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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모습

강원희 선교사, "히말라야의 슈바이처"

아리마대 사람 2023. 6. 14. 14:11

네팔·방글라데시 등에서 40여 년간 의료 봉사를 하며 '히말라야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강원희 선교사가 (2023년 5월) 26일 오후 4시께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고인은 1934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나 6·25전쟁 중이던 1·4 후퇴 때 남한으로 피란 내려와 전쟁의 비참함을 겪으며 평생 아픈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

세브란스 의대(현 연세대 의대)를 다니면서 슈바이처 전기를 읽고 감동을 받아 틈만 나면 무의촌 진료를 다녔다. 1961년 의대를 졸업한 그는 1970년 강원도 간성·속초 등 무의촌에서 진료소를 운영했다. 황해도 피란민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북한과 가까운 강원도에서 의술을 시작한 것이었다.

1970년 속초로 가서 '대동의원'을 열었다. 병원은 잘됐다. 환자가 넘치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마음 한구석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선교사를 꿈꿨다고 한다. 은혜의 빚을 지고 있고, 갚으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6년 존경하던 한경직 목사에게 '선교사로 가고 싶다'는 말을 했더니 한 목사가 네팔을 추천했다.

1982년 49세에 선교사가 되려고 잘 되던 병원을 정리했다. 고등학교 1·2학년생 두 자녀를 둔 그가 늦깎이 선교사가 되려는 것을 부인이 극구 말리자 "내 인생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은데 생선에 비유하면 머리와 꼬리가 아니라 가장 좋은 가운데 토막을 바치고 싶다"고 설득했다.

고인은 1982년부터 네팔·방글라데시·스리랑카 등에서 40여 년간 의료 봉사 활동을 펼쳤다.

1982년 당시 네팔은 공산 세력이 득세했고, 서점에는 김일성 책 천지였다. 현지 청년들은 "남한에서 왔다"는 그에게 "죽여버리겠다"며 으르렁댔다. 그는 주말마다 산동네를 찾아다니며 병자들을 고쳤다. 출산부터 중환자 수술까지 거의 모든 환자를 돌봤다. 먼 곳으로 왕진할 때는 하루 열대여섯 시간 걸은 적도 있었다. 그곳 환자들은 "이상하게 닥터 강이 치료하면 염증도 안 생기고 잘 낫는다"고들 했다. 그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낮에는 환자들을 돌보고 밤에는 잘 시간을 쪼개며 현지 언어를 배우는 등 열정적이었다. 봉사의 마음가짐도 중요하지만 실력이 없으면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생각에 틈나는 대로 귀국해 대형병원에서 새로운 의료기술을 익혔다.

위험한 순간도 많았다. 1998년 힌두교 성지인 네팔 돌카의 산골짜기 병원에서 병원 사역자 중 한 사람이 간호사 방에 붙은 힌두신(神) 포스터를 찢는 일이 벌어졌다. 성난 군중이 병원으로 밀어닥쳤다. 먼저 기도를 하고, 죽을 각오로 그들을 맞았다. "실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내가 책임지겠다"고 빌었다. 사람들은 몇 시간 만에 씩씩대며 돌아갔다. 그는 "그동안 친구처럼 신뢰를 쌓은 덕에 살아남은 것 같다"고 했다.

1985년이었다. 네팔 응급실로 배 전체에 염증이 퍼진 환자가 실려왔다. 수술에 들어가자 헌혈하겠다던 환자 아들들이 도망쳐 버렸다. 그냥 두면 죽는 상황이었다. 얼른 자신의 피를 뽑아서 맞춰 보니까 환자와 맞아서 그는 자신의 팔을 걷고 200cc 혈액 팩 2개를 뽑았다. 병원장이 뛰어와 말리는 바람에 그 정도에서 그쳤다. 환자는 한 달여 만에 퇴원했다. 자신의 피를 뽑아 네팔인에게 수혈하고, 환자가 퇴원하면 식료품을 사 들고 집까지 찾아갔다. 네팔 현지인들은 그를 '바제(네팔 말로 할아버지)'로 부르며 '히말라야의 슈바이처'로 칭송했다.

고인은 1999~2002년 경북 안동성소병원장을 맡았다가 병원 경영이 안정되자 병원장 자리를 내놓고 곧장 에티오피아로 떠나 7년간 그곳 오지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펼쳤다.

이같은 공로로 고인은 보령의료봉사상(1990), 연세의학대상 봉사상(2000), 제24회 아산상 의료봉사상(2012), 연세를 빛낸 동문상(2012), 국민훈장 동백장(2014), 제17회 서재필 의학상(2020) 등을 받았다.

고인은 2011년 자전 에세이 '히말라야의 슈바이처'에서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그렇게 섬기며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이 부르시는 장소가 한국일 수도 있고, 네팔일 수도 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자리가 어디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언제 어디서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 부르심을 따를 뿐이다. 살아도 천국이고 부르시면 정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닌가"라고 했다.

같은 해 여든을 앞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종교 다큐멘터리 영화 '소명 3-히말라야의 슈바이처'(감독 신현원)가 개봉됐다. 의료선교의 의미를 삶으로 증명한 그의 모습에 영화는 3만명 넘는 관객을 모으며 잔잔한 감동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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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참가했던 글짓기 대회에서 우리나라의 효자, 효녀에 관한 이야기들이 실린 책을 부상으로 받은 적이 있다.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었고,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이야기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 하나는 가뭄 때에 먹을 것이 부족한 와중에 고기를 먹고 싶어하는 부모님을 위해 자신의 허벅지살을 도려내어 드시게 하려 했다는 어느 효자의 이야기이다.
당시의 어린 나이에 읽기에는 워낙 자극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인지 책에 실려있던 여러 이야기들 중에서 유독 이 이야기만이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요즘의 시각에서 보자면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는 잔혹한 범행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 이야기는 아마도 자신의 일부를 희생해서라도 부모를 섬기고자 했던 그 마음의 자세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 것이다.
“내 인생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은데 생선에 비유하면 머리와 꼬리가 아니라 가장 좋은 가운데 토막을 바치고 싶다”
강원희 선교사님의 삶은 어릴 적 이야기 책 속에서 유일하게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효자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드려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했던 선교사님의 마음의 자세가 자신의 일부를 희생해서라도 부모를 섬기고자 했던 효자의 마음의 자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선교사님은 이야기 속의 효자의 마음과 같이 진짜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존경하고,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나도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