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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개론 (데이비드 포슨 목사)

아리마대 사람 2023. 8. 5. 01:03

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에 관해 나누고자 합니다. 데이비드 포슨 목사님의 강의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강의 내용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다양한 해석 중 하나로서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데이비드 포슨 (1930. 2. 25 - 2020. 5. 21): 데이비드 포슨은 영국 북부에서 성장하면서 농부가 되고자 했지만, Durham 대학교에서 농업학과 학사과정을 마칠 무렵, 하나님이 자신을 기독교 목회자로 부르시는 것을 느끼고, 케임브리지에 있는 감리교 신학 대학인 Wesley House에서 신학학사와 예술학석사를 취득했습니다. 감리교 목사로 시무하던 중 유아세례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교단을 떠났습니다. Gold Hill 침례교회와 Guildford 침례교회(Millmead)의 목사로서 시무하면서 복음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 사이에서 성경 교사로서 명성을 쌓았습니다. 교회의 병자와 노인들을 위해 제작된 교육용 테이프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고, 그가 사역하는 동안 Millmead는 영국에서 가장 큰 침례 교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1979년 Millmead를 떠나 아시아, 호주, 아프리카, 영국, 유럽 및 미국의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전 세계 순회 성경 교육 사역에 참여했습니다. 저술가이자 연설가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수백만 부 이상의 저서가 120개국 이상에 배포되었습니다. 2020년 5월 21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성경의 유래


영어의 바이블(The Bible), 독일어의 비벨(Die Bibel), 프랑스어의 비블(La Bible)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비블리아(biblia)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라틴어는 그리스어의 비블리아(biblia)에서 나왔고, 이것은 그리스어의 비블로스(biblos)의 복수형으로서 '책'을 의미합니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고대에는 갈대줄기를 엮은 '파피루스'에 글을 기록하였기에 그 책을 '비블로스'라고 했습니다.
또한 비블로스(Byblos)는 지중해 연안 페니키아의 항구도시 '쥬베르'의 헬라어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이 항구도시의 역사는 기원전 수천년으로 소급되는데, 이곳은 고대 오리엔트 세계의 교역의 중심지로서 특히 이집트산 파피루스의 집산지였습니다. 최초의 성경 사본들은 아프리카에서 그리스로 수입된 파피루스에 쓰여졌는데,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파피루스 원료를 '비블로스(byblos)'라 부르기 시작했고, 이것이 '파피루스 두루마리' 또는 '책'이라는 뜻이 되었습니다. 후대에는 '책 중의 책'이라는 뜻에서 성경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시작은 창세기입니다.


성경은 한권의 책이 아니라 66권의 책이 모아져서 구성된 책입니다.  
성경은 우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한 시간의 범위는 다른 역사책 보다 먼저 시작되었고 늦게 끝납니다. 이는 우주의 시작부터 우주의 종말까지, 심지어 영원까지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각도에서 보신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긴 사건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일반 정치사나 우주사나 문화사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사건들을 신중하게 선택해서 기록했습니다. 그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일들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다른 역사서와는 전혀 다릅니다. 성경의 주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 세상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가?
둘째,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기에 완전하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 큰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를 말해 줍니다. 그 후 성경의 각권은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주처럼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 해결책은 사람을 구속하여 자아중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자아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입니다. 구속이란 말은 벗어나게 한다, 구해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66권의 책은 위대한 극본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극본은 ‘구속극’이라고 할 수 있으며, 창세기는 이 극본의 서막입니다.


창세기는 모든 것의 기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은 모두 두루마리로 되어 있으며, 유대인들은 성경 각권의 첫 글자로 제목을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각권의 처음 몇 글자만 보면 그 책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본래 제목은 '태초'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약 250년 전에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 때 이 책의 이름이 '창세기'로 변경되었습니다. 그 뜻은 기원 및 최초라는 뜻입니다. 
이 책의 이름은 아주 적절합니다. 이 책이 우주와 해와 달과 별의 기원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기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식물, 조류, 어류, 각종 동물과 사람의 기원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 성별과 혼인과 가정의 기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류 문명과 정부의 기원을 기록하고 있으며 문화, 예술, 과학의 기원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와 사망, 살인과 전쟁의 기원을 기록하고 있으며, 심지어 제사의 기원과 동물과 산 사람을 드리는 제사의 기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아주 놀라운 책입니다. 비록 50장으로서 매우 짧지만 위에서 말한 모든 기원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만약 창세기 앞부분의 몇 장이 없다면, 뒤의 성경은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창세기는 가장 근본적인 의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사람은 사는 목적은 무엇이냐?', '사람은 왜 다 죽느냐?' 등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문제들은 우리가 논하려 하지도 않고 생각하려 하지도 않는 문제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필연적으로  죽습니다만,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사망의 공포를 위장하려고 합니다. 삶과 죽음은 인생의 근본적인 의문이며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이 필요하지만, 세상의 그 누구도 우리에게 답을 주지 못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삶의 분주함에 매몰되어 이러한 근본적인 의문들을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살게 됩니다.
또한 창세기는 '우주는 어떻게 왔느냐?'의 문제도 다룹니다. 우리는 우주가 어떻게 왔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역사학자들이 그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경과를 기록하거나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과학자들도 우리에게 우주가 어떻게 왔는지를 알려 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계산과 추론을 통해 우주의 시초까지 거슬러 올라가 짐작할 수 있으나, 그 이상은 더 갈 수 없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말할 수 없고, 더욱이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철학자들도 이 근본적인 의문에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유한한 사고력으로 추론하고 추측을 펼칠 뿐입니다. 
또한 창세기는 '죄악은 어디서 왔는가?', '왜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죄악이 있는가?'의 문제를 다룹니다. 철학자들은 머리를 쥐어짜며 죄악의 기원을 우리에게 알려주려 하지만 이에 대한 철학자들의 해석은 항상 추측에 불과합니다. 아무도 진정한 원인을 밝혀주지 못합니다. 오직 한 분만이 이 모든 원인을 밝혀 줄 수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펼칠 때 즉시 한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원인을 밝혀 줄 수 있다는 점으로부터 우리는 '이 책은 사람의 상상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계시인가?'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 밖에 '창세기의 내용은 다만 사람들의 의문에 대한 추측에 불과한가, 아니면 그 의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제시한 것인가?'라는 문제도 만나게 됩니다. 답을 제시할 수 있는 분은 우주 창조에 참여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창조는 그분이 친히 주도하신 것입니다.
우주 기원에 관한 기록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바와 같이 '바벨론 서사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내용은 창세기보다 아주 복잡하나 신뢰도는 창세기보다 아주 미약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주의 기원을 말하려 했으며, 이것은 그 중의 한가지일 뿐입니다. 이런 야사에 비하면 창세기 1장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신뢰도가 높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 때는 반드시 이는 사람의 상상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계시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반드시 믿음의 한 걸음을 내디뎌야 힐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적 접근방법은 하나의 이론을 가정하고, 그 후에 그 이론이 정확한지를 실험을 통해 검증합니다. 이 과정에서는 반드시 이론에 대한 믿음의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과학적 접근방법은 그 기초로서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로 볼 때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과학적인 접근 방법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창세기를 읽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책에서 우리의 문제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는 이론을 가정하고, 그 후에 그 가정한 것이 사실과 부합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창세기는 단지 성경의 첫 번째 책일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의 기초입니다.


성경의 대부분의 진리는 창세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성경 속 진리의 온상이라고 불려집니다. 창세기의 종자가 싹이 나고 자라서 성경의 뒷부분에서 결실하게 됩니다.
창세기의 계시는 성경 전체를 여는 열쇠입니다.
만약 성경이 출애굽기부터 시작한다면 성경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 보았습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는 유대민족에 대해 아무런 흥미도 가질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왜 그들의 역사와 종교를 연구해야 합니까? 오직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만이 흥미를 가지고 읽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도덕에 메말라있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더 좋아지기를 원하지만, 늘 실패합니다. 왜 그럴까요? 출애굽기는 우리에게 답을 주지 못하지만, 창세기는 답을 줄 수 있습니다.
창세기가 있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읽게 되고, 우리 인생을 읽게 되고, 우리 자신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나는 왜 더 좋아질 수 없고, 왜 더 완벽해질 수 없는지를 알게 됩니다. 
창세기를 읽다보면 우리의 조상 아담을 읽게 됩니다. 그의 삶을 읽으면 거울로 나 자신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 속 많은 곳에 아담, 노아, 아브라함, 야곱 등의 창세기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전체 구약성경은 창세기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더욱더 창세기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이 창세기를 인용한 회수는 구약성경을 초월합니다. 신약성경은 창세기 1장부터 6장까지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저자 여덟 명 모두가 창세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책에 대하여 언급하였으며 창세기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혹에 대한 해석을 제공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것이 진리임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창세기의 모든 인물이 실존인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노아 홍수를 사실로 말씀하시기에 저도 사실로 봅니다. 이에 관해 아무리 어려운 문제를 만난다 할지라도 사실로 봅니다. 예수님께서 노아를 실존 인물로 말씀하시기에 저도 노아는 실존인물이라고 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도 보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했다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이 듣고 예수님께 묻기를 '네가 아직 50세도 못되었는데 어찌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하느냐?'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8:56-58)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 분이 하신 말씀은 다 진실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창세기의 기록을 인정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혼과 재혼에 대해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창세기 2장의 내용을 그들에게 보이시며 답은 이 속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창세기는 확실히 모든 성경의 기초입니다. 다른 성경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만약 창세기가 없었다면 다른 성경들은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창세기가 없다면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바울은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고,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서 5:12, 19)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것이 십자가의 핵심내용입니다. 그는 창세기 3장의 내용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가 없다면 다른 성경들은 의미가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만약 창세기가 믿어지지 않는다면, 다른 성경도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만약 창세기의 내용이 진실하지 못하다면, 창조는 우연에 불과한 일이고 우리의 조상은 야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창세기는 많은 공격을 받습니다.


창세기를 믿지 못하게 하면 모든 성경의 기초를 파괴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창세기를 믿지 못하게 되면 다른 성경도 쉽게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세기가 성경의 다른 어떤 책들보다 많은 공격을 받고 많은 변론을 가져오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공격은 두 가지 측면에서 옵니다.
먼저는 과학의 측면에서 옵니다.
과학이 제시하는 질문들 중에는 모든 사람이 아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과학은 창조의 순서와 창조의 속도와 창조의 방법에 질문하고 지구의 연령에 대해 질문하며 사람의 기원에 대해 질문하고 홍수의 범위에 대해 질문하며 홍수 전 인류의 수명에 대해 질문하고 그 밖의 많은 것들에 대해 질문합니다.
청소년들의 경우 학교에서 생물학을 배웁니다. 만약 그들이 학교에서 배운 시각에서 창세기를 읽는다면 참으로 많은 문제들에 봉착하고 혼란스러워 집니다. 솔직하게 이런 문제들을 마주해야 합니다.
이런 공격적인 질문의 배후에는 절대적으로 사단의 공격이 있다고 봅니다.
사단은 성경 속의 두 권의 책을 아주 싫어합니다. 창세기와 계시록 입니다. 특히 사단이 어떻게 세상에 들어왔는지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창세기의 시작 부분과 어떻게 부끄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는지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을 더욱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창세기의 시작 부분과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을 읽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창세기는 고대 근동 지방의 신화에 불과하고, 계시록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두 권의 책을 읽지 않게 된다는 것을 사단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누구일까요?


유대인들의 분류방법을 따르면, 창세기는 다섯 권의 책 중의 한 권입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다섯 권의 책을 모아서 모세오경 또는 오경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다섯 권의 책을 '율법책'이라고 하며, 이는 '가르치다' 또는 '지시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 다섯 권의 책이 창조주 하나님의 지침서라고 믿습니다. 이 다섯 권의 책은 바른 인생을 살게 하므로 반드시 숙독해야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을 매년 한 번씩 반드시 읽습니다. 매주 토라를 일정한 주기로 읽어나가면, 유대력 1년마다 토라 전체를 읽게 됩니다.
유대인들,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일반 역사학자들도 모세오경의 저자를 모세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는 전통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이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모세가 대학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충분한 교육과 지식을 바탕으로 이 다섯 권의 책을 편성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다섯 권의 책에 저자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전통의 관점은 믿을 만 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이 다섯 권의 책을 썼다고 할 때 두 가지 문제가 나타납니다.
첫 번째, 신명기의 마지막 부분에 모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모세가 이 부분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여호수아가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보충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두 번째, 보다 큰 문제는 모세가 창세기 역사 끝난 지 300년 후에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4권에 기록된 사건들은 모세가 살아 있는 동안의 사건들이므로 모세가 이 4권의 책을 쓰는 데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창세기의 사건이 끝난 지 300년 후에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떻게 창세기의 내용을 알 수 있었을까요?
이 점은 초기 인류의 독특한 특성으로부터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문자가 발명되지 않았을 때, 그들은 뛰어난 기억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까지도 문자가 없는 부족들은 여전히 뛰어난 기억력으로 그들 부족의 역사를 말할 수 있습니다. 저녁때 숯불 옆에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들려준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구전의 전통은 원시사회에서는 아주 확고합니다.
당시의 히브리인들도 그러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그들은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출신과 조상들에 관해 알려주기 위해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이 정확하게 전달되었는데, 하나는 족보이고, 영웅 이야기입니다. 부족들도 뛰어난 기억력으로 이 두 가지 사실을 전승했습니다. 창세기의 대부분의 내용은 이 두 가지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영웅들의 이야기 사이에 족보가 끼워져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모세는 친부모와 애굽의 노예들로부터 이런 내용을 들었고 훗날 이 내용들이 책으로 엮어지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한 부분만은 전승의 예외입니다.
창세기의 내용 중에서 한 부류의 구절들은 모세가 구전을 전해들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창세기 1장입니다. 성경이 장절로 나누어질 때 많은 부분은 잘 나누어지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2장 3절까지의 말씀은 모세가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것이 아닙니다. 그 단락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성경의 대부분의 내용과 다른 방식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을 워드 프로세서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워드 프로세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경 저자의 개성, 기억, 깨달음 그리고 관점 등을 통해 그 분의 말씀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모든 계시를 주관하여 모든 결과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하십니다. 성경을 통해 성경 저자의 특성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등에서 우리는 선명하게 모세의 품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 2, 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의 모든 특징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완벽한 숫자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숫자가 없고 문자만 있습니다. 문자로 숫자를 대신합니다. A는 숫자 1로, B는 숫자 2로, C는 숫자 3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많은 숫자들이 등장합니다. 3과 7이 대표적입니다. 3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숫자이고, 7은 성경에서 완전수를 나타냅니다.
창세기 1장에는 3이라는 숫자가 정말 자주 나옵니다.
하나님은 3번에 걸쳐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21)
21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27)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3번에 걸쳐 이름을 지어 부르셨습니다.
(창세기 1:5)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 1:8)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세기 1:10)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은 3번에 걸쳐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7)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16)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창세기 1:25)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은 3번이나 축복했습니다.
(창세기 1:22)
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3)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그 다음은 숫자 7입니다.

창세기 1:1절의 히브리 원문은 일곱 단어입니다.
(창세기 1:1)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하나님께서 창조에 대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만족해하시는 모습이 7번 나옵니다.
(창세기 1:4)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창세기 1:10)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12)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18)
18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21)
21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25)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31)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천지창조에 나오는 날의 수도 모두 7일이며, 이는 아주 선명합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을 제외한 만물의 태초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시작점에서부터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성경이 시작하기 전부터 존재하시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가 생기기 전에 존재하셨고,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분이십니다. 반드시 영원한 분이 계셔야 우주가 창조될 수 있습니다. 이는 무에서 유를 이루는데 반드시 필요한 조건입니다. 무에서 유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그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우주는 영원하신 그분께서 창조하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은 누가 창조하였는가라고 묻는다면 이것은 아주 터무니없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정사각형을 이루는 원형이 있는가?'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왜 터무니없는 질문이냐면, 하나님과 피조물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생각하려면, 피조물이 스스로를 창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존재하셨고, 존재하시고, 영원한 존재이십니다. 성경은 정확히 그분은 영원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영원히 존재하시며, 언제나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이름은 '있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야훼' 또는 '여호와'를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가장 가까운 말은 '항상, 언제나'라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분은 '항상, 언제나' 존재하십니다.
성경은 한 번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증명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며, 항상, 언제나 그곳에 계셨으며, 아무런 해명이 필요 없습니다. 해명이 필요한 것은 각양 각색의 사물의 존재뿐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사실은 현대인의 생각과 완전히 다릅니다. 현대인들은 다른 사물들은 처음부터 존재한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존재만은 증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처음부터 존재하시는 분이고, 다른 사물들의 존재는 증명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창세기는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질문에 답을 주고 있습니다.
모세시대에 이르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해 냈고, 홍해를 가르셨고, 애굽의 군대를 매몰시키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기적을 경험한다면, 더 이상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런 기적들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증명을 필요로 하고, 증명을 요구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믿음으로 우주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눈에 보이는 우주만물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3)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둘째,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1:6)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을 찾고, 그분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고, 그 다음 결과를 기다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이미 계셨음을 가정 먼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범하는 실수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1장의 주제는 창조주이지 피조물이 아닙니다.  이 세계가 어떻게 지음을 받았느냐가 주제가 아니고, 누가 이 세계를 지었느냐에 주제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31절 속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32번이나 등장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핵심은 창조의 이야기가 아니라, 창조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