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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에 관한 질문과 답변」

Q33. 포도주와 포도즙 중에 어떤 것을 사용해야 하나요?

아리마대 사람 2022. 12. 19. 22:37

▒ 외국에 나갔을 때 진짜 포도주로 성만찬을 거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술을 마시면 안된다고 가르치는데 성만찬 때는 진짜 포도주를 마셔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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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찬을 거행할 때에 포도즙을 사용해야 하느냐 아니면 포도주를 사용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미묘한 문제에 속합니다. 만일 포도즙을 사용한다면 왜 그것을 사용하는지에 대한 이유, 즉 성서적 · 신학적 정당성이 분명히 있어야 하며, 이는 포도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초대교회가 사용한 것은 포도주였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에 사용하신 것도 포도주입니다. 성만찬은 바로 이 자리에서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그때 이후로 언제나 빵과 포도주가 성만찬의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기원후 165년경에 기록된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첫 번째 변증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도가 끝난 뒤에 우리는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그러고 나서 빵과 물이 담긴 잔과 섞인 포도주가 인도자에게 주어지고, 그는 그것들을 들어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주의 아버지께 찬양과 영광을 올려보냅니다.

4세기 교부 암브로시우스는 성만찬에서 포도주에 타는 물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기를, 모세가 '말씀'과 함께 지팡이로 반석을 쳤을 때 반석에서 생수가 나왔듯이, 사제가 '주님의 말씀'과 함께 잔에 손을 댈 때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생수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옆구리를 로마 병정이 창으로 찔렀을 때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왔는데, 이 물은 씻는 물이요 이 피는 구원하는 피며, 그러므로 성만찬에서 물을 포도주에 타는 것은 바로 이 물과 피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교회는 언제부터 성찬식에서 포도주가 아닌 포도즙을 사용하기 시작했을까요? 포도즙의 역사는 19세기 미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사회에서는 금주운동이 거세게 불었는데, 그 여파가 교회 안에까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사회로부터 "왜 그리스도인들은 성만찬을 구실로 하여 술(포도주)을 마시느냐?" 하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당시에 알코올 없는 포도즙을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포도즙은 공기에 노출되면서 곧바로 산화, 즉 발효되어 술이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노력 끝에 루이스 파스퇴르가 개발한 저온살균법을 응용하여 토마스 웰치 박사가 발효되지 않은 포도주스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비로소 교회는 알코올이 함유되지 않은 포도즙으로 성만찬을 거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포도즙을 택했지만, 전통을 보다 더 중시하는 교단에서는 여전히 포도주를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양 진영은 서로를 비난하기에 이르렀는데, 포도즙을 사용하는 측에서는 상대방을 가리켜 '술 마시는 자들'이라고 비난했고, 포도주를 사용하는 측에서는 상대방을 '주께서 사용하신 것을 비판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포도즙의 문제는 결국 보수진영과 에큐메니컬 진영 사이의 분열을 초래했고, 그 결과 두 진영은 함께 앉아 성만찬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화해와 연합의 성만찬이 오히려 분열의 빌미가 된 어이없는 일입니다. 외국에서는 포도주와 포도주스를 함께 제공하고, 참여자가 각자의 신앙에 따라 선택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이것도 하나의 좋은 대안이라고 여겨집니다. 다만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비난하지는 말아야겠지요.
한국교회는 미국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으면서 포도즙을 사용하도록 배웠기 때문에 그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만찬에서 무엇을 마시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만찬에서 참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 성만찬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에서 우리가 참여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바로 가시적인 방식으로 주어지는 불가시적인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