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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을

<창세기> 2장 - 이름과 관계 (데이비드 포슨 목사)

아리마대 사람 2023. 8. 10. 19:13

창세기 2장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 있습니다.


창세기 2장의 전체 스타일, 내용, 그리고 사건의 시점을 보면 창세기 1장과 매우 다릅니다.
창세기 1장의 경우에는 눈을 감고 바라보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2장의 경우에는 눈을 감고 바라보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느낌이 아니라, 마치 땅에 서서 사방을 보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런 느낌을 갖게 되는 이유는 창세기 2장의 주인공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1장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그분의 각도에서 보았습니다. 하지만 2장에 들어와서는 전체 화면의 주인공이 인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인간도 특별한 신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장에서는 통칭되었지만, 2장에서는 인간에게 특별한 이름이 붙여집니다.
1장에서는 인간을 다만 사람, 남자, 여자로 통칭하였지만, 2장에서는 아담, 하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 각각이 특별하고 고유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을 그냥 하나님(엘로힘)이라고 했는데, 2장부터는 그분을 '여호와 하나님'(야웨 엘로힘)이라고 불렀습니다.
(창세기 2:4)
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영어성경에는 '야웨 엘로힘'을 대문자 'LORD'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원래 히브리어 원본 성경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다는 표시입니다.
히브리어에는 모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이름을 다만 자음 네 글자 'YHWH'로 기록했습니다. 여호와(야웨)란 이름이 이렇게 생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이 이름을 'Yahweh God'으로 기록한 성경도 있습니다.
앞에서 '항상, 언제나'라는 말이 하나님의 이름인 '야웨' 또는 '여호와'를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가장 가까운 말이 아닐까 했는데요. "야웨"라는 말은 '존재한다, 있다'는 동사의 분사형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존재하는, 항상 있는'의 뜻이 됩니다. 이 단어가 하나님의 이름인 것입니다.


2장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고, 남자의 이름이 나오고, 여자의 이름도 나옵니다.

 

이 장에는 많은 이름이 나오는데, 인명뿐 아니라 지명도 나옵니다. 그저 '땅'이라는 통칭이 아니고, 개별적인 고유 지명이 나옵니다. '하윌라', '구스', '앗수르' 등의 이름이 나오고, 그 밖에 '에덴'같은 것도 나옵니다.
땅만 이름이 생긴 것이 아니고 강에도 이름이 생겼습니다. 여기서는 4대강을 말씀하고 있고, 그 중 두 개는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힛데겔(티그리스)'과 '유브라데(유프라테스)' 강입니다.
강의 위치를 통해 볼 때, 에덴은 터키 동북쪽이거나 아르메니아 근처일 것입니다. 아라랏 산은 현재도 여전히 터키에 있고, 많은 사람들이 방주의 흔적을 찾으러 그곳으로 갑니다. 이렇게 이름으로 그 지점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름의 중요성은 다만 이렇게 위치를 알려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름은 더욱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창1장에서는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통칭하였는데, 이 단어는 '삼(3)위'라는 의미입니다. 이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단수 동사를 사용합니다. 이 하나님은 인간과 같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7)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는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인간이 짐승들과 다른 큰 특징은 인간만 유일하게 창조주와 닮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과 동일하게 '영원(infinity)'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피조물에도 없는 특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동물에게도 이 특징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침팬지가 기도하는 모습은 결코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2장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지만, 또한 인간은 하나님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과 같지 않으시며, 인간도 결코 하나님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같은가 하면, 또 같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과 가까이, 친밀하게 살도록 하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와 다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분을 경외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친밀하게 아빠라 부르고 원하는 것을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또는 겁이 나거나 위축되어서,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 친밀함과 경외함 사이의 균형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첫 부분인 1-2장은 이 균형을 알고 이해하도록 도움을 줍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의 뜻은 '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처음 사람을 지었다는 뜻입니다. 그의 아내 이름은 하와이며 '생명이 있는(lively)'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이름들은 모두 그 이름 속에 묘사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심지어 의성어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그 이름을 들어 보면 그냥 어떤 물건의 소리와도 같습니다. 마치 뻐꾸기가 뻐꾹하는 소리로 이름 지어진 것과 같습니다.
사실 남자가 하나님의 분부대로 동물에게 이름을 지을 때, 그가 그 동물을 묘사한 바가 바로 그 동물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창세기 2:19)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성경에 나타난 이름은 묘사하는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그에 따르는 권세도 있습니다. 이름을 짓는 사람이 자가 지음 받는 자를 다스릴 권세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아담이 동물들에게 권세를 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담이 또한 아내의 이름도 지었지요. 그래서 오늘날 여자들이 결혼 이후에 남편의 성을 따르고, 자녀를 낳으면 남편의 성을 따르는데, 이러한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이름들은 이러한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 관계의 3차원

 

인생의 의미는 관계에 있으며, 인간은 많은 관계의 중심점입니다. 관계는 3가지 측면으로 구분하는데, '위로의 관계', '아래로의 관계', 또한 '옆으로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수직적인 '위로의 관계'가 있고, 대자연과는 수직적인 '아래로의 관계'가 있으며, 그 밖에 나와 타인과의 수평적인 '옆으로의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1. 첫 번째 관계는 인간과 하나님께서 지으신 생물들 간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생물을 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생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고, 생물들은 인간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권세가 동물들을 학대하거나, 소멸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점은 동물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이 점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유럽 어느 나라에서 여자들 몇 명이 '바다표범을 해치지 말라'고 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낙태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쉽게 결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바다표범의 가치를 사람의 가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니까요.
예수님께서 이천 마리의 돼지 떼를 희생시키면서 한 사람을 도와 가족 곁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귀신들린 자가 고침받은 사건보다 돼지 떼가 죽은 사건을 더 크게 보고 예수님께 떠나시기를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경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동물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과 동물은 확실히 다른 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동물은 사람 아래에서 사람을 섬기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심지어 홍수 이후에는 동물이 사람의 음식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9:3)
3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홍수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다시 씨 있는 채소만 먹으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홍수 후에는 채식주의를 취소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29)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인간을 광야 가운데 두지 않고 동산에 두셨고, 뿐만 아니라 그곳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2:8)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세기 2:15)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그래서 인간은 자기 하위의 자연과의 관계가 아주 중요합니다. 인간은 하위 자연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자연계를 경작하면서 실용적으로 사용해야 하고, 또한 잘 지켜서 다듬고 아름답게 관리해야 합니다. 마치 어느 농부가 자기 밭에 절반은 제비꽃을 심고, 절반은 감자를 심어서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답게 가꾼 것처럼 말입니다.

2. 두 번째 관계는 인간과 하나님 간의 관계입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두 그루 나무가 아주 중요합니다. 한 나무는 오래 살게 해주는 나무이고, 다른 한 나무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나무입니다.
두 그루 나무는 사실 본래 아무런 마술적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마치 성찬처럼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물질적 통로를 통해 우리에게 영적인 축복과 저주를 전달하십니다. 규례대로 성찬에 참여하지 않으면, 사람이 병이 들고 심지어 죽기까지 합니다. 떡과 포도주는 본래 아무런 신비한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떡과 포도주라는 물질적 통로를 통해 그분의 은혜와 심판을 전달하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는 이 두 그루 나무가 아무런 영적인 신비한 작용은 없지만, 영적인 원칙을 대표한다고 봅니다.
두 그루 나무 중의 한 나무는 '생명나무'입니다.
이로 보아서 아담과 하와는 애초에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것은 아니고 사망의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다면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만, 아직 사람이 왜 죽는지에 관해 정확히 아는 과학자는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 죽는다는 것만 압니다.
인간의 몸은 마치 정교한 기계와 같아서 계속 잘 먹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운동을 하면 몸은 자체적으로 보완이 됩니다. 마치 사람의 피부가 몇 주마다 한 번씩 새로 바뀌는 것처럼 말입니다.
침실에 많은 존재하는 먼지의 대부분은 우리 몸의 피부에서 떨어진 잔해들입니다. 우리의 몸은 스스로 신진대사를 합니다. 마치 대단히 정교한 기계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몸의 기능은 왜 영원히 계속 잘 돌아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을 주는 과학자는 아직 없습니다. 그들은 현대의 불로초를 찾고 있습니다. 바로 생명 대사 활동이 정지되지 않고, 계속 돌아가는 비결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비결은 바로 생명나무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에덴 동산에 생명나무를 두셨습니다. 사람이 이 생명나무 과실을 먹으면 영원히 삽니다.
(창세기 3:22)
22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사람은 죽지 않는 존재로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받으면 죽지 않게 됩니다.
두 그루 나무 중의 또 다른 나무는 매우 중요한 나무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나무 이름에 담긴 '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이며, '경험을 통해서 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아담이 하와를 '알고' 하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17)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이 말씀은 "나는 너희들이 선악을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보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에게 순수함, 순진함을 유지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극적인 것은 오늘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마다 더 이상은 순수해지거나 순진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일단 잘못을 저지르고 나면 다시는 이전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혹시 용서를 받았을 수는 있지만, 순수한, 순진함의 본성은 이미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손실입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순수하고 순진할 때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20)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순수함, 순진함은 그 자체가 가장 큰 행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순수함, 순진함을 유지하라고 하시면서 왜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두셨을까요?
이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나는 도덕적 권세를 갖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임의대로 옳고 그름을 결정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옳고 그름을 신뢰하라는뜻입니다.
부모들은 자식이 부모의 충고를 잘 듣기를 원합니다. 부모의 말을 안 듣고 고생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부모의 '도덕적 권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어느 것이 너희에게 좋은 것이고, 어느 것이 해로운 것인지를 가르쳐 줄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에게 '너희들이 지구의 주인이 아니고 내가 주인이다'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녀들이 그렇듯이, 인간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굳이 자신이 한번 체험해서 알려고 합니다. 이 결과가 순수함, 순진함을 잃어버리고, 다시는 이전과 같지 않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참으로 비극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가 대표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 대한 도덕적 권세를 갖고 계시고, 옳고 그름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3. 세 번째 관계는 타인과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위로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아래로는 자연계와 교제할 필요가 있고, 또한 옆 사람과도 상호 작용을 통해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만약 하나님과만 교제한다면, 사람이 만약 집 안에서 강아지만 돌보며 산다면, 그 삶은 온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수평적 네트웍을 맺고 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샬롬이라는 말을 잘 아시죠? 참으로 아름다운 이 단어는 외부적인 평화, 내부적인 평강, 정의, 질서라는 뜻과 함께 '조화(harmony)'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의 조화, 하나님과의 조화, 자연계와의 조화, 타인과의 조화... 이보다 더 좋은 축복의 언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창세기 2장에는 조화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창세기 2:17)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아담아, 만약 네가 이 조화를 깨뜨리면 반드시 죽는다'라는 뜻입니다. 비록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은 즉시 죽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시간은 점점 정지되어 갔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열매 하나 먹은 정도의 이런 작은 죄를 지었는데 처벌이 너무 중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일단 죄를 지으면 나는 반드시 너희 생명에 한계를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죄악이 영원히 너희 안에 존재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을 배신한 인간이 영원히 살아가게 하신다면, 인간은 계속 죄를 지으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를 영원히 훼손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도덕적 권세를 받아들이지 않은 인간들의 생명에 한계를 두셨습니다.
또한 인간은 수평적인 관계가 필요한데, 바로 '돕는 배필' 즉 삶의 동반자를 통해서입니다. 애완동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지만 그것들은 결코 인간 사이의 관계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그 밖에 창세기 1장에는 남녀가 존귀함에 있어서 동등하다고 말합니다. 나중에 보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타락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운명에 있어서도 남녀는 동일한 상태에 처해집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남녀를 논할 때, 남녀 모두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말합니다.
(창세기 1:27)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지만 창세기 2장에서는 남녀가 서로 다른 기능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음의 4가지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여자는 남자로부터 지어졌습니다. 여자의 존재는 남자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from man"
둘째, 남자가 먼저 지음 받고, 이후에 여자가 지음을 받았습니다. "after man"
그래서 남자는 장자의 책임을 담당해야 합니다. 이 점은 창세기 3장에서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죄의 책임을 하와가 아닌 아담에게 대표로 물으셨습니다. 아담은 반드시 하와를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9)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셋째, 여자는 남자를 위해 지음을 받았습니다. "for man"
아담은 장가들기 전에, 이미 하고 있던 "일"이 있었습니다. 남자는 "일"을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창세기 2:15)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하지만 여자는 "관계"를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창세기 2:18)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이는 남자는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고, 여자는 밖에서 일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중점은 하나님께서 남녀를 지을 때, 남녀 각각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넷째, 여자는 남자와 동반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with man"
남자가 여자를 위해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름을 짓는 자에게 지음 받는 자를 다스릴 권세가 있습니다.
(창세기 2:23)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그러나 동시에 두 사람 사이는 동반자 관계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24)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동등한 관계는 아닙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한 표를 가지면 어떻게 표결이 되겠습니까? 동반자 관계이지만 그 중 한쪽이 책임을 맡아야 하는 관계입니다. 그렇다고해서 남자가 임의로 리더십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올바른 연합과 동반자 관계입니다.
만약 남자가 리더십을 내세우며 상대방을 지배하려 할 때는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여자가 리더십에 반발하면 연합을 망치게 됩니다.


부부와 가정   


창세기 2장은 많은 일들을 얘기합니다. 모두 오늘날의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들입니다.
성관계는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원래 성관계는 악한 것이 아니고, 선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매우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에게 반드시 부모가 되라는 것만은 아니며, 동반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관계를 통한 기쁨은 일부일처 사이에 주어진 고유한 권리입니다. 일부일처의 뜻은 부부 쌍방이 종신토록 나에게는 이 배우자뿐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결혼에 관해 두 가지 요소로 설명합니다. 떠남과 연합입니다.
(창세기 2:24)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결혼은 반드시 육체적 측면, 사회적 측면에서 모두 떠남과 연합입니다. 그 중 어느 한 쪽이라도 부족하면 결혼이라고 하지 않거나, 올바른 결혼이 되지 못합니다. 남녀가 성관계를 하지만, 그것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결혼이 아니라 음란이 됩니다. 결혼식을 통해 사회의 인정은 받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 연합이 없다면, 이러한 것은 행복한 결혼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결혼 관계가 다른 어떤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배우자의 중요성은 타인과의 관계보다 더욱 큽니다. 심지어 자녀와의 관계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부부는 모든 관계에서 반드시 서로를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부부 사이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서로 간에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하고, 상대방에게 완전히 열어 놓아야 하고,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관계입니다. 
(창세기 2:25)
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인간에게는 여러 관계가 그물망처럼 얽혀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수평으로는 동반자/동료와의 관계이고, 아래로는 자연계와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아래의 자연계를 통치해야 하고, 반드시 위로 하나님께 순복해야 합니다. 또한 반드시 자기 옆의 동반자들과 서로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야 할 3가지 기본 관계이고, 우리는 이 3가지 기본 관계를 올바르게 잘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죄가 들어온 이후부터 이러한 관계가 하나 하나 파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