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잠깐 스쳐가는 말씀 한 조각

말씀 한 조각 만으로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 생각 한 조각

광야를 지나며

아리마대 사람 2019. 9. 11. 16:23

광야를 지나며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이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 곳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내 자아가 산산히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광야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이라고 나타나 있다.

텅 비고 아무 것도 없는 곳이 심지어 아득히 넓기까지 하다면... 그 곳에 있다는 자체가 두려울 뿐만 아니라,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기에 그 두려움조차 막막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려움은 고통이 될 것이다.

흔히 우리의 삶을 광야에 비유하곤 하는데, 아마도 두렵고, 막막하고, 고통스럽다는 의미에서 그와 같은 비유를 사용하는 것 같다.

물론, 모든 사람이 삶을 두렵고 막막하고 고통스럽게 느끼지는 않을 것이고, 또한 삶의 순간들이 항상 두렵고 막막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아닐 테지만...

 

삶은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자신이 잘 모르는 시간에 작은 환영과 더불어 얼떨결에 시작된다.

살아가는 동안에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그로 인한 좌절과 분노(怒), 고난과 슬픔(哀)을 겪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이에 익숙해지지만(참고자료), 그에 반비례하여 주변의 사람들의 삶이 끝을 맺는 모습을 보고 겪게 된다.

그에 대해서조차 익숙해져 무덤덤해지다가, 마침내는 시작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언제일지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끝을 맺는다.

약간의 비관적인 관점을 지닌 채로 한걸음 물리서서 두려움과 막막함과 고통 가운데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확대해서 바라본다면, 광야로 보일런지도 모르겠다.

 

광야...

광야를 생각해 보면...

성경에서의 광야를 생각해 보면...

 

...가장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40년을 지내게 되는 광야가 떠오른다. 이 광야에서의 생활은 실제로 두렵고 막막하고 고통스러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그리고 하나님을 자주, 매우 신경질적으로 원망하곤 했다.

 

(출애굽기 14:11-12)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출애굽기16:2-3)
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애굽기17:2-3)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흥미롭게도 출애굽의 광야는 실제로 우리의 삶과 너무나 많이 닮아있다.

애굽에서 태어나 노역에 시달리며 종살이를 하다가 애굽을 벗어난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기까지 지내게 되는 광야생활은... 세상에 태어나 사단에게 시달리며 종살이를 하던 세상의 풍습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을 믿게 된 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지내게 되는 '세상에서의 삶'과 구조적으로 매우 흡사하다.

만일, 애굽을 나서지 못한 삶이라면, 그나마 광야에는 발도 들여 놓지 못한 채, 심지어는 가나안의 존재조차 모른 채로 애굽에서 노역에 시달리다가 삶이 끝나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삶이라면, 그나마 나를 만드신 하나님을 한번 불러보지도 못한 채, 심지어는 '하나님의 나라'의 존재조차 모른 채로 세상에서 사단에 시달리다가 삶이 끝나고 말 것이다.

광야는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발을 들여 놓은 곳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도 광야는 문자 그대로 그저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이었기에 그곳에서의 생활은 두렵고 막막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 40년을 지내는 동안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지냈던 광야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광야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다. 그들은 배고플 때 만나를 먹었고, 고기가 먹고 싶을 때 메추라기를 먹었고,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셨다. 또한, 광야생활을 지내는 동안 옷이 해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

 

(출애굽기 13:21-22)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신명기8:1-4)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에서 그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고,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하나님만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고, 하나님만이 그들을 보살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분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로, 반석에서 솟아난 물로, 옷이 해어지지 않게 하시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심으로 그들을 돌보셨다. 이렇게 광야에서 그들을 돌보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고,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도록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참고자료)

앞에서 언급했듯이 일반적으로 광야를 삶에 비유할 수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을 지냈던 광야생활은 천국을 향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출애굽기 및 모세오경의 이후는 광야에서의 삶을 통해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과 한계를 진솔하고 냉정하게 보여주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광야가 우리 삶의 모습이라면, 과연 광야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위에 '광야'라는 곡의 가사를 적은 것은, 이러한 우리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있다고 생각된 까닭이다.

 

...광야를 지나며...

 

우선 이 곡은 '광야를 지나기 전'이나 '광야를 지난 후'가 아닌, 광야를 지나고 있는 지금의 과정을 노래하고 있으며, 그래서 곡의 제목도 '광야를 지나며'이다. 그래서, 더 호기심이 생기며,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광야에 놓인 처음부터 광야를 지난 것은 아니며, 그저 광야에 서있었을 뿐이었다. 이 곡은 광야에 서있기만 하던 처지에서 어떻게 광야를 지나고 있는 지금의 과정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노래하고 있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있네

 

광야는 어두운 밤의 깊은 어둠 속과 같은 곳이며, 이는 시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길고 긴 장소이다.

주변을, 아니 바로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이곳에서 사람은 고독하며,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기댈 수가 없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기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낮아질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이 어둡고 외롭기만 한 곳이 광야이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이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어둡고 외로운 광야에서 화자(話者)는 깨닫게 된다. 주님 밖에 없음을...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고, 어둠 속에서 내 빛이 될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고, 그래서, 나의 외로움을 덜어주실 분은 주님 밖에 없음을...

그러니, 주님을 붙잡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실은 단 한 순간도 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보이는 그 자체로서의 광야는 어둡고 외롭기만 한 곳이지만, 주님을 붙들면 견딜 수 있으며, 또한 붙들 수 있는 분은 주님뿐임을 깨닫는다.

어둡고 외롭기만 한 광야에서 이를 깨달았음을 고백한다.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 곳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주님 손을 꼭 붙들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주님 손을 꼭 붙들고 있으면서... 이제, 자신이 광야에 놓여진 까닭을 깨닫는다.

실은 광야에 보내지도록 택함을 받았다는 것을...

그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고, 그들이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도록 가르치신 것과 같이 나로 하여금 주님만을 의지하게 함으로써 나를 정결하게 만들어 사용하시려는 것임을...

주님만을 의지할 때 주님께 순종하게 되며, 이제 더 이상은 내 자아가 아닌,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을...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그것을 깨닫는 곳이 광야임을 노래한다.

 

내 자아가 산산히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이제, 스스로 높아지고자 했던 욕심과 교만으로 가득했던 자아는 깨어졌다.

그리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그래서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기도하게 된다. 이것을 이루는 것이 사명이며, 삶의 목적임을 고백한다.

이제 이것을 깨닫고 고백한 사람은 더 이상 광야에 멍하니 서있지 않는다. 이제 그는 광야를 지난다.

 

이와 같이 깨닫고, 더 깊이 깨닫고, 마침내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마치 사도 바울이 자신을 향한 부르심의 때를 깨달은 과정과 같다.

회심한 바울은 하나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자신을 택하여 부르셨다고 알고 있었다.

 

(사도행전 22:6-8)
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그러나, 이후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태 중에서 자신이 시작될 때부터 자신을 택하여 부르셨다고 고백한다.

 

(갈라디아서 1:15)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이후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택하여 부르셨음을 깨닫고 고백한다.

 

(디모데후서 1:9)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만 바라보고 순종할 때, 깨닫고 알게 되어 지는 것이다.

이 곡에서 광야에 놓인 화자는 "광야... 광야에 서있네"를 노래하다가 마침내는 자신이 아제 "광야를 지나며..." 노래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또한 요셉의 성장과도 같이 생각된다.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빠졌다가 애굽으로 팔려 보디발의 집에서 하인으로 생활하고, 억울한 누명으로 옥에 갇혀 죄인의 신분으로 생활하다가 꿈해몽을 통해 마침내는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아버지와 형제들을 애굽으로 불러온 요셉은 자신을 애굽에 팔았던 형들 앞에서 자신의 인생이 모두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에 이루어졌음을 고백한다.

 

(창세기 45:4-5)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이 마침내 이를 깨닫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위의 노래와 같이 그가 광야에서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광야에 놓이면 처음에는 서 있을 수 밖에 없다. 어쩌면, 서있기조차 버거워 무릎을 꿇고 주저앉게 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때에 주님만 바라본다면, 광야는 주님을 만나는 곳이 되고, 광야를 지나며 노래하게 된다.

광야에 놓인다는 다는 것은 분명히 두렵고 막막하고 고통스럽지만, 광야에 서있지 않으면 주님을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를 참고하면, 광야에 놓일 일이 없는 천사들이 구원의 복음에 관해 잘 아지 못하고, 살펴보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베드로전서 1:10-12)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광야를 지나며... 히즈윌과 같이 째지한 감성을 담뿍 담아 멋지게 부를 수는 없지만, 노래를 다시 불러본다.

광야... 모두가 광야를 원하지 않지만, 어쩌면 광야가 축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광야는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고, 주님만이 내 친구가 되시는 곳이다. 광야에서가 아니라면,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광야는 주님께서 나를 정결케 하여 사용하시려고 나를 택하여 보내신 곳이기 때문이다.

광야는 성령께서 주님 뜻만 이루고, 주님만 드러내는 존재로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이름다움을 바라보고 성전에서 사모하기를 구하였다.

 

(시편 27:4)
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모자라고, 어리석고, 옹졸하고, 교만한 나는... 무엇보다 먼저 광야에서 살기를 구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광야에 살면서 주님 손을 꼭 붙들고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심으로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고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사모하는 그것이라

 

광야는 어떻게든 빨리 벗어나야만 할 곳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축복의 장소가 아닌가 싶다. 광야는 두렵고 막막하고 고통스러운 곳이지만, 세심한 하나님께서는 먹을 양식과 마실 물, 입을 옷도 챙겨주시고 발도 부르트지 않게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 광야에 서있다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하박국 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광야같은 17절의 환경 속에서도 하박국 선지자는 오히려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18절과 같이 노래했다.

아마도 하박국 선지자가 "광야를 지나며"라는 노래를 들었다면... 무척 자주 흥얼거렸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