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斷腸)의 미아리 고개'라는 워낙에 유명한 노래가 있다. 여기서 '단장'이란 글자 그대로는 '창자가 끊어진다'는 뜻이며,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큰 슬픔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은 중국의 '세설신어(世設新語)'라는 책에 기록된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진(晉)나라 환온(桓溫)이 촉(蜀)으로 가다가 장강 중류의 삼협(三峽)을 지나게 되었다. 한 병사가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 왔는데, 그 원숭이 어미가 강안(江岸)에서 울며 백여 리를 뒤따라와 배 위에 뛰어오르자마자 혼절하고 말았다. 원숭이의 배를 가르고 보니, 창자가 모두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환온은 크게 노하여 그 병사를 내쫓아 버렸다.(桓公入蜀, 至三峽中, 部伍中有得猨子者. 其母緣岸哀號, 行百餘里不去, 遂跳上船, 至便絶. 破視其腹中, 腸皆寸寸斷. 公聞之怒, 命黜其人.)」
이 이야기에 나오는 '원숭이의 창자가 모두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는 구절에서 '단장'이라는 말이 유래한 것이다.
요즘 극동방송에서 자주 방송되는 찬양 중에 '요게벳의 노래'라는 찬양이 있다.
모세의 엄마 요게벳이 갓난 아기인 모세와 생이별을 할 수 밖에 없는 심경을 노래한 찬양인데, 이 찬양의 가사에는 '사람'에 관심을 기울이고 초점을 맞추는 최근의 사조가 나타나 있다. 과거에는 역사나 사건 등을 바라볼 때, 서사나 위인 위주로 보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는데, 최근에는 그 가운데에서 살아간 개인의 삶의 상황과 생각에 초점을 맞추고 부각시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전과는 다른 새롭고 신선한 관점이지만, 일견 인본주의적 방향으로 빗나갈 수도 있어서 주의가 필요하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시는 역사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간 인물들의 삶과 생각을 들여다보는 관점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 찬양의 가사도 그러한 관점에서 쓰여진 것 같다. 이러한 관점은 성경을 보다 마이크로한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여 새로운 통찰을 주기도 하지만, 성경에 없는 부분들을 논리적이고 보편타당한 사고에 기초하여 채워넣어야 할 필요가 발생하기 때문에 매우 주의를 기울여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찬양을 듣는 데에 있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럼에도 이 찬양의 가사는 매우 중요한 메세지를 담고 있기에 듣고 있노라면 감동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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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찬양의 배경은 출애굽기 1장이다.
(출애굽기 1:8-22)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9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10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13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14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15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16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18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20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21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22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그리고, 이 찬양의 가사는 출애굽기 2장의 첫 부분에 근거하여 쓰여졌다.
(출애굽기 2:1-3)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이와 같은 성경의 기록을 바탕으로 논리적이고 보편타당한 사고에 근거하여 추정한 요게벳의 심정을 버무려서 가사가 쓰여졌다.
요게벳의 노래
작은 갈대 상자, 물이 새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네
어떤 맘이었을까,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흐르고 흘러
동그란 눈으로 엄마를 보고 있는 아이와 입을 맞추고
상자를 덮고 강가에 띄우며 간절히 기도했겠지
정처 없이 강물에 흔들 흔들 흘러 내려가는 그 상자를 보며
눈을 감아도 보이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주저 앉아 눈물을 흘렸겠지
찬양의 가사는 갓난아기 모세를 떠나보내야만 하는 요게벳의 심정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며 쓰여졌다. 출애굽기 2장에는 매우 객관적이고 간략한 기술만이 나타나 있으므로 성경을 통해서는 요게벳의 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서 가사와 같이 이루어 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말 그대로 '단장'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애굽이라는 잔인한 강대국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백성의 신세, 왕에게 미움을 받아 강도높고 어려운 노동을 통해 탄압을 받으며 차별과 학대를 받는 상황, 아들을 낳으면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왕의 명령이 내려진 상황... 부모로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세상의 누군가가 이 극적인 안타까움을 소재로 글을 쓰거나 노래를 만든다면 아마도 '단장의 나일 강 가 갈대 사이' 정도의 제목이 붙여지고, 이 상황이 절정이 되어 '아, 한 많은 나일 강 가 갈대 사이'라는 탄식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게벳의 노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맡긴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를 이끄시는 주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드린다
그가 널 구원하시리
그가 널 이끄시리라
그가 널 사용하시리
그가 너를 인도하시리
이 또한 논리적이고 보편타당한 사고에 근거한 요게벳의 심정이라고 생각된다.
조상들의 때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어 왔으나, 그 하나님은 지금 애굽에서 노예로 살며 학대를 받는 상황에서 침묵하고 계실 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스라엘 자손의 갓난 남자아이는 나일강에 던지라는 명령때문에 이제 아들마저 키울 수 없는 상황에서... 요게벳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심정이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유대인들은 조상 대대로 풍습과 율법을 지키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꿈꾸며 세상 어디에서도 유대인으로서 살아감이 밝혀진 지금의 시대에 판단할 때, 아마도 하나님의 침묵과 무관하게 요게벳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을 것이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기의 삶을 하나님께 맡겼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찬양은 그 절박한 심정을 "삶의 참 주인, 참 부모, 주님께 너의 삶을 드린다"라고 노래한다. 그 절박한 심정, 그 절박한 순간, 아기를 눕힌 갈대 상자를 손에서 놓는 그 순간... 이 지점은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체념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순간이자, 요게벳이 더 이상 부모로서의 자신을 주장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었지만... 그러나, 그 순간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부모가 되어 주시는 순간이 된다.
찬양은 요게벳의 관점에서 "이제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너를 이끄시며, 너를 사용하시고, 너를 인도하실거야"라는 바램을 노래하고 있는데, 성경은 이 바램이 막연한 바램으로서 증발되지 않고, 확실한 증거의 예언이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부모로서 모세를 양육하시고, 성숙시키시고, 구원하시고, 이끄시고, 사용하시고, 인도하셨음을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40년 동안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로 지내게 하시며 지도자로 교육시키셨다.
그리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치기로 지내게 하시며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는 때, 가나안 땅이 죄악으로 가득찬 때, 곧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40년 동안 출애굽의 지도자로 사용하셨다.
이 찬양은 모세의 어머니인 요게벳의 심정으로 쓰여진 가사때문에 자녀문제로 고민하는 부모들의 마음가짐에 참고할 만한 찬양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이 찬양은 이 시대에 특별히 믿음의 부모들에게 각별하게 들려져야 할 찬양임에 분명하다. 가정마다 한 자녀인 경우가 많고, 그렇다보니 자녀에게 과도한 물질을 공급하고 반대급부로 부모의 결핍과 욕심을 아이에게 투영하여 헬리콥터 마냥 아이의 주변을 관찰하고 간섭하고 개입하는 풍조가 만연한 이 시대에 참으로 필요한 찬양임에 분명하다.
내가 자녀의 부모로써 양육의 권리를 주장하고 행사하며, 나의 가치관과 나의 생각을 강요한다면... 나의 자녀는 기껏해야 나의 모습을 간직한 나의 분신으로 자라고 말 것이다. 나의 모습을 돌이켜 본다면, 이것은 끔찍한 비극이며, 저주이다. 나는 세상 속에서 휩쓸려 다니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저주의 사슬을 이어가는 고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일, 정신이 제대로 박힌 부모라면 내가 부모 노릇을 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하나님께서 부모가 되어주시기를 간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사단에게 얽매인 저주의 사슬을 끊을 수 있고, 그분의 성품을 닮아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으로 자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자녀를 향해 '자식이 원수'라는 입술의 저주부터 끊을 수 있게 될 것이며, 하나님 안에서 천국 백성의 삶을 살아가는 친구로서 자녀를 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이의 기를 살려야 한다'며 비교육적 행위도 불사하는 세상의 부모들의 그릇된 과잉애정의 울타리를 극복하여 자녀를 대함으로써 건전한 자존감을 지닌 사람으로 자녀가 자라가는 경험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며, 자녀로 인해 늙는다, 죽겠다는 한숨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자녀를 주심에 오직 감사의 기도만을 올려드리는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삶이 안락하고 행복하게 됨을 감사하며 살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부모된 입장에서 가장 먼저 할 일, 자녀를 그들의 삶의 참 주인, 참 부모, 참 주님되신 하나님께 맡기기 전에 가장 먼저 할 일은... 부모된 자신을 하나님 손에 맡기고, 드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한다면, 자녀도 나의 모습을 따라 스스로를 하나님 손에 맡기고, 드릴 것이기 때문이다. 찬양의 가사 뒤에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진짜 고백이 감춰져 있을 것 같다.
나의 삶의 참 주인, 나의 참 부모이신
하나님 그 손에 나의 삶을 맡긴다
나의 삶의 참 주인, 나를 이끄시는 주
하나님 그 손에 나의 삶을 드린다
그가 날 구원하시리
그가 날 이끄시리라
그가 날 사용하시리
그가 나를 인도하시리
부모된 내가 먼저 나의 삶의 참 주인, 나의 참 부모,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에 나의 삶을 맡기고, 나의 삶을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부모로서의 나를 구원하시고, 이끄시고, 사용하시고, 인도하셔서...
부모된 나로 하여금 나의 자녀들을 하나님 손에 맡기고, 드릴 수 있게 하시며...
또한, 나를 보고 자란 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손에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맡기고,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드림으로써...
내 자녀들을 부모로서 맡아주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이끄시고, 사용하시고, 인도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세워주실 것이다.
찬양은 요게벳이 '어떤 맘이었을까'라고 노래하고 있지만, 성경을 통해 모세의 삶을 본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다. 그 맘은 분명히 '단장의 나일 강 갈대 사이'였을 테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 손에 모세를 맡길 수 있었던 그 어머니 요게벳의 믿음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키워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모세와 같은 인물을 키워낼 수 있는 분이심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 모든 과정을 본 우리 모두는 또한 하나님을 찬양할 수 밖에 없다...
(출애굽기 11:3)
3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출애굽기 33:11)
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출애굽기 34:29)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민수기 12:3)
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신명기 34:10-12)
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분명히 주의를 기울여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찬양인데, 이렇게 보편타당한 추론을 담고 있기에 듣고 있노라면... 감동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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