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잠깐 스쳐가는 말씀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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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모습

성경을 '어리석고 촌스럽고 우스꽝스럽게 문자적으로' 읽은 한국 교회 초대 교인들

아리마대 사람 2022. 4. 4. 10:45

요즘 자주 듣게 되는 말이 '유연성'이다. 

코로나로 인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건강관리를 위해 홈트(홈 트레이닝)를 진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이 때 부상방지를 위해 '신체유연성'이 강조되고 있다.

또한 재택근무가 보편화되면서 정형화된 근무시간과 장소를 탈피하여 개인의 상황에 맞는 근무시간과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유연근무제도'가 보급되고 정착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급변하는 상황, 때로는 예측하지 못한 상황 하에서 당황하지 않고 적절하게 대응하여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창의적 방법론으로서 '유연한 사고'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생각해보면... 코로나와 유연성은 얼핏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 같은데... 코로나로 인해 유연성이 더욱 강조되는 상황이 흥미롭다.

유연성은 이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 하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가치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변치 않는 특성, 결코 변해서는 안되는 특성이 가치를 지니는 경우도 있다. 특별히 관계에 있어서 필요한 가치들, 곧 사랑, 믿음, 신뢰 등이 그러한 가치이다.

모든 분야에서 유연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이처럼 변치 않는 특성은 어리석어 보이거나 촌스럽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모습은 사람의 눈에, 어리석은 사람들의 눈에 비친 모습일 뿐이다. 가장 중요하고 절대적인 평가는 사람의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일이 사람의 교만한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거나 촌스럽고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다시 선포하신 율법'이 그러하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을 통해 유연성을 거부하는 가르침을 주셨다.

 

(마태복음5:21-48)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예수님의 말씀을... 당시는 물론이고, 요즘의 시대에 비추어보면 어떨까?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여 폭력을 휘두르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세상 가운데에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화도 내지 말고 욕도 하지 말라고 하신다...

욕정을 사랑으로 미화하거나 본능에 사로잡힌 방종, 가려야 할 것들의 노출을 자유라고 주장하고, 간음도 용인되며 불륜도 미화되는, 어쩌면 권장되기까지하는 세상, 이젠 미성년자들의 혼전임신도 방임하고 조장하는 세상 가운데에서 음욕 조차 품지 말라고 하신다...

성격차이를 이유로 이혼이 빈번하고 각방, 별거, 졸혼, 황혼 이혼이 만연하는 세상 가운데에서 음행의 이유 외에는 이혼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커녕 하나님이 없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그것이 진보적이고 지성적이며 바람직한 모습인 양 떠받들어지는 세상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소홀히 취급하지 말라고 하신다...

정당방위를 넘어서 정의라는 이름으로 복수를 부추기는 세상 가운데에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원하는 것 이상을 주라고 하신다...

내 편이라고 생각되면 서로를 감싸고 서로의 이익을 보장하고, 적이라고 생각되면 가차없이 짓밟는 진영주의가 만연한 세상 가운데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괴롭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이런 세상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떻게 비쳐질까?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거나 촌스럽고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세상 가운데에서 성경을 '단순무식하게 문자적으로' 읽는 모습은 어떻게 비쳐질까?

문자로 기록된 정보의 첫번째 해석은 문자적으로 읽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맥락이나 비유를 따져보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고, 신학적 의미나 영적인 의미를 따져보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고, 성경이 구전으로 전해지던 당시나 문자로 정착되던 당시의 상황을 연구해서 좀 더 명확한 의미를 찾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 모습은 어리석고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이런 세상 가운데에서는... 말씀의 변치 않는 가치를 존중하며 어리석고 촌스럽고 우스꽝스럽게 보이기까지 따르는 모습은 너무나 귀하다.

어리석어 보이거나 촌스럽고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믿음의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신 분들이 계신다. 그분들은 "유연하지 못한" 모습을 통해 성경말씀은 눈으로 읽고 머리로 이해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행함으로써 읽는 것임을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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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십자가를 지고 천리 길을 걸어온 사람들

1886년 겨울, 서울 정동에 있던 언더우드의 집에 낯선 손님들이 찾아 왔다. 황해도 솔래에서 ‘천리길을 걸어’ 올라온 세례 지원자들이었다. 솔래에 복음을 전한 사람은 의주 출신으로서 1882년 만주에서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매서인이 된 서상륜이었다. (※ 매서인(권서인)은 우리나라 복음전파 초창기에 예수교서회나 성서공회에서 월급을 받거나 성경을 할인받아 정액으로 팔면서 마진을 남기는 일종의 행상을 말합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1-2명에서 많게는 8명까지 매서인을 두었고, 19세기말부터 1945년까지 약 2천명 가량이 활동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성경과 찬송가 등의 신앙서적과 선교달력 등을 짊어지고 전국을 누비며 노숙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영리를 목적으로 일을 한 것이 아니었으며, 성경의 판매뿐만 아니라 전도자, 교사, 설교자의 역할까지 담당하면서 초기 교회를 세우는데 기여했다고 합니다.)
1885년 서울에 선교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솔래 사람들은 선교사가 내려와 세례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종교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한국 정부의 입장을 고려하여 지방 선교 여행을 삼갔고 서울에서도 학교와 병원을 통한 간접 선교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복음의 맛을 안 한국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완전한 교인이 되기를 바랐다. 결국 기다리다 못해 솔래 교인들이 찾아 올라왔다.
“저희에게 세례를 주십시오.”
“당신들이 누구인줄 알고 세례를 줍니까? 기독교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선교사와 솔래 교인들 사이에 종교 토론이 시작되었다. 솔래 교인들은 이미 3년 넘게 성경과 교리서를 읽으며 신앙 생활을 해왔던터라 선교사의 질문에 막힘이 없었다. 그래도 믿기지 않은 듯 언더우드가 의심하는 눈치를 보이자 청년들은 말없이 두루마기를 벗었다. 두루마기를 벗고 뒤로 돌아선 그들의 등에는 하나 같이 나무 십자가가 묶여 있었다.
“그게 뭐요?”
언더우드는 이 낯설고 예상치 못했던 장면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서울에 선교사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이제나저제나 기다렸으나 오시지 않아 우리가 올라가기로 하고 출발하기 전에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신 말씀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서울 올라가는 것은 세례 받고 예수님을 모시기 위함이요, 성경의 예루살렘은 곧 서울이니 우리가 서울에 올라가면서 그냥 갈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옳다고 여겨 각자 자기 몸에 맞는 십자가를 만들어 지고 온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나무 십자가를 등에 묶고 ‘천리 길’을 걸어온 솔래 교인들의 소박한 믿음에 신학교를 갓 졸업하고 나온 20대 선교사가 감동할 것은 당연했다. 언더우드는 그들에게 정식으로 세례 문답을 했고 그 중 세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빚 문서를 태운 부자 교인

1900년 무렵 강화 북부 해안 홍의마을에 종순일(種純一)이란 교인이 있었다. 전통 유학자 출신으로 땅도 많고 여유 있던 부자였다. 그가 사는 마을에 그에게 돈을 빌려다 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마을 훈장 박능일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가 마태복음 18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무자비한 종에 대한 비유’ 대목에서 멈추었다.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 진 신하가 그 빚을 탕감받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 그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옥에 가두었는데, 그 사실을 안 임금이 화를 내며 그를 다시 잡아 옥에 가두었다는 내용의 말씀이었다.
‘마을 부자’ 종순일은 이 말씀을 읽고 며칠동안 고민하다가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자기에게 돈을 빌려간 마을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마을 사람들은 ‘빌린 돈을 갚으라는 것인가? 아니면 이자를 높이려는가?’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모였다. 종순일은 성경을 펴서 마태복음 18장 말씀을 읽은 후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무자비한 종이 바로 나외다. 내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은 것이 1만 달란트 빚 탕감 받은 것보다 더 크거늘, 여러분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돈을 받으려 하는 것이 1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주지 못한 것보다 더 악한 짓이요. 그러다 내가 천국을 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오늘부로 여러분들에게 빌려준 돈은 없는 것으로 하겠오.”
그는 빚 문서를 꺼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불살라 없앴다. 그 자리에 동석했던 교회 전도사가 증인이 되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이 모두 교인이 될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종순일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마 19:21)는 말씀을 읽고 자기 재산을 처분하여 교회에 헌납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각 지방과 고을에 보내셨다”(눅 10:1)는 말씀을 읽고 아내와 함께 괘나리 봇짐 하나씩 메고 남쪽 길상면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다. 그가 찾아 간 “땅 끝”(행 1:7)은 강화 주변의 작은 섬들이었다. 그는 그렇게 강화, 옹진 섬 지역을 돌며 수십처 교회를 개척하였고 평생 가난한 전도자로 생을 마쳤다.

 종 문서를 불태운 과부 교인

강화읍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에 ‘과부 교인’ 김씨 부인이 있었다. 자식도 없이 혼자였지만 재물에는 여유가 있어 복섬이란 여종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팔십이 넘어 믿기 시작했는데 교회에 나가면서 한글을 배워 성경을 읽게 되었다. 그러던 중 마태복음 18장을 읽다가 18절에서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김씨 부인은 이 말씀을 자신에 적용하였다. 그는 다음 주일 교인들을 집으로 초청한 후 복섬이를 방안으로 불러 들였다.

“내가 성경 말씀을 보니 우리 주인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다 같은 형제라. 어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겠소? 내가 복섬이를 몸종으로 부리는 것이 땅에서 매고 사는 것인 즉 어찌 하나님의 복을 받으리요?”
그러면서 김씨 부인은 문갑에서 복섬이의 종문서를 꺼내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라버렸다.
“복섬아, 지금 이후 너는 내 종이 아니다. 너는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가고 싶은대로 가도 좋다.”

“마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발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하지만 말아 주세요.”

김씨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는 복섬이를 양녀로 들이기로 했다. 종에서 양녀로 신분이 바뀐(롬 8:14) 복섬이는 더욱 정성스럽게 김씨 부인을 섬겼고 김씨 부인 역시 늘그막에 얻은 딸로 더욱 기뻤다. 이 광경을 본 교인들의 감동 또한 컸다.

 

문자적으로

 

이런 식이었다. 한국 교회 초대 교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in a literal sense) 읽었다. 강화의 어떤 교인은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치실 때 했던 것처럼 침으로 갠 진흙을 맹인 눈에 바르고(요 9:6) 기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선교사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이같은 ‘문자적’ 신앙을 미신적인 것이라며 우려했지만 한국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받은 감동을 ‘문자적으로’ 실천함으로 뒤이어 나타날 이적에 기대를 걸었다.
이처럼 한국 교회 ‘개종 1세대’는 성경을 읽되 ‘해석’보다는 ‘실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성경을 읽는 한국 교회 특유의 소박한 신앙 전통이 수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