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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 "남녀노소 모두의 사랑을 받았던 진정한 방송인"

아리마대 사람 2022. 6. 21. 19:33

송해 선생님께서 <전국노래자랑>을 시작하실 때의 나이는 환갑이 넘은 61세였으나, 이후 34년의 시간 동안 진행자로서 <전국노래자랑>을 이끌었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늦었다고 생각될 때는 실제로 늦은 때이다"라는 말도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그나마 가장 빠른 때이다"라는 정도의 말이 될 것이다. "오늘이 내 인생에 가장 젊은 날이다"라는 말처럼.

<전국노래자랑> 진행자로서의 송해 선생님의 삶을 보면서 "늦었다고 생각될 때는 사람의 생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언제 쓰일지, 어디서 쓰일지, 누구를 위해 쓰일지, 무엇을 위해 쓰일지, 어떻게 쓰일지, 그리고 얼마나 오래 쓰일지... 나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따라 나를 쓰실 것이다.

지금이 늦었다고 생각할 때인지 아닌지는 사람의 생각일 뿐,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내게 중요한 것은 내가 쓰임받을 준비를 갖춰야 한다는 것뿐이다.

(디모데후서 2:20-21)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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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국민 MC · 현역 최고령 MC · 현역 최장수 MC · 영원한 오빠 · 일요일의 남자 · 살아있는 근현대사 · 살아있는 전국노래자랑 · 기네스 세계기록 '최고령 티브이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 수많은 수식어로 불렸지만 ‘송해’라는 이름 자체가 가진 상징성을 온전히 표현할 수는 없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던 원로 희극인겸 방송인 송해가 2022년 6월 8일 향년 95세로 영면에 들었다.
송해의 인생은 그 자체로 한국 근현대사의 교과서였다.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송해는 해주예술학교에서 성악을 배웠고,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남한에 내려와 정착한 실향민이다. 
송해는 혈혈단신으로 부산에 내려와 군 통신학교에 입대한 후 통신병으로 복무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성립 당시 모스 부호로 전군에 협정 타결 소식을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몰랐지만 송해 개인에게는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스스로 알리는 아이러니한 순간이기도 했다.
제대 이후 송해는 1955년 유랑극단 '창공악극단'을 통해 본격적인 문화예술인의 길에 뛰어들었다. 시작은 가수로 출발했지만 악극단 공연 특성상 종종 진행을 겸하면서 자연스럽게 MC 경험을 쌓았다.
1960년대부터 대중문화의 중심이 극장에서 방송으로 옮겨 가면서 송해 역시 주 활동 무대를 라디오와 TV로 옮겼다. 송해는 MBC와 전속계약을 맺고 코미디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세상을 떠난 원로 희극인 배삼룡·구봉서·서영춘· 박시명 등이 모두 송해와 동시대에 함께 활동한 인물들이다. 특히 당대의 여성 코미디언 1인자였던 이순주와는 '웃음의 파노라마' 등 여러 방송에서 오랫동안 명콤비로 활약했다. 이들은 콩트 연기에서 퀴즈쇼로 이어지는 한국 TV 코미디와 버라이어티 전성기의 초석을 닦은 '예능인 1세대'로 기억된다.

전화위복이 된 <전국노래자랑>


진행자로서의 역량도 빼어났다. 송해는 여러 라디오 프로그램의 DJ로 활약했는데 1974년부터 약 17년간 진행했던 KBS 라디오 교통방송 '가로수를 누비며'에서는 송해 특유의 유쾌하고 구수한 입담으로 사랑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구혼작전>, <운수대통 일보직전> 등 여러 영화에 주조연으로 출연하고 간간이 가수활동도 이어가는 등, 이른바 '원조 멀티테이너'로 사랑받았다. 
하지만 1986년 송해의 인생에 큰 시련이 찾아온다. 당시 스무살이던 아들 송창진씨를 불의의 뺑소니 사고로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은 후, 송해는 한동안 방송 활동을 중단했다. 그런데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이야기처럼, 이 일은 송해의 인생에 또다른 전환점을 가져다 준다.
송해의 인생을 논하면서 역시 KBS1 <전국노래자랑>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80년 11월부터 방송을 시작한 <전국노래자랑>의 마이크를 송해가 넘겨 받은 건 1988년 5월 경북 성주 편부터였다. <전국노래자랑>은 당시에도 인기 프로그램이었지만 지금처럼 국민 예능 정도의 위상은 아니었다. 
당시 이미 송해의 나이는 환갑이 넘은 61세였고 그와 동시대에 활동하던 방송인들은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다. 실의에 빠져 있던 송해를 설득해 방송으로 돌아오게 한 이는 당시 <전국노래자랑>의 연출을 맡고 있던 안인기 전 KBS PD(배우 안성기의 친형)였다. 고심 끝에 송해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무대로 돌아왔고, 이는 본인과 <전국노래자랑> 모두에게 신의 한수가 된다.
'딩동댕' 실로폰 시그널로 시작하는 <전국노래자랑>. 송해가 "전국" 하고 외치면 관중들이 "노래자랑"이라고 화답하며 '빠라밤빠빠빰밤 빠라라빠밤~♬' 흥겨운 주제곡이 흘러나오는 오프닝 장면은 이 프로그램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잡았다.

맵시가 나지 않은 양복 재킷을 입고 마이크를 잡은 이장님, 긴장해서 음이탈을 해버린 미용사, 엄청난 성량으로 무대를 휘어잡는 호떡집 아주머니… 그렇게 돈 있고 힘 있는 사람이 아닌, 동네에서 흔히 보는 장삼이사들이 <전국노래자랑> 무대에 올랐다. 그들의 아버지, 형님, 오빠가 돼 툭툭 던지는 한마디로 긴장을 풀어주고, 좌중을 웃고 울게 한 '송해의 마법'은 전국의 일요일을 사로잡았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명장면과 레전드급 출연자들도 배출해냈다. 서울 종로편에 출연했던 '할담비' 지병수씨를 비롯하여 '꿀벌아저씨' 김영호씨, '할미넴' 최병주씨, 농담같은 실명으로 놀라움을 안긴 손고장난벽씨(실명) 등은 큰 웃음을 선사하며 화제가 됐다. 시간이 흘러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했던 어린 출연자들이 나이를 먹어 장성한 성인이 되거나 가정을 꾸린 모습으로 다시 재출연하며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또한 송소희, 임영웅, 송가인, 이찬원, 정동원 등 지금은 모두 스타로 자리 잡은 연예인들이 데뷔 전 <전국노래자랑>에서 출연해 입상했던 경력이 뒤늦게 재조명되기도 했다.
<전국노래자랑>은 일반인 출연자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었지만 한편으로 가수를 꿈을 키우는 유망주들의 등용문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트로트 부흥기가 오기 전까지 한동안 소외되었던 많은 무명 가수들이 이름을 알릴 수 있는 무대가 되기도 했다. 
2003년인 광복절을 맞이하여 기획된 '평양노래자랑'은 <전국노래자랑> 역사에서 가장 특별했던 무대로 꼽힌다. 당시 해당 방송은 3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대한민국을 감동으로 물들였다. 특히 실향민 출신인 송해가 선보인 무대라는 점에서 더 뜻깊은 의미가 있었다.
방송의 트렌드가 단기간에도 끊임없이 바뀌는 시대에 <전국노래자랑>이 꾸준한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데는 MC 송해의 존재감이 절대적이었다. 송해는 <전국노래자랑>과 함께 전국 팔도 방방곡곡을 누비며 무려 34년의 시간을 함께 했다.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수많은 국민들을 만나면서 송해는 형님이자 오빠로, 아빠이자 삼촌으로, 할아버지이자 어르신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만인의 친구'이자 '국민 MC'로 자리매김했다. <전국노래자랑>을 통해 그는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
남다른 친화력을 앞세워 송해는 각양각색의 일반인 출연자, 관객들과 어우러지며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고민을 들어주며 위로와 격려를 전하기도 했다. 짓궂은 장난과 갑작스러운 돌발상황도 유쾌하고 넉넉한 웃음으로 품어줬다. 그렇게 송해는 진행자를 넘어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됐다.
송해는 건강문제로 한동안 휴식을 취해야 했던 1991년과 말년을 제외하곤 개인적인 사유로 <전국노래자랑> 방송일정에 불참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을 만큼 자기관리에도 철두철미했다. 송해는 "같은 무대에 100번 나오면 100번을 긴장해야 한다, 관객이 단 한 명이 있어도 1만 명이 있다는 자세로 대해야 한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하지만 송해도 세월의 흐름을 피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코로나19라는 악재는 현장 공개 녹화로 방송되던 <전국노래자랑>에게도 직격탄이 됐다. 
송해는 올해들어 코로나19에 확진되는 등 부쩍 쇠약해진 모습으로 우려를 자아냈다. 코로나19의 터널에서 벗어난 <전국노래자랑>이 무려 2년 만인 지난 4일 다시 야외 녹화를 진행했으나 송해는 끝내 참석하지 못했다. 최근 건강상의 이유로 KBS에 방송 하차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었기에, 그의 복귀를 기다려 온 국민들의 안타까움이 더 클 수밖에 없다. 

파란만장했던 95년의 인생
 
지난해 11월 극장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송해 1927>, 그리고 올해 1월 31일 설특집으로 방송된 특집공연 KBS2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는 그가 국민들에게 남긴 유작이자 마지막 고별인사가 됐다. 송해는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95년 인생을 추억하면서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모습을 보였다.
송해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바로 가족에 대한 헌신과 그리움이었다. 고향에 떠나면서 다시 만나지 못한 어머니와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아들은 그의 마음 속에 평생 지우지 못한 한으로 남았다.
2018년에 60년을 동고동락했던 아내 석옥이씨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송해가 들려준 수많은 이야기와 노래 속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함이 느껴지는 이유다. 
하지만 송해는 굴곡진 인생의 시련 속에서도 항상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했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럴 때는 운명이고 팔자라고 내가 나를 위로해야 한다. 세상만사에는 우선 순위와 경중과 높낮이가 있다. 나라고 높은 데가 없겠는가. 다 있지만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것뿐"이라며 격려했다.
또한 송해는 '땡(탈락)'과 '딩동댕(합격)'으로 표현되는 <전국노래자랑>의 시그널을 빗대어 조언을 전하기도 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 출연 당시 송해는 "누구나 당연히 땡보다는 딩동댕을 좋아한다. 하지만 땡을 맞아보지 않으면 딩동댕의 진정한 가치를 모른다. 땡이 세 번 맞으면 바로 딩동댕이 되는 것이다.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했던 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늘 내 인생이 딩동댕이라는 것을 남기기 위하여 노력했다"라고 전했다. 그리고 이 어록은, 송해라는 어른이 다음 세대를 위해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가 됐다. 
송해는 대한민국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 백상예술대상 공로상, 은관문화훈장 등 무수히 많은 수상과 헌사를 받으며 우리 사회와 대중문화계에서 존경받는 어른의 모범을 보여줬다. 기네스북 '최고령 진행자' 세계기록에도 이름을 남기며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됐다.

"강산이 좋다 사람이 좋다 풍악 따라 걸어온 유랑의 길... 가진 건 없어도 행복한 인생 나는 나는 나는 딴따라"

그가 2018년 내놓은 노래 <딴따라>의 한 대목이다. 살아생전 자신의 고향 황해도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고 싶다는 마지막 소원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하늘에서도 '딴따라'로 사람을 따라, 풍악을 따라 여기저기를 다닐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