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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한 조각

애즈버리 대부흥

아리마대 사람 2023. 3. 13. 15:16

최근에 "애즈버리 대부흥"이라고 이름 붙여진 사건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2023년 2월 8일 미국 애즈버리 대학의 낮 채플이 끝난 후에도 학생들을 중심으로 예배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며, 애즈버리 대학 예배당에 모인 사람들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이를 경험한 학생들이 미국 각지로 흩어져 간증을 한다는 것이다. 애즈버리 지역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감동을 받고 수 년간 기도했다는 동양인 목사님의 이야기도 더해져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반가운 소식에 놀라고 환호하다가,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에는 찬양인도자 중 한명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의 확인을 비롯하여 "애즈버리 대부흥"에 대한 분석의 결과로 인해 이를 마냥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좀 더 침작하게, 좀 더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정보전달 수단이 극히 발달한 세태답게 이 소식은 금새 퍼져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와 같은 개괄적인 정보만 알 수 있을 뿐이고, 아직도 애즈버리 대부흥이 어떻게 시작되고 진행된 것인지,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것인지, 현재는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정보전달이 빠르기는 하지만, 수많은 정보들이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닐 뿐 더러, 충분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직접 참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시대에 '부흥'이란 말을 듣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평양 대부흥이나 아주사 대부흥, 또한 '부흥'이라는 명찰은 달지 않았지만 50년 전 여의도 광장에서의 집회 등이 우리나라와 미국에서의 기독교의 부흥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는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부흥은 무엇일까? 부흥은 성령의 임재와 기독교의 성장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된다.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신 바와 같이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님의 일하심으로부터 교회가 시작되고 놀라운 성장이 이루어졌다는 점, 곧 교회의 놀라운 부흥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할 때, 성령의 임재가 언급되고 있는 애즈버리 대부흥의 소식은 교회의 부흥을 기대할 수 있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우기 지금이 '교회의 침체기'라고 이야기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경제성장과 기술발전으로 인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세태는 인간 자신과 기술을 의지하려 할 뿐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이러한 때에 겪게 된 코로나는 교회를 쇠락의 내리막길로 밀쳐버린 것처럼 느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때에 듣게 된 부흥의 소식이라니...
반갑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부흥이라고 하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같이 성령님께서 찾아오시고, 놀랍게 일하시는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니, 긴가민가하고 밍숭맹숭한 심정으로 신앙생활의 명백을 이어가던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어렴풋하게 믿고 있는 바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고, 신앙의 생기를 되찾을 수 있는 너무나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이끄는 목회자들에게도 새로운 많은 성도들을 기대할 수 있는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애즈버리 대부흥의 물결이 태평양을 건너 한국에도 흘러오기를 바라는 목소리도 있다. 그렇다보니 이 와중에 조금은 우스꽝스런 이야기도 듣게 된다. 부흥에 목마른 교회, 혹은 부흥에 욕심을 내는 교회에서는 발빠르게 예배 시간에 애즈버리 대학의 집회에서 불려진 찬양들을 부른다고 한다. 또한 애즈버리 대학의 집회를 흉내내어 기도회를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소식은 애즈버리 대부흥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데서 일어나는 일들일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편에서는 이것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새옹지마'라는 말이 가리키듯 매사에 너무 쉽게 들떠서는 안된다는 세상살이의 지혜를 반영해보더라도 그럴 것이다. 그냥 부흥도 아니고, 대부흥, 그것도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대부흥이라고 하는데... 실은 그렇지가 않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잘못된 이해거나 잘못된 방향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잘못된 평가거나 잘못된 명칭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염려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이런 소식들 속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는 기적, 성령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기적,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시는 기적을 보기 원한다.
 
(마가복음 8:11)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흔히 허용하시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창조와 함께 세상이 운용되는 법칙을 만드셨고, 공의로운 하나님께서는 이를 지키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주와 세상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용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법칙이 지켜지지 않는 순간, 곧 기적의 순간을 보기 원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 물론 때때로 기적은 일어난다. 홍해가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여리고성 주위를 돌며 나팔을 불고 고함을 외쳤을 때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가 살아나는 일 등이다. 이러한 일들은 만물의 창조주이자 만유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펼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되심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세상이 일정한 법칙을 따라 운행되는 가운데 계신다. 그러나 때로는 우주와 세상의 법칙이 깨어지는 순간 가운데에도 계신다. 따라서 어느쪽이든지, 기적이 보이는 쪽이든 안보이는 쪽이든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는 이미 차고 넘치도록 주어진 상황인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역사를 통해서, 지식의 발전을 통해서 충분히 이 사실을 발견하고 깨달을 수가 있다. 정확하시고 효율적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차고 넘치는 상황에서 여분의 일을 굳이 행하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적에 너무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필요한 일이다. 역사 속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리스도의 출현 소식에도 귀를 닫아야하는 '그 때'에 가까워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정확하지 않은 소식과 소문에 귀를 열고 마음을 빼앗기면 안되는 시대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4: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미혹은 특별히 믿는 자들을 대상으로 더욱 그럴 듯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더욱 그러하다.
 
(마태복음 24:24)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게다가 정보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고, 이에 따라 각종 정보가 빠르게 전해지고 있는 이 시대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들려오는 여러가지 소식에 흔들리지 말아야 할 필요는 더욱 더 커진다.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남이 겪은 기적은 내게는 소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신이 겪은 일들에 대한 기억조차도 흐릿해져 마침내는 없던 일과 다르지 않게 되어 버린다. 기적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겪은 기적일지라도 이러한데,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기적의 소문이라면 그 영향이 얼마나 크고 오랫동안 지속될 것으로 기대해야 할까? 미국에서 일어난 대부흥이 사실이라면 그 소식은 반갑고 놀랍지만, 이 시간, 이 곳의 나에게는 냉정하게 말해서 큰 의미가 없다. 내가 경험하고, 내가 부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내가 경험하고 내가 체험하는 부흥이 중요한 것이며, 그것도 지금 이 순간의 부흥이 필요한 것이다.
 
부흥의 소식 가운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어떻게 부흥을 경험할 수 있을까?
 
바리새인들이 기적을 원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마가복음 8:11)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부흥의 의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통해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역사를 보기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내가 믿는 믿음이 틀림이 없다는 증거가 될 것이며, 내 믿음이 살아 숨쉬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임한 성령의 소식, 다른 사람들이 참석 중인 집회가 계속되고 있다는 소식을 통해서만 가능할까?
야고보 사도는 살아있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셨다.
 
(야고보서 2:14-17)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살아있는 믿음은 행하는 믿음이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는 입을 것과 먹을 것이 필요하듯이, 영혼이 있어야 살아있는 사람이듯이, 그렇게 믿음은 행함을 통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의 행동을 지녔다면 대부흥의 소식에 연연할 필요가 없고, 대부흥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따질 필요가 없다.
나의 믿음의 행동의 지경을 넓히는 것을 통해 내 속에서 대부흥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바를 지켜보려는 마음과 행동, 다른 사람들에게 내 것을 나누어주려는 마음과 행동이 부흥인 것이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바를 더욱 굳게 지키려는 마음과 행동,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내 것을 더 많이 나누어주려는 마음과 행동이 대부흥인 것이다.
내 자신을 들여다보자.
세상의 생각과 가치관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려는 마음과 행동, 하나라도 더 갖고 싶은 욕심이 꺽이고 기꺼이 나누는 마음과 행동은... 나 자신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내가 이러한 마음을 갖고, 이러한 일을 행하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임재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애즈버리 대부흥"의 소식을 접하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내게 중요한 것, 내게 필요한 것은 내 속의 대부흥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삶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성령님의 임재를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가 있게 된다.
나를 통해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진짜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