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잠깐 스쳐가는 말씀 한 조각

말씀 한 조각 만으로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 생각 한 조각

"구제"의 중요성

아리마대 사람 2024. 8. 20. 00:02

구제는...

 
"십시일반"이라는 말이 있다. 열 사람이 자기 밥그릇에서 한 술씩 보태면 한 사람이 먹을 분량이 된다는 말이다. 여러 사람이 힘을 모으면 한 사람을 도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힘을 모아서 어려운 사람을 돕자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구제할 것은 없어도 도둑 줄 것은 있다"라는 속담이 있다. 형편이 어려워서 남을 돕지 못할 형편의 가난한 집이라고 하더라도 도둑맞을 물건은 있다는 말이다.
돈을 벌고 재물을 모으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를 위해 아둥바둥 살며, 세상살이의 어려움이라는 것 대부분이 이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힘든 일은 구제하는 일이다.
주변에서 구제의 모습을 보게 된다. (
구제의 모습의 예)
진정어린 구제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구제의 모습에는 박수를 보낸다. 그것은 구제의 모습이 귀한 모습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힘든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구제(救濟)"라는 단어의 뜻이 '자연적인 재해나 사회적인 피해를 당하여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줌'이라고 나타나 있다. 만일 모든 사람이 평상시에 어려움이 없이 살아간다면 이러한 정의가 옳을 것이다. 어려움 없이 지내다가 자연적인 재해나 사회적인 피해를 겪게 될 때에만 도움이 필요할 테니까.
그러나 현실 속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평상시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건강의 문제라든가, 혹은 노동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거나 적은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니 "구제"는 국어사전에 수록된 의미 이상의 행위로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구제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를 구제하며, 또한 이웃을 구제하며  살기를 원하셨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을 기록한 레위기를 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가 있다.

(레위기 19:9-10)
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23:22)
22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구제법으로서 가난한 자들과 거류민을 위해 곡식을 거둘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않고 떨어진 이삭을 줍지 않으며, 열매도 다 따지 않고 떨어진 열매를 줍지 않는 규정이 만들어졌다. 이를 '페아'법이라고 하며, 여기서 '페아'는 '모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방인 며느리였던 룻이 자신에게는 낯선 이스라엘 땅에서 시어머니 나오미를 봉양할 수 있었던 것도 페아법에 따라 밭에서 곡식의 이삭을 주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룻기 2:2-3)
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룻기 2:15-16)
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이로부터 자연적인 재해나 사회적인 피해를 당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넘어서는, 보다 넓은 의미의 구제를 생각할 수 있다. 구제는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평상시에도 행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의 모든 백성들에 대한 샘플로서 먼저 택하여 본보기로 삼으신 백성이라는 점에 착안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서로를 구제하며 살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초대교회를 보아도 구제가 일상이었으며, 매우 적극적인 구제가 이루어졌던 것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2:44-45)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사도행전 4:32-35)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올바른 구제의 의미


지금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전에 따른 부의 불균형, 즉 빈부격차에 대한 해결방안으로서 분배가 강조되고 있는 시대이다.
지금은 이것이 마치 '절대선'처럼 옳은 것으로 취급되어 '분배의 정의'라는 말까지 등장하고 있는 시대이다.
지금은 이러한 강조가 지나쳐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이념과도 연결지으려는 시도들이 존재하는 시대이다.
기계적인 분배가 근로의욕을 떨어뜨려 사회발전을 막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매우 단순한 추론으로도 가능하며, 이는 공산주의 체제를 통해 이미 역사 속에서 실증된 바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사회제도를 통해 기계적으로 공정하게 분배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이룩하겠다는 것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발상에 근거한 것으로서 성경과는 전혀 별개이며, 하나님을 떠난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시대적 흐름 속에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모습을 근거로 무조건적인 기계적 분배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가난한 사람이 없었던 이유'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세상이 주장하고 있는 분배는 사회제도나 사회체제에 의해 강제되는 것이지만, 성경에 나타난 분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한 것이었다. 페아법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고, 초대교회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도행전 4:33)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소망을 통해 천국과 영생을 바라보게 됨으로써 이 세상의 것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게 되었고, 이러한 관점으로 이 세상의 것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바라볼 때, 사랑의 마음이 생겨나 그들과 함께 기꺼이 이 세상의 것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인간이 규정짓는 '분배'의 행위가 아니고, '사랑'의 행위였던 것이다. 그 바탕에는 얼마든지 얼룩지고 오염되기 쉬우며 가변적인 '인간의 정의'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풍성하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난 분배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고, 이러한 개념에 근거한 행위로서 구제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구제하는 사람이 받는 복


성경을 보면, 구제가 무척 강조되고 있으며, 교훈으로서 주어지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잠언 11:24-25)
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잠언 28:27)
27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

잠언의 말씀을 정리해 보면, 내 것을 나누며 구제할 때, 적어도 궁핍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서 풍족하고 윤택해진다고 말씀하신다.
내 것을 움켜쥐고 구제하지 않으면, 오히려 가난하게 되며, 더 나아가서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이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서로를 구제하며 살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는 이처럼 구제를 통해 풍족해지고 윤택해진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다비다를 살펴보자.
다비다는 욥바에 사는 '여제자'였다. 그는 희귀한 '여제자'라는 호칭이 붙여질 만큼 선행과 '구제'를 대단히 많이 행하는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9:36)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런데 병으로 죽고 말았다.

(사도행전 9:37)
37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사람이 죽었으니 장사를 지내는 것이 당연한 절차이지만, 다비다의 주변 사람들은 마침 가까운 룻다에 머물고 있던 베드로를 급히 부른다.

(사도행전 9:38)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베드로가 기도하고, 마치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게 말씀하셨듯이 '일어나라'라고 말했을 때, 죽은  다비다는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사도행전 9:40)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이렇게 하여 다비다는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아 육신의 생명이 풍족해지고 윤택해졌으며, 또한 살아난 다비다를 통하여 예수님를 믿는 증인들과 하나님의 나라가 더 확장되어 풍족해지고 윤택해지는 일이 일어났다.

(사도행전 9:41-42)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또한, 고넬료를 살펴보자.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는 이탈리아 부대의 백부장이었다. 이스라엘 땅에 파견된 로마 점령군의 간부였던 것이다.  

(사도행전 10:1)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경건하게 살아가는 이방인이었으며, 기도와 더불어 '구제'를 행하는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10:2)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그래서 그는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사람이 되었다.

(사도행전 10:4)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베드로로 하여금 고넬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를 선언하게 하셨다. 

(사도행전 10:34-35)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그리고 마침내 고넬료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 모두가 성령을 받아 성령으로 풍족해지고 윤택해지는 일이 일어났다.

(사도행전 10:44-46)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옷이 매우 귀했던 당시에 속옷과 겉옷을 지어 나누어주는 진심어린 '구제'를 행했던 다비다.
점령군의 백부장이었음에도 하나님을 믿고 경건하게 살며 진정성있는 '구제'를 행했던 고넬료.
이들을 통해 '구제'를 행할 때 풍족함과 윤택함을 선물로 받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구제는 이런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구제하는 사람이 받는 더 큰 복


구제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실은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때에는 예수님을 믿었는가,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하며 살았는가, 또한 예수님을 어떻게 대접했는가가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인데, 이것은 곧 구제가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25:31-46)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이 구제는 예수님을 어떻게 대접했는가의 문제이며,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얼마나 충성되게 행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즉 행함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구원의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 말씀했다. 사랑으로 구제를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 구원의 능력이 없는 것이다.

(야고보서 2:14-17)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사이비 혹은 이단과 같은 '인본주의'에 근거한 '사람의 사상'이 정의로 치부되는 시대 속에서 바른 길로 돌이키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뿐이다.
인간의 사회제도와 체제를 통한 기계적 분배의 실현이 정의라는 분위기 속에서 바른 길로 돌이키는 방법은 사랑으로 구제를 행하는 것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세상살이 속의 복을 받아 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를 쌓아 세상살이 가운데 복을 받아 누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비록 그 쌓은 기도가 세상살이 속의 복을 위한 것이었더라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어진 '세상살이 속의 복'으로 '구제'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해가 되고, 저주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제'를 행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복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행할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