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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에 관한 질문과 답변」

Q39. 세례와 침례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아리마대 사람 2022. 12. 22. 10:53

▒ 어떤 교회에서는 세례를 주지만, 어떤 교회에서는 침례를 줍니다.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옳은 방식인가요?

 

어떤 교회에서는 침례로 받지 않은 다른 교회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다시 침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이럴 경우에는 다시 받아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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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세례는 한 사람의 자연인이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입니다. 이 때에는 몸에 물을 뿌리거나, 붓거나, 온몸을 물에 잠그는 방식을 취하게 되는데 세례와 침례는 사용하는 물의 양에 따라 구분됩니다. 사실 한국교회에서는 물로 씻는다는 의미의 '세례'라는 말이 통칭이 된지 오래이며, '침례'라는 말은 일부 교회에서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세례라는 단어를 사용하겠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세례라는 말은 주로 '밥티조' 또는 그와 비슷한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매우 포괄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반드시 온몸을 물에 잠그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머리꼭대기까지 물에 잠기는 것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허리까지 잠기는 것을 의미하는지 이 단어만을 가지고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밥티조'라는 단어를 가지고 침례를 주장하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세례의 방식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기원후 100년경에 기록된 『디다케』, 곧 『열두 사도 교훈집』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문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례에 관해서 여러분은 이렇게 세례를 주시오.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살아 있는 물로 세례를 주시오. 만일 살아 있는 물이 없으면 다른 물로 세례를 주시오. 찬물로 할 수 없으면 더운물로 하시오. 둘다 없으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머리에 세 번 부으시오.

여기에서 말하는 '살아 있는 물'은 어떤 물을 가리킬까요? 웅덩이에 고여 있는 썩은 물이 아니라 강물이나 샘물처럼 움직이고 신선한 물을 의미합니다. 이 문서를 따라 세례 방식의 우선순위를 매기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강이나 냇가에 가서 흐르는 찬물에 온몸이 잠기도록 합니다. 둘째, 웅덩이나 집안의 욕조 등 고여있는 찬물 혹은 따뜻한 물에 온몸이 잠기도록 합니다. 셋째, 머리에 물을 세 번 붓습니다. 이 세가지 방식 중에서 둘째의 경우는 병자나 노약자를 위한 방식으로 보이며, 셋째의 경우는 많은 양의 물을 구하기 힘든 상황을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대부분 첫째 방식으로 세례가 행해졌습니다. 기원후 215년경에 기록된 『사도전승』은 세례 예식을 다음과 같이 베풀라고 명합니다.

수탁이 울 시각에 먼저 물에 기도할 것이다.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나 위에서부터 흐르는 물이어야 한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할 것이다. 만일 불가피한 경우가 항존하고 절박하다면, 현지에 있는 물을 사용할 것이다. ··· 세례 받을 사람이 물에 내려가면 세례를 베푸는 이는 그에게 안수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까?'하고 물어볼 것이다. 세례 받을 사람은 '믿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즉시 그의 머리에 안수하면서 한 번 침수시킬 것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온 몸을 물에 잠그는 방식의 세례를 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에서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야외의 강가나 냇가에서 머리꼭대기까지 물에 잠기는 방식의 세례를 행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교회는 점차 교회 안의 적당한 장소에 세례를 위한 욕조를 만들고 거기에서 세례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세례 욕조는 어른이 잠길 정도로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5세기경 유아세례가 성행하면서 세례욕조는 유아가 간신히 잠길 정도로 작아졌습니다.
세례 욕조의 위치도 점차 위로 올라왔습니다. 처음 세례가 행해지던 강물이나 냇물은 땅보다 아래에 위치해 있었지만, 실내에 세례 욕조를 만들 때는 땅과 같은 높이에 두었고, 유아세례를 위한 욕조는 세례 주는 사람이 유아를 손에 잡고 물에 잠그기에 적당하도록 어른 허리 높이에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근대에는 세례 욕조의 크기가 더 작아져서 '재떨이'보다 약간 더 큰 정도가 되었고, 그나마 있던 다리와 받침대도 제거하여 이동식 세례 우물이 되어 사용하지 않을 때는 강대상 서랍 같은 곳에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예배운동에 힘입어 최근 20여 년 동안 다시 세례 우물을 크게 짓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초대교회 세례 우물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과 세례의 신학적 중요성에 대한 재발견에 따른 것입니다. 세례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기 위해서는 온몸을 물에 잠그는 방식의 세례가 좋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물의 양을 가지고 어떤 세례는 유효하고, 무효하다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세례의 신학적 의미를 충분히 살려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충분한 양의 물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 위로 흘러내리는 단 몇 방울의 물은 '죄를 씻음 받고 새 사람으로 탄생'하는 세례의 상징성을 표현하기에는 그 양이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예배학자 제임스 화이트 박사는 근대 개신교의 세례를 '드라이크리닝'이라고 비꼬기도 했습니다. 근대 개신교회들이 너무 편의적으로 세례를 주는 것에 대한 비판이지요. 오늘날의 교회들도 어떻게 하면 세례의 풍부한 신학적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도록 새례를 행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