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박사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나아가셨던 석학의 마지막은 어떠했을까요?
신문기사를 참고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영상원 교수이자 영화감독인 큰아들 이승무씨가 전한 이어령 박사님의 마지막 한 시간입니다.
2022년 2월 26일 오전 11시경, 최근 할아버지의 기력이 부쩍 약해졌음을 알고 있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두 손녀는 이날 우연히 만나 할아버지에게 영상전화를 걸었다. 그 시간 이어령 박사님은 간단한 의사표현만이 가능한 상태였지만 화면에 나온 두 손주의 얼굴을 보고는 야윈 얼굴에 참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힘없는 한 손을 낮게 들어올려 인사를 했다. 이후 가족들과 가까운 목사님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다.
30분이 지난 후부터 박사님의 숨은 더 희박해졌고 아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죽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봐야겠다는 표정이었다. 아주 재미있는 걸 본 듯했고, 어찌 보면 황홀하기까지 한 얼굴이었다. 아버지가 뚫어져라 한곳을 바라보셨기에 나도 그의 얼굴을 계속 바라봤다. 30분 동안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때, "나를 지키기 위해 쓰는 마스크가 사실은 나로부터 남도 지키기 위해 쓴 것이 아니냐!"고 말하며 이기(利己)와 이타(利他)의 대립을 끝내고 오로지 생명의 가치를 깨닫는 시절을 보낸 이어령 박사님은 죽음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고향의 보리밭에서 혼자 굴렁쇠를 굴리던 여섯 살부터 그는 죽음을 지켜보는 자였다.
태양이 눈부셨던 조용한 낮에 갑자기 흐른 눈물.
#햇볕 내리쬐던 가을날, 노인은 집 뜨락에 날아든 참새를 보았다. 어릴 적 동네 개구쟁이들과 쇠꼬챙이로 꿰어 구워 먹던 참새였다. 이 작은 생명을, 한 폭의 ‘날아다니는 수묵화’와도 같은 저 어여쁜 새를 뜨거운 불에 구워 먹었다니... 종종걸음 치는 새를 눈길로 좇던 노인은 종이에 연필로 참새를 그렸다. 그리고 썼다.
‘시든 잔디밭, 날아든 참새를 보고, 눈물 한방울.’
그는 이 눈물이 죽음에 대한 예감 때문이었다고 했고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았다.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고요한 가운데 굴러가던 굴렁쇠가 아름다웠던 까닭은, 삶이 찬란했던 덕분이고 동시에 죽음이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이어령 선생이 본 죽음은 삶의 또 다른 차원이었다. "손바닥과 손등처럼 서로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 삶과 죽음이었고,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의 모태로 돌아가는 일"이 죽음이었다. 그래서 자궁(womb)은 무덤(tomb)과, 수의는 포대기와 그렇게 닮아있다는 것이다.
그토록 지적이고 문장력이 뛰어난 석학이 자신의 삶의 마지막에 도달해서 그 동안 사유해 온 죽음을 직접 볼 수 있게 된 순간, 기운을 차리고 한 줄의 글이라도 남길 수 있었다면 죽음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이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덧없는 생각을 잠시 해봅니다.
굳이 덧없다는 말을 한 것은 이러한 바램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직접 보지 못했을 뿐 이미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 죽음에 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죽음을 직접 볼 수 있게 됩니다. 그 때 천국을 바라보며 여유롭고 평화롭게 마지막 숨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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