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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에 관한 질문과 답변」

Q56. 교회력은 무엇이며, 왜 지켜야 하나요?

아리마대 사람 2023. 1. 6. 19:28

▒ 성경에는 교회력에 관한 언급이 별로 없는데 교회력이 혹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요?

 

교회력을 지키면 무슨 유익이 있나요?

 

주일예배의 설교 본문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되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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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 하면 누군가가 괜히 '멋부리기 위해' 만들어낸 복잡한 고안물이며, '복음적인 교회에서는 이것을 지키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교회력은 교회가 탄생할 때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부활절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는 당시에 예배하는 날이었던 안식일이 아닌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즉 한 주간의 첫날에 모여서 주님을 기억하며 떡을 떼었습니다.

(사도행전 20:7)
7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매주 같은 날이 되면 이렇게 같은 방식으로 주님을 기념하다가 1년 후 그날이 왔을 때 '작년 오늘 주님께서 부활하셨다.'하고 기념하면서 더 성대하게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활절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최초의 교회가 부활절을 지켰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고린도전서 5:7-8)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이 본문에 따르며,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을 지켰는데, 그 이름을 '그리스도인의 유월절'이라고 했습니다. 즉 유대인의 유월절은 어린 양의 희생과 그 피로 말미암아 (장자의) 죽음을 면하고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의 신분으로 바뀌게 된 절기이고, 그리스도인들의 유월절은 어린 양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노예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된 절기라고 인식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의 유월절이나 기독교의 유월절은 공히 '파스카', 즉 '넘어감'을 기념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성령강림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하신 후에 제자들은 그들의 선포와 집회에서 성령이 함께하심을 수시로 경험했고, 그로부터 1년 후 같은 날에 '작년 오늘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신 날이다.'라고 기억하면서 더 크게 집회를 벌였습니다. 그 후로 매년 그날이 되면 어김없이 이러한 기념의 행위가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과거의 사건을 기념하는 것은 이를 통해 공동체가 주님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때 그 일'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체험하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부활절도, 성령강림절도 모두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초대교회 문서들을 살펴보면, 교회력은 4세기경에 지금과 같은 구조로 이미 확립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력의 근본 취지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의 역사 그리고 성령에 의한 교회의 발전을 좀 더 극대화하고 거기에 맞는 예배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보다 깊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세시대에는 교회력에 대한 오용이 있었습니다. 중세교회가 성모 마리아의 축일을 비롯하여 1년 365일을 각종 성자들의 축일로 채워 예배에서 주님의 말씀과 구속사건을 선포하기보다 이들 성자들의 생활담이나 전설을 이야기함으로써 교회력의 근본 취지를 변질시킨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오용을 근절하고자 교회력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력 자체를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루터는 예수님과 관계된 교회력을 지키려고 했으며 이에 따라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등의 절기는 물론 주님의 수세일이나 수태고지일 등도 존속시키려고 했습니다. 요한 웨슬리 역시 가치 있는 목적과 무관한 모든 행사는 폐지하려고 했지만, 대림절, 부활절, 성 주간,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주일 등은 지켰습니다.
다만 개혁가들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입장을 취한 츠빙글리는 교회의 성상들을 파괴하고,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성자와 순교자들을 향한 숭배를 철저히 거부했으며, 당시까지 전해오던 교회력을 전면 거부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처럼 교회력에 대해 낮은 인식을 갖게 된 원인은 직접적으로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19세기 미국의 교회들과 그들이 파송한 선교사들에게 있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것은 가장 급진적이었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력은 '대림절기'로부터 시작합니다. 4주 동안 계속되는 이 절기는 초림의 주님을 기념하며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고 선포하는 절기입니다. '성탄절기'는 성탄 전야로부터 시작해서 주현절까지로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 다음에 따라오는 '주현절 이후의 절기'는 주님께서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수세축일과 산상변모축일을 포함합니다. 그 다음은 '사순절기'로서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해서 주일을 뺀 40일 간의 기간인데, 이때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서 특히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을 중심으로 한 사건들을 기념합니다. 사순절기의 절정은 '성 주간'으로서 종려주일로부터 시작해서 성 목요일, 성 금요일, 성 토요일까지입니다. 그 다음은 '부활절기'로서 부활절 전야의 철야로부터 시작해서 부활주일, 성령강림주일에 이르는 8주간이 이에 해당됩니다. 말할 것도 없이 부활절기는 8주간 내내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선포하는 절기이며, 주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절기도 이 기간에 속해 있습니다. 성령강림주일 다음 주일은 '삼위일체주일'로 지키며, 이때부터 시작해서 다음 해 대림절 전주까지는 '보통 절기'로 지켜지는데 그중 맨 마지막 주일, 즉 1년의 맨 마지막 주일은 '그리스도왕주일'로 지킵니다.
이처럼 교회력은 1년을 그리스도의 일생으로 나누어 1년 내내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그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념하고 감사하며 선포하는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력의 중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는 교회의 예배와 행사가 교회력의 토대 위에 든든히 서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교회의 예배와 행사가 교회력을 충실히 따라가느냐 아니냐의 여부가 그 교회의 그리스도 중심성을 나타내준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교회력에 토대를 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일차적인 과제는 세계교회가 사용하는 '표준성서정과'를 채택하여 설교의 본문을 정하는 것입니다. 표준성서정과는 교회력에 따라 매주의 말씀을 배정해 놓았으므로 그것을 주일예배의 본문으로 정하면 자연히 설교가 교회력을 따라가게 되고 예배는 그리스도 중심이 됩니다. 여기에 그 본문과 절기의 주제에 맞는 기도와 찬송을 선택하고(물론 성가대의 찬양도!), 강대상의 드림천과 예배 봉사자들의 예복 색깔, 예배당 장식 등을 맞추면 됩니다. 이렇게 될 때에 매주의 예배는 완전한 통일성하에서 하나의 주제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게 됩니다. 교회의 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순절 기간 내내 절제, 훈련, 참회와 관련된 행사를 했다면, 부활절 기간에는 생명 나눔, 희년, 부활신앙의 고백 등 부활과 관련된 행사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태양력, 태음력, 회계력, 학사력 등 수많은 달력을 사용합니다. 교회력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달력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것에 따라 삶을 영위한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농업이나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태음력을 따라 살아야 하고, 기업은 회계력을 따라 살아야 하며, 학생은 학사력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만약 학생이 학사력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등록 기간이나 수강 신청 기간에 놀러가고, 시험 기간에 시험을 안치면 그 학생은 학생으로서의 신분을 이어갈 수 없게 됩니다. 교회와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신분을 유지하고, 성도가 성도로서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회력을 충실히 지켜야 합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 생활을 위해서 우리는 교회력을 온전하게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바라보고 하루를 살듯이, 교회는 1년 내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