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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36장 - 아브라함, 이삭, 야곱 (데이비드 포슨 목사)

아리마대 사람 2023. 8. 17. 20:44

구약 성경에 나타난 두 개의 큰 주장

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두 개의 큰 주장이 있습니다.

 

① 하나의 큰 주장은 유대 민족의 신이 '온 우주의 하나님'이라는 주장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각 나라는 모두 자신들만의 고유한 신이 있었습니다. 바알, 이시스, 몰렉 등 그 무슨 신이든지 그것은 '자기 민족 고유의 신' 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전쟁은 모두 종교적이었고, 두 민족신들 사이의 전쟁이었으며, 두 민족신을 따르는 양측 신도들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야웨' 혹은 '항상 계시는 분'이라고 불리는 이 신은 다른 나라에서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의 신' 정도로 이해되었습니다. 각각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요.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의 신이 세상의 모든 신들보다 높은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 그런 구절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하나님은 유일하게 진정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다른 신들은 모두 사람이 생각해 낸 신들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했을 뿐 아니라, 창조한 우주를 지금 운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사야서, 특히 그 중에서도 이사야서 40장, 그리고 욥기와 시편의 많은 시들에서도 이렇게 '하나님의 온 우주적 하나님되심'을 선포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당연히 다른 나라의 반감을 일으켰습니다.


② 또 하나의 큰 주장은 온 우주의 하나님이 바로 '유대 민족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주장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도 특별히 작은 무리의 사람들인 유대인을 선택하여 그들하고만 특별히 친밀하게 교제하시는 '유대 민족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특별성과 선민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전 우주의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다른 나라가 어떠한 반응을 하였을 것이라고 상상이 됩니까?
이 주장은 다른 나라에게 있어서 참으로 가당치 않은 것입니다.


'유대인의 신은 전 우주의 하나님이시고, 전 우주의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다'라는 이러한 이중 선포가 창세기부터 나옵니다. 만약 창세기가 없다면, 그런 주장을 펼 수 없습니다.


유대인을 선택하심


만일 성경이 창세기를 빼고 출애굽기부터 시작한다면, 성경의 독자들은 아마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라고만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가 있기에 '하나님은 전 우주의 하나님이지만, 또한 유대인의 하나님이 되셨다'라는 주장을 알게 됩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기꺼이 자신을 가리켜 '나는 이 작은 유대인 무리의 족장 3명의 하나님'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잊지말아야 할 점은 창세기 50장의 연대가 성경의 나머지 65권을 다 합친 연대보다 훨씬 더 길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부터 계시록 마지막까지의 기간을 다 합쳐서 대략 1500년간입니다. 그러나 천지창조부터 요셉까지의 창세기의 연대는 1500년보다 훨씬 더 깁니다. 성경을 읽으면, 분명히 창세기에는 연대가 많이 압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안에서 특별히 길고 여러 역사를 한꺼번에 담고 있는 단락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1-11장까지의 단락인데, 창세기 분량의 1/4을 차지하므로 긴 분량은 아닙니다. 그러나 거기에 포함된 연대는 수십 세기 이상이며 아주 깁니다.
이 단락에는 많은 사람이 등장하고, 또한 많은 나라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창세기의 후반부인 12-50장은 창세기 안에서 아주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1-11장까지의 3배, 전체 창세기의 3/4의 분량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포함된 연대는 수백 년에 불과하며 아주 짧습니다.
이 단락은 소수의 몇 명에게만 집중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특별히 한 가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 가족의 4대에 걸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역사의 기록물이라면 그 비율이 매우 불균형한 것인데, 거기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단락이 시작되는 12장부터 창세기 역사의 진행 속도가 느려지고 시야가 좁아집니다. 원래의 초점은 전 세계와 전 인류였는데, 이젠 초점이 한 가족에 모아집니다.
이것은 특별한 배치인데, 창세기가 '하나님의 각도'에서 인류 역사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11장에서 먼저 전 인류와 전 역사를 다루시고, 이제 12-50장에서는 한 가족에게 초점을 두십니다. 마치 전 세계에서 이 가족만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이 가족은 대단히 중요한데,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셋의 후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예배자)들'을 마음에 두고 계셨고, 그들을 특별하게 보고 계셨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통해 그분의 구원 계획과 목표를 완성하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가 이렇게 불균형적인 비율로 기록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문제와 그 해결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점은 성경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 것인가'를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 것인가'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복음서의 설교를 들어보면, 대부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해결해 주신다는 관점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런 패턴을 가집니다.
'고독하냐? 힘드냐? 슬프냐? 너의 인생에 목표가 있느냐? 예수님이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 주실 것이다'
이런 설교를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초점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문제와 그 해결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문제와 그 해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문제는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인간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인간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입니다.
그 해결 방법 중 가장 단순한 방법은 전 인류를 소멸시키고 다시 새로운 인류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방법을 시도해 보셨습니다.
의인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셨지만,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술에 취해 벌거벗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때부터 슬픈 이야기가 다시 반복되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을 통해 이 방식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을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는 새로운 방법을 이미 알고 계셨고, 이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셨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인간을 왜 만드셨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아주 간단한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 아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더욱 많은 아들들이 있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더욱 많은 아들을 얻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대가족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지으신 것입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결국 그분께서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시면서 '내가 사람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차라리 자녀들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럼, 이제 하나님은 하나님께 반역한 인간을 어떻게 처리하실까요?
그분은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한 민족을 특별히 선택하시고, 그 민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어느 철학자는 이를 '특별한 선택의 스캔들(The scandal of particularity)'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유대인만 선택하였습니까? 왜 미국 사람을 통하여 미국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왜 영국 사람을 통하여 영국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왜 한국 사람을 통하여 한국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특별히 유대인을 선택하여 문제를 해결하셨는데, 다른 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해하기 어렵고, 반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세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사탕을 줄 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한가지 방법은 큰 아이에게 사탕 봉지를 주고 '너희 셋이서 나누어 먹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방법은 사탕 세 개를 사서 하나씩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어느 방법이 집안을 평화롭게 할까요?
사탕 세 개를 사서 하나씩 나누어 주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형제'라는 유대감과 가정 내의 질서를 배우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탕봉지를 큰 아이에게 주고 동생들과 사이좋게 나누어 먹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미국 사람, 영국 사람, 한국 사람으로 각각 보내시지 않고, 한 민족인 유대민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유대인으로 세상에 보내셨으며, 유대인은 선민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너희는 가서 세상 사람들과 나누어라'라고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왜 유대인인가요?'라고 반박하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특별한 선택(particularity)은 그분의 주권입니다.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대조되는 두 개의 족보


창세기 12-50장에는 네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12-36장까지는 세 명의 족장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37-50장에는 네 번째 사람인 요셉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네 번째 사람인 요셉은 세 사람과 아주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요셉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3대만 언급하셨습니다.
세 명의 족장들은 대조적 관계 속에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대조되고, 이삭은 이복형제인 이스마엘과 대조되며, 야곱은 쌍둥이 형인 에서와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대조되는 상대와의 관계들은 갈수록 가까워집니다. 조카 → 이복형제 → 쌍둥이 형제로 발전합니다.
하나님은 이 관계들을 통해 1~11장에 나타난 가인의 후예와 셋의 후예처럼 두 족보를 다시 보여주십니다. 창세기에서는 이렇게 두 종류의 인간의 후손들을 대조시켜 보여주십니다.

이 두 족보는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릅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당신은 아브라함입니까, 아니면 롯입니까?

당신은 이삭입니까, 아니면 이스마엘입니까?
당신은 야곱입니까, 아니면 에서입니까?
창세기를 읽을 때, 반드시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이 질문을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어느 족보에 속했는가?'


실제 일어난 일의 기록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를 실제 일어난 이야기로 믿지 않습니다. 창세기를 전설이나 설화로 생각하거나, 혹은 민간에 전해온 영웅 이야기 정도로 여깁니다. 전체적으로 그것은 네 사람을 중심으로 한 전설이며, 그저 그 내용 중에 조금의 진실이 섞여있는 정도의 소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왜 창세기의 진실성을 반박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알아야 할 사실은 '소설'이라는 장르는 훨씬 나중에야 비로소 문학의 표현 양식으로서 알려지게 된 것이고, 아브라함 시대의 사람들은 소설 같은 것을 아예 몰랐다는 점입니다. 당시에는 이야기를 소설처럼 지어서 써내던 사람도 없었고, 픽션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기본적으로 문학양식 같은 것이 아예 없었습니다.
창세기는 소설이 아닙니다. 실제 사실을 기반으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기록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당시에는 '진실 절반, 상상 절반'을 섞어서 기록할 줄을 몰랐습니다. 창세기는 단순히 실제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일 뿐입니다.

 

① 창세기가 진실인 이유 중의 한 가지는 이 족장 이야기에 "기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용감한 영웅 이야기를 남기려 했다면, 반드시 많은 기적을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보면, 기적 비슷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출애굽기에는 수십 개의 기적이 나옵니다만, 창세기에는 그러한 것들이 거의 없습니다.
세상의 전설에는 보통 많은 기적들이 나오는데, 창세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전설에는 그 전설에 부합되는 마술적 물건도 함께 나오지만, 창세기에는 그런 마술적 물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② 또한 족장 이야기에는 시대착오(Anachronism)적인 이야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란 이런 것입니다. 만약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전화를 걸었다면, 이것은 시대와 부합되지 않습니다. 전화가 없던 시기에 전화가 언급된다면, 족장 이야기는 누군가가 지어낸 것이라고 의심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에 담겨 있는 당시의 세부 문화는 당시 문화 배경과 일치하며, 이는 고고학에서 이미 증명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진실성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③ 다만 한 가지, 자연현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바로 창세기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천사'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면, 천사는 성경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예수님 시대와 계시록에도 아주 많이 나옵니다. 만약 천사의 존재를 믿지 못하면, 성경 전체를 믿기가 아주 힘들어질 것입니다.
천사를 제외하면,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는 매우 평범합니다. 남녀가 출생했고, 사랑했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사망한 내용입니다. 이것을 실제 사건으로 믿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양과 염소와 소를 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서로의 의견이 다를 때는 다투었고 싸웠습니다. 또한 장막을 치고,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실제 사건으로 믿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상생활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입니다.

 

특별한 선택

 

창세기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일의 기록입니다만, 과연 평범한 기록에 불과할까요?

창세기 이야기는 과연 무엇이 특별한 것일까요?
창세기 이야기가 특별한 점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하셨고, 그들도 하나님께 말을 했다는 점입니다. 곧, 사람이 하나님과 대화를 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벗'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저 하늘에 수많은 별들을 펼치신 전 우주의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아브라함이라는 미미한 사람과 친구가 되셨다는 것인데,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사야 41:8)
8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야고보서 2:23)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것이 바로 '특별한 선택의 스캔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편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친구가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것이 불공평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특별한 선택'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하나님은 왜 '특별한 선택'을 행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왜 자신을 가리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을까요?
분명 그들은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 하셨을까요?

혹시 그들이 특별했다면, 과연 그들은 무엇이 특별했을까요?
이 질문들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계속 물었던 질문입니다.
'유대인은 무엇이 특별한가요?'
'하나님은 왜 그들을 택하셨을까요?'
이 질문은 '하나님은 왜 우리를 선택하지 않으셨을까요?'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말뜻은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셔야 했다. 그런데 왜 유대인을?'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보다 우리가 더욱 중요하고, 유대인들보다 우리가 재능도 더욱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을?'이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기본적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연관있습니다.
그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관련하여 세 사람의 이야기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4대에 걸쳐서 응당 기업을 계승받아야 할 장자가 기업을 계승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기준으로는 장자가 집안의 기업과 재산을 계승받아야 했는데, 창세기의 4대에서는 장자가 선택된 것이 아니고, 막내가 선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택하셨고,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출생의 권리에 의해서 무조건 장자가 집안의 기업과 재산을 계승받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삭과 야곱은 장자가 아니었지만, 출생의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서 '장자의 기업'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장자라서, 유대인이라서 나의 사랑을 당연히 받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명백히 알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아닌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입니다.

이 점은 세 명의 족장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세 명의 족장 중에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이 도덕적으로 고상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기까지 했습니다. 게다가 야곱은 이 세 사람 중에서 아마도 가장 나쁜 사람일 것입니다. 만일 야곱 같은 친척을 두고 있다면, 아마 돈이나 물건을 도적질 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계략이 아주 많았지만, 나중에는 자신도 다른 사람한테 속임을 당했습니다. 야곱의 결혼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결혼하고 첫날 밤을 보낸 후에 자신이 원했던 예쁜 신부가 아니라 원하지 않았던 못생긴 언니를 취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날 밤, 그는 캄캄해진 다음에 신방에 들어갔고, 신부는 결혼식 내내 머리에 베일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7년 동안 아름다운 동생을 아내로 취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했지만, 장인은 못생긴 언니를 그에게 주었습니다.
만약 이런 일을 겪은 당사자라면 결코 웃어 넘길 수 없겠지만, 주변의 친구가 이런 일을 겪는다면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때때로 성경에는 이러한 유머가 등장합니다.
사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아주 큰 교훈 하나가 있는데, 바로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입니다.
야곱은 눈이 먼 늙은 아버지를 속였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이 그를 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를 원망하지 못합니다. 자업자득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6:31)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세 사람 모두 아내가 둘씩이며, 심지어 더 있었습니다.
이처럼 족장들 모두는 연약했고, 때로는 잘못도 범했습니다. 요즘 흔히 사용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아주 인간적입니다.

성경은 이 세 사람이 위대한 조상이라고 미화하지 않고, 실은 이 세 사람 모두가 거짓말을 했으며, 우리와 똑같이 평범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보여 줍니다.

이처럼 세 명의 족장들을 살펴볼 때,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어떤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결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가까이 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그들과 가까워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서 어떤 점을 보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을까요?
우리는 창세기에서, 더욱 깊은 답을 찾아야 합니다.

...............

.........

...

의외로 답은 간단합니다. 

이 세 사람에게는 남다른 특징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 모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기적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보다는, 믿는 사람을 더 가까이 하십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합니다.
(창세기 15:6)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신약에서도 지속적으로 말합니다.
(로마서 4:3)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갈라디아서 3:6)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야고보서 2:23)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제일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명확하게 대답하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삭도 이러한 믿음이 있었고,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 사람 모두 믿음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제각각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서로 성격도 다르고, 기질도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의 표현 방식은 서로 조금씩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은 보여준 믿음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르는 문명이 대단히 발전된 도시였습니다. 소위 하늘에 닿고자 했던 아주 높은 계단식 첨탑인 지구라트는 아브라함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첨단 문명을 누리며 살던 사람에게 '내가 너를 남은 평생 동안 장막에서 살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이 사람은 75세였습니다. 과연 75세의 나이에 살기 좋은 고향의 최신식 집을 떠나 남은 여생을 야산에 장막을 치고 차디찬 겨울과 눈바람을 참으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낯선 곳으로 떠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브라함은 부친과 가족 몇 명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가나안까지 가는 길의 절반인 하란에 도착했을 때, 함께 온 가족들이 '이 정도면 괜찮다'고 해서 거기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은 아내와 조카 롯을 데리고 계속해서 가나안까지 나아갔습니다.
이 노인은 하나님을 믿었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 하나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90세에 아들을 낳았을 때, 부부는 그의 이름을 '웃음'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자신들이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참지 못하여 웃고 말았는데, 그래서 '웃음'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주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믿음도 한번은 흔들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인내를 가지고 11년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배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아내의 나이는 갈수록 많아졌고, 결국 그의 아내가 그에게 건의하기를 '내 여종을 취하여 자녀를 얻으라'고 하니 그가 그 말을 들었고, 결국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마엘은 믿음의 자녀가 아니고 육신의 자녀였으므로 하나님은 그를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열두 두령을 낳을 것이며 큰 나라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고, 그가 바로 오늘의 아랍 나라들의 선조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계보로 택하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그를 버리지 않으셨고, 그도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무엇보다 잘 드러난 때는 하나님께서 '너의 독자를 나에게 번제로 드리겠느냐?'고 물어보신 때였습니다. 이 때 이삭의 나이는 25세-37세 무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를 요구하셨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1:19)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성경은 당시 아브라함의 몸이 죽은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4:19)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그는 하나님께서 죽은 것과 같은 자신이 아들을 얻는 기적을 주셨으니 이삭이 죽은 후에도 하나님께서 죽은 그를 부활시키는 기적을 주실 것 또한 믿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는 하나님께서 한 번도 '죽은 사람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이는 이미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18)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아브라함의 믿음이 참으로 큽니다.


이삭의 믿음   


이삭의 믿음은 아버지가 자신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을 때, 그에 대한 순종에서 드러났습니다.
이 때 이삭의 나이는 25세-37세 무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그림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그림들은 대부분 이삭을 12-15세의 어린 소년으로 그립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아주 잘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히브리 성경이 장과 절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자 했던 사건 후에 사라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라는 90세에 이삭을 출산했고, 127세에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이삭은 37세였습니다. 사라의 죽음은 이삭의 번제 사건 이후에 이어지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고자 했을 때 이삭은 이미 30세 초반 무렵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연로한 부친에게 복종했습니다. 이것이 이삭의 믿음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자 했던 곳은 모리아 산이고, 신기하게도 후에 이곳은 골고다 혹은 갈보리산이라고 불렸습니다.
또한 이삭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아내를 선택해 주신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도 이삭의 믿음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택해 주신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야곱의 믿음   

야곱도 아주 큰 믿음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축복을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고, 또한 그렇게 했습니다. 믿음이 과잉상태였던 것입니다.
명백히 그는 모략과 속임수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복을 받고 싶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좋은 점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씨름한 밤에 하나님께서 그를 치셔서 이때부터 남은 평생동안 다리를 절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또한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되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친척들과의 대조   


이 세 사람에게는 잘한 일도 있었고, 잘못한 일도 있었습니다. 연약함과 실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모두 하나님에 대한 큰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점은 믿음이 없고, 육신적으로 행하는 그들의 친척들과의 대조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친척들은 영적인 안목이 없었고, 물질적인 기준으로만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척박한 땅에 살려고 하지 않고 비옥한 요단 평지를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들과 롯의 기축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을 때, 아브라함이 롯에게 '다툼이 없도록 우리가 좋게 헤어지자'고 말했습니다. 때로는 이런 지혜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네가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해라. 나는 너와 다른 편 땅을 선택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창세기 13:9)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라함의 이러한 말은 놀랍습니다. 자신이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하려는 것이 사람의 욕심인데, 그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롯이 요단 지역을 바라보니 거기는 요단강이 뱀처럼 통과하여 물이 넉넉하고 숲이 우거져 있었으며 아주 비옥해 보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조건이 시선을 사로잡는 곳이어서, 롯은 요단 지역을 선택했습니다. 롯은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쫓아갔고,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남았습니다.
롯만 이렇게 행동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마엘과 에서도 그러했습니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임신했을 때 그가 자신의 여주인을 멸시한 것처럼 이스마엘은 어린 이삭을 놀리다가 아브라함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었습니다. 그는 팥죽 한 그릇을 선택했기에 아버지가 죽을 때가 다 되어 남겨주는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에서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즉시 해결하려 하고, 참거나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되지 말라'고 깨우칩니다.
에서는 이 거래를 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소리 높여 울면서 축복을 구했지만 회개는 없었고, 이미 늦은 때였습니다.
믿음의 세 사람과 육신을 따라서 살아간 친척들이 서로 대비가 되는 것처럼, 오늘날 현실을 살아가는 대다수 가족들에서도 이러한 대비를 볼 수 있습니다. 같은 가족이지만,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살고, 어떤 사람들은 육신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비는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내들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라, 리브가, 라헬의 공통점은 세 사람 모두 아주 예뻤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내적 성품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남편에게 복종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아내들은 믿음의 사람들의 아내들과는 '믿음'의 측면에서부터 달랐습니다.
사해 남쪽 끝에는 뛰어 가는 여자와 같은 신기한 형태의 바위가 있는데, '롯의 아내'라고 불립니다. 예수님께서도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죄악의 도시를 빠져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돔에 대한 미련 때문에, 소돔의 삶에 대한 미련 때문에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롯의 아내는 역사에 길이 남는 유명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창세기를 읽을 때, 반드시 유념해야 할 점입니다.
믿음에 속한 사람들과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 대비되며, 그들의 아내들도 대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가족들을 선택하시고 함께하셨는지를 조금 더 알게 되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① 이삭과 이스마엘, 그 후...
이스마엘과 이삭 사이의 원한은 지금까지도 중동에 존재하여,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이 서로 미워하고 있습니다.

 

② 야곱과 에서, 그 후...
야곱은 매우 야심만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에게 사랑을 제일 많이 받았고,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형과 싸웠고,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놓지를 않았던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움켜쥐는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에서의 후예는 오늘날 '페트라'라고 불리는 곳에서 지냈습니다. 그곳에는 후에 붉은 사암층을 깎아 만든 거대한 신전이 있습니다. 에서가 이곳으로 이사 와서 에돔나라를 건설했습니다.
에서와 야곱 사이의 원한은 후에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헤롯이라는 마지막 에돔 사람이 에서의 후예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에돔 출신 헤롯은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그가 베들레헴 지경 안에서 태어난 두 살 아래의 모든 남자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야곱의 후예가 태어나면 왕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아예 없애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이 세 명의 족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셨는데, 이 언약은 오늘까지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통해 인류 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셨고, 또한 한 사람을 통해 인류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언약'이라는 단어는 아주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오늘날 성찬식 때도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라고 말합니다.
언약은 동일한 힘과 권세를 가진 쌍방간에 이루어지는 '계약'이 아닙니다. 언약은 절대적 힘을 가지신 하나님 쪽에서 세우신 것이며, 그 목적은 상대방을 축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때 언약의 상대방에게는 두 가지 선택만이 주어집니다. 언약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거절 할 것인지입니다. 언약은 그 내용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약속을 하셨는데, 이 약속을 끝까지 지킨다고 맹세하셨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맹세하셨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람은 맹세할 때 반드시 자기보다 더욱 능력 있는 사람을 가리켜 합니다. 예를 들면,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든지, 아니면 신을 가리켜 맹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는 하나님을 걸고 맹세하는 바, 이 일을 내가 반드시 행할 것이다'라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보다 더욱 능력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셨습니다.
'언약'의 성격을 쉽게 설명하면, 사실 혼인과 같습니다. 언약은 '내가 반드시'로서 나타납니다. 우주의 하나님께서 이 미천한 가족과 혼인 언약을 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언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정착할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작은 땅은 여러 대륙의 합류점이고, 랜드마크는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해서 아시아까지 연결되는 도로, 아라비아에서 유럽까지 연결되는 도로가 바로 아마겟돈이라는 작은 산에서 교차 되는데, 이곳이 전 세계의 교차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영원한 기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이며,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신 영원한 기업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그 땅은 그들에게 속한 땅입니다.

②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땅에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언약 때문입니다.

③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통하여 열방이 축복을 받든지 아니면 열방이 저주를 받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2:3)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축복 또는 저주' 이것이 유대인을 부르신 목적이며, 그들은 선민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해야 했습니다.
이 약속이 오늘날까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때, 요구하신 것이 있습니다.
1) 첫째, 유대 남자 모두는 반드시 할례를 행해야 하며, 이것은 태어나서부터 약속 받은 표시다.
2) 둘째, 아브라함은 반드시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완전히 지켜야 한다.

이 약속이 성경 전체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에 근거하여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6:7)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이 말씀은 성경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며, 요한계시록의 끝까지 나타납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할렐루야!
이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고 싶어 하십니다.
이 사실은 성경의 맨 마지막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하늘을 떠나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한 가족이 되고 싶어 하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싶어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주요 목적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큰 믿음을 보여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공통점 중 하나는 모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셨음을 확실히 믿었고, 자신들이 소유한 적 없던 그 땅을 기업으로 아들에게 남겨 주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창세기 12:7)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물려주었습니다.
(창세기 24장)
2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7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② 이삭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창세기 16:2-3)
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3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물려주었습니다.
(창세기 28장)
1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4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③ 야곱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창세기 35장)
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물려주었습니다.
(창세기 48장)
2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3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4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지만 그 세 사람은 모두 땅을 진정으로 소유해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들 가족의 무덤인 막벨라 굴만 소유했을 뿐이었습니다.
(창세기 23:16-18)
16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17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18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이러한 믿음이 참으로 큽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해보지 못했던 땅을 자손에게 남겨준다는 유언을 남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 땅을 주셨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 전체가 언젠가는 온전히 그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믿음을 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13)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라는 말씀은 그들이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하루 이틀만 믿은 것이 아니라, 비록 그 약속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 약속을 굳게 믿었고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약속을 믿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도 약속이 아직 성취된 것을 보지 못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11:39-40)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통해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묻혔다는 무덤이 헤브론에 있지만, 그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였는데, 이는 과거형이 아니고 현재형입니다.
(마태복음 22:32)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있으며, 우리가 아니면 그들도 온전하게 되지 못합니다. 그들은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으로서 지금 경주를 하고 있는 우리를 천국에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의 완성, 언약의 완성'은 릴레이 경주의 마지막 주자인 지금 우리 세대를 통해서 온전함을 이루고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 하실 때, 그분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오시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한 부분은 모두 없어지고, 우리는 완벽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하여 나타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