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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아리마대 사람 2023. 7. 29. 14:15

CBS가 만드는 삶과 신앙에 관한 이야기인 '잘 믿고 잘 사는 법'이라는 프로그램의 64번째 에피소드인 김학철 교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동영상 참조)

(김학철: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마태복음 해석』(대한기독교서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문학동네),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대한기독교서회), 『고전으로 읽는 성서 - 마태복음서』(EBS Books) 외에 십여 권의 (공)저역서 및 30여 편의 논문을 썼다. 한국신약학회 편집위원장, 한국기독교교양학회 학술진흥위원장, 한국기독교학회 편집주간 등을 역임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교수로 그리스도교 교양학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어떤 분들은 다음과 같이 되물으실 수 있습니다. 
"성경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되어있으니 믿으면 되지. 그 이상의 말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그런 분들은 그냥 믿으시면 됩니다.
그런데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지성적 차원, 교양적 차원, 역사적 차원에서 알아보고자 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 '사실'이라는 말에 대한 정의와 분류


어떤 것이 사실이냐를 묻기 위해서는 먼저 '사실'이라는 말에 대한 정의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전적으로 '사실'이라고 하는 말의 정의는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일 혹은 현재에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할 때는 '실제'라는 말, 그리고 '있다, 있었다'라는 말이 너무 간단한 말이지만, 사실 학문적으로 들어가서 보면 그렇게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서양철학사의 상당 부분이 '무엇이 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을 '존재론'이라고 부르는데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가 서양철학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먼저 이에 관해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있다'와 '없다'라고 하는 것의 간략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에 종이가 있습니다. 이 종이는 관찰이 가능합니다. 이것을 계량할 수도 있습니다. 폭과 길이, 면적을 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종이가 있다'라고 하는 것은 반복적으로 관찰 가능하며 계량화해서 수치로 나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종류의 '있다'입니다. 이것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한편 다른 종류의 '있다'도 있습니다. 제 마음 속에는 제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반복적으로 관찰하고 계량해서 수치로 나타낼 수 있을까요? 제가 "내 마음 속에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어"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주관적 사실'입니다. 주관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말을 하고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고, 자식을 먹이고, 자식을 입히고, 자식이 잘되도록 계획하는 등 그 말에 부응하는 행동을 하면, 옆에 있는 사람도 저의 행동을 보고서 "아, 저 사람 마음 속에는 자식을 향한 사랑이 있어"라고 상호주관적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상호주관적 사실'이 됩니다.
그런데 만일 제가 "내 마음 속에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어"라고 말을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잘 알 수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 사람의 마음 속에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는가?"라고 생각하거나, "저 사람이 평소에 자식 대하는 거 보니까 저게 사랑하는 건지 집착하는 건지 모르겠어"라고 생각하거나, 어떨 때는 "사랑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워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내 마음 속에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어"라고 하는 말은 오로지 '주관적 사실'만이 되고 맙니다.

이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여기에 종이가 있습니다. 관찰이 가능합니다. '객관적 사실'입니다.
제 마음 속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주관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주관적 사실'입니다.
제가 그 말을 하고 거기에 부응하는 행동을 합니다. 그러면 '상호주관적 사실'이 됩니다.


또한 '사실'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두 종류의 사실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과학적 사실'입니다.
종이가 여기 있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고, 자연과학적 사실입니다. 이것은 반복적으로 관찰 가능하고, 계량해서 수치로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모든 자연과학의 대상들입니다. 반복적으로 관찰 가능하고 계량해서 수치로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을 흔히 '객관적 사실'로 부르고 '실증적 사실'이라고도 부릅니다.
두 번째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것은 과학적 사실(실증적 사실)하고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 한 번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흐르고 그 과정 중에 한 번만 일어납니다. 이것은 반복할 수가 없고, 반복적으로 관찰할 수도 없습니다. 계량화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3·1운동하고 중국에서 있었던 5·4운동을 어떻게 계량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과학적 사실'과 '역사적 사실'이라는 두 종류의 사실이 있는데,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과거에 일어났었던 일'이고, 다른 하나는 '조사되어 기록된 과거'입니다. 이 두 가지 차원을 모두 '역사적 사실'이라고 부릅니다. 전자는 정말로 일어났느냐를 문제 삼는 것으로서 실증이라고 합니다. 후자는 그것을 조사해서 기록한 과거를 가리키며, 이것은 해석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모든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석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E. H. Carr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역사적 사실을 두고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과 그것을 기록한 과거, 이 실증과 해석을 하나로 묶어서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2.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접근 방법


이제 '부활은 역사적 사실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준비를 어느 정도 갖추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하고 그것이 역사적 사실로서 자격을 갖춘다고 말할 때, 어떤 방법론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크게 두 가지 종류의 방법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론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가정하는 겁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풀리는 숙제보다 풀어야 할 숙제가 더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종류의 문제는 풀릴 것입니다. "아니 왕이 그렇게 바쁜데 어떻게 그걸 다 해?" 또는 "세종대왕이 그렇게 천재야? 훈민정음을 어떻게 만들어?" 이런 의문점들은 풀리겠지만, 조선왕조실록, 동국정운, 훈민정음해례본 정인지서문 등 훈민정음과 관련된 어마어마한 다른 역사적 자료들을 다 무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 말이 성립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방법론 중의 하나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가정해보고 무엇이 더 설명하기 편한가를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없었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었대"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풀어야 할 숙제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훨씬 더 그럴듯합니다. 개연성과 확률의 차원에서 훨씬 더 그럴듯합니다. 역사적 사실은 개연성과 확률의 영역에서 실증됩니다. 역사적 사실은 자연과학적 사실과 달리 역사적 사실 나름의 규범을 갖습니다.


두 번째 방법론은 어떤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언이나 기록이나 고고학적 유물들이 일관성 있고 적절한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것, 이순신 장군은 정말로 있었다고 말하는 사료들, 유물들, 그리고 공적인 증언과 사적인 증언을 모두 포함하는 증언들이 일관성이 있고 적절한가를 묻고, 그게 일관성과 적절성을 갖추었다면 역사적 사실로 등재가 되는 겁니다.

 

3. '부활'에 대한 이해

 

역사적 사실로서 '부활'에 접근하기 전에 먼저 '부활'이라는 것을 정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몸을 지니고 사시다가 십자가형을 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안치되셨습니다. 그런데 이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고, 그리고 예수님이 생전의 몸과 동일하고 또 동일하지 않은 어떤 몸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생전에 몸을 지니고 계셨는데, 이 몸이 십자가형을 통해서 돌아가셨고 확실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후에는 이 몸이 사라지고 부활한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이 몸은 이전의 예수님의 몸과 동일성도 있고, 동시에 비동일성도 있다는 것이 부활의 증언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동일성이 있다는 것은 이 부활하신 분이 "내가 예수"라고 스스로 밝히셨고, 밝히신 후에 제자들이 그분을 알아봤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동일한 것입니다.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내가 예수"라고 말하기 전에는 그분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누가복음 24:15-16)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또한 벽이 가로막혀 있고 문도 닫혀있는데,  그 문을 통과해서 들어오십니다.
(요한복음 20:19)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엠마오에서는 생생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사라지십니다.
(누가복음 24:30-31)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러니까 성서에서 말하는 부활이라고 하는 것에 관한 증언을 살펴보면, 일차적으로 부활한 몸은 예수님의 몸이 사라진 곳에서 나타난 것이니까 같은 차원이 있고, 동시에 같지 않은 차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부활입니다.

 

4.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접근 방법

 

자, 그러면 부활은 역사적 사실인지, 그 자격 조건을 갖췄는지 한번 따져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지 확인하는 두 가지 방법론 중 하나는 '부활이 없다고 가정하면 더 설명하기가 쉬운가'이고, 다른 하나는 '일관성과 적절성을 갖췄는가'입니다.

 

첫 번째 방법론은 부활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먼저, 신약성서의 대부분을 기록한 저자인 바울의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얘기하기 위해서는 사료가 있어야 합니다. 증인과 증언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나는 그것을 보았다"라고 하는 증언이 구체적인 자료로서 남아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있을까요?
예, 있습니다! 바로 신약성서 전체가 부활에 대한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약에 부활하지 않았다면, 신약성서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몇몇 본문들을 주목해서 볼 수가 있는데, 가장 먼저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흔히 부활장이라고 불립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증언과 관련하여, 한 번에 오백 명이 되는 형제자매들이 목격했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5-6)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전의 예수님과 동일한 차원과 동일하지 않은 차원을 동시에 가진 부활의 몸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6-7)
6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저자인 바울은 마침내 자신의 이야기를 증언합니다.

(고린도전서 15:8)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우리는 이 증언이 믿을 만한가, 아닌가라는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해 앞서 언급한 방법론을 적용해보겠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적이 없다면 풀어야 할 숙제들이 갑자기 많이 생깁니다.
본래 바울은 열심 있는 바리새인으로서 성실히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일으킨 운동, 예수님의 복음이 유대교와 바리새파를 위협하고 유대교 신앙을 망친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박해를 하러 다녔습니다. 바울이 속해 있던 바리새파는 권력과 기득권을 누릴 수 있는 그 당시의 주류집단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집단에서 나름 엘리트였습니다.
그런데 이 바울이란 사람이 갑자기 사회에서 핍박의 대상이고, 많은 사람들이 우습게 생각하고, 그 주장이 공공연하게 먹히지 않는 어떤 한 집단으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자신이 박해하고 없애고자 했던 예수님과 예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설명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이분은 그렇게 옮겨간 것뿐만 아니라 지중해 전역을 누비면서 열심히 선교를 합니다. 그리고 전승에 따르면 이분은 결국 순교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만약에 이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면 이것은 가능했을까요? 아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자들의 경우도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주변에는 예수님을 따르던 거의 모든 제자들이 있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만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9:26)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제자들은 멀리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바라볼 수 있었을지 몰라도 십자가 현장에는 아무도 있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무섭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하면 자기도 처형의 위험에 놓이기 때문에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형이 집행된 후, 처음으로 돌아오는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 한복판, 예수님의 사형이 일어났던 바로 그 도시에서 "너희가 죽인 예수는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라고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전승에 따르면 이 제자들은 많은 분들이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이 겁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사실 겁쟁이라고 얘기하기도 좀 미안합니다. 우리도 아마 그랬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이 왜 갑자기 자기의 목숨을 내놓을 정도가 되었을까요? 숨고, 도망가고, 무서워했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자기의 목숨을 하나도 아깝지 않은 것처럼 정면으로, 대로로 나섰을까요? 그것도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면서 말입니다.
그들에게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급격한 행동의 전환을 설명해 줄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그 제자들에게 물어보았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증인이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무엇의 증인이냐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32)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것이 자연과학적 사실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은 자연과학적 사실과는 달리 반복적으로 관찰 가능하거나 계량화해서 수치화할 순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개연성과 확률을 통해 판단하는 건데, 바울이나 다른 제자들의 급격한 행동의 변화를 통해 무엇인가 있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차원을 가진 몸으로 부활했다고 하는 그들의 증언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한가지 경우가 남아 있기는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제자들이 집단적으로 착각했거나 아니면 제자들이 거짓말했다는 주장입니다. 아주 오래된 주장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다가 예수님께서 부활했다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혹은 예수님께서 가사 상태에 빠져서 사람들이 죽은 줄로 착각했지만 결국 그분이 깨어나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과연 부활을 봤다고 증언하는 제자들의 행동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요? 과연 제자들이 자신들이 지어낸 거짓말에 자신들의 목숨을 걸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과연 실제로 부활을 목격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이런 주장들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 스스로 대답해보시면 됩니다.

앞에서 사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눴습니다. 객관적 사실, 상호주관적 사실, 그리고 주관적인 사실이 그것입니다. 부활이라는 사건은 주관적 사실과 상호주관적 사실에 해당합니다. 또한 자연과학적 사실과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하면 역사적 사실은 상호 주관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는 바가 큽니다. 그러나 저는 성서에 있는 부활 증언들이 신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증언대로 믿어줘야 그 후의 사람들의 변화와 행동의 양식들을 이해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방법론은 일관성과 적절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신약성서 전체가 부활에 관한 증언입니다만, 부활사건을 특별히 보도하고 있는 것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입니다. 그중에서도 복음서들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복음서를 낱낱이 비교해서 보면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믿기 어렵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다음과 같은 문제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들을 가만히 보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 네 개의 복음서가 전하는 부활의 소식이 조금씩 다릅니다.
마태복음 같은 경우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두 명의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찾아갑니다.
(마태복음 28:1)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그리고 그곳에서 한 명의 천사를 만납니다.
(마태복음 28:2-5)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 천사가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알려줍니다.

(마태복음 28:6)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여인들은 부활의 소식을 전하러 남성 제자들에게 갑니다. 

(마태복음 28:8)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그 사이에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의 발을 붙잡고 경배를 했다고 얘기를 합니다.
(마태복음 28:9)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두 여인이 빈 무덤을 발견하고, 한 명의 천사를 만나서, 가다가 부활한 예수님을 뵙고 발을 붙잡고 경배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세 명이 등장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세 명의 여인입니다.
(마가복음 16:1)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이 분들이 가서 빈 무덤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 천사가 있다고 얘기하지 않고, 한 청년이 있다고 말합니다.
(마가복음 16:5)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그리고 이 청년이 부활의 소식을 알려줍니다.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은 마가복음이 16:8로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16:9 이후로는 후대에 덧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서를 읽어보면 마가복음 16:9 이후로는 꺾쇠가 있어서 '이 부분은 후대의 사본에 나오는 것이고 고대의 사본에는 이 부분이 없다'라고 알려줍니다. 16:8은 여성 제자들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마가복음 16:8)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16:8에 따르면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것으로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또 달라집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세 명이긴 세 명입니다만,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는 마가복음과 같지만 살로메 대신 요안나가 증인으로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24:10)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이분들이 빈 무덤을 발견하는데 거기서 아주 화려한 옷을 입은 두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누가복음 24:4)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그리고 돌아가서 남자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알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분들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입니다.
(누가복음 24:13-15)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마태복음에서는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분들이 여성 제자들인데, 누가복음에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남성 제자로 되어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또 달라집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만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20:1)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지 않고,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20:2)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그 두 사람이 무덤으로 달려갔고, 빈 무덤에 실제로 들어간 분은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는 밖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돌아간 후에, 혼자 남은 마리아가 무덤 밖에 서서 울다가 흰 옷 입은 천사 둘을 만납니다.
(요한복음 20:12)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그 후에 곧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요한복음 20:15)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했으니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0:17)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자, 이 보도들을 접하고 이렇게 면면이 비교해서 읽어보면 '이거 신뢰성이 떨어지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야말로 오히려 이 부활의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것을 전달해줍니다. 왜냐하면 이렇습니다.
역사학자들이 공통으로 인지하고 있는 것은, 일상적인 사건이 아닌 매우 충격적이고, 예외적이고, 압도적인 사건을 만났을 때 그 사건 당사자들의 기억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압도하는 사건, 충격적인 사건, 예외적인 사건을 만나면 정상적인 상황과 달리 세세하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핵심에만 집중하고 기억하기 때문에 그 외의 세부사항들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대단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들, 또 아주 기뻤던 사건들을 살펴보더라도 기억하는 것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이나 그 당시의 다른 문집들을 보면 19세기에 콜레라가 돌았을 때, 사망자 수가 조금씩 다릅니다. 목민심서,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평양에서 죽은 사람만 수만 명, 도성에서 죽은 사람은 13만명"이라고 합니다. 역서일기에 따르면 "도성 안에서 죽은 사람만 20만 4천여 명"이라고 합니다. 조선 정부가 작성한 '인구파악문서'에 따르면 "3년 동안 인구 41,779명 감소"라고 합니다. 당시의 통계가 정확하지 않았던 점도 이유겠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받은 충격 때문에 그 세부사항에 일정한 차이가 발생했다는 것이 주된 이유입니다.
신약학에서는 마태하고 누가는 마가를 참조해서 썼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을 아는 마태와 누가가 마가복음과는 다르게 기록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마태는 마가를 알고 있지만, 마태 자신에게 전해진 전승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도 마가를 알고 있지만, 누가 자신에게 전해진 전승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마가를 보고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전해받은 것을 왜곡하거나 다른 것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들은 전승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기록한 것입니다. 만일 이 네 개의 진술이 모두 일치했으면 오히려 의심했어야 합니다.
이처럼 그 충격적이고 놀라운 부활의 현장을 목격한 서로 다른 증언들이 고스란히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이 사실이 증명해주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활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들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4. '부활'은 역사적 사실인가?

 

"부활은 역사적 사실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라고 가정하는 것이, 생각하는 것이, 전제하는 것이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라고 얘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역사적인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몸이 어떤 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적인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분들은 의학적으로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계속 고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죽은 사람은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의학적 상식이고 모든 인류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바는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셨는데, 그 부활하신 몸이 그 이전의 몸과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차원을 동시에 가지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제자들은 자신들이 본 충격적인 부활의 사실을 가감없이 최대한 기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려고 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복음서와 서신서와 이 모두를 포함한 신약성서의 증언은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이것이 성서가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는 바입니다.

 

부활절에

                                           - 김현승 -

 

당신의 핏자국에선
꽃이 피어 - 사랑이 피어
땅 끝에서 땅 끝에서
당신의 못자국은
우리에게 열매 맺게 합니다.

당신은 지금 무덤 밖
온 천하에 계십니다 - 두루 계십니다
당신은 당신의 손으로
로마를 ​​정복하지 않았으나
당신은 그 손의 피로
로마를 붙들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지금 유태인의 옛 수의를 벗고
모든 4월의 관에서 나오십니다.
모든 나라가
지금은 이것을 믿습니다.

증거로는 증거할 수 없는 곳에
모든 나라의 합창은 우렁차게 울려납니다.
해마다 3월과 4월 사이의
훈훈한 땅들은,
밀알 하나가 썩어서 다시 사는 기적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 파릇한 새 목숨의 순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