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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아주시는" 하나님

아리마대 사람 2022. 7. 2. 23:55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동시에, 교회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삼다"라는 동사가 있다.

국어사전을 펴서... 아니,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사전을 통해 정확한 뜻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삼다 [삼ː따] 「…을 …으로」
1. 어떤 대상과 인연을 맺어 자기와 관계있는 사람으로 만들다.
     (예) 고아를 양자로 삼다.

     (예) 친구의 딸을 며느리로 삼다.

2. 무엇을 무엇이 되게 하거나 여기다.
     (예)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다.
     (예) 그는 정직을 신조로 삼고 있다.
3. (주로 ‘삼아’ 꼴로 쓰여) 무엇을 무엇으로 가정하다.
(예) 그녀는 딸을 친구 삼아 이야기하곤 한다.

 

대체적으로 '전에는 나와 관련되지 않았던 무엇을 이제는 나와 관련된 무엇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국어사전 1번 의미의 예문들을 보면, 전에는 양자가 아니었던 고아를 이제는 양자로 받아들인다는 의미, 전에는 며느리가 아니었던 친구의 딸을 이제는 며느리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된다.

국어사전 2번 의미의 예문들을 보면, 전에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아니었던 위기를 이제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받아들인다는 의미, 전에는 신조가 아니었던 정직을 이제는 신조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된다.

국어사전 3번 의미의 예문들을 보면, 전에는 친구가 아니었던 딸을 이제는 친구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받아들인다'는 말은 '과거의 의미는 지워버리고, 이제부터는 다른 의미로서 새롭게 이해한다'는 뜻을 강하게 나타낸다.

국어사전 1번 의미의 예문들을 보면, 고아였던 과거는 지워버리고 이제부터는 양자로서 새롭게 이해한다는 의미, 친구의 딸이었던 과거는 지워버리고 이제부터는 며느리로서 새롭게 이해한다는 의미가 된다.

국어사전 2번 의미의 예문들을 보면, 위기였던 과거는 지워버리고 이제부터는 전화위복의 계기로서 새롭게 이해한다는 의미, (나와 직접적으로는 무관했던 가치로서의) 정직이라는 과거는 지워버리고 이제부터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신조로서 새롭게 이해한다는 의미가 된다.

국어사전 3번 의미의 예문들을 보면, 딸이라는 과거는 지워버리고(여기서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므로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는 친구로서 새롭게 이해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처럼 "과거의 의미를 지워버리고 이제부터는 다른 의미로 새롭게 이해한다"는 형식의 의미가 "죄인이었던 과거를 지워버리고 예수를 믿게 된 이제부터는 의인으로 인정받는다"는 구원론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흔히 사용하게 된 것 같다.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나를/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고..."

"죄인되었던 나를/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고..."

"부족한 나를/우리를 일꾼으로 삼아주시고..."

특히 기도할 때 이와 같은 표현이 자주 사용된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자 부족하고 모자라기만 했던 내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받고 능력을 발휘하기까지에 이르렀음을 생각할 때, 감사하고 감격스러워서 이와 같은 표현이 사용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진심으로 느낄 때, 실제로 내게 일어난 일임을 체감할 때, 감격의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

이는 우리에게 있어서 신실한 고백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삼다'는 말을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사용하게 된 필요와 까닭은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다'라는 말의 의미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좀 더 상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삼다'라는 말은 본래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던 것을 특별한 계기나 특별한 동기를 통해서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다른 의미로 새롭게 이해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으며, 이 상황을 수용하고 받아들여서 새로운 의미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의미의 진행과정을 생각해 볼 때... 이 말은 사람의 한계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말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면, 첫째, 사람은 본래 어떤 것이 지닌 나름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의미가 있다. 둘째, 그 의미를 인식하고 살아가는 가운데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특별한 어떤 일을 겪게 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셋째, 특별한 일의 결과로서 새로운 의미를 깨닫고 이해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의미가 있다. 넷째, 마침내 새로운 의미를 수용하는 데에 적응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이처럼 앞날을 미리 알지 못하는 사람의 한계 때문에 '삼다'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 사람은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수용력과 적응력이라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삼을 수가 있다. 이 과정은 사람이 살면서 자주 맞닥뜨리는 상황이기도 하다.

'삼다'라는 말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적용되는데... 하나님께는 어떨까?

하나님께서도 본래 어떤 것이 지닌 나름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머물러 계시다가 예상하지 못했던 특별한 일을 겪으시고, 마침내 그 일의 결과로서 깨닫게 된 새로운 의미를 이해하시고 받아들이실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고, 그렇게 하실 수가 없으며, 그러실 필요도 없다. 그분은 과거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도 계실 분이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며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사야 41:4)
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앞에서 인용한 예문들을 일차원적인 사고의 틀 속에서 하나님께 적용한다고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고아를 굳이 양자로 삼으실 필요가 없으시다. 아들을 창조하시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친구의 딸을 굳이 며느리로 삼으실 필요가 없으시다. 며느리를 창조하시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위기를 굳이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으실 필요가 없으시다. 위기가 복이 되도록 상황을 창조하시면 되고, 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는 위기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정직을 굳이 신조로 삼으실 필요가 없으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시고 다스리시기 때문이며, 이미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딸을 굳이 친구 삼아 이야기하실 필요가 없으시다. 친구를 창조하시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삼으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상황과 하나님의 상황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해당되지 않는 말을 하나님께 대해서 사용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람이 자꾸만 하나님을 사람의 상황 속에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쁘게 보자면, 하나님을 사람의 영역으로 끌어오려는 인본주의적 행태라고 할 수가 있다.

좋게 보자면, 하나님을 친밀하게 가까이 모시려는 어리석지만 순진무구한 친근감의 표출이라고 할 수도 있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이러한 행태는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의 세번째 계명에 위배되는 행태일 수가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를 나쁘게 보셔서 '인본주의적 행위'라고 지적하시고 '교만한 행위'라고 정의하신다면, 이 말을 사용하고 살아가는 인간은 죄를 더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이러한 표현을 허용하시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면, 이미 성령께서 강력하게 임재하셔서 이러한 언어생활이 죄악이므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지 말도록 우리를 가르치고 깨우쳐 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언어를 허용해 주실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도 작고 어린 우리를 이해하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인식은 말씀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이사야 55:8-9)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도 작고 어린 우리를 이해하시고 사랑으로 보아주신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부적절한 입술의 말을 상관하지 않으시고, 우주보다 더 큰 사랑으로 단지 순수하지만 어리석을 뿐인 우리의 마음을 바라보시고 부족하고 서툰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삼다'라는 말의 뜻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명확히 이해해 보자.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명백히 다르고, 사람의 길은 하나님의 길과 명백히 다르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사람에 대한 '삼다'와 하나님께 대한 '삼다'가 명백히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사람에 대해서 사용하는 '삼다'라는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사람 자신이 몰랐던 의미가 사람에게 새로운 의미로서 다가올 때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삼다'인 것이다.

하나님께 대해서 사용하는 '삼다'라는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주신 의미를 사람이 스스로 버리고 스스로를 다른 의미로 선언하고 떠났다가 다시 본래의 의미로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이를 받아주시는 것이 '삼다'인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부여하신 본래의 의미가 있었음(맨 왼쪽 그림)을 무시한다면 사람에 대한 '삼다'와 하나님께 대한 '삼다'가 너무나 닮은 꼴이어서 사람에 대해 사용하듯 하나님께 대해서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전능자이신 하나님께는 우리가 보기에 새로운 의미가 실은 하나님께서 이미 부여해주셨던 본래의 의미인 것이다. 대상의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그 대상이 지닌 의미의 창조자 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의 차이는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다.

우리는 집을 나갔던 탕자를 아들로 "삼아주신" 아버지의 이야기를 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본래 아버지와 함께 지내던 아들이 집을 나가 탕자가 되었으나 제 발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을 용서하고 다시 아들로 "받아들여 주신" 아버지의 이야기를 보시는 것이다.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나를/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고..."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는 "본래 자녀였던 내가/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는 길로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나를/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여 주시고..."인 것이다.

우리는 "죄인되었던 나를/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고..."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는 "본래 자녀였던 내가/우리가 죄인의 행위를 하며 살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나를/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여 주시고..."인 것이다.

우리는 "부족한 나를/우리를 일꾼으로 삼아주시고..."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는 "본래 능력을 주셨던 내가/우리가 제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 능력을 오용하며 살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나를/우리를 일꾼으로 받아들여 주시고..."인 것이다.

우리는 부분만 볼 수 있을 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알고 계신다. 우리는 죄인인 나를 자녀로, 부족한 나를 일꾼으로 삼아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지만, 하나님께는 본래부터 자녀이고, 일꾼인 것이다.

어리석고 부족한 우리의 말이 어떻게 표현을 하든 간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본래 우리에 대한 의미를 다 아시면서도,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짐짓 모른 체 하시며, 죄인인 나를 자녀로, 부족한 나를 일꾼으로 "삼아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모든 "삼아주심"을 가능케 하셨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나를/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죄인되었던 나를/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부족한 나를/우리를 일꾼으로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