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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모습

케이티 데이비스,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아리마대 사람 2021. 6. 17. 10:29

인터넷 서점에서 보게 된 책소개입니다.

젊은 아가씨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생각해 봅니다.

 


 

책 소개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는 다복한 생활을 뒤로 한 채 우간다로 떠나 열네 명의 아이들을 입양하여 키운 ‘케이티 데이비스’의 이야기를 그려낸 책이다.
케이티 데이비스는 미국 테네시 주 내슈빌에서 태어나 다복한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스물세 살의 미국인 아가씨다. 케이티 데이비스는 열여섯 살 때에 아프리카의 우간다에서 봉사활동을 한 이후 안락함을 보장하는 미래를 내려놓고, 2007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간다로 향했다. 케이티 데이비스는 질병과 가난, 전쟁의 위협이 도사리는 우간다에서 처녀의 몸으로 지금까지 열네 명의 꼬마 숙녀들을 입양해 키우며 헌신적인 “엄마”로 살고 있다. 이 책은 고아원의 예쁜 꼬마 에밀리, 다섯 살의 수미니 등 저자가 보살펴 온 아이들과 빚어온 생활을 비롯하여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변화해가는 케이티 데이비스의 내적 성장을 이야기한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바로 ‘사랑’의 가치를 체득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주님, 우리가 매 순간 주님을 선택하게 해 주세요!”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예수님을 사랑하면서부터 나 자신의 계획, 나를 향한 다른 사람들의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사랑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고, 그 사랑이 나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다”라고 밝힌다. 미국을 떠나 우간다에서 사는 삶, 처녀의 몸으로 14명의 우간다 아이들의 ‘엄마’로 사는 삶, 이 모든 것은 케이티의 인생 계획표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녀의 계획과 달랐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순종했다.
대학 입학 전 1년만 머물 작정으로 선교 여행을 떠났던 우간다였다. 그러나 어느 날, 애처로운 상황에 처해 잠시 맡아 돌봐 주던 다섯 살배기 스코비아가 어렵사리 꺼낸 한 마디,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라는 말이 그녀의 삶을 새로운 지경으로 이끌게 된다. 이제 그녀는 선교사나 구호 기관의 일원이 아닌 우간다 아이들의 ‘진짜 엄마’가 되고, 그들의 ‘진짜 가족’으로 평생 그 땅에서 살기로 결정한다.
이 책은 저자를 초인이나 성자로 치켜세우지 않는다. 또 그녀가 여유 있는 미국에서의 삶을 내려놓고 지금의 생활 방식을 택했다고 해서 그녀를 지나치게 추앙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저자는 이 책에서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고민했을 법한 딜레마들과 자신의 모순된 감정, 한계 등을 여실히 보여 주며 우리의 마음을 보듬는다. 그리고 열여덟 살의 한 평범한 소녀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분이 주시는 마음에 무조건 “예!”하고 순종했을 때 펼쳐지는 놀라운 기적의 현장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독자들은 매 페이지마다 그녀와 함께 웃고 울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왔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순종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놀랍고 실제적으로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지,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 안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 대신 우리가 지금 얼마나 다른 것들에 의지하며 살고 있는지 확인하라. 그리고 이제 매 순간 ‘하나님’을 선택하라!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면 ‘진짜 인생’이 열린다!

 

 

책 속으로

 

<29쪽 중에서>
내가 이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왜 사랑하는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사람들 눈에는 이 녀석들의 더러운 옷이나 머리에 핀 곰팡이, 콧구멍 주위에 말라붙은 콧물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또 쥐와 바퀴벌레가 득실대는 고아원 바닥을 보면 그야말로 구역질이 나올 지경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내 눈에는 그런 것들이 주목되지 않았다. 아니, 그 작은 얼굴들에서 나 자신을 보았다. 그 아이들에게 깊은 사랑을 느끼면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돌멩이와 흙을 선물이라고 건네는 아이들에게서 나 자신을 보며 내 인생을 하나님께 맡겼다.

 

<46쪽 중에서>
얼핏 보면 이 아이들은 불쌍하기 그지없다. 옷은 너덜너덜하고, 잠자리는 낡고 더러운 매트리스다. 비 오는 날에도 맨발로 학교에 가야 한다. 전기도 수도도 없다. 비는 또 어찌나 퍼붓는지 고아원 전체가 질펀한 늪으로 변했다. 하지만 나는 이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럽다. 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성령 충만을 경험했으니 말이다. 이 아이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기이하심을 알고 있다.

 

<89쪽 중에서>
우리 집의 천사들은 나를 엄마라 부른다. 기아와 질병 등으로 엄마를 잃은 400명의 마을 아이들도 나를 엄마라 부른다. 하도 많은 아이가 엄마라고 불러 대니까 이젠 집 근처에 사는 마을 어르신들까지 나를 엄마라 부른다. “많은 아이의 엄마.”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도, 가게 점원도, 주차요원도 나를 엄마라 부른다. 선생님도, 마을 병원 의사들도 나를 엄마라 부른다. 차를 타고 지독히 울퉁불퉁한 흙길을 달릴 때도 엄마란 외침이 들려 온다. 우리 딸들은 학교에 갔다가 우르르 들어오면서 엄마라고 노래를 부르고, 아침마다 내 귀에 대고 엄마라 속삭인다. 좋은 일이 생겨도 엄마라고 외치고, 슬픈 일이 생겨도 훌쩍거리며 엄마를 찾는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쁨으로 내 심장이 마구 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늘 아버지의 심정도 그러하시리라.

 

<98쪽 중에서>
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마음과 말씀을 날마다 새롭게 보여 주셨다. 하나님이 왕이시고 나는 그분의 종임을 깨닫고 나자 모든 상황에서 내 전부를 내어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었다.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고 매일같이 내 세상이 변하기를 원했다. 중요한 건 세상의 스포트라이트가 아니다. 그저 하나님이 주신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면서 내 역할에 충실하면 그만이었다.
‘하나님이 이번에는 무슨 일을 벌이실까? 이번에는 누구를 내 삶 속으로 보내실까?’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무조건 믿는 마음으로 한 번에 한걸음씩 떼었다. 때로 사람들은 내 인생의 무대에 불쑥 나타났다가 재빨리 퇴장한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그들조차 기꺼이 내 마음속으로 입양하는 법을 배웠다. 내 세상에 들어와 오랫동안 머물 사람도 있고, 잠시 머물다 떠나갈 사람도 있다. 개중에는 나와 살짝 스친 그 짧은 순간에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영원히 자리 잡은 사람도 있다.

 

<114-115쪽 중에서>
세상에는 고아가 1억 4400만 명이고, 기아나 충분히 예방 및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죽어 가는 아이가 1100만 명이며, 노동 학대나 성매매 같은 끔찍한 조건에서 사는 아이가 850만 명이고, 에이즈에 걸린 아이가 230만 명이다. 모두 합치면 고통 중에 신음하는 아이가 1억 6480만 명이다.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닌가?
하지만 이 지구의 그리스도인 숫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사람이 자그마치 21억 명이다. 이 그리스도인들 중 8퍼센트만 한 아이씩 책임진다면 위의 통계는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이게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이 현실을 바꾸기 위해 뭐든 할 것이다. 주님은 나만큼이나 이 아이들을 깊이 사랑하신다. 이것을 알기에 책임감이 생긴다.

 

<126쪽 중에서>
평범하고 부유하게 살라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소시민적인 삶의 유혹을 떨쳐내기란 어렵다. 그와 반대로, 세상 재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려니 불안하고 겁이 난다. 하지만 그 불안과 두려움 너머에 상상도 못할 만큼 좋고 온전한 삶이 있다면 어떻겠는가?
모두가 전 재산을 팔고 짐을 싸서 아프리카로 날아와야 하는 건 아니다. 모두가 고향과 친척을 떠나 머나먼 타지에서 선교사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자리에서 선교사가 될 수 있다.
매일 우리는 선택하며 산다. 쥐 소리가 들리던 그날의 나처럼 안전하고 편안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을 것인가? 감히 위대하신 하나님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하찮은 것이 두려워서 뒷걸음만 칠 것인가? 아니면 과감히 나서서 누군가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고 누군가의 세상을 환히 밝혀 줄 것인가. 온전한 삶이 존재한다. 누구라도 그 삶을 잡을 수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을 용기만 있다면.

 

<152-153쪽 중에서>
집에 다시 돌아온 뒤로 내가 그토록 심한 문화 충격에 시달리는 이유가 내내 궁금했다. 태어나서 자라고 18년간이나 고향이라 불렀던 곳에서 이런 이질감을 느껴도 되는 건가? 불과 1년 조금 넘게 지냈던 곳이 진짜 고향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뭔가? …(중략)…
문화 충격과 이질감의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께 내 필요를 맡기지 못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예수님을 ‘잃어버렸다.’ 실제로 예수님이 내 곁을 떠나가신 건 아니지만 자꾸 내 힘으로 살려고 하니까 그분이 너무도 멀게 느껴진다. 이곳에서는 몸이 아프면 약국이나 병원을 찾아간다. 배가 고파서 뭔가 먹고 싶으면 슈퍼마켓으로 달려간다. 급히 어딘가 가야 하면 자기 차를 탄다.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하면 엄마에게 전화를 걸거나 룸메이트에게 말을 건다.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는 남동생 브레드를 찾아가면 브레드가 나를 실컷 웃겨 준다.
먼저 하나님께 달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자꾸만 까먹는다. 이젠 일부러 밤낮으로 ‘기도 시간’을 정해 놓아야 한다. 우간다에서는 매 순간 하나님과 소통하며 지냈는데 말이다. 우간다에서는 물질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했다. 그래서 영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웠다.

 

<166쪽 중에서>
지금 와서 깨닫는 것이지만,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오해가 세상에 만연해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하나님이 다스리시지만 나에게도 선택권이 있다. 나는 하나님을 따를 수도, 그분께 등을 돌릴 수도 있다. 순종할 수도, 거역할 수도 있다. 힘든 곳으로 갈 수도, 편안한 곳에 머물 수도 있다.
내가 편안한 곳에 눌러앉아 있어도 무조건적인 사랑의 하나님은 상관없이 나를 사랑해 주실 것이다. 여전히 내 삶 속에서 그분의 영광이 나타나고 복이 찾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분이 부르시는 곳으로 갔을 때만큼 큰 영광과 복은 구경할 수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내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놓칠 수 있다. 그 옛날 부자 청년이 그랬다. 물론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고꾸라져 죽지는 않았다. 어쩌면 남은 평생 계속해서 떵떵거리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 봐야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을 때 누릴 수 있는 삶에 비할 바가 아니다.

 

<172쪽 중에서>
이후 몇 주간은 우리 단체가 섬기는 여섯 마을을 돌며 후원 대상 아이들을 만나고 새로운 후원 대상도 선정했다. 이 마을들을 한 번 돌고만 와도 항상 마음이 부유해지는 기분이다. 발길이 닿는 곳에서 가난과 질병의 흔적을 볼 때마다 우리에게 하나님과 구주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새삼 깨닫는다. 소박한 삶에도 늘 감사하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들은 가난해서 더더욱 하나님을 의지한다. 그래서 그들과 어울리고 나면 하늘 아버지의 마음에 더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다. 미국의 '깨끗한' 문화 속에서 넉 달이나 보냈더니 때 묻은 손들이 사방에서 나를 끌어당기는 바람에 내 몸이 오농 땀과 먼지 범벅이 되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우간다의 소박한 마을과 오두막집에서는 누구라도 마음이 부유해진다.

 

<194-195쪽 중에서>
그레이스를 여러 병원에 데려갔는데 가는 곳마다 태어날 때 산소가 부족해 뇌성마비가 왔다는 진단을 내렸다. 하나같이 그레이스가 나중에 말은 할 수 있겠지만 걷지는 못할 거라고 대답했다. 한 의사는 언젠가 전신마비가 올 거라고 장담했다. 다리의 마비가 그 증거라고 했다. 암울한 진단을 접하고 나니 순간순간 겁이 났다. 그레이스의 연약한 몸을 보면 참을 수 없이 슬퍼지고 때로는 화도 났다. 태어날 때부터 이런 인생이라니. 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은 똑같은 확신을 주셨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가 그레이스의 회복을 위해 애쓰긴 했지만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도운 사람은 새언니 제인이었다. 제인과 그레이스는 거의 같은 또래라, 우리는 둘을 “쌍둥이”라고 불렀다. 그레이스가 우리와 함께 살기 전에는 낮에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가 제인밖에 없었다. 그래서 친구가 몹시 필요했을 것이다. 제인에게 그레이스는 동생이나 친구만이 아니었다. 제인은 그레이스를 마치 보호자처럼 따라다니며 소소하게 챙겼다. 제인은 그레이스가 빨리 걷기를 원했다. 제인은 절대 포기를 몰랐다. 그래서 그레이스와 놀 때마다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명령했다. “어서 걸어와!” 그래도 그레이스가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으면 조르르 달려가 통통한 팔로 끙끙거리며 일으켜 세웠다. 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감동적인 장면이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되었다.
제인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만의 방식으로, 나도, 다른 딸들도 지극 정성으로 그레이스를 돕고 열심히 기도했다. 마침내 얼마 있지 않아 기적이 일어났다!

 

<220쪽 중에서>
나는 친구들에게 형형색색의 재생지로 목걸이를 만드는 법을 배워 이 여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목걸이를 만들며 서로를 깊이 알아 갔다. 누군가 에이즈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하면 함께 부둥켜안고 울었고, 누군가 목걸이를 우스꽝스러운 모양으로 만들면 다 함께 깔깔거리며 웃었다. 서서히 인종과 사회적 차이를 초월한 유대감이 싹텄고, 그들이 그렇게 마음의 빗장을 열자 우리는 그 틈으로 예수님을 전했다.
무엇보다도 이 여인들이 바람직하지 못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았다. 우리는 매춘이나 양조, 쓰레기통 뒤지기를 계속하면 이 모임에서 내보낼 수밖에 없다고 못을 박았다. 여자들은 매주 일정한 개수의 목걸이를 만들어 전체 모임에 가지고 온다. 그러면 내가 그 목걸이들을 사서 미국으로 보내 판매한다.

 

<221쪽 중에서>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마세세에 가면 지독한 무기력과 절망감이 밀려 올 때가 있다. 내가 내 밴의 뒤편에 임시로 마련한 병원에서 하루 15시간 동안 꼬박 병을 치료해도 마을 전체에 드리운 고통의 그림자는 꿈쩍도 하질 않는다. 아무리 문제를 해결하고 상처를 싸매도 정말이지 끝이 없어 보인다. 나는 이런 현실 속에서 내 인생 최대의 교훈을 얻었다. 그것은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꿋꿋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아도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게을리할 수는 없다.
생각 같아선 여기 이 사람들 모두를 도와주고 싶다.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내 손으로 완전히 뿌리 뽑고 싶다. 하지만 이 땅에서 이상을 완전히 이룰 수는 없다. 이 지역에서 아마지마가 거둔 성과는 대단하지만 그래봐야 ‘몇’ 사람을 도왔을 뿐이다. 거대한 암 덩어리의 표면만 겨우 긁어 냈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래도 괜찮다며 등을 토닥여 주신다. 내가 만약 이곳에서 계속 복음을 전한다면, 아니 복음을 실천한다면 외적인 환경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만 있다면 잠시의 가난쯤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으리라.

 

<286-287쪽 중에서>
우리 딸들이 이웃을 사랑하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집으로 초대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 너무도 감사하다. 우리 아이들은 사랑에 목마른 아기를 보면 당연하다는 듯 집으로 데려와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한껏 귀여워해 준다. 머리 누일 곳이 필요한 낯선 손님을 보면 내게 방을 내어 주라고 조른다. 누군가를 도와야 할 일이 생기면 나는 일단 겁부터 먹는데 우리 애들은 기뻐서 날뛴다. 우리는 다급한 상황을 자주 만난다. 어떤 때는 어려운 사람을 하루에도 수십 명씩 만난다. 그때마다 우리 아이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도와줄 기회를 만났다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정말이지 이 예쁜 녀석들에게 배울 게 너무도 많다.
이만큼 슬픔과 고통을 경험했으면 이젠 좀 적응이 될 때도 됐으련만 이 무너진 세상은 날마다 내 마음을 찢어놓는다. 수많은 사람이 이렇게 비참하게 살고 죽어야 한다는 현실이 안타까워 미칠 것만 같다. 아픔은 전혀 줄어들지 않지만 희망은 좀 더 생겼다. 생각 같아선 내 친구들이 이 땅에서 나와 함께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 땅에서든 천국에서든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의 깊고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누렸으면 좋겠다. 슬픔의 골짜기 너머로 구속의 빛이 보인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슬픔과 친해질 각오를 해야 한다. 기쁨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슬픔의 맛을 알아야 한다. 기쁨에는 고통이라는 대가가 따르지만 그 고통을 감내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알다시피 부활이 있기 전에도 먼저 죽음이 있지 않았는가.

 

<296쪽 중에서>
제인을 잃는 것이 죽기보다 싫지만 그 불의의 한가운데서 내 마음이 그분의 마음에 점점 더 가까워졌다. 하나님도 이 고통을 아신다. 타락한 세상의 불의 속에서 자식을 잃는 기분을 겪어 봐서 충분히 아신다. 그래서 대성통곡을 하며 주먹으로 땅을 치는 와중에도 위로가 된다. 그리고 그분의 마음에 더 가까워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분은 아름다운 삶, 처절한 삶, 편한 삶, 힘든 삶, 이 모든 삶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신다. 몇 시간씩이나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긍휼과 위로를 구하며 기도했더니 무릎이 오렌지색으로 더러워졌다. 내 눈물이 우간다의 바짝 마른 적토 속으로 스며들지 않고 웅덩이에 고여 있다. 이 웅덩이와 내 무릎의 색깔은 얼룩과 상처 하나 없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심지어 예수님도 부활 후까지도 상처를 지니고 계셨다. 그분의 눈에 내 상처는 영광의 상처다. 더러워지고 이리저리 치일수록 나는 더 완벽해진다. 나를 지으신 분의 형상으로 변해 간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없이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