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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을

"공의로우신" 하나님

아리마대 사람 2022. 7. 17. 22:49

최근 몇년 간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적 경향이자 나아가서 사회적 가치, 곧 '시대정신'이라고 불리는 가치의 자리를 꿰찬 말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

"공정과 정의"

"공정과 상식"

여기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공정"이다. 공평하고 올바르다는 뜻이다.

그 다음에는 "정의"라는 말이 자리하고 있다.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상식"이라는 말이 자리잡고 있다.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을 가리키며, 이는 일반적 견문과 함께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 따위가 포함된다.

또한 "평등"이라는 말이 있다. 권리, 의무, 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다는 뜻이다.

 

"공정"을 중심으로 한 시대정신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어릴 적 줄곧 들으며 자랐던 "민주화"라는 말 이후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아마도 갈수록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지금의 시대 속에서 사람들이 공정에 목말라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공정"을 바라고 있다 보니, 사회 제도 측면에서 여러 사람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저마다 "공정"을 내세우며, "공정"을 외치고 있는데... 때때로 동의받지 못하는 "공정"을 주장하는 경우에는 심각한 역풍을 맞게 된다.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권력의 지형도가 바뀌거나, 더 나아가서는 나라의 정권이 바뀌기도 한다. 공정이 훼손되었다고 느낄 때, 전근대 사회에서의 민란이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투표권으로 재탄생한 '날 때부터 왕후장상이 따로 있나'라는 말이 고유한 힘을 발휘하여 절차에 따라 왕후장상을 갈아 엎는 것이다.

 

"공정", "정의", "상식", "평등", 곧 시대정신이라고 불리는 말들을 살펴보면 상호 모순되는 것이 없으며, 어느 하나가 이루어진다면 다른 것들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깊은 상호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어느 하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다른 것들도 이루어지기 어려운 특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들은 서로 간에 조금씩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어서 상호연관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상호 보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공정은 약간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면을 가진 말이다. 이는 일부 측정 가능허가나 법적, 제도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측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정의는 공정의 근거가 되는 개념이지만, 공정보다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이고 측정 가능한 측면이 없다보니 쉽게 오용되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상식은 보다 형이하학적인 인상을 주지만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며 여러 사람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평등은 18세기 이후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 역주행하며 다시 각광받기 시작한 것 같은데, 가치의 측정 기준이 제각각일 수 있다는 점과 지나치게 기계적이거나 지나치게 감상적인 양극단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이런 특성들을 생각해 볼 때,  현 시대의 시대정신은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바이며 이루고자 하는 바이지만, 실제로 그 과정은 지난할 수 밖에 없다. 사람은 제 각각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생각하게 마련이고, 제 입장과 더불어 남의 입장을 헤아리는 능력에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시대정신은 각 사람에게 다르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개를 돌려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답답한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제각각 제 생각을 주장하며 제 말만 하고 있고, 그러한 생각과 말에는 제 욕심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한계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걸 넘어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하나님을 생각한다.

상식과 평등의 하나님을...

공정과 정의의 하나님을...

성경의 표현대로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성경에는 공의라는 말이 무척 많이 등장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라고 말한다.

 

(신명기 32:4)

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시편 33:5)

5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이사야 45:21)

21 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또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이 일을 옛부터 듣게 한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얼마나 공의로운 분이신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출애굽 사건이다.

출애굽을 통해 가나안 땅에 도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뛰어나고 훌륭해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어리석고 교만한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 땅을 주신 것은 오로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 곧 언약때문이었다.

 

(신명기 9:4-6)
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내 공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차지하게 하셨다 하지 말라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5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6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주변의 상황과 약속의 대상에 대한 판단의 결과에 흔들리지 않고 맹세를 이루심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면서 이 언약이 이루어지게 될 시기는 이방 땅 애굽에서 사백 년 동안의 괴롭힘을 당한 후가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다.

 

(창세기 15:13-14)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고자 하신다면, 그 시기는 하나님 마음대로 정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때를 말씀하신다. 왜 굳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사백 년의 시간이 필요하신 것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기로 한 땅에 이미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비롯한 이방 족속들의 죄악이 가득 차고,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그들이 멸망하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창세기 15:16)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하나님께서 이유없이, 막무가내로 그의 뜻을 이루시지 않고 엄격하게 정해진 원칙을 따라 행하심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

 

이 하나님께서는 또한 사람에게 공의를 요구하신다. 하나님 앞에서의 공의는 사람을 살게 한다. 비록 죽을 수밖에 없는 악인일지라도 죄악에서 돌이켜 공의를 행하고 지키면 죽지 않게 된다.

 

(에스겔 18:21-22)

21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22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

 

(에스겔 18:26-27)

26 만일 의인이 그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그로 말미암아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요
27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공의를 요구하실까?

 

(창세기 2:7)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피조물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불어 넣어주시고 자녀로 삼아주신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닮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자녀들이 창조주인 아버지의 공의를 닮아 멸망에 이르지 않고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베드로후서 3:9)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공의의 하나님께서 자녀들에 대하여 오래 참아주신다는 사실은 아모리 족속의 죄를 사백 년 동안 지켜보신 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들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인 사백 년을 주셨던 것이다.

 

돌이킬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시고 기다리심은 므두셀라의 일생으로부터도 알 수가 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뜻이었다.

 

(창세기 5:25-27)
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다. 그리고 노아가 600세가 되었을 때 홍수가 발생했다. 노아가 600세인 해는 므두셀라가 187+182+600=969세가 되는 해였다. 홍수가 일어난 해는 므두셀라가 죽은 해였다.

 

(창세기 5:25-32)
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세기 7:6)
6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의미대로 그가 죽던 해에 홍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수명인 969년은 돌이킬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주신 기회의 시간, 곧 하나님의 기다리심의 시간이었다.

 

하나님께서 인내하시고 기다리시는 이유는 요나를 보내 회개를 촉구하셨던 니느웨에 대한 마음에서 알 수 있다.

 

(요나 4:10-11)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의 공의는 마침내 이루어질 하나님의 심판에서도 이를 지배하는 정신이자 가치이다.

 

(사도행전 17:30-31)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데살로니가후서 1:6-9)
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요한계시록 19:11)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인간 사회의 공정과 정의가 혼란 가운데 놓여져 있는 까닭에 이젠 상식과 평등까지 동원해서 이를 바로 세우고자 애쓰는 현 시국이 안타까워 하늘을 바라보다가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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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원칙대로 행하시는 분이시다.

 - 우주의 원칙은 죄를 지으면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 원칙이 지켜지는 것은 우주적 공의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또 다른 원칙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

 - 죄를 지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원칙 외에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원칙을 주셨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피조물이자 자녀인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죽음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 원칙을 알고 행하기를 원하신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사람들이 돌이킬 수 있도록 심판의 때까지 오래 참으신다.

 - 죽음이 존재하고 구원이 존재하는 것은 죽음 이후에 구원을 판별하는 때가 온다는 의미이며, 하나님의 인내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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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시는 엄격한 법치주의자이자 원칙주의자이시며, 또한 정확하게 설계하시고 운영하시는 수학자이자 엔지니어이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공정의 정의를 실현하실 수 있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오차없이 운영하실 수 있다.

그래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불리실 수가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실 수가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성품이 공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시다.

 

(신명기 32:4)
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하나님이 법치주의자이자 원칙주의자로 느껴지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분이시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셔서 모든 것을 아신다. 사람의 마음과 역사의 전개와 천지의 운행을 포함하여 이전에 일어난 일과 장차 올 일과 모든 정보를 아신다.

 

(이사야 41:21-23)
21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하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22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이 어떠한 것도 알게 하라 우리가 마음에 두고 그 결말을 알아보리라 혹 앞으로 올 일을 듣게 하며
23 뒤에 올 일을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신들인 줄 우리가 알리라 또 복을 내리든지 재난을 내리든지 하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정보를 통해 판단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단은 공의로우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완전할 수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 11:20)
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이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성품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시며, 모든 정보를 아시는 분이시므로 공의로우실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자연과 우주가 아닐까 싶다. 바울은 만물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신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로마서 1:20)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자연과 우주 가운데에 드러나는 가장 분명한 하나님의 공의의 증거는 창조된 모든 것이 규칙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 규칙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이며, 모든 것은 이 규칙을 따라 운행된다. 이 규칙을 물리법칙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원자를 구성하는 입자들로부터 우주를 구성하는 천체들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법칙을 따라 정확히 운행된다.

그래서 뉴튼이 흑사병을 피해 고향에 머물다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블랙홀의 존재를 예측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은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이 규칙에 기반하여 자연과 우주의 현상들이 이해되고, 예측되고, 관측기술의 발전을 통해 이를 확인하고, 새로운 관측을 통해 새로운 이해를 지속적으로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이 수학자요 엔지니어라고 느껴지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정확한 설계와 운영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 덕분에 내가 살며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 죽을 수 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 구원을 받고 생명을 얻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 오늘도 이 안정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다.

오늘도 주위를 둘러보고, 하늘을 바라보며 그 가운데에 깃들인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생각해 본다.

 

생각 가운데 떠오른 참으로 신기한 것 한 가지는...

사도 바울께서 그 바쁜 와중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는지 놀라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