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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야고보서

야고보서 1장

아리마대 사람 2017. 1. 25. 20:42

야고보는 유대파 그리스도인이며, 어머니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다.

야고보서는 초대교회의 후기에 쓰여졌으므로 내용 측면에서 고난과 박해를 이기라는 가르침과 생활윤리를 강조한다.

야고보서는 마태복음과 더불어, 믿음을 강조하는 바울과 반대편에 서있는 책으로 여겨진다.

성경이 정경화된 시기는 서기 300년 무렵이었다. 바울은 바울서신에서 거짓 가르침, 다른 복음과 싸워야 한다고 말했으며, 정경이 확립된 시기는 이미 바울의 신학이 승리한 때였다.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늘날의 신학의 교리는 대부분 바울의 교리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바울을 반대하는 성경이 정경에 포함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지만,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는 그러한 어려움을 뚫고 정경에 포함되었다. 이것은 야고보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야고보서의 별명은 ‘신약의 잠언’이다. 훈계와 교훈이 주된 내용이므로 '지켜라', '행하라' 등의 명령법이 무척 많이 나온다. 어머니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으므로 그가 강하게 얘기해도 순종으로 받아들여졌다.

야고보서는 무척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가르침을 제시하는 점이 특징이다.

헤게시푸스가 기록한 야고보의 죽음에 관한 전승은 다음과 같다.

 

모든 이로부터 의인이라 불리운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사도들로부터 교회를 전해 받았다. 그는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거룩하였다. 그는 포도주나 발효 음료를 마시지 않았고, 생명이 있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얼굴에 면도도 하지 않았고, 기름을 바르지도 않았고, 목욕도 하지 않았다. 오직 야고보만이 성소에 들어갈 자격이 있었다. 그는 홀로 성전에 들어가는 습관이 있었는데 종종 무릎을 꿇고 백성들을 위해 용서를 간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쉬지 않고 백성들을 위해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에 그의 무릎은 마치 낙타의 발처럼 딱딱해졌다. 그의 위대한 거룩함에 의해, 그는 예언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의인이요 오블리아라고 불리었다. 오블리아란 그리스어로 "백성의 요새"와 "정의"를 뜻한다. 일곱 분파의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이 와서 그에게 예수께 이르는 길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그분이 구세주라는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지만, 일부 유대인들은 부활, 그리고 장차 그가 모든 사람들의 공로에 따라 상급을 주러 오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과 통치자들이 예수를 믿게 되자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그들은 많은 백성이 예수를 메시아로 기대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야고보에게 가서 말하였다. "백성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기대하여 그를 좇음으로써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제지하여 주십시오.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에 관해 올바르게 권면하여 주시기를 당신에게 간청합니다. 우리는 모두 당신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모든 사람들은 당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니 높은 곳, 당신의 모습이 뚜렷이 보이고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음성을 쉽사리 들을 수 있도록 성전의 꼭대기에 서십시오." 그렇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야고보를 성전의 꼭대기에 세우고 그에게 외쳤다. "우리가 신뢰하는 의인이여, 백성들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좇아 잘못된 길로 가면서 우리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문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예수의 문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그러자 야고보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왜 당신들은 나에게 인자이신 예수에 관해 묻는 것이오. 그 분은 하늘 위,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고, 장차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동의하며 야고보의 증언을 찬송하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그러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서로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예수에 관한 이 증언을 허용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러니 올라가서 그를 아래로 던집시다. 그러면 사람들이 두려워서 그를 믿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외치며 말하였다. "오! 오! 의인이 길을 잃었도다." 이사야서에 기록된 바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 그들은 올라가서 그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의인 야고보를 돌로 치자."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야고보가 아래로 떨어졌으나 아직 죽지 않았음으로 그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야고보는 몸을 돌려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 하느님 아버지, 그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돌을 던지고 있을 때 예레미야가 말한 레갑의 자손인 제사장이 소리치며 말했다. "그만 두시오. 당신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의인이 당신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때 어느 축융업자가 피륙을 두드릴때 사용하는 곤봉으로 의인의 머리를 쳤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순교하였으며 사람들은 성전에 야고보를 매장하였다. 이곳에는 아직도 그의 비석이 남아 있다. 야고보는 헬라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충실히 증거한 증인이 되었다. 이 일이 있은 직후 베스파시아누스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장악하였다.

--- 헤게시푸스, 회고록 제 5권 ---

 

************ 야고보서 1장 ************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James, a servant of God and of the Lord Jesus Christ, To the twelve tribes scattered among the nations: Greetings.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편지의 발신자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이면서 예루살렘교회의 리더였던 사도 야고보라고 알려져 있다.

(마태복음 13:55)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후에도 야고보를 비롯한 형제들, 가장 가까이 지낸 가족들까지도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비웃기까지 했다.

(요한복음 7:2-5)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야고보도, 유다도, 요셉도, 시몬도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고린도전서 15:7-8)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이후,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한 사람들 중에는 야고보와 유다를 포함한 예수님의 형제들과 마리아도 있었다.

(사도행전 1:14)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제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는 바울과 베드로, 또한 자기 형제인 유다의 자기 소개와 흡사하다.

(로마서 1: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베드로후서 1: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유다서 1: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변화된 야고보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활동했으며, 성도들로부터 큰 신임을 얻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로서 기둥같은 역할을 감당했다.

(갈라디아서 2:9)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편지의 수신자이다.

'열두 지파'라는 말에서 문안의 대상이 유대인임을 알 수 있고, '흩어져 있다'는 말에서 로마의 각 처로 흩어진 유대인, 곧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여진 서신임을 알 수 있다.

문안하노라

편지의 인사말이다.

'은혜와 평강'이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이는 서방식 인사말에 가깝다.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Consider it pure joy, my brothers, whenever you face trials of many kinds, 

내 형제들아

야고보 사도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를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로마의 각 처로 흩어진 유대인들로서 이제는 복음을 받아들인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 쓰여진 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말은 단락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새로운 단락의 시작을 나타낸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러 가진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로 시작하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흩어져서 지내고 있는 유대인 신자들은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며 살고 있었다. 야고보 사도는 이 소식을 듣고 야고보서를 기록하여 보내게 된 것이며,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을 전하는 것은 이 서신이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because you know that the testing of your faith develops perseverance.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앞에서 언급된 '여러 가지 시험'은 '믿음의 시련'이다. 흩어져서 지내고 있는 유대인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기독교)에 대한 핍박과 이로 인한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이러한 시련을 견디는 것은 믿음의 인내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하는 일이 된다.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Perseverance must finish its work so that you may be mature and complete, not lacking anything.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믿음의 인내를 이루는 데에 있어서는 끝까지 변함없는 '온전한' 인내를 이루어야 한다. 이와 같이 온전한 인내를 이루어 낸 성숙한 믿음의 사람은 믿음 안에서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이는 믿음으로 인한 시련을 통해 인내를 이룸으로써 구원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자라게 될 것이므로 기뻐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이는 단련(믿음의 시련)을 통해 순금(온전한 인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됨)같이 되리라는 욥의 말과 같다.

(욥기 23:10)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2절부터 4절까지에는 시험인내온전함의 구조가 담겨 있다.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If any of you lacks wisdom, he should ask God, who gives generously to all without finding fault, and it will be given to him. 

야고보 사도는 인내를 이루는 데에 '지혜'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고, 이 인내를 온전히 이룰 때 구원받기에 부족함이 없게 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다. 지혜가 부족하여 왜 시련을 인내해야 하는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이를 깨닫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넉넉히 가지고 계시며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지혜가 부족한 누군가가 지혜를 구하면 그의 지혜가 부족함을 탓하지 않으시고 후하게 주신다.

솔로몬을 볼 때에,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구하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칭찬하심을 알 수 있다.

(열왕기상 3:11-12)
11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12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도 주셨다.

(열왕기상 3:13)

13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후히 주신다는 의미는 지혜 자체를 후히 주신다는 의미로도, 또한 지혜 뿐만 아니라 다른 복까지도 주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But when he asks, he must believe and not doubt, because he who doubts is like a wave of the sea, blown and tossed by the wind.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는 말씀은 '구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곧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구해야 한다. 의심하지 않는 믿음으로 구할 때에 구하는 것을 다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는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신 일을 통해 이를 알려 주셨다. 

(마태복음 21:20-22)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는 야고보가 어릴 적 자랐던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동네에서 갈릴리 호수의 모습을 떠올리고 사용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That man should not think he will receive anything from the Lord;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면서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다. 이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로 밀려가며, 오르락내리락 움직인다.

세상이 주는 '믿음의 시련'을 바람이라고 생각할 때,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은 사람은 세상이 주는 '믿음의 시련'에 따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이리저리로 흔들린다. 곧 하나님을 믿었다가 또한 의심했다가 하게 된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다.

이 말씀을 통해 기도하며 구하는데 얻지 못한다면 의심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he is a double-minded man, unstable in all he does. 

두 마음은 '믿는 마음'과 '의심하는 마음'이며, 이런 마음은 필요와 상황에 따라, 하나님과 세상을 번갈아 바라보는 사람이다. 이러한 마음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은 믿음 위에 굳게 서지 못하므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고, 따라서 지혜를 얻을 수가 없으며, 믿음의 시련에 대해 온전한 인내를 이루는 지혜가 부족하므로 구원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기 어렵다.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The brother in humble circumstances ought to take pride in his high position.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야고보서는 로마의 각 처로 흩어진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여졌다.

각 처로 흩어진 이들 유대인들은 주로 사업에 종사했다. 사업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들 유대인들은 탐욕에 빠지기 쉬웠다. 이들 중에는 세상 속에서 사업을 통해 부유해진 사람들도 있었던 반면, 낯선 환경에서 가난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점을 생각할 때 다음의 말씀을 떠올릴 수 있다.

(마태복음 19:23-24)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10:23-25)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누가복음 18:24-25)
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여기서 '낮은 형제'는 부유하지 않은, 가난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로 생각할 수 있다. 바로 다음의 10절에 '부한 자'가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낮은 형제', 곧 재물이 없는 사람은 재물에 얽매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위험에서 보다 자유롭다. 따라서, 재물로 인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오히려 기뻐할 수가 있다.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But the one who is rich should take pride in his low position, because he will pass away like a wild flower. 

'부한 자'는 '낮은 형제'의 상대적 개념으로서 많은 재물을 소유한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재물을 가진 사람, 특히 많은 재물을 소유한 사람은 이 땅의 재물에 얽매이기가 쉽다. 그러나, 이 땅의 재물로 인해 하늘나라를 생각하지 못하고 바라보지 못할 위험이 매우 크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누가복음 18:24-25)
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부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우선 '낮은 형제'가 되어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낮아짐'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부한 자가 자랑해야 할 것은 '낮아짐'인 것이다.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시간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혼이 살아가는 시간에 비하면 매우 짧은 시간이지만, 재물은 이것을 생각하고 깨닫지 못하게 한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재물은 세상에 속한 것일 뿐이므로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전혀 지니고 갈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더 많은 재물을 가지려 애쓰며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흔한 모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시간은 풀의 꽃과 같을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편 기자도 이를 말한 바 있다.

(시편 103:15)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For the sun rises with scorching heat and withers the plant; its blossom falls and its beauty is destroyed. In the same way, the rich man will fade away even while he goes about his business.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이, 이 세상의 삶이 영원할 것처럼 살아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의 겉사람, 곧 육신은 낡아진다.

(고린도후서 4:16)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그리고, 마침내는 낡아진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게 된다.

(베드로후서 1:14)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시간이 지나 이 세상을 떠나는 삶의 모습은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삶이 유한하기 떄문에, 아무리 재물이 많은 사람도 그 재물을 소유하고, 누리는 시간은 유한할 뿐이다.

또한 살아가는 동안에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과 같은 일들을 통해 재물은 손에서 빠져나가 버리기 십상이다. 이처럼 아무리 부한 자라도 그 재물과 소유는 결국 이와 같이 쇠잔해지고 만다.

야고보 사도는 사업을 통해 돈벌기에만 몰두하기 쉬운 유대인 신자들에게 재물의 유한함을 전하고 있다.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Blessed is the man who perseveres under trial, because when he has stood the test, he will receive the crown of life that God has promised to those who love him.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야고보서의 특징은 말씀이 뒤엉켜있다는 점이다. 논리적이거나 정돈되어 있지 않고, 떠오르는 얘기를 즉흥적으로 전달하는 듯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시험을 참는 자"는 3-4절에서 말한 '여러 가지 시험', 곧 '믿음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인내하고, 마침내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사람이다.

(야고보서 1:2-4)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험을 당할 때에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하는 이유, 온전히 기쁘게 여길 수 있는 이유는 현재 당하고 있는 시험을 참아낼 때 복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시험을 참는 자"는 곧 "시련을 견디어 낸 자"이다.

시련은 "믿음의 시련"이다.

믿음의 시련은 성도들이 겪는 시험이며, "주님을 믿는가", "주님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시험이다.

믿음의 시련을 견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것이 가능한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확실히 알고,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버리지 않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약속되어 있다.

따라서, 시련을 견디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절)고 말한 이유가 바로 시험을 당할 때에 인내하면(3절), 곧 견디어 내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되어(4절)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복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태복음 5장에 나타난 복의 말씀과도 같다.

(마태복음 5:11-12)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When tempted, no one should say, 'God is tempting me.' For God cannot be tempted by evil, nor does he tempt anyone;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여기서는 자신이 시험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권면의 말씀이 나타나 있다. 이 시험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대한 믿음의 시련이 아니라, 또 다른 시험인 미혹을 말한다(14절).

믿음의 시련과 미혹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또한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하나의 시험을 견디어 내면 믿음의 시련이 될 수 있고, 견디어 내지 못하면 미혹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신이 시험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앞 절에서 말하는 "시험을 참는 자"와 달리 시험을 참지 못하는 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내가 하나님께 시험(미혹)을 받는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의 말이며, 또한 잘못된 생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기서는 왜 잘못된 생각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but each one is tempted when, by his own evil desire, he is dragged away and enticed.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3절에서 말했던 시험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믿음의 시련"(3절)이 아니라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시련을 겪고 있다고 생각되면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러한 시험은 자기 욕심이 만든 시험, 곧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시험인 것이다.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시험은 어떤 것이 있을까?

① 끝없는 탐욕

② 남들과의 비교

이러한 미혹은 일차적으로 만족과 감사가 없는 삶을 만든다.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Then, after desire has conceived, it gives birth to sin; and sin, when it is full-grown, gives birth to death.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면 끝없는 탐욕을 갖게 되고, 또한 자신의 소유를 남들과 비교하게 된다. 오로지 소유만을 생각하게 되고, 그 결과로서 죄를 짓게 된다.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죄를 거듭 짓다보면 죄에 둔감해지고,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된다.

앞에서 언급된 시험, 곧 "믿음의 시련"을 이겨내면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된다. 이 시험은 (애초에 통과하기를 바라며 주어지는 것으로서) 생명으로 이끌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시험, 곧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면 그 결과는 "사망"이다. 이 시험은 (애초에 실패하기를 바라며 주어지는 것으로서) 사망으로 이끌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이다.

욕심→죄→사망의 구조와 대조되는 구조도 있다.

2-4절에 나타난 시험인내온전함의 구조이다.

또한 복음을 심고물주고(중생)자라게 하는(성결) 생명의 구조도 있다. 

(고린도전서 3:6)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Don't be deceived, my dear brothers.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이 말은 단락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새로운 단락의 시작을 나타낸다.

속지 말라

야고보 사도는 믿음의 시험과 욕심의 미혹을 혼동하지 말 것, 믿음의 시험의 결과는 생명의 면류관, 욕심의 미혹의 결과는 사망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자신의 욕심에 끌려 미혹되며, 죄를 짓게 되고, 죄의 결국은 사망이다.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것을 시험을 받는다고 속지 말아야 한다. (시험의 내용과 결과)

무엇보다, 자신의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것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속지 말아야 한다. (시험의 출제자)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Every good and perfect gift is from above, coming down from the Father of the heavenly lights, who does not change like shifting shadows.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시는 분이며(13절),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만 주시는 분이시다.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하나님께서는 빛들의 아버지이시다. 빛 앞에서는 모든 것이 보여지듯,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나며 감출 수 없다.

(욥기 26:6)
6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

이는 빛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특성을 따라 빛을 창조하셨음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만을 주시는 하나님을 "빛들의 아버지"라고 칭한 후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은 상징과 이유이면서 동시에 물리적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는 분이시다. 따라서 모든 것의 절대적 기준이며, 진리가 되신다.

하나님께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 하나님을 비출 수 있는 빛, 하나님보다 밝은 빛이 없기 때문에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시다.

하나님이 빛들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의 그림자가 나타날 뿐이다. 곧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두움과 더러움, 곧 죄가 드러나게 된다.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He chose to give us birth through the word of truth, that we might be a kind of firstfruits of all he created.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향한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를 향한 선한 뜻, 곧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피조물 중에 "한 첫 열매(아파르켄 티나)"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구약에서 '첫 열매'는 수확된 첫 곡물로서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성물이다.

(출애굽기 34:22)
22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레위기 23:10)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은 '첫 열매'와 같이 특별히 구별되고 선택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심을 나타낸다.

- 하나님께서 만드신 나라와 백성 가운데 첫 열매는 이스라엘이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소중하게 여기신다. 

(예레미야 2:3)
3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고린도전서 15:20)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다.

(빌립보서 2:9-11)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자기의 뜻을 따라

우리를 향한 "자기의 뜻"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시는 의지를 가리킨다.

(에베소서 1:11)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 "뜻"은 우리를 피조물 중에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이를 위하여 우리를 낳으셨다. 우리를 낳으셨다는 구절은 두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1) 창조: 창조의 과정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또한 '진리의 말씀과 함께' 우리를 낳으신 것이다.

(요한복음 1:1-3)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2) 부르심: 복음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들, 곧 "첫 열매"가 된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옛 성품을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됨을 가리킨다.

(에베소서 1:4-5)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고린도후서 5:17)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My dear brothers, take note of this: Everyone should be quick to listen, slow to speak and slow to become angry,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이 말은 단락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새로운 단락의 시작을 나타낸다.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야고보서는 로마의 각 처로 흩어진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여졌다.

각 처로 흩어진 이들 유대인들이 주의해야 할 것 중에 하나는 공동체(우선적으로는 기독교 공동체이며, 넓게는 유대인 공동체를 의미할 것이다) 내에서의 험담과 다툼이었고, 야고보 사도는 이에 대한 권면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첫 열매가 행해야 할 바로 이해할 수도 있다.

듣기는 속히 하라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듣는 것 자체는 시비의 여지가 없는 행위이며, 듣기에 힘을 쏟는다면 시비의 발생을 방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말하기를 더디하라는 것은 험담에 대한 권면이다. 여기서의 말하기는 타인에 대한 험담을 가리킨다.

성내기도 더디하라는 것은 다툼에 대한 권면이다.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for man's anger does not bring about the righteous life that God desires. 

성내기를 더디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성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며 살도록 가르치셨다. 

(요한복음 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의 모습은 성내지 않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5)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성내는 것, 곧 분을 내는 것은 다툼을 일으킨다. 성내는 데에는 반드시 상대가 있기 때문에 상대와의 다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잠언 15:18)
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그리고, 성내는 사람은 범죄하게 된다.

(잠언 29:22)
22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성내는 사람이 범죄하게 되는 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4:26-27)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성내는 것, 곧 분을 내는 것으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고, 이 결과가 범죄로 나타남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극명하게 보여진 바와 같다.

(창세기 4:5-6)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성냄으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고, 성냄으로 인해 마귀에게 틈을 주어 범죄하게 되므로 성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Therefore, get rid of all moral filth and the evil that is so prevalent and humbly accept the word planted in you, which can save you.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내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더러운 생각과 행위들, 그리고 악을 내버려야 한다. 그리고, 마음에 심어진 말씀, 곧 이미 듣고 배워서 알고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에 들어와 심어지며, 이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묵상하고 받아들일 때 믿음이 자라고 이 믿음이 영혼의 구원을 열매맺게 한다.

(로마서 10:17)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Do not merely listen to the word, and so deceive yourselves. Do what it says.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입으로 전함 → 귀에 들려짐 → 마음에 심어짐 →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온유함으로 받음 → 행함의 과정이 발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 행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진리로 인정하는 사람이며, 진리이신, 곧 유일한 구원의 길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마태복음 7:21)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행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저버린 사람이고 그 말씀을 진리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고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행위이다.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Anyone who listens to the word but does not do what it says is like a man who looks at his face in a mirror 

야고보 사도는 이해하기 쉬운 직접적인 비유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는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을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보는 사람에 비유하였다.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말씀을 듣는 동안 말씀을 알고 있으므로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마치 거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보는 동안 '나는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and, after looking at himself, goes away and immediately forgets what he looks like. 

그러나, 말씀을 듣고난 후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말씀을 저버린 사람이고, 말씀을 진리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며,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는 마치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다가 거울을 떠난 후 자기 얼굴을 곧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다. 그리스도인인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But the man who looks intently into the perfect law that gives freedom, and continues to do this, not forgetting what he has heard, but doing it-he will be blessed in what he does. 

자유롭게 하는 율법은 자유를 주기 위한 율법이다. 이 또한 율법이므로 반드시 행할 것을 요구하지만, 율법 조문을 범하는 자를 죄인으로 정죄하기 위한 율법이 아니고,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는 율법이다. 그리고, 이 율법을 지키는 자를 구원하는 율법이다.
자유롭게 하는 이 율법이 온전한 율법인 까닭은 예수님께서 이를 완전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17)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이 율법은 예수님의 말씀, 곧 가르침이며,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신 바를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난 후, 들여다보고 실천하는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 곧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아는 사람이다.
여기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21절에 나타난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은 행하는 일에 복을 받는다. 이런 사람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아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쳐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아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면 크게 무너지고 만다.
(마태복음 7:24-27)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받게 된다.
(마태복음 7:21)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If anyone considers himself religious and yet does not keep a tight rein on his tongue, he deceives himself and his religion is worthless. 

19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성내기를 더디하는 것과 더불어 지켜야 할 것은 말하기를 더디하는 것이다.

말하기를 더디하는 것을 26절에서는 혀를 재갈 물리는 것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사람, 곧 경건한 사람은 성내지 않아야 한다.

또한 경건한 사람은 말하기를 더디해야 한다. 곧 자기 혀를 재갈 물려야 한다.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않으면, 허물을 만들게 되고 환난에 처하게 된다.

(잠언 10:19)
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21:23)
23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말하기를 더디하지 않는 사람들, 곧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않는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이를 잘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들이 자신을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행위이며, 그 경건은 헛된 것이다.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Religion that God our Father accepts as pure and faultless is this: to look after orphans and widows in their distress and to keep oneself from being polluted by the world.

야고보 사도는 경건에 대해 좀 더 말씀한다.

야고보 사도는 경건을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 것(21절)'으로 희미하게 정의한 바 있으며, 이제 여기서는 명확하게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모습'으로 정의한다.

경건의 기본은 고아와 과부를 그들의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다. 고아는 돌봐줄 부모가 없는 아이이고, 과부는 돌봐줄 남편이 없는 아녀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회복지의 개념이 없던 당시의 고아와 과부는 삶이 가장 어렵고,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돌본다는 것은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 행위, 곧 거저 주는 행위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들에게 행한 것을 곧 예수님 자신에게 한 행동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5:40)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고아와 과부는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자비에 관해 말씀하셨고, 이 말씀은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 6:30-36)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은 타인을 대상으로 한 경건이다.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한 경건은 험담과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말하기를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해야 한다.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게 하며(20절), 혀를 재갈 물릴 때 자기 자신을 허물로부터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 대하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을 따라 행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말하기를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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