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다. 여기서 '말'은 곡식, 가루, 액체 등의 부피를 잴 때 사용하는 단위로서 '되'의 열 배이며 약 18리터에 해당한다. 서 말이면 54리터에 해당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승용차의 연료탱크의 용량이 40~75L 가량 되니까 서 말이면 많은 양이다.
그래서 이 속담의 의미는 좋은 재료나 자원, 능력 등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활용해야만 보배가 된다는 말인 것이다.
구슬 자체는 어쩌면 큰 가치가 없을 수도 있지만, 이것을 줄에 꿰어서 목걸이나 팔찌 등을 만든다면 이것은 몸을 치장할 수 있고, 가치있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장신구가 된다.
이런 경우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먹는 일이 재미와 취미로 여겨지는 요즘의 세태를 반영하여 요리에 비유해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구슬에 해당하는 음식 재료를 조리법을 통해 줄에 꿰면 요리라는 보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구슬에 해당하는 배추, 소금, 고추가루, 젓갈 등을 다듬고, 절이고, 무치고, 익힘으로써 줄에 꿰면 김치라는 보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구슬에 해당하는 쌀, 당근, 양파, 달걀 등을 다듬고, 볶고, 부치고, 예쁘게 배치함으로써 줄에 꿰면 오무라이스라는 보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속담의 연장선 상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여러가지 중의 한 가지는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이 한결같이 최고라고 평가하는 우리나라의 치안이다. (링크)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도 우리나라에 있는 동안은 우리나라의 치안의 울타리 속에서 우리나라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행동하며 생활한다. 이로부터 치안이 만족스럽지 않은 나라에서 온 그들도 우리나라의 치안의 울타리 속에 동화될 수 있는 치안의 소양과 개념을 이미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나라에 돌아가면 다시금 본래 자신이 속했던 사회의 일원이 되고 만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자기 나라의 치안에 실망하는 그들 각자에게도 구슬과 같은 치안의 소양과 개념은 있지만, 그들의 사회는 이 구슬을 꿰지 못하여 치안이라는 보배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구슬에 해당하는 치안의 소양과 개념을 갖추고, 이를 행함으로써 줄에 꿸 때, 살기에 편리하고 안전한 사회라는 보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구슬에 해당하는 제 아무리 좋은 법을 갖추고 있더라도 이를 지킴으로써 꿰지 않는다면 살기 좋은 사회라는 보배를 이룩할 수 없음과 같다.
준법사회와 위법사회, 범법사회, 어쩌면 무법사회까지도 어쩌면 동일한 구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꿴다'는 개념에 해당하는 '지키고 행함'에서의 차이 때문에 안전하고 살기 좋은 사회와 불안하고 살기 어려운 사회로 갈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구슬은 반드시 꿰어야만 보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떠할까?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말씀은 명백히 구슬이다.
(시편 12:6)
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편 119:105)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서 말이 넘는 구슬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서 말이 넘는다고 말하는 까닭은 이 구슬 속에 세상의 시작과 끝, 인간의 시작과 끝, 역사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법칙과 예수님의 구원사역 등의 세상의 모든 진리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구슬을 꿰면 어떤 보배가 될까?
이 구슬 속에는 구슬을 꿰었을 때 어떤 보배가 될 것인지까지도 담겨있다.
(히브리서 4:12)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디모데후서 3:15-17)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말씀이라는 구슬을 꿰어 만든 보배는 살아 있어서 날선 칼보다도 더 예리하게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에 파고들어 나의 생각과 뜻을 하나님의 생각과 뜻으로 이끌어 간다.
성경말씀이라는 구슬을 꿰어 만든 보배는 구원으로 이끄는 지혜를 주며,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시켜서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게 한다.
그러니까 성경말씀이라는 구슬을 꿰어 만든 보배는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한 일을 행하며 살게 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과 그 이후의 삶에까지 미치는 보배가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구슬에 해당하는 성경말씀을 '도대체 어떻게 꿰어서' 보배와 같은 삶을 살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중요한 문제는 '도대체 성경말씀을 어떻게 꿸 것인가?'인 것이다. 보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과연 성경말씀을 '꿴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과연 성경말씀을 '꿴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성경말씀을 꿸 수 있을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
성경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져도 꿰어야 구원의 삶으로 이끄는 보배가 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지 않으면 보배가 되지 못한다...
성경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져도 꿰지 않으면 구원의 삶으로 이끄는 보배가 되지 못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지 않으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성경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져도 꿰지 않으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지 않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성경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져도 꿰지 않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동시에 이 속담을 고스란히 담고있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야고보서 2:16)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야고보서는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일상 영역 속의 속담을 우리의 믿음의 영역으로 가져와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이 말씀을 통해 성경말씀을 꿰어 보배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야고보서 2:15-17)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것은 '행함'이다.
야고보서는 헐벗고 굶주인 형제나 자매에게 '평안히 지내기를 바래, 몸을 따듯하게 하도록 해, 배부르게 먹어'라고 말만 하면서 정작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만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묻는 서기관에게 대답해 주셨다.
(마가복음 12:29-31)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22:40)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계명 중에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 두 가지가 계명의 모든 것이라고.
또한 '그렇다면 내 이웃은 누구냐고' 묻는 율법교사에게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셨다.
(누가복음 10:30-35)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그리고 율법교사에게 문답법을 통해 가르쳐주셨다.
(누가복음 10:36-37)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이라고. 사랑을 자비로 보여준 사람이 이웃이라고.
강도만난 사람을 향해 '쯔즛...'하고 혀를 차고 지나갈 뿐 돕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헐벗고 굶주인 형제나 자매에게 '평안히 지내기를 바래, 몸을 따듯하게 하도록 해, 배부르게 먹어'라고 말만 할 뿐 정작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과 같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매우 싫어했다. 야고보서에는 복음의 메시지가 없다고 했고, 야고보서를 알곡이 없는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경멸했다. 가톨릭을 반대하며 '오직 믿음'을 주장했던 그의 입장에서는 믿음보다 행위를 강조하는 책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루터는 야고보서가 바울신학의 '이신칭의'의 진리를 갉아먹는다고 생각하여 야고보서는 성경의 다른 모든 책들과 상충되므로 정경에서 빼야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것은 '곡을 바루려다 직에 지남을 면치 못함'의 생각일 뿐이다. 구부러진 것을 펴려다가 반대편으로 구부러져 버린 결과에 불과하다. 과연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지푸라기 서신'을 썼을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사람이 죽기 바로 직전,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에 구원받는 것이 아닌 이상,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후의 삶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결코 덜 중요하지 않으며, 어쩌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마르틴 루터는 '행함'을 구원받기 전의 삶에 속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 '행함'을 마치 면죄부와 같은 것으로, 구원에 이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수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가톨릭에 대한 반발은 그를 종교개혁으로 이끌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생각을 가두어 야고보서의 말씀을 오해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은 구원받은 이후의 삶에 속하는 것이다. 이 '행함'은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삶에 있어서 목적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야고보서는 이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행함'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구원받는 사람으로서, 나를 구원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행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떤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행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이나 율법교사의 질문에 답을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 살아야 함을 계속적으로 가르쳐 주셨다.
(마태복음 5:19)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7:21)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4-27)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가복음 3:31-35)
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누가복음 10:25-28)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누가복음 22:19)
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그래서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한 것이다.
(야고보서 1:22)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그러니 구슬에 해당하는 '성경말씀'을 '행함'으로써 줄에 꿰면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따른 삶'이라는 보배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구슬을 냉정하게 바라보자.
이 구슬은 높임말을 써서 '성경말씀'이라고 부른다. 흔히 '성경말씀'은 귀하고 엄청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막연하고, 관념적이고, 입에 발린 말에 불과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성경말씀'은 그저 종이에 인쇄된 글자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성경말씀은 서점에 널리고 널린, 주위에 흔하디 흔한 인쇄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성경말씀을 꿰면... 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나를 통해 실현되고 실행되면, 성경말씀은 놀랍고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이 말을 시점을 바꾸어 다시 써보면 이렇게 된다.
"내가 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실현하고 실행하면, 성경말씀은 놀랍고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인쇄물로서 접하게 되는 '성경말씀'은 그 자체로서 무엇을 행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이 말씀을 따라 행할 때, 이 말씀은 나의 행함을 통해 살아나서 나를 통해 일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서 역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말씀이라는 구슬을 '꿰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꿰인 성경말씀은 내 속에서 날선 칼보다도 더 예리하게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에 파고들어 나의 생각과 뜻을 하나님의 생각과 뜻으로 이끌어 가고, 나에게 구원으로 이끄는 지혜를 주며,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시켜서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말씀은 보배가 된다.
그리고 이 보배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편지가 되어 세상으로 전해지며, 세상을 보배롭게 물들여감으로써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게 된다.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성경말씀을 따라 행하며 삶으로써 성경말씀이 보배가 되므로, 성경말씀을 보배로 만드는 것은 나의 행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혹은 나의 행함에 어떤 힘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 힘은 성경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성경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충성스럽게 행하는 종일 뿐인 것이다.
...어릴 적 방학 때마다 즐겨보았던 만화를 떠올린다...
초등학교 때 시작해서 고등학생이 되어서까지 방학 때마다 꼭 보았던 만화, 로보트 태권V.
가만히 두면 고철덩어리에 불과한 태권V지만, 훈이와 영희가 제비호를 타고 태권V에 탑승하면 정의로 뭉친 주먹을 지닌 무적의 로보트가 되어 달리고 날면서 악의 로보트들을 때려 부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행함'이 바로 그런 것이다.
반드시, 행하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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