지 못하는 것,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을 잘 모르고, 또한 본 적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고집부리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어리석은 주장과 고집을 받아주시고 사랑스럽게 보아주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잘 모르고, 또한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사랑한다고 하는 모습이... 아마도 사랑스러우신가 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허락해주기까지 하신다.

하나님을 잘 모르고, 또한 본 적도 없으면서도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고집부리는 까닭은 아마도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셨음을 무의식 깊은 곳에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까지 하는 것일 것이다.
비록 모든 사람이 잠든 밤이나 너무 적적할 때만 하나님 가까이 가고 싶어하지만.
뻔뻔하게도 감히 때 묻은 손으로 그 분의 옷자락을 만져보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어쩌면 무신론자와 다르지 않은 존재이지만.
비록 그런 처지에 불과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히 초라한 삶을 살고, 지극히 부족한 삶을 살고 있는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속을 풍금처럼 울리게 하는 시 한 줄을 쓰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
지극히 초라하고 지극히 부족한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허락하시며, 모든 사람이 잠든 밤이나 너무 적적할 때만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나를 언제나 받아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느낌으로 인해 그 분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이 모습을 하나님은 사랑스러워 하신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감히 내 삶이 하나님 앞에 귀한 삶이라고 말하는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꽃 한 송이를 바치듯이 하나님 앞에 귀한 삶을 살아보겠다고 다짐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dN12aR02y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