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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에 관한 질문과 답변」

Q29. 성만찬은 얼마나 자주 거행해야 하나요?

아리마대 사람 2022. 12. 13. 16:44

▒ 성만찬을 얼마나 자주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교회는 1년에 한두 번 하고, 또 어떤 교회는 한 달에 한 번씩 합니다. 그런가 하면 매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얼마나 자주 하는 것이 성경적인지 알고 싶습니다.

 

성당에서는 매주 미사 때마다 주님의 살과 피인 빵과 포도주를 먹는 성만찬을 거행합니다. 그런데 왜 교회는 매주 하지 않고 특별한 날에만 하나요?

 

성만찬을 매주 하면 습관적으로 잠여하게 되고, 그러면 오히려 좋지 않은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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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과 신약의 교회가 어떻게 예배를 드렸을까를 생각하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최초 교회의 예배는 성만찬(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교회가 행하는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의식을 말합니다. 헬라어에서 온 영어의 뜻은 '감사'이며, 우리말로는 '성만찬', '성찬', '감사례', '주의 만찬'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됩니다.)을 중심으로 행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던 열두 사도들과 그들이 세운 각처의 교회는 항상 성만찬을 중심으로 모임을 가졌습니다.

 

(사도행전 2:46)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사도행전 20:7)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이 말씀에서 '떡을 뗌'은 모두 성만찬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최초의 교회가 모여서 한 행위의 중심은 성만찬이었으며, 그들이 모인 이유는 바로 성만찬을 통해서 주님을 기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들의 교회가 성만찬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린 또 하나의 이유를 알기 위해 우리는 유대인들의 생활습관을 이해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어떤 사건을 '현재 여기에서' 되풀이함으로써 과거의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지금도 매년 유월절이 되면 '무교병과 쓴 나물과 어린 양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수천 년 전에 일어난 '유월'의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성경에도 이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길 위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내내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갔지만,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 한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할 때, 주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비로소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왜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던 선생님을 길 위에서는 알아보지 못하다가 하필 식탁에서 알아보았을까요? 제자들이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들의 시력이 1.0에서 2.0 정도로 좋아졌다는 말일까요?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이 세상에 계실 때의 몸과 어느 정도 달라졌기 때문에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가 식탁에서 떡을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고 떼어 주실 때에 그분의 음성과 모습과 자태와 분위기와 그 모든 것이, 선생님이 세상이 계실 때 평소 식탁에서 하시던 그 모습과 너무나 똑같아서 "이것은 우리 선생님이 늘 하시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분이? 아하! 바로 선생님이시구나."하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만찬이야말로 예수님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입니다. 여기에 성만찬의 신비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만찬에 참여할 때에 열두 제자에게 친히 떡을 떼어 주시고 잔을 나누어 주시던 그 예수님의 임재를 우리는 더욱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떡을 떼어 주시면서 "이것을 행함으로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왜 주님은 고상하거나 거창한 것과 함께 당신을 기억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음식'과 함께 당신을 기억하라고 명하셨을까요? 여기에는 깊은 신학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식사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사람은 음식을 먹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식사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음식을 가지고 깊은 영적 진리를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51)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즉 예수님은 식사의 메뉴인 '빵'에다 당신 자신을 비유하심으로써 사람이 빵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 없이는 우리가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빵을 먹기 위해서는 먼저 그 빵을 떼어야 하는데, 그 떼어지는 빵이 마치 십자가 위에서 찢어질 당신의 몸과 같고, 잔에 부어지는 붉은 포도주가 십자가 위에서 을려질 당시의 피와 같다고 비유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54-55)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신학적 의미 때문에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떡을 뗴고 잔을 나눔으로써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과 은총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성만찬 속에서 주님을 생각할 때, 살이 찢기고 피를 흘려 우리를 구원해주신 주님의 은총을 훨씬 더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과 신학적인 의미 때문에 열두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는 성만찬이 필수적이고 중심적인 요소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만찬 없이 예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이나 『디다케』,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첫 번째 변증문』 등을 보면 2세기의 교회에서는 매주일 성만찬이 거행된 것을 알 수 있으며,  교부 키프리아누스나 테르툴리아누스의 글들을 보면 3세기의 사람들은 매일 성찬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이 계속해서 내려오다가 중세기에는 예배에서 성만찬을 거행하기는 하지만 회중에게는 빵과 포도주를 주지 않는 관습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예배에서 행해지는 성만찬이 회중에게는 별 의미를 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1215년 열린 라테란 공의회는 신자들이 최소한 부활절 기간만이라도 신실한 죄의 고백과 함께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고 명하고 있습니다.

중세시대 회중은 오랫동안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에 참여하지 못한 채 미사에 참여했기 때문에 성만찬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츠빙글리 등 일부 개혁자들이 성만찬 없이도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주장하자 이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개신교회에서는 성만찬 없는 예배가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미국 개신교회의 예배는 성만찬 없는 예배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북미와 유럽에서 일어난 예배운동은 초기 기독교 예배를 회복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따라서 성만찬이 주일낮예배의 정규 순서로 다시 환원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개교회의 예배 현장에서 초기 기독교의 예배가 실제적으로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성만찬이 예배에 없어서는 안 될 본질적 요소라는 인식은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각 교단에서 발행하는 예배서들은 부록으로 처리하던 성만찬 예식을 주일예배의 정규 순서로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성만찬을 매주 하면 '습관적'으로 참여하게 되기 때문에 가끔씩 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사실은 이러한 주장이 설교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교도 매주 들으면 '습관적'이 되어 긴장하지 않고 졸고 하니까, 1년에 서너 번씩만 들으면 정신 바싹 차리고 듣지 않겠습니까? 설교 없는 예배가 불완전한 예배인 것처럼 성만찬 없는 예배도 불완전한 예배입니다. 성만찬은 신약성경보다도 먼저 존재했습니다. 오히려 예배가 성만찬으로부터 태어나고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배는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만나는 사건이기 때문에 단지 찬양과 기도와 설교만으로 구성된 예배보다는 주께서 친히 제정하신 성만찬과 함께 할 때, 우리는 훨씬 더 생생하게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만찬은 매주 거행하는 것이 성경적이며 신학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