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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7-50장 - 요셉 (데이비드 포슨 목사)

아리마대 사람 2023. 8. 17. 20:44

채색옷을 입은 요셉 


대다수 사람들이 요셉의 이야기에 대해 아주 익숙하리라고 봅니다. 특별히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반드시 주일 학교에서 요셉의 이야기에 대해 배웠을 것입니다. 고생 끝에 성공하는 이야기라서 아마도 많은 어린 아이들의 관심을 끌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제들과 다른 옷을 입었습니다.
(창세기 37:3)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NIV성경은 '화려하게 장식된 옷(richly ornamented robe)'이라고 번역했지만, 사실 그것은 형형색색의 화려한 가운은 아닐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긴 팔 소매가 달린 코트' 정도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이 옷은 작업감독이 입는 특별한 옷일 것입니다. 노동을 하는 곳에는 반드시 감독을 세웠는데, 노동자들은 소매를 걷어 올리거나 짧은 팔 옷을 입고 작업을 했을 것이며, 감독하는 사람만 긴 팔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당시 요셉은 장자가 아니면서도 형들의 작업을 감독했습니다. 과연 그의 형제들이 그와 어떻게 지냈을까요?


제4대 요셉


요셉은 제4대입니다.
요셉은 아브라함의 증손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장자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도 명확한 패턴이 나타나는데, 장자가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4대째에 내려와서도 무조건 장자라는 출생의 권리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은혜'로 축복 받을 사람을 정하셨습니다.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어린 자(연약한 자)'를 선택하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요셉의 형제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경건한 셋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래서 앞의 3대의 경우처럼 택함을 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 간의 대조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에게 선하게 대하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요셉은 자신보다 앞선 3대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요셉의 하나님'이라고 지칭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전 3대에게는 모두 천사가 나타났지만, 요셉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요셉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시고, 그에게 꿈을 해석하게 하신 것을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요셉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셉도 하나님께 말씀드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상황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남다른 방식으로 믿음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이야기를 왜 들려주고 있을까요?


한 가지 분명한 원인은 창세기 바로 다음의 책인 출애굽기와의 연관성으로부터 파악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야곱의 후손, 곧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에 처한 상황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그들이 왜 애굽으로 내려갔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한 이유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기근 때문에 양식이 부족하여 애굽으로 이주했던 이유와 동일합니다.
애굽은 에티오피아 고지로부터 흘러 내려온 나일 강이 있어서 농사를 지을 때 비를 의지할 필요 없었습니다. 나일 강에서 충분한 물을 공급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가나안 땅은 농사에 필요한 물을 지중해의 서풍에 따라오는 비에 의존했습니다. 따라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근이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요셉의 이야기는 성경의 다음 부분인 출애굽기와의 연결고리가 되어 야곱의 가족이 왜 애굽으로 이주했는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런데 성경이 창세기 이후 출애굽기에서 400년의 커튼을 열고 갑자기 야곱의 자손들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할 때, 야곱의 자손들은 이미 몇 백 만으로 늘어났지만 애굽의 노예가 되어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요셉 이후의 400년 동안의 상황은 성경에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400년 동안의 이야기를 왜 기록하지 않았는지에 관한 설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처럼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의 분량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분량과 비슷합니다.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는 그보다 짧습니다.


성경에서 요셉의 이야기는 왜 중요할까요?


요셉의 이야기는 왜 중요할까요? 성경은 요셉의 이야기를 왜 이렇게 상세히 기록했을까요? 세상의 유명한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그가 도덕적으로 살아서 결국은 승리하고 성공한 좋은 본보기이기 때문일까요?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네 가지 각도에서 요셉의 이야기를 읽어야 합니다.

① 먼저, 인간적 각도에서 보겠습니다.
요셉의 이야기에는 실제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아주 생동적인 묘사와 뛰어난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야기 자체가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복잡하게 얽혀있고, 또한 어떤 곳에는 불가사의한 우연의 일치가 일어납니다.
이 이야기는 단 두 부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아래로 추락하고, 후반부는 위로 올라갑니다. 이것은 그가 겪었던 삶이기도 합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던 아들이었는데 다른 집의 노예가 되었고, 감옥에 갇혀 잊혀진 죄수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한 나라의 총리로 수직상승했는데 참으로 불가사의한 이야기입니다.
사회적 신분이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밑바닥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갔는데, 그의 이러한 경력이 우리에게 매우 흥미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사회적 신분이 밑바닥까지 떨어지게 되는 과정에서 그의 형들이 질투하는 것을 보는데, 그의 인생 여정 전체가 그가 꾼 꿈을 이루는 과정이었습니다.
요셉은 성경인물 중에 꾀가 좀 없는 편에 속합니다. 그래서 그는 참으로 순진하게 말합니다. 그는 형들에게 "내가 꿈을 꾸었는데 형들이 모두 나에게 절을 했어요."라는 말을 하는데, 이러한 말을 발설하면 자랑하는 듯 들릴 수가 있고, 결코 형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을 형들에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는 확실히 꿈을 꾸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면 어떨까요? 혹시 자랑하듯 말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람은 다 비슷합니다. 그러니 꾀가 없는 요셉을 탓할 수는 없지요.
아무튼, 요셉의 스토리는 대단히 인간적입니다.

② 다음으로, 하나님의 각도에서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해서 요셉에게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은 현실 속에 깨어있을 때보다 꿈을 꿀 때 하나님의 계시를 더 쉽게 받아들입니다. 신기한 것은 우리가 꿈 속에서 모든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신령한 꿈은 올바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요셉도 '꿈 해석은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말했습니다.
(창세기 40:8)
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창세기 41:15-16)
15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16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왜 그럴까요? 신령한 꿈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도 이와 똑같은 은사가 있었습니다.
사실 요셉 이야기 전체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고 요셉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직접적인 기적은 나타나지 않지만, 이야기 가운데 분명하게 계십니다. 요셉에게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에 관한 꿈을 주셨고, 배후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셨으며, 그분의 목적과 계획대로 모든 환경을 주재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항상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지 않고, 바다가 갈라지는 것처럼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도록 섭리하시고, 내가 변화되게 하시며, 내 인생의 배후에서 섭리하십니다. 요셉처럼요.
이것은 운이나 재수를 믿는 것과 완전히 반대입니다.
'운'의 히브리 단어는 '갯(Gad)'인데, '하나님(God)'과 발음이 비슷하지만 전혀 다릅니다. 운을 의지해서 살 수도 있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운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마치 로또에 당첨되기를 바라는 것처럼요. 그들은 자기가 처한 모든 환경이 우연히 생성된 것으로 믿습니다. 물론 자기 자신도 우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믿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런 식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환경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하나님께서 인생의 배후에서 섭리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당시에는 모르지만 나중에 시간이 흐른 뒤에 과거를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손길이 내 인생을 섭리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과거의 그 당시 상황에서는 그 섭리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각도에서 보면, 요셉의 모든 이야기는 한 구절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45:7)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요셉이 먼저 형들을 힘들게 한 후에, 그의 형들에게 자신을 드러낼 때 이 말을 했습니다. 이 말과 함께 형들이 자신을 애굽에 노예로 판 악행을 용서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라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요셉의 형들의 입장을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동생을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버리고 다 해결한 줄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동생의 그 특별한 외투에 숫염소의 피를 묻혀서 가련한 늙은 아버지에게 가져가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제일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늙은 아버지 야곱에게 이렇게 말했는데, 이는 너무나 잔인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이 발생하도록 허락하시는 데에는 그분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라는 말이 바로 요셉의 믿음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애굽에 먼저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
애굽에 보내진 요셉은 바로를 위해 꿈을 해몽했는데, 먼저 칠 년의 풍년이 있고, 다음으로는 칠 년의 흉년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서 흉년을 위해 양식을 저장하라고 건의했습니다. 이 일 후에 그는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어 애굽의 양식을 맡아서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의 꿈에서 얻은 선견지명이 전 애굽을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가족까지도 구원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가나안에 양식이 떨어져서 애굽에 내려왔던 것이니까요. 그리고 요셉은 그들의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이 일은 사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애굽으로 내려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사건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왜 벌어진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그들을 애굽으로 오게 하셨을까요? 불필요할 것 같은데 말이죠.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도덕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의 자손을 애굽에서 사백 년 동안 정착하게 한 후에 반드시 이끌어 낼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5:13-16)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의 땅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죄악이 가득 차서 그들이 자신들의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할 때까지는 그 땅을 넘보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도덕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거주하게 하려고 다른 민족들을 무조건 쫓아내지 않으십니다. 그 곳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죄가 가득 차기까지 기다립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바에 따르면, 그 곳 주민들의 죄악이 얼마나 극악무도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가나안 땅의 여기저기에 성병이 퍼져있었을 정도로 도덕의 부패와 타락이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 땅을 점령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누가 '하나님이 그 땅을 유대인에게 주신 것은 불공평한 처사다'라고 불평한다면, 그 말은 틀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땅 사람들의 죄악이 가득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로소 그 땅 사람들을 심판하여 쫓아내셨습니다. 그것은 의로운 심판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전하고자 하시는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가 되게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노예 상태로부터 구원하셔서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모델로서 하나님의 길로 행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복된 지를 세상에 보여주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겪게 하신 목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주 쉬는 날 없이 7일을 계속 작업하는 고생을 겪었고, 자신들이 소유한 돈도, 재산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려운 노동을 맡았고, 심지어는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죽이도록 조치되기도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크신 손을 내밀어 그들을 곤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노예생활을 겪게 된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각도에서 본 요셉 이야기입니다.

③ 세 번째로, 요셉의 성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셉의 인격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성경에는 요셉의 어떠한 결점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에서 성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대해서 그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 아주 정직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들 각자에게는 연약함과 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에 대해서는 어떠한 결점도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
굳이 요셉의 잘못을 찾자면, 자기가 본 꿈을 형들에게 말하는 것 정도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자기가 본 꿈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을 보아서 그는 꾀가 없는 편이었고 영악하게 말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요셉의 잘못된 태도나 혹은 부정적인 평가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요셉이 부정적인 반응과 태도를 나타낼 상황은 무척 많았습니다만, 그는 자기 인생이 내리막길로 곤두박질 칠 때에도 어떤 불평이나 원망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감옥 중에서도 제일 무서운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갇혀도 '하나님이 왜 아무 잘못도 없는 나를 이렇게 대우하시느냐'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은 사형수를 가두는 곳이었습니다. 실제로 떡 굽는 관원장은 사형을 당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 갔을 때, 그곳은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아름다운 용모로 그를 유혹할 때, 집안에는 한 사람도 없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여전히 자신의 정직성을 지켰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지켜보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눈짓할 때,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주인의 아내가 요셉을 무고하여, 요셉은 사형수를 가두는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 대해서도 한 마디의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인품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기 자신의 일보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데에 관심이 쏠려 있었습니다.
요셉이 밑바닥까지 떨어진 상태, 즉 사형수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 두 사람이 모두 감옥에 들어 왔는데 뜻밖에도 요셉이 그들을 위로하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자기 자신을 챙기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챙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불행을 당하는 동안 줄곧 한 마디도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위로 올라갈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은 추락할 때보다 위로 올라갈 때, 특별히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위로 올라갈 때, 특별히 빠르게 위로 올라갈 때에 그 사람의 인격이 제대로 드러납니다. 인격의 본질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시험의 때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요셉이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자신을 애굽에 노예로 판 형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양식을 주면서 돈도 받지 않고, 오히려 돈을 그들의 주머니에 도로 넣어주었습니다. 마침내는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용서하였고, 그들을 위해 바로에게 구하여 나일강 삼각주의 제일 좋은 땅을 얻게 하였는데, 바로 고센땅입니다.
그는 형들에게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라고 용서하며,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라고 약속합니다.
그의 형들은 그를 버리고, 그를 팔았으며, 그가 죽었다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들을 도와주고, 용서하고, 돌보겠다고 약속합니다.
낮아질 때나 높아질 때나 언제나 요셉의 인격은 타락하지 않고 정직을 유지했습니다. 정말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구약성경 전체에서 오직 이 한 사람에 대해서만 어떠한 부정적 묘사가 없습니다. 다른 인물들은 그들의 인생 전체의 그림을 볼 때 조금씩 흠이 발견됩니다.
다윗왕도 이렇지 못했습니다. 그가 무슨 죄를 범했는지는 잘 아실 것입니다.
엘리야도 두려워했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야고보서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여러 가지의 연약함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확실히 완전하고 정직한 사람입니다. 오직 요셉만은 어떤 방면으로 보든지 조금도 흠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예외적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단 한 사람만 이렇고, 신약 성경에서도 단 한 사람만 이러합니다. 그분이 누구신지는 모두가 아실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시작되어 요셉이 애굽으로 팔린 사건 바로 다음에 그의 형 유다의 이야기가 한 장(창세기 38장)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는다면 반드시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인 요셉의 이야기 중에 갑자기 그의 형 유다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유다는 그의 형들 중에서도 뛰어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매우 속물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조'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생각됩니다.
유다가 얼굴을 가린 창녀를 만났는데, 이 창녀가 사실은 그의 며느리였고, 이 일로 인해 그의 며느리가 임신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갑자기 요셉의 이야기 중에 끼어든 것입니다. 이 이야기야말로 요셉의 인격을 대조적으로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형들은 동생을 상인들에게 팔 정도로 매우 나빴지만,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형 유다는 길 곁에서 창녀를 만나 임신을 시켰지만,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대조가 참으로 명확합니다.
마치 아브라함과 롯의 대조, 이삭과 이스마엘의 대조, 그리고 야곱과 에서의 대조처럼 말입니다.
요셉을 형과 대조시켜 하나님 앞에 정직한 그의 인격을 강조한 것입니다.

④ 네 번째로, 종합적인 측면에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왜 요셉의 이야기를 기록하였는지, 성경에서 요셉의 이야기는 왜 중요한지를 논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요셉의 삶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인간적 각도에서 보면, 요셉은 밑바닥까지 내려간 상황에 처했다가 밑바닥에서 제일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자기 가족, 그리고 민족까지 구원하였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각도에서 보면, 하나님이 요셉의 일생을 주관하셨고, 그가 곤경을 겪는 것을 허락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셋째, 요셉의 성품을 보면, 밑바닥까지 내려갈 때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갈 때나 변함없이 성실과 정직을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삶을 종합하면 누구를 연상하게 됩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예표인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구약 성경에 나타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일생을 통해,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어떤 일을 겪게될 것인지를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요셉처럼 자기의 형제들에게 거절당하고, 세상에서 제일 큰 모욕과 곤경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밑바닥으로부터 들려 올려지고, 백성들의 임금과 구주가 되셨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요셉과 예수님이 무척 많이 닮았다는 것은 너무나 뚜렷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 속에서 예수님의 그림자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39)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성경'은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으며, 예수님이 신약의 실체이십니다만, 예수님의 그림자는 이미 구약성경의 여기저기에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을 때에는 그 속에서 반드시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의 그림자를, 더 나아가서 그분의 형상을 찾아야 합니다.하나님은 일찌기 구원의 계획을 예비하셨고, 구약시대에 이를 암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암시는 구약성경 여기저기에 나타나 있으며, 특별히 창세기에 나타나 있고, 요셉이 바로 신약성경의 예수님의 예표인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에 어떻게 반응하시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취하셔서 그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구원을 주시고, 그를 높이 들어 구주와 주님이 되게 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