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잠깐 스쳐가는 말씀 한 조각

말씀 한 조각 만으로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 삶의 모습

영화 『굿바이』

아리마대 사람 2020. 12. 28. 11:05

훈련소의 신병교육과정에는 '행군'이 포함되어 있다. 군장을 싸서 어깨에 메고,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걷는 훈련이다.

걷다보면 처음에는 그다지 무겁게 느껴지지 않던 군장이 점차 무겁게 느껴지고, 어느새 발바닥에는 물집이 생겨난다.

중간중간 휴식시간을 갖는데,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난 후에는 휴식시간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휴식시간을 마치고 다시 걸음을 떼는 순간은 발바닥이 무척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걷다보면 통증은 가라앉게 되고, 점차 요령 또한 생겨난다. 요령은...그저 묵묵히 앞사람의 뒷꿈치를 보며 걷는 것이다.

그렇게 걷다보면 훈련소로 복귀하게 된다. 그저 묵묵히 걸었던 걸음이 행군을 무사히 마쳤다는 자긍심이 된다.

살아가는 것도 그렇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따라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 삶의 요령이고, 최선이 아닐까 싶다.

성령의 지시를 따라 묵묵히 그리스도를 기다린 시므온처럼...

성전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기도하며 살던 안나처럼... 

 

(누가복음 2:25-38)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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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영화평론가의 글입니다.

 

'일이 없어서..' 시체 염습을 시작한 첼리스트, 그의 멋진 선택

 

선 자리를 탓한 시절이 있었다. 돈이 없어서, 집안이 별로여서, 내세울 만한 게 많지 않아서, 이름 있는 회사에 다니지 못해서, 온갖 것을 끌어와 내가 저지른 잘못을 뒤집어씌웠다.
세상은 마음처럼 풀리지 않았다. 기대한 자리는 늘 남의 차지가 됐고, 공모전엔 번번이 미끄러졌다. 취업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봉급은 보잘 것 없었고, 주어지는 일도 별 볼 일 없었다. 하루하루 잘 나가는 친구들에게 뒤처지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늙어버리면 어떡하지. 조급함이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책임을 미루고만 싶었다. 보잘 것 없던 시기를 보잘 것 없이 지내다보니 남의 시선만 신경 썼다. 제 삶을 살면서도 만족할 줄 몰랐다.
선 자리보다 자세가 중요하단 걸 깨닫기까지는 많은 경험이 필요했다. 익숙한 내 나라와 가족과 애인을 떠나서야 정말 지켜야 할 것과 쓸모없이 집착하고 있었던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중요한 것을 지키다보니 다른 것엔 신경 쓸 여유도 필요도 없었다.
다시 돌아와 같은 자리에 서서 다른 마음으로 일하는 건 놀라운 경험이었다. 내 선 자리와 내 일과 내가 지나온 것들을 긍정할 수 있었다. 자긍심이 무엇인지 그때서야 알았다.

업에 대하여, 자긍심에 대하여

 

<굿바이>는 자긍심에 대한 영화다. 제 선 자리를 긍정하며, 긍지를 갖고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도쿄 어느 악단 첼리스트 다이고(모토키 마사히로 분)는 하루아침에 일을 잃는다. 큰 빚을 내 첼로까지 샀건만 악단이 해체된 것이다. 제 경력과 실력으론 마땅히 갈 곳도 없단 걸 다이고가 가장 잘 안다.
다이고는 아내(히로스에 료코 분)를 설득해 고향으로 간다. 어릴 적 종업원과 눈이 맞아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어머니가 운영해온 가게가 둘의 터전이 된다.
언제까지 백수로 살 수는 없는 법, 다이고는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NK에이전트란 업체를 찾는다. 사장 이쿠에이(야마자키 츠토무 분)는 다짜고짜 합격이라며 한 달에 50만엔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NK에이전트는 사망자의 몸을 닦고 옷을 입혀 관에 넣는 일을 한다. 납관을 줄여 NK라 부른다는데, 우리 표현으로 하자면 염습을 전문으로 하는 외주업체다. 첼리스트가 아무리 일이 없다고 염습이라니, 뭔가 아니다 싶지만 분위기에 압도돼 일단 출근하기로 한다.

긍지를 갖고 제가 선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

 

영화는 다이고가 이쿠에이와 함께 일하며 진정한 염장이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는다. 이쿠에이는 어느 한 죽음도 소홀히 넘기지 않는다. 다이고가 이쿠에이의 염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느낀 그대로 '차갑게 식은 사람을 치장해 영원한 아름다움을 주는 행위이고, 냉정하면서도 정확하고 동시에 따스한 애정이 넘치는 일'이다.
하나하나의 죽음에 예를 갖춰 배웅하는 이쿠에이에게선 장인의 멋과 혼까지 느껴지는 듯하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이쿠에이의 염습을 지켜본 다이고가 변하지 않을 리 만무하다. 제 하는 일에 긍지를 갖고 최선을 다하는 인간은 지켜보는 이조차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이쿠에이와 다이고 뿐 아니다. 크고 작은 배역을 맡은 이들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끄는 목욕탕 아주머니(요시유키 카즈코 분)와 화장장 아저씨(사사노 타카시 분)도 같은 사람들이다. 목욕탕 관두고 건물을 팔자는 아들에게 "목욕탕 없어지면 단골손님들은 어쩌느냐"고 들은 체도 안 하는 아주머니는 제 업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이가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해도 제 자리를 지키는 화장장 아저씨는 또 어떤가.

이들은 제 일에 긍지를 갖고 자리를 지킴으로써 세상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이보다 더 멋진 일이 세상엔 얼마나 있을까. 나는 딱히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