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을 볼 때면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4차원이네...'
4차원은 3차원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시공간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4차원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언급되는 까닭은 아인슈타인의 개념 덕분일까요, 아니면 3차원 세상에 묶여사는 우리의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수학에서는 다차원을 다루기가 참 쉽습니다. 고등학교 수학책에 나오는 '벡터'를 배울 때 만났던 개념인데, 벡터의 차원은 그저 요소의 갯수로 정의됩니다. 물리적으로 이해를 할 수는 없어도, 이를 수학적으로 다루는 데는 어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조금이나마 이를 이해하려고 해보지만, 그저 1차원이나 2차원의 모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실은 우리는 3차원의 현상도 충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일 2차원의 공이 1차원의 세상을 지나간다면...2차원의 공이 1차원의 세상에 처음 닿는 순간 1차원의 세상에서는 점으로 나타나며, 2차원의 공이 1차원의 세상을 통과하는 동안에는 그 길이가 점차 길어지는 선분으로 나타나다가, 2차원의 공이 최대지름을 통과한 이후에는 점차 그 길이가 짧아지는 선분으로 나타나다가, 2차원의 공이 1차원의 세상을 완전히 통과하는 순간에는 점이 되었다가 없어지게 됩니다.
만일 3차원의 공이 2차원의 세상을 지나간다면...3차원의 공이 2차원의 세상에 처음 닿는 순간 2차원의 세상에서는 점으로 나타나며, 3차원의 공이 2차원의 세상을 통과하는 동안에는 그 반지름이 점차 커지는 원으로 나타나다가, 3차원의 공이 최대지름을 통과한 이후에는 점차 그 반지름이 짧아지는 원으로 나타나다가, 3차원의 공이 2차원의 세상을 완전히 통과하는 순간에는 점이 되었다가 없어지게 됩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4차원의 공이 3차원의 세상을 지나가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일 4차원의 공이 3차원의 세상을 지나간다면...4차원의 공이 3차원의 세상에 처음 닿는 순간 3차원의 세상에서는 점으로 나타나며, 4차원의 공이 3차원의 세상을 통과하는 동안에는 그 반지름이 점차 커지는 구로서 나타나다가, 4차원의 공이 최대지름을 통과한 이후에는 점차 그 반지름이 짧아지는 구로서 나타나다가, 4차원의 공이 3차원의 세상을 완전히 통과하는 순간에는 점이 되었다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이상을 차원에 대해서도 이렇게 단순한 방식을 끌어다가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3차원 이상의 세상을 알 수 없으니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단순한 기하학적 공간 개념만으로 구성되는 다차원을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1차원 세상의 존재로서 지렁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차원 지렁이는 바로 눈앞의 1차원 세상만 바라볼 수 있는 1차원의 시야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이 지렁이가 1차원의 세상을 기어다니다가 2차원의 세상에서 온 바퀴벌레를 보았습니다. 2차원의 세상을 기어다니는 바퀴벌레는 여기저기 사방팔방으로 방향을 바꿔 기어다닙니다. 지렁이의 1차원 시야에는 바퀴벌레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나타나는 신비의 존재로 보입니다. 지렁이는 자신이 바퀴벌레를 보는 그 짧은 순간 동안에만 바퀴벌레의 존재를 인식할 뿐이며,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는 동안의 바퀴벌레의 존재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1차원의 지렁이는 2차원의 바퀴벌레의 존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어디 있는거지?...'
2차원 세상의 존재로서 바퀴벌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2차원 바퀴벌레는 주변의 2차원 세상만 둘러볼 수 있는 2차원의 시야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이 바퀴벌레가 2차원의 세상을 기어다니다가 3차원의 세상에서 온 메뚜기를 보았습니다. 3차원의 세상을 뛰어다니는 메뚜기는 폴짝폴짝 이곳저곳을 뛰어다닙니다. 바퀴벌레의 2차원 시야에는 메뚜기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나타나는 신비의 존재로 보입니다. 바퀴벌레는 자신이 메뚜기를 보는 그 짧은 순간 동안에만 메뚜기의 존재를 인식할 뿐이며,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는 동안의 메뚜기의 존재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2차원의 바퀴벌레는 3차원의 메뚜기의 존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어디 있는거지?...'
1차원의 세상을 부지런히 기어가고 있는 지렁이의 저 멀리에 지렁이를 잡아먹으려는 두더쥐 한 마리가 돌 뒤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면, 지렁이는 두더쥐 앞에 도달할 때까지 이 사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렁이와 두더쥐가 존재하고 있는 1차원의 세상과 좀 떨어진 곳을 기어다니는 바퀴벌레는 고개짓 한번으로 지렁이와 두더쥐를 모두 볼 수 있으며, 잠시 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바퀴벌레는 지렁이에게 그 존재가 이해되지 않지만, 지렁이에게 일어날 일을 예상할 수 있는 대단한 존재입니다. 좌표계로 말하자면 Y축 상에 위치하면 X축을 다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2차원의 세상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는 바퀴벌레의 저 멀리에 바퀴벌레를 잡아먹으려는 농발거미 한 마리가 담벼락 뒤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면, 바퀴벌레는 농발거미 앞에 도달할 때까지 이 사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퀴벌레와 농발거미가 존재하고 있는 2차원의 세상과 좀 떨어진 곳을 뛰어다니는 메뚜기는 고개짓 한번으로 바퀴벌레와 농발거미를 모두 볼 수 있으며, 잠시 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메뚜기는 바퀴벌레에게 그 존재가 이해되지 않지만, 바퀴벌레에게 일어날 일을 예상할 수 있는 대단한 존재입니다. 좌표계로 말하자면 Z축 상에 위치하면 XY평면을 다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한 차원 위의 세상은, 벡터로 보자면 벡터 요소의 갯수가 그저 하나 더 늘어난 것에 불과하지만, 한 차원 아래의 세상을 굽어볼 수 있는 수준높은 세상입니다. 굽어볼 수 있다는 말은 단번에 많은 것을 꿰뚫어 볼 수 있고, 많은 것을 꿰뚫어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일!!! 지렁이가 메뚜기를 만났다면 어떨까요? 1차원에서 살아가는 지렁이가 3차원을 살아가는 메뚜기를 만날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지렁이의 시야를 이루는 직선 상에 메뚜기가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평면을 둘러 볼 수 있는 바퀴벌레가 매뚜기를 만날 확률보다 훨씬 낮습니다. 모든 것이 일직선 상에만 존재하는 1차원의 세상에 사는 지렁이의 입장에서는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며 공중에 떠 있기까지 하는 메뚜기란 존재의 개념은 어떤 식으로든 상상조차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1차원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점과 선만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고 넓이라는 개념조차 없습니다. 2차원의 세상에서는 넓이가 있어도 높이가 없으니 부피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만일 메뚜기가 지렁이를 따라서 1차원의 세상에 맞추어 뛰어다닌다면, 1차원의 세상에 비친 메뚜기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저 그림자의 형태로만 나타날 뿐이고, 그 그림자조차도 길이가 늘었다가 줄어들었다 하면서 움직이는 선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렁이가 보는 메뚜기는 이런 모습일 뿐입니다. 지렁이가 이걸 보며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뛰어다닌다'는 개념을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고차원의 세상에 사는 존재는 저차원의 존재가 살아가는 세상을 이해하기가 참 쉽습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단번에 많은 것을 꿰뚫어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두 세상의 차원의 차이가 커진다면, 고차원의 세상에서는 저차원의 세상의 모든 것을 단번에 알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저차원의 세상에 사는 존재는 고차원의 존재를 아는 것, 고차원의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지렁이가 메뚜기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저차원의 존재가 고차원을 알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그래서, 믿음입니다.
지렁이가 공중을 뛰어다니는 메뚜기를 만나기란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당장 눈앞에 볼 수는 없지만 메뚜기가 지금 뛰어 다니고 있음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메뚜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지렁이가 믿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설혹 지렁이가 메뚜기를 보더라도 그것은 1차원에 비친 메뚜기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지렁이는 그 그림자가 메뚜기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지만, 진짜 메뚜기에 관한 것은 다 알지 못합니다.
만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 더 고차원의 세상이 있다면, 지렁이가 메뚜기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것들은 고차원의 세상에 있는 것들의 그림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 그림자는 고차원 세상의 것이 저차원의 세상에 맞추어진 형태로 비치는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원리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것들이 하늘에 있는 것들의 그림자에 불과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8:5)
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9:24)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히브리서 10:1)
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눈 앞에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는 지렁이라면 메뚜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것이며 메뚜기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분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도 없다, 예수님도 없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이사야 55:8-9)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고차원의 하나님께서는 저차원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는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차원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차원에 맞추어진 하나님의 그림자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비친 하나님의 그림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가운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0)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세상에 비친 하나님의 그림자를 보고 어떤 이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하나님을 부정하기도 합니다.
봄이 되면 죽은 것만 같던 나뭇가지에서 새싹이 움트고 잎이 나고 꽃이 피는 것을 보면서,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자연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아름답게 변해가는 것을 보며, 여름의 햇살과 겨울의 눈송이가 우리의 피부와 어우러지는 것을 보며, 채운듯 비운듯 투명한 물을 보며, 눈에 안보이지만 코를 통해 가슴을 채우는 공기를 느끼며, 눈을 들어 우리가 사는 이 큰 땅이 바다와 뭍으로 나뉜 것을 보며, 이 큰 땅이 텅빈 공간에 자리잡고 규칙에 따라 돌고 있음을 알며, 텅빈 공간은 끝이 없고 계속 팽창 중이라는 것을 알며, 이 모든 것이 아름답게 계획되었음을 깨닫고 설계자 하나님을 발견하고 믿는 이도 있고, 모든 것은 그저 우연히 생겨나서 저절로 조화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도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여러가지 우상을 숭배하던 갈대아 지역에서 살면서 우상의 부질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참된 신을 찾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만물 가운데에 비친 하나님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 그것이 믿음이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림자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졌기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그림자를 통해서 발견하고 믿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 것입니다.
무지하고 저차원의 우리들이지만, 우리도 고차원의 존재가 될 것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8)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될 것임을 변화산에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며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습니다.
(마태복음 17:2-3)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광대하신 분, 전능하신 분으로 표현합니다만, 차원 낮은 우리가 무슨 말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그저 다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그림자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11:6)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차원 낮은 우리가 '믿음'으로 고차원의 하나님을 인정할 때, 우리의 차원이 너무 낮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특하게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차원 낮은 우리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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