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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모습

백영심 간호사, "케냐 · 말라위 30년"

아리마대 사람 2020. 9. 30. 00:45

'상금 4억원은 아프리카에... 내 옷값은 1달러'

1990년 9월, 김포국제공항 출국장.
당시 28세이던 백영심 간호사가 아프리카 케냐로 의료 선교를 떠나던 날이었다. 돌아올 날은 정해지지 않았다. 부모님은 공항 바닥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백 간호사는 2남 4녀 중 셋째 딸. 제주 조천읍 함덕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제주에서 마쳤다. 자식을 육지로 내놓는 일만 해도 조마조마했는데, 그 귀한 셋째 딸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아프리카로 간다니...

백 간호사를 아프리카로 파송했던 한국 교회조차도 그가 금방 돌아올 줄 알았다. 처음엔 정식 선교사 월급 대신, 교회 청년들이 모아준 300달러(약 36만원)와 병원 퇴직금을 가지고 떠났다.

 

하지만, 백 간호사는 아프리카에서 30년을 ‘시스터 백’으로 살았다. 시스터 백은 현지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애칭.

그는 케냐에서 4년, 나머지 세월은 아프리카 중에서도 최빈국이라는 말라위에서 보냈다. 자기 월급을 쪼개고 아껴 말라위에 유치원 · 초등학교 · 진료소를 지었고, 200병상 규모의 최신식 종합병원인 대양누가병원과 간호대학 설립도 주도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백 간호사는 2012년 이태석상, 2013년 나이팅게일 기장, 2015년 호암상, 지난 8월 성천상을 받았다. 국내외에서 굵직한 사회봉사 · 의료인상을 두루 받았지만, 언론 인터뷰는 손에 꼽을 정도. 지난달 17일, 성천상 수상을 위해 서울에 온 백 간호사를 만났을 때도, 첫 인사는 ‘저는 인터뷰할 만한 사람이 아닌데...’ 였다.

 

◆ ‘사랑 실천’이 삶의 소명

 

성천상은 JW중외제약 창업자인 고 성천 이기석 선생의 생명존중 정신을 기려, 음지에서 헌신적인 의료봉사활동을 통해 의료복지 증진에 기여하면서 사회적인 귀감이 되는 참 의료인을 발굴하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 상을 사양하신 적도 많으시다고요. 인터뷰 거절당한 기자도 많고요(웃음).

“다른 사람들이 다 각자 주어진 길을 가는 것처럼 저도 제 길을 가는 것뿐이지, 언론에 나올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어쩌다 보니 제 일이 조금 알려져서 (인터뷰를) 하지만(웃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는데, 저는 이 말을 ‘내가 한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선교사로 조용히 숨어서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주변에 개인 정보도 잘 드러내지 않았어요.”

 

2008년 이명박 정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인 안필영 등을 포함해 세계 각국에서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인 재외 동포 42명을 ‘건국 60주년 재외 동포 명예위원’으로 위촉했다. 백 간호사도 여기 포함되면서 처음 언론에 이름이 알려졌다.

 

– 명예위원은 어떻게 되셨나요.

“당시 짐바브웨 · 말라위 겸임 대사님이 대양누가병원 기공식에 참석하시면서, 제가 일했던 진료소에도 오셨어요. 이후 한국에서 명예위원이 됐다는 연락이 왔어요. ‘저 너무 바빠서 못 갈 것 같습니다’ 했더니, ‘그게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된 건데 무슨 말이냐’고 하시더군요(웃음). 너무 거절하면 교만하다고 할 것 같아, 알겠다고 했어요.”

 

– 그때 비행기 좌석을 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진해서 바꿨다고요.

“나랏돈이고 나는 몸도 작은데 비즈니스석을 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이코노미석을 타고 왔어요. 차액을 돌려주셔서, 그걸로 현지에 필요한 약품을 샀습니다.”

 

– 이태석상도 1회 때 수상을 권유받았지만, 사양해서 2회에 받으셨다고요.

“2회 때는 저희 간호대학이 막 문을 열었어요. 구급차도 필요하고 간호대학 버스도 필요한데, 가만 보니 상금이랑 필요한 금액이 맞아 떨어져서 받겠다고 했어요(웃음).”

 

백 간호사는 호암상 상금 3억원은 현지에 도서관을 짓는 데 썼다. 성천상 상금 1억은 “현지 중·고등학교를 짓는 데 쓸 예정”이라고 했다.

 

– 어릴 때부터 꿈이 간호사였나요?

“큰언니 권유로 간호대학에 입학했지만, 방황을 많이 했어요. ‘나는 왜 사는가’ ‘뭐 때문에 간호 공부를 하는가’와 같은 물음이 계속됐습니다. 그러다 1학년 여름방학 때 여수에 있는 애양원(한국 최초의 나병원)을 방문했는데, 거기서 제가 많이 깨졌어요.”

 

– 깨졌다니, 무슨 뜻인가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손과 발이 문드러지고 얼굴이 일그러졌는데도, 감사하고 기쁘고 평안해요. 천국에 사는 사람들처럼요. 그분들을 보면서 내가 사는 이유는 사랑이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도구가 간호라는 걸 알았습니다. 간호를 공부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가장 어렵고 힘든 곳에서 내가 쓰임받았으면 좋겠다고 마음먹었어요.”

 

– 그래서 아프리카로 간 건가요?

“졸업 후 대학 병원에서 6년간 일했는데,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겁이 나더군요. 급여나 생활 안정성 면에서 안주해버릴 것 같아서요. 그 무렵 서울의 한 교회를 통해, 아프리카 케냐에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제가 가겠다고 손을 들었어요.”

 

– 가족들 반대나 미래에 대한 걱정은 없었나요.

“가족들은 가지 않기를 바랐죠. 그때 선도 많이 들어왔거든요(웃음). 결혼해서 평범하게 아기 낳고 살면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할 것 같았어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모님도 대학 때부터 워낙 제가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걸 아셨기에, 결국엔 지지해주셨어요.”

 

– 대학 병원 간호사로, 혹은 한국에서 아이 낳고 평범하게 살면서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지 않은가요.

“아프리카에 가야만 봉사하는 삶을 사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를 더 요구하는 곳에서, 더 열악하고 힘든 곳에서 도움이 됐으면 했어요. 그게 아프리카였고요. 한국 대학 병원은 제가 없어도 일할 사람이 많잖아요.”

 

◆말라위의 나이팅게일

 

– 아프리카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미국의 NP(전담 간호사 · nurse practitioner)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은 전문의 진료 전, NP가 진단을 내리고 처방전을 쓸 수 있어요. 케냐 간호협회에 등록하고 오리엔테이션을 거쳐 현지 간호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이동식 진료 차량을 타고 왕진 가방 들고서 각 마을을 돌았어요. 피부 문제 있는 환자부터 말라리아 환자까지 다양한 환자를 돌봤습니다.”

 

– 케냐에서 4년 일하다, 말라위로 갔습니다.

“케냐만 해도 동부 아프리카 중심 나라입니다. 수도인 나이로비에서는 국제 회의도 많이 열리고, 대형 병원도 있고요. 당시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하면 말라위는 의료진이 인구 대비 가장 부족한 나라였어요.”

 

– 언어도, 음식도 다른데 힘들지 않았나요.

“저는 인내하고 견뎌내는 것에는 자신이 있어요. 흙바닥에서도 잘 수 있고, 호텔에서도 잘 수 있고요.”

 

– 성천상 시상식 전, 현지 교민 인터뷰에서 ‘백 간호사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일했다’는 얘기가 나와요.

“말라위에 가니, 초기라면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는 병을 오래 내버려둬서 위험해진 경우가 많았어요. 조기 치료와 추후 관리까지 할 수 있는 진료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한데, 당시 한국은 IMF 외환 위기로 많이 어려웠어요. 지인들이 도와줬지만, 제 생활비도 줄여야 했죠. 바나나 하나, 커피 한잔으로 버티는 날이 많았어요. 내가 가진 건 몸 하나, 젊다는 게 전부여서 그거라도 바쳐야겠다는 심정이었어요.”

 

– 진료소 다음은 병원 건립이었습니다.

“한번은 새벽에 아이 엄마가 뇌성 말라리아 아이를 품고 진료소에 왔는데, 이미 혼수 상태였습니다. 아이가 손도 못 써보고 제 품에서 죽었어요. 아이를 땅에 묻고 돌아오면서, ‘의료 시설이라도 뒷받침된다면 아이들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병원을 세워야겠다' 하는 간절함이 생겼습니다.”

 

– 진료소와 달리 병원 건축은 돈이 훨씬 많이 들 텐데요.

“꿈으로만 간직하나 싶었는데, 어느 날 이동 진료를 가는 길에 한국에서 전화가 한 통 왔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분인데 ‘뭐가 필요하냐’고 묻더군요. 저는 1000불로 살림 사는 사람인데, 이분은 도와주시겠다는 규모가 달라요(웃음). 자꾸 필요한 걸 말해보라고 하기에, 병원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평생 현역이 꿈

 

당시 백 간호사에게 전화한 사람은 해운 회사인 대양상선 정유근 회장(75)이다. 정 회장은 유엔세계식량계획(WFP)과 함께, 기근 국가를 위한 원조 식량 운송을 했다. 가난과 기근으로 고통받는 국가를 직접 도울 방안을 찾던 정 회장은 WFP를 통해 백 간호사를 소개받았고, 그해 10월 아프리카에 ‘미라클 포 아프리카’ 재단을 세워 병원 건립을 시작했다. 정 회장이 재단 이사장, 백 간호사가 이사를 맡았다. 2년 5개월 만에 200병상 규모의 최신식 장비를 갖춘 ‘대양 누가 병원’이 말라위 수도 릴롱궤에 세워졌다.

 

– 기공식에 말라위 대통령도 왔습니다.

“병원 기공식 날, 대통령이 오신다고 태극기를 가져오래요. 급하게 태극기 100개를 구했어요. 말라위 대통령이 달리는 길 양쪽으로 태극기 수십 개가 펄럭거리는데, 참 감격스럽더군요. 한국인으로서 자부심도 느껴졌습니다.”

 

– 그렇게 지은 병원에서 아무런 직책도 맡지 않았습니다.

“한국 사람들 조언은, 병원에서 제일 좋은 방을 쓰래요(웃음). 그래야 사람들이 우습게 안 보고, 품위도 지킬 수 있다고요. 제일 좋은 방은 현지인 병원장 주고, 주요 직책도 다 현지인들한테 맡겼어요. 이 병원은 제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을 위한 거니까요."

 

‘미라클 포 아프리카’는 2010년에는 대양간호대학을, 2012년에는 정보통신기술대학을 세웠다.

 

– 왜 대학을 세웠나요?

“아프리카에 온 지 15년 정도 됐을 때, 변화가 없다는 생각에 회의감에 빠졌어요. 이대로라면 100년을 여기서 살아도 그대로일 것 같았어요. 교육만이 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앞으로 목표는요?

“평생 현역으로 살고 싶어요. 이제 병원은 현지인들이 자리를 잡아서 잘해나가고 있기 때문에, 저는 새로운 지역을 찾아 나서려고 합니다.”

 

– 돈에 대한 욕심은 없으신가요?

“살면서 돈이 필요한 건 맞아요. 그렇지만 ‘돈이 제일이다’라고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노후에 어떻게 할 거냐’고 걱정하는데, 아프리카는 고구마도 많고 호박도 많고 농산물은 되게 싸거든요(웃음). 내 몸 하나 입에 풀칠하고 살 수 있다는 배짱이 있어요. 지금 제가 입은 옷도 국제 구호품 시장에서 1달러 주고 산 거예요. 저한테 필요한 건 넘치도록 받고 있어요. 나눠줘야 할 만큼요.”

 

– 후회 없는 인생인가요?

“네. 한 번 사는 인생, 가장 최선의 삶을 살 수 있는 게 어떤 길인가 선택하고 보니, 그게 이 길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