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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에 관한 질문과 답변」

Q50. 강대상은 어디에, 어떻게 놓아야 할까요?

아리마대 사람 2023. 1. 5. 12:44

▒ 강대상을 중앙에 하나만 놓는 교회도 있고, 두 개를 양쪽에 놓는 교회도 있습니다. 심지어 강대상을 치워버리는 교회도 있던데요, 어느 것이 맞습니까?

 

강단에 사회자용 단상과 설교자용 단상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꼭 그렇게 구분할 필요가 있나요?

 

강대상이 강단 위 아래에 각각 놓여 있을 경우 어떤 때는 위에 있는 강대상에 올라가고, 또 어떤 때는 아래에 있는 강대상에 올라가서 예배를 인도하던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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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이후 가장 초기의 교회는 로마의 박해하에 있었기 때문에 변변한 예배당 건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적이 드문 야외나 지하 공동묘지 또는 성도 개인의 집에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고 성구의 배치에 대한 정형화된 틀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교회는 모일 때마다 '주의 만찬'을 실천했으므로 집례자가 빵과 만찬을 올려놓고 예식을 집전할 조그마한 탁자를 필요로 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유프라테스 강 유역 듀라-유로포스 지방에서 발견된 2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가정교회 건물은 이를 잘 입증해줍니다. 이 건물 예배실의 한쪽 끝에는 조그마한 탁자가 놓여져 있는데, 이 탁자는 아마도 제단용 탁자나 감독의 자리를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4세기에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대규모 예배당들이 건축되었습니다. 벽과 회중석 사이에 제단이 놓여진 것으로 보아 이 때는 회중을 마주하고 예배를 집전하는 방식을 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세에는 개인적으로 드리는 미사가 발달하면서 한 공간 안에 여러 개의 제단을 설치하고 이들 제단에서 동시에 미사를 드림으로써 "하나의 성찬식만 지키도록 하라.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 컵을 사용하라. 왜냐하면 주님의 피와 연합하기 위해서다. 하나의 제단만 설치하라. 왜냐하면 주교가 한 분이기 때문이다."라는 초대교회의 정신이 흐려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대체로 말씀의 강조와 함께 설교대를 부각시켰으며, 17세기 청교도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했기 때문에 설교대를 강조했습니다. 이때에는 독특한 양식이 발달했는데, 그것은 높이 세워진 설교대와 중2층 그리고 발코니였습니다. 예배당의 3면에 발코니를 설치한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을 예배당에 수용하기 위함이었고, 발코니에 앉은 사람들이 설교자의 얼굴을 잘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설교단을 높이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성찬대는 오히려 작은 선반 정도로 격하되었습니다. 칼빈에 뿌리를 둔 개혁주의(장로교회와 회중교회) 교회들 역시 말씀을 강조하고 초월적인 분위기를 주기 위해서 설교단을 중앙 높은 곳에 설치하고 그 앞쪽으로 더 낮은 곳에 성찬용 테이블과 세례반을 설치했습니다.
19세기에 일어난 또 하나의 흐름인 부흥운동은 설교단을 높이고 강단 위쪽에 위치한 설교대 뒤에 회중을 마주할 수 있는 곳에 대규모 성가대를 배치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강단 위에 의자를 세 개 놓는 관습도 이때 생겨난 것인데, 이는 설교자, 초청 설교자, 그리고 찬송 인도자를 위한 실용적인 목적에서 비롯됐습니다. 초기 한국교회가 강단에 세 개의 의자를 놓았던 것은 모두 여기에서 온 관습입니다.
현대에는 초대교회 예배의 회복을 꿈꾸는 예배운동으로 인해 말씀과 성만찬을 예배의 두 초점으로 인정하고, 따라서 설교대와 성찬대를 공히 중시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설교대는 보다 위쪽에 두되 회중석에서 볼 때 약간 왼쪽에 두고, 성찬대는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서 성찬을 받기에 편리하도록 회중석 바로 앞에 두되 중앙에 위치시키는 방식입니다. 만일 성경을 읽는 독경대를 두고 싶다면 성찬대와 같이 회중석 바로 앞에 두되 성찬대를 중심으로 설교대와 대칭이 되도록 오른쪽에 위치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흔히 강대상을 두개 놓으면서 하나는 설교자용으로 크게, 또 하나는 '사회자'용으로 작게 만드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볼 때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설교대보다 아래에 놓인 성찬대를 소위 '아래 강대상'쯤으로 생각하고 저녁예배는 그곳에서, 심지어 평신도가 사회를 볼 때는 아래 강대상에서 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아래에 있는 것은 성찬대이기 때문에 그 위에는 아무것도 올려놓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찬대는 주님의 식탁이며, 우리가 그곳에 나아갈 때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떡을 먹여주신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구는 상징성을 띠고 있습니다. 강대상은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찬대는 '먹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여 이것을 행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공동체가 참여하는 '주님의 식탁'을 상징합니다. 상황에 따라 이것들을 강단에서 치워버리는 것은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몸도 때에 따라선 '지워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성구는 상징성을 띠기 때문에 그 의미와 목적에 맞는 크기와 색깔과 재질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는 대체로 '본래적인' 재료로 성구를 만들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을 다듬어서 활용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창조를 인식하고 긍정하는 행위를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나무나 돌로 소박하게 만들어진 테이블 위에서 말씀과 성찬을 거행했습니다. 그러므로 합성수지나 다른 인공적인 느낌을 강하게 주는 재료는 성구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예배에서는 언제나 우리 주님만 강조되어야 하고 존귀하게 되어야 합니다. 말씀과 성만찬, 그리고 그것이 수행되는 설교대와 성찬대는 이에 대한 가장 확실한 가시적 상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