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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한 조각

한국에서만 가능한 일

아리마대 사람 2023. 1. 27. 00:02

작년 초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삼성의 갤럭시 광고가 영국에서 크게 비난을 받는 일이 있었다. 이 일에 대해 결국 삼성은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공식입장을 발표하고 애써 만든 광고영상을 며칠만에 유튜브에서 삭제했다고 한다.
어떤 내용의 광고였길래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광고영상의 제목은 '밤 올빼미들, 당신의 갤럭시, 당신의 길'이었으며, 새벽 2시에 삼성의 무선 이어폰인 갤럭시 버즈와 스마트 워치인 갤럭시 워치를 차고 런던 거리와 골목을 달리는 젊은 여성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광고 속 여성은 '난 달라. 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달릴거야.'라고 말한다. 갤럭시 제품과 새벽이라는 시간대를 통해서 개성과 자유를 추구하라는 주제를 전달하려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광고는 왜 비난을 받았던 것일까?
광고영상에 대한 비난의 이유는 런던에서 새벽 2시에 스마트 워치를 차고 이어폰까지 귀에 꽂은 채로 젊은 여성이 혼자 조깅을 하는 것은 몹시 위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광고영상에는 "광고를 보는 내내 긴장했다", "분명 남자가 만든 광고일 것이다", "성폭행을 조장하는 것 같다", "내 딸에게는 절대로 저렇게 하라고 하지 않겠다"는 등의 댓글이 달렸다고 하며, BBC는 "비현실적이다", 가디언은 "둔감하다", 텔레그래프는 "여성 안전에 무신경하다"는 등의 비판보도와 비판기사를 내보냈다고 한다. 광고가 방송될 무렵 영국에서는 여성피살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었기 때문에 반응이 더욱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삼성이 광고대상국의 형편과 상황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삼성의 배경에 대한 고려 또한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삼성이 '한국의 기업'이라는 점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경험하는 한국문화에 관한 긍정적 반응을 소재로 한 방송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있는 것과 유사하게 유튜브에서는 소위 '국뽕'에 찬 동영상들을 볼 수가 있는데, 주요한 소재 중 하나는 우리나라의 '치안'이다. 한국에서는 카페에 가방이나 노트북이나 핸드폰을 두고 가도 훔쳐가는 사람이 없고, 택배를 집앞에 두고 가도 훔쳐가는 사람이 없으며, 점포 밖에 상품을 진열해 놓아도 훔쳐가는 사람이 없다는 점에 대해 외국인들이 한국인의 시민의식을 칭찬하고, 심지어 놀라거나 감동하고 있으니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잘 지켜나가자고 격려하는 내용이다. 또한 이들 동영상들은 한국의 치안과 국민의식에 관한 다른 나라의 방송내용이나 외국인들의 반응을 알려주기도 하는데, 우리의 일상에 대해 '한국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감탄하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낯설고, 도대체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불필요한 궁금증이 생겨나기도 한다.

 

특별히 남미 지역은 치안이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는데, 남미 출신의 인플루언서가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찍은 동영상에 대한 남미 사람들의 반응들을 보면 다른 나라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어떻게 살 수 있는 것인지 의아하기까지 하다.
가방이나 노트북 등을 두고 자리를 비운 카페 테이블을 찍은 동영상을 보고는...
- 콜롬비아였다면 말할 것도 없어. 콜롬비아 사람이라면 알거야.
- 이건 전 세계가 따라야만 해. 정말 멋진 문화사회야, 멋져.
편의점 밖에 진열해 둔 상품들을 찍은 동영상을 보고는...
-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내 생각엔 아무래도 불가능한데.
- 남아메리카였으면 냉장고까지 훔쳐갔겠지.
시장의 점포에서 잠이 든 아주머니를 찍은 동영상을 보고는...
- 멕시코에선 잠드는 순간 다 훔쳐 간다.
- 콜롬비아에서는 저 아주머니도 위험해져.
문 밖에 놓아둔 택배박스를 찍은 동영상을 보고는...
- 우리나라였으면 5분도 안되서 저 소포들 다 훔쳐 갔을 걸.
- 우린 1분이면 가져갔을거야.
무인 아이스크림가게를 찍은 동영상을 보고는...
- 콜롬비아에서는 1시간도 못 버틸 가게.
- 여기서는 CCTV를 설치하는 게 그렇게 유용하진 않을거야. 그 카메라마저도 훔쳐갈 테니까.
핸드폰을 사용하면서 걸어가는 어린 아이를 찍은 동영상을 보고는...
- 여기에선 아이는 핸드폰 없이, 부모는 아이 없이 끝나겠지.
- 칠레에선 혼자 걷는 아이들이 없어. 난 집 앞 도로도 못건너겠던데.
밤에 홀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여성을 찍은 동영상을 보고는...
- 이렇게 두려움 없이 걸을 수 있다니.
- 한국은 새벽 2, 3시에 걸어도 상관없지. 남아메리카에서는 그러면 안되지만.

우리나라의 치안이 다른 나라보다 더 좋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재미있는 것은 무엇때문에 한국의 치안이 이렇게 좋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외국인들의 대답이다. 사람들이 밖에 많이 나오기 때문에 혼자 있는 느낌이 없기 때문이라는 대답도 있고, 사람들 스스로 규칙과 질서를 지켜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대답도 있지만, 대다수는 CCTV가 많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한국사회에서 살아오지 않은 그들에게는 아마도 가장 쉽고 합리적인 추측이 아닐까 싶은데... 실은 CCTV의 갯수가 치안과 직접 연관이 있다면, 중국이나 영국의 치안이 가장 좋아야 한다. 전세계에서 CCTV가 가장 많은 20개의 도시를 선정하면 그 중에서 18개가 중국에 있으며, 영국 런던의 CCTV 갯수는 전세계 도시들 중 3위이기 때문에 CCTV의 갯수가 치안을 보장한다면 영국에서 삼성의 광고를 비난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과연 한국의 기업인 삼성이 광고영상 때문에 비난받고 사과를 해야했던 배경이 된 한국의 치안은, 심지어 한국을 방문하지 않은 외국인들 중에는 그건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일일 뿐이고 나는 믿을 수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만큼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한국의 치안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CCTV의 영향일까? 그것은 아니다. 위에서 봤듯이 CCTV의 갯수가 많은 도시는 따로 있으며, 인구 1000명당 CCTV 갯수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서울은 전세계의 대도시들 중 53위에 불과하니 말이다.
유교문화의 영향일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가 태어나 살았던 나라는 중국이기 때문이다.
불교문화의 영향일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가 태어나 살았던 나라는 인도이고, 불교가 국교인 나라는 동남아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통해 남의 눈치를 보는 문화를 습득했기 때문일까? 도둑질과 관련한 소유욕은 원초적인 욕구라서 제어하기가 쉽지 않다. 남의 눈치 때문에 도둑질을 억지로 참아야 한다면 핸드폰이나 노트북이 놓인 카페 테이블 주변에는 곁눈질로 물건을 훔쳐보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의 영향일까? 지금도 생각나는 국민학교 1학년 때의 여름방학 과제가 있다. 공중도덕 50개를 적어오라는 것이었다. 가족과 친척, 동네 사람들이 '공중'의 전부였던 국민학교 1학년에게는 너무 벅찬 숙제였다. "줄을 설 때 새치기를 하지 않는다"와 같은 것으로는 도저히 50개를 채울 수 없어서 "줄을 설 때 시끄럽게 하지 않는다"를 추가했지만 그래도 50개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이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줄을 설 때 밀지 않는다", "줄을 설 때 옆사람을 쿡쿡 찌르지 않는다"까지 추가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의 50개가 기억나지 않는다. 배웠더라도 다 기억하지 못할 뿐더러 학교 다니면서 남의 핸드폰이나 노트북을 훔쳐서는 안된다는 것까지 세세하게 배우는 것도 아니다. 교육을 통해 사회생활을, 아니 그보다 공중도덕을, 아니 그보다 양심을 가르치기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다른 나라에서 가르치는 사회생활의 기초예절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같다.
한국의 뛰어난 치안의 원인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생각해보자면... 한국 사람들이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정형화된 표현을 따르자면 한국 사람들은 준법정신, 예의범절, 공동체의식 등을 태생적으로 갖춘 민족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양심적인 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양심의 소리에 민감한 모습, 양심의 소리를 존중하고 이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 이것이 법으로 강제되지 않아도 양심을 따라 훌륭한 치안을 유지하며 살아온 한국사회의 근원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로마서2:14-15에서 말하는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하는 율법 없는 이방인"이 혹시 한국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로마서 2:14- 15)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또한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에는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생각, 아니 그보다도 내 것이 아닌 것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 무의식적 태도는 남의 입장과 심정에 대한 배려가 기저에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내가 물건을 잃어버린다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를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의 물건에는 손을 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마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 남에게 베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사회적 실천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7:12)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이러한 특별한 점은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고 흥왕하게 된 역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이 삶 속에 흐르고 있었고,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왔으니 말이다. 우리나라는 선교자들이 들어오기 전에도 성경말씀을 통해 이미 복음이 전해진 나라였다는 역사가 이를 나타내는 것 같다.

또한 '하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믿으며 사는 모습과도 깊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천국을 향한 삶의 첫걸음은 회개이고, 회개의 첫걸음은 잘못과 죄에 대한 깨달음이며, 잘못과 죄에 대한 깨달음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과 더불어 양심에 근거하여 잘못과 죄를 인식하는 것이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4:17)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바울이 말했던 '범사에 종교심이 많은' 민족이 실은 우리 민족이 아닐까 싶다.

(사도행전 17:22)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치안이 훌륭한 우리나라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양심적인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어느 민족보다 하나님과 가까운 민족,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획 속에 두신 민족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깨닫기 어렵지만 이 훌륭한 치안을 이루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우리 자신이 편하고 안전하다. 남미에서는 핸드폰을 보관하는 데에 있어서 남자들은 바지 앞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여자들은 웃옷 속옷 속에 넣고 다닌다고 한다. 심지어 강도를 대비해서 여분의 휴대폰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고도 한다. 유럽에서도 가방은 반드시 앞으로 매거나 허리춤에 고정해서 손으로 붙들고 다녀야 한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카페에서 가방이나 핸드폰이나 노트북을 자리에 두고 주문을 하러 가거나 화장실을 다녀올 수 있는 것과 같이, 치안을 염려하면서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내 것이 아닌 물건에는 손을 대서는 안된다는 생각, 아니 그보다도 내 것이 아닌 물건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 무의식적 태도가 이와 같은 훌륭한 치안 속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할 때, 왜 하나님께서 십계명 중에서 도둑질과 탐욕에 관한 계명을 주셨는지 깊이 이해할 수가 있게 된다.

(신명기 5:19)
19 도둑질 하지 말지니라

(신명기 5:21)
21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대한민국의 삶을 통해서, 이 계명이 지켜질 때 안전하고 편안하고 편리한 생활을 누릴 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이 계명들은 하나님께서 주셨지만, 실은 하나님의 입장과는 무관하게 전적으로 사람들을 위한 계명인 것이다.

남의 것을 탐내어 훔쳐가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와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눈길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를 비교해보자. 각 사람을 한 명 한 명 바라보면 그 차이는 크지 않을지 모르지만, 각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사회를 바라보면 그 차이가 실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탐나는 대로 행동하는 삶의 결과와 남의 것에 대해 탐심을 품지 않는 삶의 결과는 매 순간 그 차이가 크지 않을지 모르지만, 사회를 이루는 각 사람의 행동을 쌓아놓고 보면 그 차이가 실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방종의 결과와 자유의 결과를 비교해서 보여주는 실제적인 사례로 생각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정의할 수가 있게 된다. 양심을 따라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킬 때,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회 속에서 자유로운 삶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의 표현을 따르면,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는 성령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3:17)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성경의 표현을 따르면, 순종을 따를 때 진정으로 의와 거룩함과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로마서의 말씀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로마서 6:16-23)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한국에서 살면서 성경을 읽다보면 삶 속에서 마주친 이 생각 저 생각이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