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있어요?"
"뭘 말씀하십니까?"
"단두대요. 지금 눈이 가려져 있어 찾을 수 없어요. 제 얼굴을 댈 받침대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 수 있어요?"
1554년, 2월 12일. 형장에 있는 모두가 제인 그레이의 이 말에 또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곧 죽을 제인은 그 순간에도 공손하고, 겸허했다. 그녀는 하얀 두 손을 더듬대며 자기 목을 올릴 곳을 찾고 있었다. 이를 본 몇몇은 울컥하는 마음을 재차 억눌러야 했다.
"이쪽입니다. 여기 딱딱한 걸 만질 수 있지요? 이 위로 턱을 놓고, 그다음 엎드리시면..."
"고맙습니다."
제인은 안내한 이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녀는 울음을 참는 게 분명했다. 목소리 또한 가늘게 떨렸지만, 이를 끝까지 억누르는 듯했다. 그녀는 그렇게 최후의 순간 앞에서도 의연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었다.
제인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국 여왕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통치 기간은 고작 아홉 날뿐이었다. 이에 '9일의 여왕'이란 다소 치욕적인 별명을 얻은 그녀는, 지금은 반역죄를 뒤집어쓴 채 형장의 이슬이 될 상태였다. 제인은 차가운 목 받침대 위로 먼저 손가락부터 댔다. 처음에는 두 팔, 그리고 쇄골과 오금, 그다음은 어금니와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서늘함이 몰려왔다. 제인은 그제야 눈 앞까지 온 사신의 콧김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낯선 느낌은 굴복을 요구했다. 이제라도 그녀 다음으로 왕관을 쓴 여왕 메리 1세에게 죽기 싫다고 매달리면, 하다 못해 임신을 한 것 같다고 뒤늦게라도 억지를 쓰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을 가린 흰 천은 조금씩 젖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끝내 "억울하다"라느니, "내 잘못이 없다"라느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때 그녀는 고작 열일곱에서 열여덟 사이였다.
탐욕스런 부모, 그렇지 못한 장녀
제인은 1536~1537년 사이 런던 혹은 레스터셔에서 태어났다. 제인의 아버지는 서퍽 공작인 헨리 그레이였다. 아버지가 한 지역을 대표하는 귀족이었다면 어머니는 한 나라의 얼굴 격인 왕족이었다. '노랭이 왕' 헨리 7세의 차녀이자 당장 위세를 떨치고 있는 '덩치 왕 해리' 헨리 8세의 동생인 메리 튜더가 낳은 딸, 프랜시스 브랜든이었다. 이들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난 제인은, 그런 어머니 덕에 모계에서 모계로 이어진 왕가의 피를 품을 수 있었다. 그녀 밑으로는 캐서린과 메리 등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외향적 성격의 부모는 사냥과 모임을 즐겼지만, 제인은 이와 반대로 공부와 독서만 좋아했다. 똑똑한 제인은 어릴 적부터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했다. 클수록 갸름한 얼굴에선 아름다움이 맺혔다. 곧게 뻗은 허리에선 기품이 묻어나왔다. 야심가인 부모는 그런 제인이 아까웠다. 공부만 하지 말고 사교계에도 나와 이름을 알리기를 바랐다. 이들은 허구한 날 제인에게 왕가의 구성원답게 권력 의지가 있어야한다고 구슬렸다. 언젠가부터는 책에 손만 대도 매질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제인은 대체로 순종적이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천성만은 바꿀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니보다 더 어머니 같았지만...
제인은 갓 열 살이 된 1547년 2월, 그해 헨리 8세와 사별한 왕비 캐서린 파의 저택에서 짐을 풀었다. 제인은 너그러운 캐서린, 약간 의뭉스럽지만 겉으로는 친절한 그녀의 재혼남 토머스 시모어와 함께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나마 부모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인을 거둔 캐서린은 교양 있는 여성이자, 신교도의 독실한 신자였다. 헨리 8세의 왕비였던 1545년 서른세 살께 그려진 캐서린 초상화를 보면, 먼저 진지한 표정과 절제된 자세에서 기품을 느낄 수 있다. 외모는 나이치고는 노안에 속한다. 이는 헌신의 징표였다. 그녀는 병이 깊어질수록 까다로워졌던 헨리 8세에게 온몸을 바쳐 봉사했다. 그렇기에 주름살 또한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 캐서린은 명석한 제인을 다 큰 친딸처럼 대했다. 제인 또한 캐서린을 친어머니보다 더 따랐다. 그녀를 따라 신교도의 충직한 일원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캐서린은 제인과 함께 있고서 1년 반가량 흐른 1548년 9월, 딸 메리를 낳고 숨지고 말았다. 사인은 산욕열이었다. 깊이 상심한 제인은 캐서린의 장례식에서 상주 역할을 맡았다. 마지막 추모를 끝으로 제인의 찰나 같은 봄날도 끝났다. 다시 부모 품으로 돌아가야 할 그녀 앞에는, 그새 덩치를 더 키운 불행만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체스판 말이 되다
욕심 많은 제인의 부모는 딸을 그저 체스판 말처럼 볼 뿐이었다. 젊고, 예쁘고, 똑똑하면서도 특별한 혈통까지 품은 그녀를 앞세워 권력의 틈을 비집고 들어갈 생각밖에 없었다. 사실 부모가 앞서 캐서린과 토머스에게 제인을 맡긴 데도 다 계획이 있었다. 이들은 헨리 8세에 이어 겨우 열 살 나이로 왕관을 쓴 에드워드 6세의 왕비 자리로 제인을 올리고 싶었다. 그래서 미리 토머스와 말을 맞춘 후 제인이 일종의 '신부 수업'을 받게끔 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알게 모르게 제인의 과외 교사 역할을 한 캐서린이 너무 일찍 죽어버렸다. 얼마 되지 않아 토머스도 에드워드 6세 납치와 그의 강제 혼인을 꾀했다는 혐의 등으로 처형당하고 말았다. 기세등등했던 제인의 부모는 물거품이 된 계획 앞에서 덜덜 떠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대로 가면 자신들도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딸을 서둘러 다른 사람과 혼인시키기로 했다. 점점 매서워지는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부모가 제인의 결혼 상대로 찍은 이는 길포드 더들리였다.에드워드 6세 시대에서 실세가 된 노섬벌랜드 공작, 그 시대 또 다른 야심가인 존 더들리의 아들이었다. 길포드가 제인에게 어울리는 지성을 갖췄으면 좋았겠지만, 외려 망나니라는 꼬리표가 따라오는 등 영 소문이 좋지 않은 자였다. 부모는 크게 한 번 데이고도 딸을 통한 권력 쟁취를 또다시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당사자인 제인은 길포드와의 가약을 한사코 거부했다. 또다시 학대 당한 제인은 부모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결국 이를 받아들여야 했다. 남편이 된 길포드는 곧장 제인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나섰기에, 역시나 신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왕 에드워드 6세의 후계자로
진짜 불행은 이제 시작이었다. 제인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실세 귀족의 아내가 된 건 그렇다고 쳐도, 설마 자신이 왕비도 아닌 여왕 자리에 오를 줄은. 그건 너무 뜬금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종종 우연과 광기를 동력으로 삼는다. 먼저 우연이 발생했다. '소년 왕' 에드워드 6세는 어린 나이치고는 키도 크고 풍채도 좋은 편이었다. 당시 궁정 화가 윌리엄 스크로츠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13살 무렵의 에드워드 6세의 그림을 보면, 젊은 시절 부친을 떠올리게 하는 호남의 용모, 특히 아버지를 쏙 빼닮은 길쭉한 팔다리가 눈길을 끈다. 냉정한 표정, 허리춤에 찬 길쭉한 검도 왕의 위엄을 돋보이게 한다. 그런데, 그런 에드워드 6세가 1553년 1월께부터 갑자기 폐결핵 증상을 보였다. 곧 사경을 헤맬 만큼 병세는 급속도로 악화했다.
이쯤 광기도 고개를 들었다. 여태껏 실세로 권력 놀음을 한 존, 이제는 제인의 시아버지가 된 그는 새 시대의 도래가 두려웠다. 신교도인 에드워드 6세가 죽고, 이후 서열상 이복누나인 메리 1세가 즉위하면 그의 세상도 끝이라고 판단했다. 구교도인 메리 1세가 지금의 신교도 체제를 좋게 볼 리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존은 아직 숨이 붙어있는 에드워드 6세를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며느리 제인을 '조커'로 들이밀었다. 종교적 믿음이 다른 메리보다, 같은 신교도인 왕족 제인에게 직을 물려주는 게 맞다고 거듭 강조했다. 제인의 부모는 이런 전개를 흐뭇하게 바라봤을 것이다. 에드워드 6세는 병에 걸리고 6개월 후 허무하게 죽었다. 1553년 7월 6일, 열여섯 생일을 맞이하지도 못한 나이였다. 그의 유언장 앞줄에 쓰인 후계자의 이름은... 메리 1세가 아닌 제인 그레이였다. 광기의 승리였다.
순순히 내려놓은 ‘9일의 여왕’
"그럴 리 없어요. 왕위는 제가 아닌 메리의 것이에요!"
제인은 왕관이 자기 몫으로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쓰러질 만큼 격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제인은 한 번도 여왕이 될 뜻을 품은 적이 없었다. 이 일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지만, 또다시 거듭되는 부모의 매질과 시댁의 강요로 울면서 왕좌에 올랐다는 후문이다. 즉위 일은 7월 10일, 에드워드 6세가 죽은 후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제인의 초상화에선 먼저 그녀의 크고 동그란 눈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순수한 눈에선 야심과 욕망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몸에 딱 맞는 드레스, 반짝이는 보석보다 눈에 띄는 건 그녀가 든 책 한 권이다. 제인은 이런 사람이었다. 그녀는 왕관을 쓴 후부터 외려 더 삶을 지옥처럼 여겼을 것이다. 이 와중에도 제인은 자기 또한 공동 왕으로 임명하라는 남편 길포드의 요청만은 한사코 거부했다.
서열대로라면 원래 왕위를 이어야 할 메리 1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안토니스 모르가 1554년께 그린 그림에서 짐작할 수 있듯 메리 1세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제인의 둥글둥글한 초상화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날카로운 분위기를 품고 있다. 한때 금발의 미소녀로 불린 메리 1세였지만, 그녀 또한 어릴 적부터 왕좌의 싸움에 휘말린 탓에 갖은 고생을 한 처지였다. 이 때문에 살은 쏙 빠져 깡마른 몸이 됐고, 지독한 근시와 신경질적으로 된 성격 탓에 늘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중요한 건, 모든 순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메리 1세는 이미 런던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실세 존의 계략을 간파한 그녀는 이를 깨부술 병사를 모으고 있었다. 메리 1세에게는 권력욕이 있고, 무엇보다도 '내가 적법한 계승자'라는 명분도 뚜렷했다. 이 덕에 단기간에 군대를 꾸린 메리 1세는 런던으로 곧장 진격했다. 기대만큼 병력을 모으지 못한 존 일당은 허무하게 밀려났다. 제인은 메리 1세에게 순순히 왕관을 넘겼다. 이날이 7월 19일이었다. 통치 기간은 7월 10일부터 딱 아흐레였다. 제인이 훗날 '9일의 여왕'으로 불리게 된 이유다. 메리 1세는 모든 일의 주모자인 존부터 처형했다. 그렇다면 여왕 행세를 한 격이 된 제인에 대해선...
갇힌 뒤 외려 자유를 찾다
메리 1세는 제인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메리 1세는 제인을 불쌍하게 보고 있었다. 그녀는 여린 제인이 이리저리 이용만 당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통치 기간은 한순간이었지만, 그래도 한때는 여왕이었던 점 또한 그녀를 사형수로 몰기에 부담스러운 지점이었다. 메리 1세는 제인을 일단 런던탑에 가뒀다. 말은 감금이지만, 제인은 그곳에서 책을 읽으며 꽤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메리 1세는 스페인 왕세자였던 펠리페 2세와 결혼 후 자식을 낳으면 제인을 풀어줄 계획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평생 제인을 괴롭히기만 한 아버지 헨리가 또 문제를 일으켰다. 메리 1세에 맞선 신교도의 반란에 가담하고 만 것이다. 메리 1세까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 만큼 이들의 진격은 갑작스러웠다. 그래도 평생을 급박하게 살아온 그녀였기에, 이번 사태 또한 큰 탈 없이 진압할 수 있었다. 이쯤부터였다. 제인을 죽여야 한다는 말이 왕궁에서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제인은 존재 자체로 반역자이자 위험인물이 됐다고 말이었다. 왕족이자 신교도인 제인이 있는 한, 그녀를 상징으로 내건 반란이 언제든 생길 수 있다는 게 근거였다.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하면, 최소한 사형 주장은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여왕 메리 1세의 제안입니다."
"이 땅에서 생명을 이어가겠다고 영원한 생명을 버릴 수는 없지요."
메리 1세는 그럼에도 제인을 형장에 보내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녀는 고민 끝에 신하를 시켜 제인의 개종을 권유했다. 하지만 제인은 이처럼 완강한 모습만 보였다. 제인은 기구한 삶 속에서 신앙만을 유일한 버팀목으로 삼았다. 이것만은 버릴 수 없었다. 반역자로 오해받을지언정, 변절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메리 1세는 더는 손을 쓴 방도가 없어 제인의 처형을 명령했다. 그러고도 그날이 오자 특별히 산파를 보내 제인의 임신 여부를 살펴봤다는 설이 있다. 당시에는 사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임신하면 집행 연기 혹은 사면까지도 받을 수 있었다. 무고한 아이까지 죽일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역시나 제인은 임신 상태가 아니었다.
끝까지 비정했던 어머니
제인은 처형대 위로 천천히 목을 올렸다. 제인은 떨리는 몸을 다잡기 위해 거듭 심호흡을 했다. 한 번 더, 한 번 더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내뱉는 그때... 사형 집행자는 제인의 목을 깔끔하게 벴다. 소녀의 잘린 머리가 짚단 위에서 굴렀다. 소녀의 흰 드레스는 콸콸 쏟아지는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평생 질곡의 삶을 산 그녀의 최후에 모두가 얼굴을 감싼 채 신음했다.
남편 길포드는 같은 날 제인보다 앞서, 아버지 헨리는 제인이 죽고서 이틀 후인 2월 23일에 처형됐다. 다만 어머니 프랜시스는 새로운 남편을 만나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살았다. 그녀는 제인 처형 후 5년 뒤인 1559년에 사망했다. 제인의 삶을 망치는 데 동참했던 프랜시스는 끝까지 비정한 모습을 보였다. 첫째 딸을 아예 잊었다는 듯, 죽을 때까지 제인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문제적 어른들만 없었다면 제인은 책에 파묻혀 조용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평범한 가정의 자애로운 어머니가 될지언정, 피로 얼룩진 '9일의 여왕'이 될 일 따위 없었을 것이다. 5세기가 흐른 지금도 그녀의 눈물겨운 생을 되짚으면 한숨만 내쉬어진다.
역사공부를 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아마도 복잡한 당시의 상황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사회, 문화, 제도... 무엇보다도 사고 방식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어려움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쌓고 쌓아 둔, 학습대상으로서의 역사 과목은 한국사든, 세계사든, 그저 힘에 부친 암기의 대상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의 이야기들은... 그 또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때때로 흥미로울 때가 있다.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들 중의 하나이다.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자료를 찾아보니... 중세 유럽에서 종교란 윤리를 비롯한 사회제도 전반을 규정하는 형이상학적 사유체계의 근본이었고, 따라서 현대인이 생각하는 '국가' 나 '이념', '민족' 등의 개념 이상으로 충성을 바쳐 수호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에드워드 6세 → 제인 그레이 → 메리 1세 → 엘리자베스 1세로 이어지는 당시의 상황을 종교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다음과 같다.
"에드워드 6세는 이복누나인 메리, 엘리자베스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나이가 20년 넘게 차이 나던 큰누나 메리와 사적으로는 특히 사이가 좋았는데, 다만 종교 문제로 갈등이 있었다. 에드워드 6세는 종교개혁의 영향 속에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메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6세는 자신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 가톨릭 신자인 누나 메리가 왕위를 이어받아 잉글랜드 교회를 다시 로마 교황 휘하로 되돌릴 것을 우려하였고, 갑작스레 병에 걸려 병세가 악화되어 죽음이 확실시되자 왕위 승계 문서를 수정하여 메리를 왕위 계승권자에서 제외하면서 자연스럽게 엘리자베스도 제외하고, 한때 결혼 상대로 고려되었던 친척이자 개신교도인 제인 그레이에게 왕위를 넘기기로 했다. 당시 왕위 계승권 서열은 헨리 8세의 장녀 메리, 헨리 8세의 차녀 엘리자베스, 헨리 8세의 조카 프랜시스 브랜든 (제인 그레이의 어머니), 헨리 8세의 조카손녀 제인의 순서였다.
제인 그레이의 부모인 도셋 후작 부부 (헨리 그레이와 프랜시스 브랜든)와 시아버지인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는 메리 1세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메리 1세는 일찌감치 지지자들 사이에 숨어서 가톨릭 신자들이 뭉쳐있는 서퍽의 요새로 피신해버렸고, 에드워드 6세의 사후 본격적으로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노섬벌랜드 공작도 반격을 시도했으나 애초에 정통성 문제에서 심각하게 밀렸기 때문에 이탈자들이 속출하면서 반 메리 전선은 금방 와해되었다. 메리 1세는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런던에 재입성하여 적법하게 즉위하게 되었고, 전세가 바뀐 순간에 제인 그레이의 못난 부모는 냉혹하게도 딸 제인과 사위인 길포드를 버리고 탈출했다. 비록 제인은 순순히 폐위에 동의했으나 어쨌든 메리 1세의 즉위를 저지하고 즉위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반역자로 낙인찍히고 말았고, 제인을 계속 살려 두면 그녀를 빌미로 신교도들이 또 반역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여론이 강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 1세는 제인을 살려 주고자 그녀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살려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독실한 신교도인 제인은 개종을 끝내 거부했고, 메리 1세는 제인이 살아 있는 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결국 제인 그레이를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메리 1세의 여동생 엘리자베스는 시골에 있으면서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메리가 병력 500명을 동원하여 끌어내 런던으로 압송하여 런던탑에 감금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처형은 매우 어려웠다. 엘리자베스는 그다지 종교에 열성적인 편이 아닌데다가 겉으로나마 잉글랜드 교회가 가톨릭으로 복귀한 걸 받아들인 상태라 종교를 빌미로 처형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튜더 왕조의 후손은 메리와 엘리자베스 자매밖에 남지 않았는데, 나이가 40세에 가까워진 메리는 아직 후사가 없었고, 아무 대책 없이 엘리자베스를 죽이고 나면 후계자가 전무한 상황에서 귀족들끼리 차기 왕위 계승과 관련한 분쟁이 벌어질 게 뻔했다. 가톨릭화를 추진하던 메리 1세의 심복인 윈체스터 주교 스티븐 가디너가 '엘리자베스를 죽여야 된다' 고 선동했지만 엘리자베스는 4개월 동안 감금되었던 시기에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척하여 런던탑에서 해방되었다. 이후 메리 1세는 일생의 숙원을 펴는데, 1520년대 이후 헨리 8세 시기와 에드워드 6세 시대 반포한 종교관련 법률을 모두 무효화시키면서 선대왕의 반가톨릭적 종교 정책을 바꾸려고 했다.
메리 1세는 어떻게든 자녀를 낳아 왕위를 이어받게 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임종을 맞던 순간에 엘리자베스 1세를 왕위계승자로 지명해야 했다. 사실 지명하지 않았더라도 적법한 계승자나 튜더 왕조 혈통은 엘리자베스가 유일했기 때문에, 가톨릭 세력이 밀던 인물을 지명해도 성공 확률은 낮았다.
엘리자베스 1세는 즉위 이후, 메리 1세가 임명한 신학 교수들과 사제들을 점차 프로테스탄트로 교체했는데, 이것은 장기적인 프로테스탄트화 정책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궁극적인 목표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프로테스탄트화였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 대해 대중들의 최초 반응은 냉담한 편이었다. 수도원 폐쇄 및 옛 전례의 변화는 대중들에게 상당한 상실감을 남겼고, 이 영적 공허감을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교리가 대체하기까지는 수십년의 긴 세월이 걸렸다. 1,000년 가까이 믿어온 종교를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자베스 1세는 다소 온건한 방향으로 종교정책을 세우고 장기적인 프로테스탄트화 정책을 수행한 것이었다."
종교가 절대적인 사회 속에서 종교로 인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부모의 강요와 학대 속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면서 자라왔고, 부모와 시아버지의 권력욕으로 인해 비참한 처지에 빠진 상황...
평생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던 여왕이 되었다가 이제는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
그러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 제인 그레이는 어쩌면 평생 처음으로 자신의 뜻을 명확하게 밝혔다.
신교를 버리고 구교로 개종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여왕 메리 1세의 제안에 "이 땅에서 생명을 이어가겠다고 영원한 생명을 버릴 수는 없지요" 라며 거절한 것이다. 그리고 폴 들라로슈가 그린 그림처럼 처형당한다.
시대의 격랑에 휘말려 스스로를 추스리지 못하며 살았고 불과 열 일곱, 여덟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지만, 제인 그레이는 '이 땅에서 생명을 이어가겠다고 영원한 생명을 버릴 수는 없다' 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히브리서 12:2)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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