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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을

<창세기> 4-11장 - 타락의 결과 (데이비드 포슨 목사)

아리마대 사람 2023. 8. 17. 20:40

3가지 큰 사건


창세기 4-11장은 타락의 결과를 설명합니다. 마치 돌맹이 하나를 연못에 던졌을 때, 잔잔한 파문이 계속 퍼져 나가듯이 타락은 이후의 각 시대에 계속 영향을 주었고, 열국에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타락은 인간의 문명을 더럽히고, 계속 전파되어 갔습니다. 예술과 학문을 타락시키고, 사회와 정치도 타락을 더해 갔습니다.
창세기를 그저 지식과 교양의 측면에서만 읽지 말고,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느끼셨는지를 깨닫고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기뻐하고, 괴로워하고, 화를 내고, 슬퍼하기도 하십니다.
창세기 4-11장은 짧은 기록이지만, 수 세기에 걸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만, 하나님은 그 중에서 하나님 자신과 역사의 경영에 제일 크게 관련된 일들만 뽑아서 기록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에 기록된 타락 후,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께 가장 크게 문제가 되었던 3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째, 가인입니다.
둘째, 노아와 그의 방주입니다.
셋째, 니므롯과 그의 높은 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3가지 사건을 중대하게 보셨으며, 이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셨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사건 1. 가인과 아벨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첫 번째 남자의 죄가 두 번째 남자에게 영향을 주었고, 두 번째 남자가 세 번째 남자를 죽이게 했다'는 말입니다. 이 세 사람 모두 아담의 가족입니다. 이 말은 아담의 큰 아들이 작은 아들을 죽인 사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많은 세기 후에 예수님도 똑같은 원인 때문에 죽임을 당했는데, 바로 질투와 미움이었습니다. 질투는 역사상 최초로 악한 살인죄를 초래했을 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모두에게도 다른 사람을 질투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 죄의 유전을 조심해야 합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의 뜻은 '얻다'입니다. 하와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이 아들을 얻었다'라고 말했는데, 그래서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입니다.
아벨이라는 이름의 뜻은 '숨, 연기'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아벨의 호흡에 문제가 있거나 몸이 약하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셋은 아벨 대신 얻은 세 번째 자녀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① 아벨
형제인 가인과 아벨 중에서 하나님은 아벨을 더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나는 유업을 받을 당연한 권리, 타고난 권리가 있다'라고 생각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일반적으로 동생을 선택하십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이유 때문에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한 것이 아닙니다.

아벨은 죄인이 드리는 '피 제사'만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을 부모로부터 배웠습니다. 그의 부모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수치를 가릴 수 있는 짐승의 가죽 옷을 입혀 주셨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아벨은 죄인은 피 제사를 드려야 하며, 피를 흘리는 죽음이 있어야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반드시 먼저 피를 흘려야 죄의 수치를 덮을 수 있다는 것은 이처럼 처음부터 있었던 원리인데, 이것이 결국은 갈보리까지 이어졌습니다.
아벨을 이 점을 배웠기에 짐승을 데리고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가인은 단지 채소와 과일만을 가지고 와서, 일종의 추수축제를 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고, 그것이 가인을 몹시 분노하게 만들어 그의 안색이 변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너 조심해라. 너의 이런 태도는 아주 위험하다. 죄가 네 집 문 앞에 웅크리고 있고, 자칫하면 너를 덮칠거야.'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는 모두들 아시는 것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속여서 문밖으로 이끌어 내어 그를 죽이고 파묻었습니다. 이는 그가 자기 형제를 경멸했다는 것이고, 관계를 철저히 버렸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사람이 하나의 죄를 범하면, 바로 두 번째가 연속되는 법입니다. 질투를 하고나서 이제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패턴이 나타나는데, 바로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질투하는 것입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합니다. 전 인류 역사를 통해서 이런 패턴이 반복됩니다.
우리는 선한 사람이 미움을 받는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한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나?'하면서 자신의 속에 있는 죄성을 가립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들의 양심에 도전한다면, 그 사람은 즉시 미움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살면 세상이 나를 미워하는 것처럼 너희도 미워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인류 역사를 통해서 발견되는 사실입니다.
아벨은 '의로운 첫 번째 순교자'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의로운 피가 흘려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들을 뒤따라 가실 것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② 가인과 그의 후손
가인이 살인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했습니다. 형인 가인이 아니면 누가 아벨을 지키고 돌보는 자일까요?

하나님이 바로 아벨을 돌보고 지키는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전달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돌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살인은 하나님께 대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인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을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의 후대에 경건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출생했습니다.
음악의 시조가 가인의 후대입니다.
금속 제련 기술의 시조도 가인의 후대에서 나왔습니다. 인류 최초로 사용했던 담금질로 대규모의 무기를 제조했고, 이런 기술들로부터 끝없는 보복과 테러가 시작되었습니다.
도시 건설의 시조도 가인의 후대입니다. 도시는 죄인들을 한 곳에 집중하게 하며, 죄악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합니다. 이 때문에 대개 도시에서 일어나는 범죄가 시골보다 많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사실 우리가 '문명의 발전'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가인의 후대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가인의 영향으로 인해 도덕적으로 오염된 것들이고, 그런 문명에는 가인의 죄의 흔적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과학의 발전과 문화의 발전, 그리고 인간 문명의 진보의 배후에는 실은 '가인의 살인'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의 아주 비참한 결과는 인류가 중대한 발명 또는 발견을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은 사람을 죽이는데 이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시각에서 바라본 문명입니다.
뿐만 아니라 일부다처제의 시조 또한 가인의 후대입니다. 그전에는 모두 일부일처로 일평생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가인의 후대에 와서 첩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후에 아브라함, 야곱, 그리고 다윗까지 모두 일부다처를 취했습니다. 그 근본 뿌리는 바로 가인 계열이었습니다.

 

③ 셋과 그의후손
하지만 가인 계열만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같은 시대에 아담과 하와의 셋째 아들 셋은 경건한 후대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셋의 후대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두 계열이 갈라지는데, 이후 인류 역사의 끝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 날에 이 두 계열은 영원히, 완전히 분리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도 가인의 후대와 셋의 후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 결정하고, 반드시 하나의 계열을 선택해야 합니다.


사건 2. 노아의 방주

 

이 이야기는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각기 다른 많은 문화가 대홍수에 관한 민간 설화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의 많은 종족들이 같은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벨탑 분열 이전에는 한 종족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원본은 바로 성경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이야기의 진실성을 의심합니다. 우리는 그 때의 홍수가 전 세계적인 홍수인지, 아니면 당시 알려진 세계에만 영향을 미친 것인지 정확히는 모릅니다.
티그리스강과 와 유프라테스강이 흐르는 거대한 평원이 홍수이야기가 발생한 지점입니다. 이 곳은 후에 메소포타미아라고 불렸습니다.

오래 전, 영국의 레오날드 울리라는 사람이 대홍수의 유적을 찾았다고 런던의 타임즈 신문사에 전보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분지의 토층과 모래층 아래에서 두께가 6미터나 되는 퇴적층을 발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대홍수의 고고학적 유적이라고 주장했는데, 실은 일반적인 홍수의 유적일 뿐이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후에 더 많은 대홍수의 흔적들을 찾았다고 발표했습니다만, 과연 진짜로 대홍수의 유적인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라랏 산에서 노아의 방주의 흔적을 찾았다는 소식들도 들립니다. 결과는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의 강조점은 '방주'라는 물질적 흔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측면에 있습니다.
왜 대홍수가 일어났던 것일까요?
그 대답은 아주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아마도 성경에서 가장 슬픈 구절일 것입니다. 하나님께나 인간에게나요.
그리고 이 구절은 하나님의 감정을 아주 강력하게 전달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남김없이 없애 버리려 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생각을 하셨던 것일까요?
사실 창세기에는 일부분만 기록했을 뿐입니다. 신약시대과 구약시대 사이의 중간기 책인 외경 에녹서에 그 이유가 자세히 나옵니다.

유다와 베드로가 신약성경에서 이 책을 인용했기에 이 책의 내용은 믿을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비록 그것이 성경에 편입되어 있지는 않지만, 거기에는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녹서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보도록 200-300명의 천사가 헐먼산 지역에 파송되었는데, 이 천사들이 여자들을 사랑하여 여자들을 유혹했고, 그들을 임신시켜 천사와 인간의 잡종을 낳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위반했다고 합니다.
타락한 천사와 인간이 관계를 맺는 것은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도 이 사건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6:2-4)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네피림은 '거인'으로 번역되기도 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다만 새로운 단어이고, 따라서 새로운 인류를 묘사하는데 사용된 말이라는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영적 존재와 인간이 교접하는 것은 신비주의, 강신술, 무당과 같은 것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으며,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질서를 위반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행위의 결과는 온 땅에 포악함과 폭력이 가득 차는 것입니다. 그래서 홍수 전 세상은 사람을 인격이 아닌 사물로 보면서 폭력이 넘쳐나게 된 것입니다.
그 때의 세상에 대해 성경은 '온 땅에 포악함이 가득 찼고, 마지막 지경까지 도달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6:11)
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성경은 이에 대해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절망적이고 무서운 묘사입니다.
(창세기 6:5)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후회하시는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회하실 정도로 세상에 악이 충분히 가득했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크신 인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녹을 통해 인류에게 아주 명확히 경고하셨습니다. 에녹은 인류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한 '첫 선지자'입니다. 그는 '경건하지 못한 모든 사람을 징벌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오신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유다서 1:14-15)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이 65세에 아들을 얻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심상치 않은 이름을 지어 주셨는데, 그 이름은 '그가 죽으면 곧 심판이 일어나리라'라는 뜻입니다. 그의 이름은 당시의 셈족 언어로 '므두셀라'라고 합니다.
에녹은 자기 아들이 죽으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척 오래 참으셨는데, 그래서 므두셀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장수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므두셀라가 969세까지 살고 죽었는데, 그가 죽고 나서 곧 큰 비가 쏟아져서 홍수가 나게 되었습니다.
이 홍수에 대비하여 에녹의 증손이며 므두셀라의 손자인 노아가 세 아들과 함께 120년 동안 하나님 지시하신 대로 밀봉이 잘 된 큰 배 한척을 만들었는데,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홍수 이전의 이러한 상황 속에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가정에는 전도인 한명과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 셋과 며느리 셋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의를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공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부터 그들은 큰 배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배를 만드는 동안 그들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당했을 것입니다.

'여기는 바다와 먼 거리인데, 너희들이 여기서 이 배를 만들어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큰 홍수가 날 것이다'.
노아가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노아를 비웃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홍수에서 8명만 구원 받았습니다.
홍수가 지난 후, 하나님은 전 인류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셨는데,  다시는 물로 모든 생물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대지가 존재하는 한 다시는 전 인류를 멸망하지 않겠다고 하셨으며, 인류에게 충분한 양식의 공급과 춘하추동이 일정하게 오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의 증표로 하나님은 하늘에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살면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빛과 물입니다. 이 빛과 물이 만나서 함께 어울리면 무지개가 생깁니다.
이 무지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약속을 주셨다는 것을 하나님 스스로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결혼반지를 하늘에 놓고, 그분의 신실하심을 일깨우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그분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보존시키고 매년마다 수확을 내려 줄 것이라는 약속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매년마다 지구의 양식은 모든 사람의 배를 부르게 하기에 절대로 부족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들이 이기적이기에 한 쪽에서는 모자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 다른 쪽에서는 남아돕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세상을 심판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이 나쁜 사람들을 언제 심판하여 우리를 기쁘게 하실 겁니까?' 이런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 멸해야 하고, 자신만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지개의 약속을 주시면서 우리에게 반드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멸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죽인 자는 모두 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더없이 신성한 것이어서 만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죽이면 그의 생명도 죽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생명경시 풍조가 흉악한 범죄와 낙태를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 인류와 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고요. 바로 홍수 후에 말입니다.


사건 3. 니므롯과 바벨탑

 

니므롯이라는 용감한 사냥꾼이 있었는데, 그는 동물만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그러했습니다. 용맹하고 전쟁을 잘했으며, 매우 호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늘에 닿을 수 있는 높은 탑을 쌓아서 하나님의 영역인 하늘에 도전하기로 야심을 품었습니다.
우리는 당시의 높은 탑이 어떤 모양인지 대충 알고 있습니다. '지구라트'라고 불리는데,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위로 올라갑니다. 이것은 큰 바위를 깎은 것이 아니고, 벽돌로 차곡차곡 쌓은 거대한 탑입니다. 그 지역에는 큰 바위가 없고, 흙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위대함을 펼쳐 보여주고 싶었던 그는 자신의 이름과 인간들의 이름을 위하여 이 높은 탑을 건축하기로 한 것입니다.
현재도 전 세계에서는 제일 높은 건물을 건축하려는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인간의 교만함, 그리고 그 뻔뻔함과 자신감은 여전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교만의 작용 하에 끊임없이 자기를 위해 높은 탑을 쌓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마음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바벨탑은 하나님을 지극히 분노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약 저들이 자신을 위해 탑을 짓는다면, 그들이 반드시 계속 끊임없이 반역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때 처음으로 인간들에게 방언을 주셔서 서로 다른 언어로 혼잡케 하셨습니다.
인간들의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게 되었고,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더.
그때부터 인간은 각처에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아담의 타락이 각처로 퍼져나가서 삶의 각 방면에 영향을 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똑같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교만하여 하나님을 배제시키고, 인간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두 가지 사실

 

우리는 창세기 서두의 몇 장에서 두 가지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① 한 가지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한쪽 눈을 슬쩍 감아 주시는 분이 아니시며, 잘못이 있다면 반드시 징벌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공평하신 분이시어서,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을 징벌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땅을 갈며 살아야 했습니다.
가인은 떠돌며 살게 되었습니다. 버려진 사람으로서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었고, 항상 누가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세상에 죄악이 가득함과 인간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홍수로 징벌하셨습니다.
만드는 것보다 부수는 것이 쉽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또한 언제라도 전 인류를 진멸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차 세상 끝날에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가 다시 올 때도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때가 되면 반드시 끓어오를 것입니다. 결코 더디지 않습니다.

물은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100도를 넘는 순간 확 끓기 시작합니다.

②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사실 이것은 <공의> 가운데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그들의 수치를 가릴 수 있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또한 만나는 자마다 자신을 죽일 것을 두려워하는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셋의 경건한 후대가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가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대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 중에 노아와 그의 가족이 있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구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창세기의 서두에 기록된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명백히 서로 상충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거역할 때,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나타내실까요, 아니면 긍휼을 나타내실까요?
구약 성경 전체에 걸쳐서 이 둘의 충돌이 지속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이르러서 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