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잠깐 스쳐가는 말씀 한 조각

말씀 한 조각 만으로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 생각 한 조각

사람이 우선이다... 과연 그러한가?

아리마대 사람 2019. 1. 8. 01:01

요즘 초등학교의 국어나 사회과목의 시험 문제는 예전과 무척 다르다. 서술형 문제 또는 논술형 문제라고 분류되며,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기술할 수 있는 문제들이 출제되고 있다. 인터넷을 보면 이러한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는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기술하고, 맞춤법상의 오류가 크지 않으면 점수를 부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위와 같은 답을 적었는데도 정답으로 채점된 것을 보니... 예전 학교 다닐 적에 저러한 답과 유사한 답을 적었다가 '시험지에 장난치냐'는 질책과 더불어 엉덩이에 붉은 줄이 가도록 맞던 친구들 생각이 떠오르면서 왠지모를 안타까움과 함께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이런 문제에 대한 아이들의 답은 자유도가 무궁무진하게 주어지지만 실제로는 편차가 크지 않다. 아이들이 배우고 보고 듣는 것이 유사하고, 무엇보다도 '시험'이라는 상황으로부터 비롯된 압력이 아이들의 사고를 제한하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인천의 어느 초등학교 5학년 시험문제로서 서술형 문제가 출제되었다. 문제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쓰시오"였다.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보니, 점수를 받은 아이들이 많지 않았다고 하는데... 채점을 마친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이런 답을 쓴 친구도 있다'라며 답안 하나를 소개해 주었다. 어느 아이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라고 답을 적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께 간절히......

하나님께...

이 이야기는 최근에 실제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것인데, 이야기를 듣던 중 저 놀라운 답안을 듣는 순간, 어릴 적 누가 오래 잠수를 하는지 시합을 하기 위해 허리를 구푸려 물 속에 얼굴을 담그고 숨을 참다가 결국 답답함을 못이겨 급히 허리를 펴고 얼굴을 들면서 입을 벌려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던 그 때의 느낌을 느꼈다. 그리고, 곧바로 내 모습이 겹쳐지면서...부끄러웠다.

저 답...

틀에 박히지않은 새로움을 담뿍 담은 자유로운 답.

시험이라는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운 답.

시험의 답안으로서는 적기가 쉽지 않은 용기있는 신앙고백의 답.

그와 같은 답을 생각하지 못할만큼 구태의연한 내 생각을 앞세우고 사는 것이 부끄러웠고, 시험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틀에 얽매여 사는 나의 한계가 부끄러웠고, 머릿속에서만 맴돌뿐 답안지로 대표되는 세상을 향해 외치지 못하는 나의 용기없는 믿음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쓰시오"라는 문제를 듣는 순간, 내 머릿속은 여러가지 생각으로 채워지지 않았던가. 최근 결혼을 했으면서도 자녀계획은 없다는 회사의 어느 직원의 말이 떠올랐고, 살림살이보다는 형제가 풍족했던 어린 시절의 세상살이를 떠올리고,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며, 차이는 무엇이고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방안은 무엇일까를 생각하지 않았던가.

참고로서, 많은 수의 실무자와 전문가들이 위원회를 구성하고 머리를 모아, 가장 영향력있고,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방안을 짜낸 후, 인력과 비용을 들여 시행 중이거나 시행 예정인 소위 '정부의 정책'들은 어떠한가.

- 출산휴가 확대

- 영유아 의료비 제로화

- 난임시술 지원

- 아동수당 지급

- 육아휴직 지원

- 국공립 어린이집, 유치원 확충

- 직장 어린이집 확대

- 출생신고 시 혼외자녀 구별 폐지

등등...

'예전에는 저런 정책들이 없어도 '아들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기르자'라는 구호가 필요할 정도로 많이들 낳았는데...'라는 생각에 정책의 실효성에 대해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지만, 정부의 정책이든 저출산 해결 방안을 생각한 내 머릿속이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는 방안을 생각하지 못했음은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 '간절히'까지도 아니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방안을 생각조차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내 머릿속은 '인본주의'로 채워져 있지 않은지 두려웠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생각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믿음...

사람의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

문제의 해결방안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그것은 끔찍한... '인본주의'이다.

'사람이 우선이다'라는 구호가 굉장한 인기를 끌었고, 마치 이 구호가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어 줄 것만 같은 기대를 크게 낳았었다. 물론, 다른 여타의 것들과 비교할 때 사람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오로지 사람이 우선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신데, 어떻게 사람이 우선이 될 수 있겠는가...?

'무조건적으로 사람이 우선'인 최근의 사조는 흔히 '인권'이라는 말로 포장되고 있는데, 이 말은 마치 좋은 얼굴과 부드러운 말투에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시계를 차고 기획부동산을 설명하며 접근하는 사기꾼과 같은 말이다.

이 인본주의를 너무나도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있다.

너무나 잘 알려진 바벨탑 이야기이다.


(창세기 11:1-9)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바벨탑의 기저에는 인본주의 사상이 매우 깊이 배어있다.


(1)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시날 평지에 거류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천연의 돌 대신 벽돌을 사용하고, 천연의 진흙 대신 역청을 사용했다. 역청은 천연의 아스팔트나 탄화수소로써 이루어진 물질을 가열, 가공할 때 생기는 흑갈색의 타르같은 물질이라고 하니, 이들은 건축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벽돌을 굽고, 화공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역청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기술과 문명이 발달하게 되었음을 가리키는데, 기술과 문명의 발달은 곧 '인간 존재의 위대함'에 대한 자각, 정확히는 착각을 낳아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으로 이끌게 된다. 이런 사상을 여러가지 학술용어로 기술할 수도 있겠지만, 쉽게 말하면 '교만'이다. 교만은 천사도 타락하게 만든 죄악이며, 사람을 망하게 하는 선봉이다. 또한, 기술과 문명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자본과, 그리고 권력과 연계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인간의 탐욕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들이다. 곧, 교만과 탐욕이 만나게 되니 이들의 상승작용으로 죄악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정은 폭발적으로 소멸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과학적 분석기법을 내세운 진화론은 그 자체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인간은 그저 우연한 진화의 산물일 뿐이며, 다른 모든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진화의 과정에 있는 유기체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통해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지우고 있다. 또한, 생명체도 물질과 마찬가지로 최소 단위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기계적인 구조체라는 관점에 근거하여 발달한 유전자 조작이라는 기술의 활용을 통해 생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도달하려고 한다. 만일, 이러한 기술이 탐욕스러운 자본과 결탁하여 무분별하게 사용된다면, 재앙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돈이 되는 새로운 기술을 향한 욕심은 기존의 것을 뛰어넘고 파괴하는 새로운 생각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도덕의 파괴를 방조 내지는 조장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기도 한다.

기술과 문명 그 자체만이 벽돌과 역청인 것은 아니다.

기술과 문명의 발달에 도취된 인간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새로운 사상, 새로운 개념, 새로운 의식을 만들어 서로 나누며 퍼뜨려 왔다. 진화론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전방위적인 사상의 토대가 되어왔으며, 최근의 대표적인 예로서는 인간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는 주장와 함께 퍼뜨려지고 있는 다양한 성별의 정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성별은 '남성'과 '여성' 뿐임이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고, 이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동의되고 인정되는 바였으나, 최근의 시대에는 수십개의 성별을 만들어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인권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으며, 이는 창조의 법칙을 거스르는 죄악을 정당화하는 배경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인간이 선택하는 모든 것이 인권이라고 주장하며 죄악을 죄악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소위 '차별금지'라는 개념을 일상화하기 위한 시도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도 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죄의 본성이 벽돌과 역청을 사용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지워내고자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2)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이 말씀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한 '그들'이 누군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은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자'라고 말한 그들이 누군지를 알려준다.


(창세기 10:6-12)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9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10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1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시날 땅의 바벨에서는 니므롯의 나라가 시작되었다. 시날 평지에서 성읍과 탑을 건설했다는 것과 매우 유사한 표현이다. 니므롯의 나라는 앗수르 땅으로 진출하여 니느웨, 르호보딜, 갈라, 레센을 건설하였다. 니므롯은 '세상에 첫 용사'로 불린 인물로서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었으며, 그에 관하여는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으니 당대에 대단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니므롯의 나라'의 성격은 니므롯의 족보를 참고할 때 파악할 수 있다.  


(창세기 9:24-27)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창세기 10:6-8)
6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7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니므롯은 구스의 아들이며, 구스는 함의 아들이었다. 함은 노아의 작은 아들로서,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라는 저주를 받은 가나안의 아버지였고, 셈과 야벳이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은 것과 달리 아버지로부터의 축복을 받지 못한 아들이었다. 이러한 함의 손자가 니므롯이었다. 니므롯의 명성과 니므롯의 나라라는 이름, 니므롯의 나라가 시작된 위치에서 볼 수 있듯이 니므롯은 바벨론 초기의 지도자였으며, 앗수르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한 집단의 정체성과 발전에 있어서 지도자의 영향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를 생각해 보면, 성읍과 탑의 건설을 시작한 니므롯의 나라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이 바벨론은 심히 악하고 더러운 성의 상징이며,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듯이 세상의 마지막까지도 그러하다.


(요한계시록 17:5)

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그리고, 바벨론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요한계시록 18:2)

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바벨론의 무너짐이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바벨론은 지나간 과거나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세상의 마지막까지도 실제로 존재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곧,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 귀신의 처소,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 각종 더럽고 기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 니므롯의 나라인 바벨론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3)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성읍과 탑을 건설하기로 한 니므롯의 나라는 탑의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기로 했다. 그런데, 연을 날려보거나 하늘 높이 날아가는 새를 관찰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하늘에 닿는 탑을 건설하겠다는 것은 무리한 발상이다. '하늘에 닿게 하여'라고 번역되어 있는 부분의 원문은 그 탑 꼭대기를 하늘로 향하게 한다는 의미일 뿐, 닿게 하겠다고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이점이 중요한 것은, 높이를 계획해야지만, 탑의 기단의 규모를 결정해서 건설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하늘에 닿게 하겠다는 생각을 실현하려 했다면, 하늘의 높이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더라도 탑의 기단이 엄청난 규모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면, 메소포타미아 지역, 곧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서 발견되는 지구라트라는 고대의 건축물들은 단순히 크게, 높이 쌓겠다는 목적으로 건설된 니므롯 당시의 바벨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비록 하늘에 닿을 수는 없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규모의 건축물이었음이 분명한 탑을 건설한 목적은 '우리 이름을 내자'는 것이었다. 만일 지도자인 니므롯이 '내 이름을 내겠다'는 목적으로 지시한 일이었으면, 이것은 한 개인의 명예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된 일에 불과했을 것이며, 아마도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탑을 건설한 목적은 '우리 이름을 내자'는 것이었다. '우리 이름을 내자'는 것은 '우리'는 '위대하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라는 의식은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목적으로 발전하며, '위대하다'라는 의식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죄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벽돌과 역청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하늘을 향한 거대한 탑을 비롯한 탑과 성읍을 건설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떨치게 된 니므롯의 나라.

기술발달에 힘입어 '우리는 하고자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우리는 위대하다'라는 생각을 갖는 것은, 곧 하나님의 존재가 희미해 지는 것, 하나남의 존재가 지워지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며, 이는 다른 누군가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이름을 내자'라는 탑의 건설 목적이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주류사상이었다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당시의 지배적인 의식은 진화론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4)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우리'라는 의식에서 비롯된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조직적, 직접적인 대항의 절정이며, 하나님과 같아지려한 사단의 생각과 같다.

탑을 건설한 또 다른 목적인 이 말은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과 문자 그대로 직접적으로 대치된다.


(창세기 1:28)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말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과 직접적으로, 그리고, 문자적으로 대치된다.

성읍과 탑을 건설할 만큼 많은 인원이 합심하여 잘못된 기술과 사상 하에 흩어지지 않고 똘똘 뭉쳐 하나님을 대적할 때의 결과는, 뱀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도했던 사건을 생각할 때, 심히 우려스러을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세기 3:1)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3:4)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5)

아담과 하와 뿐인 세상에서 뱀은 단 세 마디의 말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 범죄하게 만들고 하나님께 염려를 끼쳤다.


(창세기 3:22)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이들이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와 같이 염려하신다. 만일, 수많은 사람들이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면서 똘똘 뭉쳐 살 때, 뱀이 몇 마디 말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범죄하게 만든다면, 그 죄의 결과와 영향은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 이상으로 심각할 것이다.


(창세기 11:6)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니므롯의 무리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들은 결국 오로지 죽을 수 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할 일임을 염려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선 이 일의 원인을 분석하신다. 그것은 그들 무리가 한 족속이고, 언어도 하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해결방안을 구상하시고 실행하신다.


(창세기 11:7)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언어가 하나였던 것이 문제였으니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고, 한 족속이었던 것이 문제였으니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니므롯의 무리들은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치게 되었다. 비록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그쳤지만, 바벨탑을 쌓았던 니므롯의 무리들의 속성도 지워졌을까?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주장은 니므롯의 때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대에는 UN이라는 국제기구가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산하에는 여러 국제기구들이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다. 특별히, 유럽의 경우 유럽경제공동체, 유럽공동체를 지나 유럽연합이 발족되어 단일 화폐를 사용하는 통합된 기구로서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기구들은 점차적으로 영향력을 키워나가고 있으며, 단순한 취지의 조직에서 점차 발전된 형태의 연합으로 진행되고 있다.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은 무엇이 문제일까?

바벨탑의 사건이 가능했던 것은 니므롯이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니므롯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으로 기록된 인물이기도 하며, 당대에 속담이 생겨날 정도로 '용감한 사냥꾼'의 전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여호와 앞에서'라는 표현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데, 굳이 '여호와 앞에서'라고 기록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눈에 뜨였다는 뜻으로 이해가 된다. 하나님께서 보셨다는 뜻인데, 이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좋았다'는 뜻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 인물이라면 하나님을 염려케 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러한 이해 가운데에 '여호와 앞에서'라는 표현을 다시 살펴보면, 그가 하나님을 대적했디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이름이 속담으로까지 널리 알려질 정도로 시날평지에 걸쳐 그 영향력이 절대적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절대권력자가 다스리고, 하나의 사상으로 뭉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기술이 발달한 하나의 공동체.

그와 같은 공동체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 예정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진행될 틈이 없어지는 것이다. 나라와 민족을 통하여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역사계획이 뒤틀어져 버리는 것이다.

절대권력자가 존재한다면 공동체는 절대권력자에 의존할 수 밖에 없고, 절대권력자는 자신을 우상화하는 것이 습성이니, 그와 같은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절대권력자를 섬기며 하나님을 외면하고 대적할 수 밖에 없게 되며, 그 끝은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밖에 없는 것이다. 물이 아닌 방법으로 다시금 노아의 홍수와 같은 심판이 되풀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니므롯은 하나님의 대적이며, 니므롯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의 대적인 것이다.

현대에 있어 니므롯의 무리들의 속성이 발현되고 있는 대표적인 주장들 중의 하나는 '세계화'이다. 모든 나라가 하나가 되면, 나라와 나라 간의 분쟁을 종식시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개념에 근거한 주장이다. 행정과 정치와 경제분야는 위에서 말한 유럽연합이 좋은 예가 되고 있으며, 문화 분야에서도 다양한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대중문화 분야에서는 K-POP도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이러한 주장은 종교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지속적으로 발발하고 있는 전쟁의 배경을 기독교와 이슬람의 싸움으로 이해한 바탕 위에, 유일신을 믿는 종교의 배타성이 문제이니 종교를 통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인 것이다.


니므롯의 나라는

-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무리를 보시고,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온 지면에 흩으셨다.

이로 인해 니므롯의 무리들이 건설하던 성읍과 탑, 그리고 도시는 건설이 그쳤으나, 흩어진 니므롯의 무리들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던 때를 기억하며 흩어진 채로 여전히 바벨탑을 세우고 있다. 또한, 비록 건설은 그쳤으나 바벨론은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 귀신의 처소,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 각종 더럽고 기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어 세상의 마지막까지 존재하다가 무너지고 만다.

세상에 넘실대는 '인본주의'와 바벨론 건설의 기초가 된 '인본주의'... 


어느 동화책에서 아빠쥐가 아들쥐에게 전해준 교훈처럼, 이 시대를 살기 위해서는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우고, 주변을 잘 살펴야 한다. 이러한 교훈을 예수님께서도 말씀해 주셨다.


(마태복음 24:23-26)
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그리스도를 말하며,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할 만큼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며,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더라도...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우고, 주변을 잘 살펴서... 믿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수많은 말들과 주장들과 사상들이 벽돌과 역청처럼 훌륭해 보이고, 이를 이용해서 쌓은 성읍과 탑들이 멋지고 근사하게 보이더라도,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겠다는 것은 아닌지, 그 목적이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믿지 말고,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살펴볼 일이다.

지금도 바벨론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