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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에 관한 질문과 답변」

Q38. 유아세례와 헌아식은 어떻게 다른가요?

아리마대 사람 2022. 12. 21. 22:53

▒ 어떤 교단은 유아세례를 주지만, 어떤 교단은 유아에게 세례를 주지 않고 '헌아식'을 합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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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의 공동체가 유아세례를 시행했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이 이에 관해 토론했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에는 유아세례에 관한 찬성 혹은 금지를 나타내는 명시적인 사례나 가르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유아세례를 시행했다는 문헌적 증거는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5세기부터는 장년세례보다 유아세례가 더 활발하게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개혁 때까지 약 1,000년 동안 유럽 사회에서는 태어난 아기에게 유아세례를 주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16세기 종교개혁자들 중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들을 '재세례파'라고 합니다.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가 순전히 부모의 의지에 의해 세례를 받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 어른이 되어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이 '재세례파'라고 이름 붙여진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세례에 관한 재세례파의 특징은 모든 신앙이 개인적이고, 인격적이고, 경험적인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중생의 경험을 한 사람에게만 물세례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재세례운동의 선구자는 후일 '메노나이트'(메노 사이먼이 1536년 개혁교회와의 단절을 선포한 이후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기독교의 소종파입니다. 이들은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오직 '믿는 자'만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개별 신앙 공동체의 자율권을 주장합니다.)의 시조가 된 메노 사이먼입니다. 그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신앙이 세례를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세례가 신앙을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세례는 신앙의 내적 경험의 결과로서 따라오는 외적 표지일 뿐입니다. 둘째, 유아는 신앙을 가질 수도 없고 회개를 할 수도 없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메노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마 28:19)에서 '가르쳐 지키게'라는 것이 먼저이고, '세례를 주는 것'은 나중이라고 엄격하게 해석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유아는 가르침을 받을 만한 이성적인 귀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세례도 받을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셋째, 세례는 이미 믿고 신자가 된 사람이 혁신적인 제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공적인 시취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메노는 츠빙글리와 마찬가지로 '표징'과 '실재'를 엄격히 구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라 세례를 받음으로 죄를 사함 받는다면 그것은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과 다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메노 사이먼의 이러한 주장들은 루터를 비롯한 다수의 개혁자들이 인정한 세례의 성례전적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유아세례를 거부한 재세례파는 '헌아식'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냈습니다. 헌아식이란 부모가 교회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아이를 신앙 안에서 양육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약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오늘날 이 전통에 서 있는 교단은 메노나이트, 후터파, 아미쉬, 그리고 침례교 등입니다. 그러나 루터, 칼빈, 츠빙글리 등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은 유아세례를 지지했습니다. 오늘날도 동방교회를 비롯하여 로마 가톨릭,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등에서 유아세례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유아세례냐 헌아식이냐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신학적으로 볼 때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는 '성례전'인 반면, 헌아식은 단지 부모가 자녀를 하나님께 바치는 서약의 행위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세례는 분명히 성례전이며, 유아세례라고 할지라도 그 효력은 동일합니다. 성례전이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는 분명하고 가시적인 은총의 수단이며, 이것을 행하는 주체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헌아식은 아이의 부모가 주체가 되어 자신의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과 서약의 행위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유아세례와 헌아식은 행위의 주체도 다르고, 그 효용도 다른 것입니다.
유아세례를 부정할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 실천적 모순에 부딪치게 됩니다. 첫째, 위에서 설명했듯이 세례는 죄 사함과 중생의 사건이고, 구원의 표이며, 그리스도의 몸에 편입되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한 가정에서 부모는 천국의 시민인데 반해, 그 자녀는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천국의 시민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둘째, 정신박약아 등 자신의 의지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영원히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어야 합니다. 단지 스스로 의사표시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어린이나 정박아의 세례를 막을 권리가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셋째,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보다 '인간의 의지'가 더 크게 작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유아에게 무차별적으로 유아세례를 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유아에게 세례를 준다면 분명한 실천적 토대 위에서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라고 하는 신앙의 울타리입니다. 교회가 유아에게 세례를 줄 때에는 단순히 부모의 신앙을 담보로 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신앙을 담보로 해서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막 세례를 받은 사람은 아무리 육신의 나이가 많다 하더라도 영적으로는 유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신령한 젖'인 '말씀'을 먹으면서 계속해서 자라가야 합니다. 이 점에서 육체의 나이는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유아의 부모의 신앙도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 중 최소한 한쪽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년세례가 유아세례보다 더 확신하고 안전한 제도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한 사람의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의지로 인격적 결단을 하고 세례를 받는 것이 유아로 세례 받는 것보다는 훨씬 더 성경의 정신에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유아에게 주시는 은총을 인간이 가로막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유아세례 문제에 대한 결론을 기원후 215년경의 문서인 『사도전승』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이 문헌을 보면 기독교 입교를 원하는 후보자들은 명백히 성인이었습니다. 당시의 세례후보자들은 일정 기간의 교육을 받아야만 했는데, 그 과정에 들어가기 이전에 먼저 개종하려는 이유에 대해 심사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준비 과정에 들어가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이 준비 과정은 3년이었으며, 개인의 믿음이나 도덕적 진보에 따라 단축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을 마친 후에 그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러한 과정과 절차를 충족시킬 만한 대상은 당연히 성인이 됩니다. 그러나 모든 준비 과정이 끝나고 정작 세례를 줄 때에는 "어린이들에게 먼저 세례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대답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게 하고, 그렇지 못하면 부모나 가족 중에서 다른 사람이 대신 대답하게 하십시오."라고 권고함으로써 스스로 대답할 수 없는 어린이도 세례를 받았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인 테르툴리아누스나 히폴리투스의 글들을 통해 우리는 세례를 위해서는 교육과 훈련을 위주로 하는 준비 기간을 철저히 지키되 어린이나 유아도 배제하지 말자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즉 성년세례를 표준으로 하되, 유아세례를 금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실천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충실성을 지키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