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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야고보서

야고보서 4장

아리마대 사람 2017. 1. 25. 21:34

야고보서의 특징은 무척 실제적이면서 논리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야고보서를 체계화시켜 정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이러한 특징이 나타나며, 마치 잠언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야고보서는 야고보를 통한 지혜의 말씀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 야고보서 4장 ************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What causes fights and quarrels among you? Don't they come from your desires that battle within you?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3장에서 언급했던 싸움과 다툼 (독한 시기와 다툼) 의 '원인'에 대해서 말하고자 함을 나타낸다.

여기서 싸움과 다툼이 일어나는 "너희 중"은 '너희'가 가리키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구성원인 성도들을 가리킨다.

(개인이 묵상을 하는 경우에는 '사람의 속'으로 이해하고 사람의 내면, 곧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영적 싸움과 다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싸움과 다툼이라는 말을 이해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싸움"은 본래 전쟁이나 전투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성도들 간에 발생하는 알력이나 불화를 가리킨다.

"다툼"은 논쟁이나 말다툼을 가리킨다.

야고보가 이를 지적해서 말해야 할 만큼 당시의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에서 이와 같은 "싸움과 다툼"이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 지체"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구성원인 성도들 간에 벌어지는 "싸움과 다툼"은 외부적 요인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내면에 있는 "정욕"에서 기인한 것이다.

"정욕"은 '기뻐하다'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말로서 본래 문자적으로는 '기쁨'이란 뜻이지만, 주로 '죄된 정욕'이나 '쾌락' 등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는 총 5번 사용되었다.

(누가복음 8:14)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디도서 3:3)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야고보서 4:3)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베드로후서 2:13)
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이 구절을 3:14-16의 내용과 연결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정욕 → 싸움과 다툼 (독한 시기와 다툼) → 땅의 것, 정욕의 것, 귀신의 것인 자랑과 거짓말 → 혼란과 모든 악한 일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You want something but don't get it. You kill and covet, but you cannot have what you want. You quarrel and fight. You do not have, because you do not ask God.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사람의 마음 속은 정욕을 따르는 욕심으로 가득차 있지만 욕심을 모두 이루고 살 수는 없다.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마음 속에 욕심내는 바를 얻기 위한 인간의 노력의 행위가 종국에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살인과 시기이다.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할 때, 인간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욕심을 따라 끊임없이 애쓰게 되며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게 된다.

이를 실제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인류 최초의 살인이자 친족살해인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다.

(창세기 4:4-8)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당시 공동체 내에서 실제적으로 살인이 일어났다고 볼 수는 없으나, 마태복음 5:21-22 말씀을 통해 "살인과 시기"를 이해할 수 있다.

(마태복음 5:21-22)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또한 요한1서의 말씀을 통해 보다 명확하게 "살인"을 이해할 수 있다.

(요한1서 3:15)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즉, 형제에게 노하는 것, 욕하는 것,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인 것이다. 이런 마음, 이런 행위가 살인의 씨앗이 되며, 발전해서 살인이 되기 때문이다. 

"시기"에 해당하는 '젤루테'의 원형인 '젤로오'는 매우 집요하고 열성적으로 미워하는 감정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마태복음 5:21-22 말씀으로부터 살인과 시기를 유사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으며, '싸움과 다툼' 또는 '저주와 다툼'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으로부터 당시에 이러한 일들이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투고 싸우는도다

욕심을 따라 끊임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들이 모여 있으면 다툼과 싸움을 피할 수 없다.

야고보가 여기서 욕심, 살인, 시기, 다툼, 싸움 등의 표현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당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구성원들(수신자들)이 자신의 정욕을 따라  더러운 욕망을 얼마나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추구하였는지를 낱낱이 보여주는 것이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한다"는 표현은 기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 주신다.

(야고보서 1:5)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마태복음 7:7)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기본적으로, 원칙적으로, 이론적으로, 얻지 못하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할 때에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구해야 한다.

(야고보서 1:6-8)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When you ask, you do not receive, because you ask with wrong motives, that you may spend what you get on your pleasures.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만일 구했는데도 불구하고 받지 못했다면, 이는 그들이 "잘못" 구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정욕을 위한 악한 동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정욕이 죄악과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생각할 때, 정욕이라는 악한 동기에서 비롯된 기도는 죄악을 품은 것이며,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 

(시편 66:18)
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여기서 "정욕"은 '기뻐하다'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본래 문자적으로는 '기쁨'이란 뜻이지만, 주로 '죄된 정욕'이나 '쾌락' 등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는 총 5번 사용되었다.

(누가복음 8:14)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디도서 3:3)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야고보서 4:1)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베드로후서 2:13)
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You adulterous people, don't you know that friendship with the world is hatred toward God? Anyone who chooses to be a friend of the world becomes an enemy of God.    

간음한 여인들아

"간음한 여인"은 본래 남편에 대한 정조를 지키지 않고 다른 남자와 부정한 행위를 하는 여자를 가리킨다.

여기서 "간음"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정조를 지키지 않고 세상과 부정한 행위를 함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이다.

(예레미야 3:20)
20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 남편을 속이고 떠남 같이 너희가 정녕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언약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로 비유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간음', '음란', '행음'에 비유한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여인"은 때로는 교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

(요한2서 1:1)
1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요한2서 1:5)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앞에서 언급한 "간음"의 의미가 바로 "세상과 벗된 것"이다.

세상과 벗이 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세상의 것들은 정욕을 따른 것들이며, 마귀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3:15)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또한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6:24)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세상과 벗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것들과 친해지고 그 영향 아래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세상의 것들은 정욕을 따른 것들이며, 마귀에게 속한 것들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Or do you think Scripture says without reason that the spirit he caused to live in us envies intensely?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여기서 "하신 말씀"에 해당하는 '헤 그레페 레게이'는  '성경이 말한다'라는 의미이며 이는 성경말씀은 직접 또는 간적적으로 인용하는 경우에 모두 사용되는 표현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라는 말씀은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

구약성경에서 "시기"라는 말은 거의 사람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하나님께 대하여는 '질투'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출애굽기 20:5)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애굽기 34:14)
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신명기 4:24)
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신명기 5:9)
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신명기 6:15)
15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는 구절의 해석은 쉽지 않다.

만일, 이 구절을 '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영을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라고 이해하면 해석이 쉽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생기를 거하게 하셨다.

(창세기 2:7)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

(출애굽기 34:14)
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이와 같이 해석하는 경우, 이어지는 6절의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는 '질투하실만큼 사랑하시지만, 그뿐만 아니라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라고 이해할 수 있다.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는 말씀은 헛되이 기록된 것이 아니며, 참된 의미를 지닌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But he gives us more grace. That is why Scripture says: 'God opposes the proud but gives grace to the humble.'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교만한 자"라는 말인 '휘페레파노이스'는 '~위에서'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휘페르'와 '나타내다, 비추다'라는 뜻을 가진 '파이노'의 합성어로서 '남의 위에 서서 자신을 나타내는 사람'을 의미한다.

"교만"은 정욕의 발현이며, 교만한 자는 자신의 교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인 꾀(3:15)를 쓴다. 교만이 충족되지 않을 때 싸움과 다툼이 일어나고, 마침내 시기와 살인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물리치신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기 때문에, 교만한 자는 패망할 수밖에 없다.

(잠언 16:18)

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겸손한 자"라는 말인 '타페이노이스'는 '타페이노스'가 원형이며 이는 본래 지면에서 높이 솟아오르지 않은'의 의미로서 이로부터 '낮은, 겸손한'을 의미하고 있다.

겸손한 자는 온유함으로써 행하며(3:13) 화평을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3:18).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며, 교만한 자와 달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심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5:9)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러한 자들은 이미 위로부터 난 지혜(3:17)를 받은 것이며, 하나님께 존귀와 영예의 은혜를 받는다.

(잠언 18:12)

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잠언 29:23)

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즉,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높여주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23:12)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Submit yourselves, then, to God. Resist the devil, and he will flee from you.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복종하다"라는 말인 '휘포탓소'는 '~아래'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휘포'와 '놓다, 두다'라는 뜻을 가진 '탓소'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말은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아래에 굴복시키는 적극적 순종을 의미하며, 이것은 겸손한 사람(6절)의 행위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인간은 당연한 일을 행할 수 없게 된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위에서 보았듯이 "세상과 벗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세상과 벗이 되는 것 = 정욕을 따라 사는 것 = 마귀에게 속하여 사는 것 하나님께 속하여 그분께 복종하며 사는 것

따라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곧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 된다.

에덴동산에서 마귀를 대적하지 않았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었다.

그러나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셨을 때 마귀는 떠나갔다.

(마태복음 4:11)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귀를 대적할 때, 마귀가 성도들을 피하게 되며, 싸움과 다툼을 없앨 수 있다.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Come near to God and he will come near to you. Wash your hands, you sinners, and purify your hearts, you double-minded.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마귀에 대해서는 대적해야 하며, 그러면 마귀가 피할 것이다(7절).

하나님께 대하여는 겸손한 태도로 복종해야 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하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를 가까이하실 것이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고 선포한 후, 긴급하게 "죄인들"에게 구체적으로 말한다.

"죄인들"은 정욕에 사로잡힌 자, 세상과 벗이 된 자들을 가리킨다.

"손을 깨끗이 하라"는 말은 구약 제사의 개념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손을 씻는 행위는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죽지 않기 위해 반드시 행했던 중요한 의식이었다.

(출애굽기 30:17-21)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19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20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
21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죄인들이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한다. 곧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일이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회개를 외친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마태복음 3:1-2)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마태복음 4:17)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또한 긴급하게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말한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들이며, 앞(1:8)에서 언급된 자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믿음으로 구한다고 하면서 의심하는 자들이고,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하지만 실은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자들이며,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지만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않는 자들이고, 말씀을 따라 행하지는 않고 듣기만 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자들이고, 하나님을 가까이한다면서 세상과 벗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세상과 벗된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4절).

"성결하게 하라"는 말인 '하그니사테'의 원형인 '하그니조'는 '순결하게 하다'라는 의미로서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행했던 제반 정결 의례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을 향한 말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는 이방신들을 버리고, 이방 신을 섬기는 민족과 통혼하는 등 가까이 하는 등의 행위를 버려야 한다는 구약의 개념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 35:2)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말라기 2:11)

11 유다는 거짓을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Grieve, mourn and wail. Change your laughter to mourning and your joy to gloom.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야고보는 손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성결하게 함과 더불어 "슬퍼하며 애통하며 우는" 철저한 회개를 말하고 있다.

"슬퍼하며"란 말은 '탈라이포레사테'로서 신약 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단어이며 '비탄을 경험하다', '탄식하다', '한탄하다'라는 의미이다. 죄인이자 두 마음을 품은 자신의 실체를 똑바로 보고 가슴을 치며 한탄하는 내적인 마음가짐을 말한다.
"애통하며"란 말은 '펜데사테'로서 이의 원형인 '펜데오'는 죽은 사람을 위하여 애곡할 때처럼 대성 통곡하는 것을 가리킨다. 마음 속의 슬픔이 너무 커서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울지어다"란 말은 '클라우사테'로서 이의 원형인 '클라어오'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비통한 마옴이 눈물로써 표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회개는 슬퍼함으로 시작하여 애통함을 거쳐 울음으로 진행되며, 이는 내적 회개의 외적 표출로 이해할 수 있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 채로 세상과 벗이 되어(4절) 웃고 즐거워하며 살던 모습을 애통함과 근심으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비하는 태도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옷을 찢는 행위였다.

철저한 회개가 이와 같은 행위를 통해 나타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말을 들으신다. 

(열왕기하 22:19)

19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또한 요나에 나타나 있듯이 악독한 민족이라도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예정된 재앙도 돌이키신다. 

(요나 3:5-10)
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6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7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Humble yourselves before the Lord, and he will lift you up.    

주 앞에서 낮추라

세상과 벗이 되어 누리던 웃음과 즐거움을 하나님 앞에서 애통과 근심으로 바꾸고, 슬퍼하며 애통하며 우는 태도가 자신을 낮추는 태도이며, 이것이 '겸비함'이다.

자신를 낮출 때에 하나님께서 높아지신다.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 때 하나님께서 높이신다. 이것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던(다니엘 5:20)" 느부갓네살 왕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된(다니엘 5:21)" 후에 위엄과 광명을 되찾은 것(다니엘 4:36)과 같이 나타날 수도 있다.

(다니엘 4:25)
25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예수님께서는 애통과 근심하는 자가 높임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마태복음 5:4)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Brothers, do not slander one another. Anyone who speaks against his brother or judges him speaks against the law and judges it. When you judge the law, you are not keeping it, but sitting in judgment on it.    

형제들아

이 말은 단락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새로운 단락의 시작을 나타낸다.

서로 비방하지 말라

"비방하지"로 번역된 '카탈랄레이테'의 원형 '카탈랄레오'는 '~에 대항하여'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카타'와 '말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랄레오'의 합성어로서 '~을 대적하여 말한다'라는 의미이며 이로부터 '폄하하여 말하다', '험담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비방은 마음에 가득한 악의와 증오 및 교만을 말로써 표출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비방에 관한 가르침을 말하고 있으며, 이는 정욕으로부터 발생하는 싸움과 다툼(1절)에 이어지는 것이다. 싸움과 다툼이 이루어지는 동안, 또는 싸움과 다툼 이후에는 비방이 따르게 된다.

이 구절이 "서로 비방하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시작하는 것은 당시의 초대교회에서는 싸움과 다툼과 더불어 비방이 심각했기에 이를 가장 먼저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형제'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형제들'로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맺어진 믿음의 형제들을 가리킨다.

비방은 '옳지 않다, 그르다, 잘못되었다'라는 판단의 결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항상 판단과 함께 이루어진다.

본래 '판단'이라는 말은 사물을 인식하여 논리나 기준 등에 따라 판정을 내린다는 의미이지만, 여기서 사용된 '판단하다'라는 말은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는 헬라어 '크리노'로서 비판, 정죄의 의미이다. 이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기준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주관적, 감정적인 것이다. 이 말은 마태복음 7:1에서는 비판으로 번역되어 있다.

(마태복음 7:1)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다음 구절에는 '재판관'이라는 용어가 나오며, 이는 헬라어로 '크리테스'이다. 즉, '너는 크리테스가 아니므로 크리노하지 말라'는 말이 된다.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며, 또한 이웃을 비방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레위기 19:16-18)
16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사람들 간에 대해 주신 율법의 전부라고 말씀해 주셨다.

(마태복음 22:37-40)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것, 남을 멸시하며 손가락질하고 판단(비판, 정죄)하는 것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최고의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며, 율법에 반하여 자신의 뜻과 감정을 따라 마음대로 행하는 것이다. 율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율법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는 행위이며, 이는 율법의 옳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 곧 비방하는 행위요, 이는 율법을 비판한 결과이다.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것이며 이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진리이며, 지혜이다. 

(시편 19:7-8)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편 119:142)
142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것, 남을 멸시하며 손가락질하고 판단(비판, 정죄)하는 것은 "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최고의 법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율법을 따르고 지키는 준행자'가 아니라 '율법을 비판하고 판단하여 임의로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재판자'의 자리에 앉았다는 의미가 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There is only one Lawgiver and Judge, the one who is able to save and destroy. But you-who are you to judge your neighbor?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입법자"는 법률을 제정하는 분을 의미하며, "재판관"은 법에 따라 옳고 그름에 대한 공권적 판단을 내리는 직책을 맡은 이를 가리킨다. 사람이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율법을 주신 분은 하나님뿐이시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뿐인 이유는 하나님만이 공의로우시며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11:20)
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사람이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율법을 주신 입법자는 하나님이시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실 수 있는 재판관도 하나님이시며, 그리고, 또한 그래서, 최종적으로 심판하실 분도 하나님이시다.

(요한계시록 20:11-12)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하나님만이 능히 구원하실 수도 있고, 능히 멸하실 수도 있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입법자이자 또한 재판관이신 하나님은 능히 구원하시기도, 능히 멸하시기도 하는 대상인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이시다.

그런데, 판단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는 피조물인 인간이 입법자이자 재판관이신 창조주께서 행하시는 일, 창조주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태도이며, 여전히 선악과에 욕심을 부리는 죄악의 행위인 것이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라는 질문을 받는 나는 분명하게 대답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써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Now listen, you who say, 'Today or tomorrow we will go to this or that city, spend a year there, carry on business and make money.'    

들으라

이제 야고보는 입밥자와 재판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판단하는 사람들과 같이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줄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어리석고 교만한 사람들에게 말씀한다.

야고보서에는 "들으라"는 말이 4장 13절과 5장 1절에, 2번 나온다.

4장 13절은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을 포함한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고, 5장 1절은 "장차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해야 하는 부한 자들"을 향한 말씀이다.

야고보는 이미 자신의 말과 가르침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저 "형제들아"라고 말을 할 뿐이지만, 이 2번의 경우에는 "들으라"라고 강조해서 말한다. 이는 교훈을 전하는 가운데 특별히 더욱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순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마는 재물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이 짧은 인생 이후에 겪게 될 일을 알고 생각할 때, 큰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복음 12:19-20)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야고보서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곧 예루살렘 교회에서 함께 믿음생활을 하다가 로마의 각 처로 흩어진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여졌다. 흩어진 유대인들은 믿음의 시련 (야고보서 1:3) 을 당하기도 했지만, 각자의 처한 환경에 동화되거나 믿음이 약해지는 문제도 있었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다보니 사업 기회를 갖게 되는 경우도 많았으며, 돈과 관련하여 욕심을 갖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어리석고 교만한 사람들 중에 돈에 대한 욕심이 가득하여 사업 기회를 찾고 있는 사람들은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고 생각한다.

여기서 "(어떤 도시에) 가서",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는 동사의 시제는 모두 헬라어의 직설법 미래 동사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나타낸다. 즉 그들은 장래의 장사 계획에 대하여 확신을 갖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속에 가득한 어리석음은 몇가지 질문만으로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과연 오늘이나 내일의 일을 예상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일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과연 일 년을 머물 수 있는가?', '어떻게 일 년 뒤의 일을, 일 년 후에도 살아있을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과연 장사하여 이익을 볼 수 있는가?', '어떻게 이익을 볼 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Why, you do not even know what will happen tomorrow. What is your life? You are a mist that appears for a little while and then vanishes.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사람들은 늘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한 치 앞을 알지 못한다.

뉴스에서 접하게 되는 사건 사고의 소식들을 들을 때, 사람은 자신에게 곧 닥칠 일을 알 수 없는 존재임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13-14절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비유와도 매우 흡사하다.

(누가복음 12:16-20)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야고보의 말씀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씀이지만, 특별히 '오늘이나 내일이나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 1장에서 '부한 자'를 대상으로 한 말씀과 같은 의미의 말씀이다.

(야고보서 1:10-11)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까지 욕심내는 존재이지만,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면 풀이 말르고 꽃이 떨어지듯 것과 같이 쇠잔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시편 기자도 이를 말한 바 있다.

(시편 103:15)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또한 시편 기자는 마치 트로트 가사처럼 사람이 입김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다.

(시편 62:9)
9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율법의 입법자요 재판관이시며, 사람을 구원하기도 하시고 멸하기도 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자가 되어 살아가고, 제 뜻대로 장래 일을 계획하고 살아가는 어리석고 교만한 인간들을 보면서 야고보는 그들의 생명이  안개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헤롯의 죽음은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도행전 12:21-23)
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야고보는 사람은 유한한 존재이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생이 유한하다는 점을 늘 마음 속에 두고 있는 듯 하다. 이는 베드로의 생각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베드로전서 1:24)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Instead, you ought to say, "If it is the Lord's will, we will live and do this or that."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 구절은 야고보의 조건문이라고 한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했던  "만일 신의 뜻이라면..."이라는 말과 같은 구조이며,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투스의 말과도 같은 구조이기도 하다. 철학자들이 많이 한 말이고, 장사꾼들이 많이 사용한 일종의 유행어였다고 한다. 장사꾼들은 자신들이 믿는 그들의 신을 가리켜 '주'라고 말했었다.

여기서 "도리어"는 '~에 대항하여', '~에 반대하여'라는 의미이며 어리석고 교만한 인간들의 삶의 태도와 다르게 살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창조주이시며 입법자요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식하고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며 "주의 뜻이면"이라고 말하는 삶의 모습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내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따르는 것이다. 삶의 주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사명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임을 늘 강조하며, 고난 속에서 감당했던 사역을 통해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었다.

(고린도전서 1:1)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후서 1:1)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에베소서 1:1)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골로새서 1:1)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디모데후서 1:1)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As it is, you boast and brag. All such boasting is evil.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13절)"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자신들의 계획과 삶 가운데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다. 계획과 성취, 무엇보다도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다.

하나님 없이 이익을 볼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 없이 이 땅의 것에 욕심내며, 하나님 없이 살아갈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 자체가 허탄한 자랑에 불과하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여기서 "악한"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포네라'는 '사악한', '마귀적인'이라는 의미이다.

3장에서는 독한 시기와 다툼에서 비롯된 자랑과 거짓말이 언급된 바 있다. 이러한 자랑이 허탄한 자랑이며, 이러한 것들은 땅 위의 것이고, 정욕의 것이며, 귀신의 것이라고 설명되었다.

(야고보서 3:14-15)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Anyone, then, who knows the good he ought to do and doesn't do it, sins.   

그러므로

"그러므로"는 이 구절이 결론에 해당함을 알려준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앞에서 언급된 내용들을 바탕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입법자와 재판관이 되시며,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믿음으로써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것이며, 내 뜻이 아니라 생명의 창조자요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류일 뿐만 아니라 죄가 된다.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을 따르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목회자들로 인해 교회가 손가락질을 받고, 기독교가 비난을 받고, 예수님이, 하나님이 영광을 받지 못하게 되는 세상의 소식을 접할 때 이 말씀이 더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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