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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에 관한 질문과 답변」

Q57. 가톨릭의 미사는 의식(ritual)이 많은데, 개신교회의 예배는 너무 밋밋하지 않나요?

아리마대 사람 2023. 1. 6. 22:43

▒ 교회의 예배를 가보면 앉아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이 거의 전부인 것 같습니다. 예배 의식이 너무 빈약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의 예배가 가톨릭의 미사와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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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예배가 오늘날처럼 주로 '앉아서 듣는' 형식의 예배로 형성된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원인이 있는데, 이는 한국교회의 예배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원인은 '개혁교회'의 전통입니다. 개혁교회의 기원은 종교개혁 당시 열린 마르부르크 회의(1529)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루터와 함께 개혁을 주도한 츠빙글리, 마르틴 부처, 멜란히톤 등은 예배에 대한 견해차이 때문에 루터와 결별하고 개혁교회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배에 끼친 영향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말씀에 대한 강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여 설교를 길게 하고 주석적인 설교를 위주로 했기 때문에 교육받은 사람들이 선호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예배가 지성에 호소하는 경향으로 흘렀습니다. 이러한 설교 형태는 예배당의 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와서 높은 강단과 2층, 그리고 발코니가 있는 예배당들을 주로 지었습니다. 이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강단에 근접시키기 위해 생긴 예배당 구조입니다.
둘째, 그들은 예배에서 일체의 물질적인 요소들을 배격했습니다. 츠빙글리는 '영적인 것을 전달하는 데 물질적인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신념에 따라 성화나 성상 등 일체의 물질적인 것들을 예배에서 배제시켜 버렸습니다. 그의 영향으로 1527년 취리히의 예배당에 있는 파이프오르간이 파괴되었습니다. 음악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영적'이지 않다는 츠빙글리의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셋째, 그들은 예배에서 참회를 강조했습니다. 칼빈의 예배에서는 시작 부분에 '우리는 아무런 선을 행할 수 없고 우리의 부패 가운데 거룩한 계명들을 끝없이 또는 그침 없이 범하고 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죄의 고백'을 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이 개혁교회 예배의 전형적인 특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배의 첫 부분에 참회의 기도가 오는 것은 '칼빈 전통' 혹은 '개혁교회 전통'입니다. 결국 츠빙글리나 부처, 멜란히톤 등 종교개혁자들의 영향으로 예배는 긴 기도, 의례적인 말, 권면, 교훈, 긴 설교가 이어짐으로써 전반적으로 지루하게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보다는 회중을 가르치기 위한 기능을 더 많이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예배가 '앉아서 듣는' 형태의 예배가 된 두 번째 원인은 청교도적 유산 때문입니다. 청교도는 본래 영국에서 출발하였으나 현재는 전 세계에 퍼져 있으며 오늘날 '독립교회'라고 불리는 여러 교파들, 즉 침례교파 중 일부, 조합주의자들(회중교회), 캐나다 연합교회 등도 이 계열에 속합니다. 이들의 신학적 뿌리는 위에 언급한 개혁교회이고, 일종의 '과도한 칼빈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 '성경엄수주의'입니다. 청교도들은 예배의 모든 사항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원했고, 이 권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규정되지 않은 다른 방법에 따라서는 예배 받으실 수 없으시다.'라고 말하면서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모든 예배 순서를 제거해버렸습니다. 문제는 성경에 나타난 예배에 관한 언급이 지극히 부분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배에 관한 규정을 소개할 목적으로 기록된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청교도들 자신도 예배에 관해 성경이 규정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일치된 견해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기도와 찬송, 그리고 설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예배 형식을 제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긴 설교입니다. 청교도들의 설교는 보통 한 시간이나 그 이상 지속되었으며 예배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또한 설교자는 지정된 성서정과를 따르지 않고 그때그때 임의로 성경 본문을 택하여 설교를 하거나 독자적으로 설교 계획을 짤 수 있었습니다.
셋째, 예배에 관한 결정이 개별 회중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개별 회중과 지역교회는 '예배의 자치권'을 가졌고, 따라서 예배의 형식은 공동체마다 독립적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개교회마다 독자적으로 예배의 형식을 정하는 것도 이런 전통에 따른 것입니다.
넷째, 기록된 기도문이 아닌 '즉석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만일 우리 기도가 우리의 입술로 나오기 전에 우리의 마음속에서 잉태된 것이 아니라면 그 기도는 육친의 애정 없이 태어나는 사생아와 같이 부정한 탄생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즉석에서 마음속에 떠오르는 영감으로 기도하기를 원했습니다. 지성에 호소하는 설교, 길고 교훈적인 기도, 감정에 호소하는 예배 분위기, 부흥회식 예배 등은 모두 청교도의 유산입니다.
한국교회의 예배가 앉아서 듣는 형태가 된 세 번째 원인은 19세기 미국에서 생성된 개척자 예배 형식 때문입니다. 개척자 예배는 당신 미국 서부의 광활한 대지 위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독특한 예배 형식으로서 주로 전도를 목적으로 행해진 집회였습니다. 이 예배 형태가 19세기 당시 미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기 때문에 교파를 초월하여 주일예배의 형태로 정착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의 미국 선교사들은 자연스럽게 자기들이 알고 있는 이 예배 형태를 한국교회에 전해주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회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서로 비슷비슷한 예배 형태를 가지게 된 것도 다 이러한 영향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회중을 향한 교육이나 전도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헌신의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온몸과 마음'을 다해 드려야 합니다. 가만히 자기 자리에 앉아서 듣기만 하는 '마음과 머리'만의 예배가 아니라  '온몸'을 통한 예배가 필요합니다. 앉고 일어섬, 무릎을 꿇거나 절을 하는 것, 성찬의 떡과 잔을 바라보고 맛보고 먹는 것, 앞으로 걸어나가는 것, 향내음을 맡는 것 등을 활용하면 우리의 예배가 훨씬 더 풍부해질 뿐 아니라 우리의 지, 정, 의 모두를 동원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몸과 마음, 지정의를 총동원하여 예배하는 것을 더 즐겨 받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