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잠깐 스쳐가는 말씀 한 조각

말씀 한 조각 만으로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 삶의 모습

김형석 교수, 『김형석 교수의 예수를 믿는다는 것』

아리마대 사람 2022. 12. 25. 20:12

김형석 교수의 예수를 믿는다는 것』 중에서

P. 5
영원과 구원을 찾는 지성인들이 과학이나 철학에서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고, 예술이나 도덕에서 스스로의 완성을 얻을 수 없다면 성실하고 경건한 심정으로 종교의 문을 두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전 인격과 삶의 가치를 걸고 신앙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대개 종교적 신앙을 찾아 누리게 된다.

P. 21
신앙은 인격적 체험에 속한다. 신앙적 체험을 겪은 사람은 후에 그 체험 내용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게 되고, 신학을 먼저 택한 사람은 후에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완전한 신앙을 갖게 된다. 나는 먼저 체험을 했고 그 체험의 내용을 서서히 이론적으로 정립해 가는 순서를 밟았던 셈이다.

P. 24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동안 나는 가급적 기독교 선입관에 붙잡히지 않고 이성적 과제와 지성적 사색에 뜻을 모으고 싶었다. 그래서 무신론자들과 반기독교 도서들을 더 열심히 읽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과 주장이 퍽 빈약했으며 사리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직감하곤 했다. 쇼펜하우어나 니체를 읽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더 깊이 빠지게 된 것을 깨달았다. 키르케고르나 도스토옙스키에 비하면 그들의 철학과 사상은 훨씬 피상적임을 발견했던 것이다.

P. 29
자연히 그리스도의 말씀은 교리를 넘어 모든 인간의 보편적 진리로 승화될 수 있다. 물론 설교나 신학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 길 외에도 얼마든지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교회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적 측면이다. 교회적 측면은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제시해 주었다면, 인간적 측면은 아우구스티누스, 파스칼, 키르케고르,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이 적절히 밝혀 주었다. 어쨌든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교회적 교리에 머물지 않고 인류의 진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P. 31
설교나 강도(講道)는 목사님들이 하는 일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 맡겨진 일은 그 보조적인 역할이었지만, 감사하게도 100년이 넘는 세월 중에 80년쯤은 그 일을 감당해 왔다. 그리고 교회와 상관없는 기업체나 사회단체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독교라는 이름을 빌리지 않고 삶의 진리를 전하는 기회도 점점 늘어났다.

P. 35
예수께서는 어린이와 같은 삶을 살라고 가르치셨고, 바울은 육신은 늙으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고 있다고 고백했다. 믿는 사람은 예수 앞에서는 언제나 어린애가 된다. 나이가 들수록 “이 철없고 어리석은 어린애 같은 저를”이라고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는 자신이 늙었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 믿음의 본질인 것 같다. 주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을 성취하고 언제나 최선을 다해 그 일을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P. 43
우리의 믿음도 그렇다. 어떤 계기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사랑의 품으로 내던지고, 그 품에서 새로운 삶을 체험할 수 없다면 우리는 참다운 믿음을 얻을 수 없다.

P. 51
봉사가 위대한 인물들에게만 주어진 과제는 아니다. 우리가 매일 하는 일,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이 인간을 목적으로 수행되며 이웃과 사회에 대한 봉사의 정신으로 채워질 수 있다면 우리는 가장 값지고 위대한 삶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인생의 제3의 차원이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최후의 목적은 인간을 위한 봉사라는 대답 이상을 얻을 수 없다.


P. 55
우리가 항상 강조하는 사랑이 무엇인가.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닌가. 인간관계의 회복을 제쳐놓고 사랑의 실천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큰 모순이다. 종교인은 그것의 모범이 되어야 하고 사회 전체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P. 58
영원과 안식을 포기한다면 믿음이나 종교는 필요 없다. 그러나 학문·예술·도덕이 가져다 줄 수 없는 영원과 안식을 갈구하는 수고로운 짐을 진 사람은 그 강을 건너야 한다. 강 저편에는 영원이 있고 그 영원을 약속해 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심과 도덕은 귀할수록 깊은 한계를 느끼며 맑을수록 무거운 짐을 안겨 준다. 공자가 준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기독교는 양심과 도덕을 완성하는 동시에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신앙을 제시해 준다. 그것이 영원에서 오는 안식을 얻는 길이다.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고 호소한 것은 인간은 궁극적으로 구원을 갈구해야 하는 존재임을 보여 준다.

P. 79
그러나 기적은 이러한 병고침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 인생의 희망과 장래를 약속받으며 거듭남을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병의 치유보다 몇 배나 더 값진 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그만큼 인간은 세속화되었으며 육체적인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