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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신약성경은 얼마나 변질되었을까요?

아리마대 사람 2023. 11. 12. 01:17

 

신약성경은 변질되었을까요? 답은 명백히 'YES'입니다.
더 깊게 파보면, 어느 정도 변질되었는지가 더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원본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원본의 복구를 위해서는 수많은 고대 원고를 참고해야 합니다. 이 복구 작업을 위해 학자들은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이라는 방법을 활용하여 신약성경을 매우 높은 정확도로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전체 신약성경을 약 2만 줄로 정의한다면, 본문비평으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부분은 40줄, 즉 약 200여 개의 단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40줄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젠가 게임에서 하나의 블록을 잘못 뽑으면 전체 탑이 무너질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40줄 중 하나가 기독교 신앙에 큰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꼼꼼히 조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문가들은 보통 본문의 변형을 이문(textual variant)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이 이문들을 세세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이문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2장 7절에서 사용한 표현에는 두 가지 이문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7, 새번역)
7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서,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돌보듯이 유순하게 처신하였습니다.
하나는 "유순하게(ηπιοι)", 다른 하나는 "어린아이처럼(νηπιοι)"입니다. 하지만 이 두 표현 사이의 차이는 실질적으로 크지 않습니다 
로마서 5장 1절에도 유사한 경우가 있습니다.
(로마서 5:1, 개역개정)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 새번역)
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화평을 누리자(εχωμεν)"라는 이문이 있고, "화평을 누리고 있다(εχομεν)"라는 다른 이문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가 기독교 신앙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모든 이문을 일일이 살펴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므로, 가장 논란의 여지가 있는 7가지만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24장 36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4:36, 새번역)
36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에 대해 혼란스러워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언제 돌아올지를 왜 알지 못했을까요? 바로 이점에서 이문의 문제까지 생깁니다. 한 이문에서는 "아들도 모른다"라고 되어 있으나, 다른 이문에서는 해당 부분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이 이문이 기독교 신학에 큰 영향을 줄 것처럼 보이나, 두 가지 방법으로 이를 반박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버지만"이라는 표현이 있기에 아버지만이 알고 아들은 모르는 것으로 추론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가복음을 참조하여 마태복음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서로 알려져 있듯이 서로 일치하는 내용이 많고, 비교하기에 용이합니다. 이에 따라 변형이 없는 마가복음 13장 32절에서 유사한 구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아들 예수가 그 시기를 알지 못했다는 것을 확정짓습니다. 물론 모든 상황에서 다른 공관복음서를 참고할 수는 없습니다.

마가복음 1장 41절에서는 나병 환자가 예수님에게 다가와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합니다.
(마가복음 1:41, 새번역)
41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대부분의 성경 원고에서는 예수님이 그를 "불쌍히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일부 원고에서는 "노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5세기에 작성된 코덱스 베자(Codex Bezae)에서는 예수님의 반응을 "노했다"라고 기록한 이문이 발견되었습니다. 코덱스 베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필사본에 "불쌍히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불쌍히 여겼다"는 이문을 지지하는 외부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내부 증거를 바탕으로 "노했다"라는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주장합니다.

본문 비평의 일반적인 원칙은 두 이문 중 더 어려운 표현이 원본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는 필경사들이 원본을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어떤 이문이 옳은지보다는 해당 이문이 기독교 신앙에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장 5절과 10장 14절에는 예수님이 노하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3:5, 새번역)
5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마가복음 10:14, 새번역)
14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예수님이 노하셨는지, 불쌍히 여기셨는지에 대한 기록은 예수님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에 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 예수님은 때로 노하실 수도 있고, 때로 불쌍히 여기실 수도 있으므로, 이 구절의 원문을 아는 것은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감정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즉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문은 어떻게 될까요?
히브리서 2장 9절에는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두 가지 이문이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2:9, 새번역)
9 예수께서 다만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낮아지셔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받아쓰신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셔야 했습니다.
대다수의 성경 원고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을 맛보셨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몇몇 원고에는 "하나님을 떠나" 죽음을 맛보셨다고 되어있습니다. 후자를 포함하는 세 가지 필사본은 모두 10세기 이후에 작성되었지만, 초기 기독교의 신학자들을 통해 "하나님을 떠나"라는 이문이 더 일찍부터 존재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 특정 이문에 대한 여러 해석과 주장이 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의 목적은 원문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 두 이문이 기독교의 교리나 신학에 영향을 주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5절, 에베소서 2장 5절,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다고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5:15, 새번역)
15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생긴 일은,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했을 때에 생긴 일과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더욱더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5, 새번역)
5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21, 새번역)
21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것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또한 예수님은 죽기 전에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죽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끊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을 맛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과의 일시적인 간격을 경험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모순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삼위일체론에 의문이 제기된다면 어떠한 변화가 생길까요?
일부 사람들은 요한일서 5장 7절에서 8절을 인용하여 삼위일체론을 지지합니다.
(요한일서 5:7-8, 개역개정)
7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8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요한일서 5:7-8, 새번역)
7 증언하시는 이가 셋인데,
8 곧 성령과 물과 피입니다. 이 셋은 일치합니다.
한글 킹제임스흠정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일서 5:7-8, 킹제임스흠정역)
7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8 땅에 증언하는 셋이 있으니 영과 물과 피라. 또 이 셋이 하나로 일치하느니라.
여기서는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라고 기술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 버전에서는 이 구절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헬라어 필사본에서는 이러한 이문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후기 라틴어 원고에만 나타나며, 다른 고대 언어의 원고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삼위일체론이 나중에 기독교 교리에 삽입된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삼위일체의 개념은 성경의 한 구절에서 요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통틀어 여러 구절에서 나타납니다. 삼위일체론은 이 이문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있었고, 초기 기독교의 신학자들은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들로부터 근거를 찾아냈습니다. 삼위일체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합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증거로 자주 인용됩니다.
(요한복음 1:18, 개역개정)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 구절에 따르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독생하신 하나님, 즉 아들 예수님이 아버지를 알려 주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아버지 하나님이 독생하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시되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렇지만 이 구절에 "독생하신 하나님" 대신 "독생하신 아들"이라는 다른 이문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되면 예수님이 아버지를 알리시는 것은 변함없지만, 아들과 하나님을 완전히 동일시하는 근거로 이 구절을 사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기독교 교리에 영향을 미칠까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자신을 독생하신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요한복음 3:16, 개역개정)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요한복음 1장 1절에서는 말씀인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시됩니다.
(요한복음 1:1, 새번역)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요한복음 20장 28절에서는 도마에 의해 예수님이 직접 "하나님"이라고 불립니다.
(요한복음 20:28, 새번역)
28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결론적으로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든 "독생하신 아들"이라는 표현이든, 기독교의 교리나 신학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인을 포함한 많은 학자들은 마가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이 원본 성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이 구절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와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빠지면 마가복음은 갑작스런 결말을 맞이하게 되겠죠. 이러한 마무리는 비록 파격적으로 보일 수 있어도, 마가의 글쓰기 스타일에 부합한다고 많은 학자들이 지적합니다.

마지막으로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7장 53절에서 8장 11절 사이의 내용은 간음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로 비기독교인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바리새인들이 돌로 간음한 여인을 죽이려고 하자, 예수님은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죄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떠나고, 예수님은 그 여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무한한 은혜와 용서의 교훈을 전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부분이 원본 요한복음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과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 등이 놀라울 수 있지만, 이 두 내용의 유무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나 핵심 믿음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학자 데럴 보크(Darrell Bock)와 대니얼 월리스(Daniel Wallace)는 <예수 폐위>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해 두어야 할 것은 이 본문들이 어떤 근본 교리도, 어떤 핵심 믿음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본문들이 우리 마음에 큰 부담을 지우기는 한다. 이 본문들이 원문의 일부가 아니었을 개연성이 있음을 안 것은 한 세기도 더 되었다. 그랬는데도 정립된 신학 개념들이 바뀐 일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가장 심각한 이문조차도 기독교 교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 특히 스터디바이블에서는 이러한 이문이 등장할 때마다 표시해 놓습니다. 이 중 어느 것도 비밀로 취급되지 않으며, 이 정보를 숨길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약성경이 완벽하게 보존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문제처럼 보이며, 이로 인해 마음에 큰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왜 그것이 완벽하게 보존되지 않았을까요? 과연 성경의 모든 단어와 문장은 정확하게 보존되었어야만 했을까요? 이것은 신약성경의 저자들과 교부들조차 가지지 않았던 견해입니다. 구원의 힘을 가진 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지 글자 그대로의 보존이 아닙니다. 크레이그 에반스 (Craig A. Evans) 교수는 <Fabricating Jesus>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베드로와 나머지 사도들은 예수 부활을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이것은 나사렛 예수의 사역과 그의 인격에 하나님이 일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습니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이여,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틀림없으며, 또한 복음서들은 조화될 수 있습니다.' (중략) 부활의 현실과 이를 믿음으로 듣고 응답한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이 새로운 운동을 일어나게 했지, '오류 없는' 성경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성경에 자신감을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신감은 완전한 보존 때문이 아니라, 삶과 세상을 바꾸는 복음,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도와 제자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복음을 신약성경이 알려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