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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을

예수님의 탄생이 언제인지 알 수 있는 단서들

아리마대 사람 2023. 12. 22. 19:33

CBS가 만드는 삶과 신앙에 관한 이야기인 '잘 믿고 잘 사는 법'이라는 프로그램의 173번째 에피소드인 김학철 교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동영상 참조)
→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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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탄절을 어떻게 보내야 될까요?

가만히, 곰곰히 생각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오신 것, 무명씨의 집에서,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언제인지도 모를 때 태어난 것, 그게 참 그렇게 고맙습니다. 그런 그분이 우리의 삶을 밝혀주고, 우리를 격려하고, 우리의 모범이 되시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게 그렇게 참 고맙더라고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셔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사는 거야' 하고 우리 삶의 매뉴얼을 보여 주셨으니까 참 감사하고 감격스럽습니다.
성탄절마다 그리스도를 내 삶의 중심으로 삼고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는 기회를 새로 마련하게 됩니다. 성탄절마다 '좁은 나를 넘어서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자'는 다짐을 합니다. 그러면 행복해집니다...
 

목자들의 경배 (렘브란트 작)

 
성탄절이라는 절기
 
동방정교회는 1월 6일 혹은 1월 7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서방교회 전통에 속하는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우리는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킵니다.
성탄절은 그리스도교 영향권에 있는 나라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나 일본 같은 비기독교권 국가에서도 나라 전체가 아주 들썩들썩하는 그런 절기로 지내죠. 이날을 명절처럼 보냅니다. 사실 저도 추석이나 설보다 성탄절이 훨씬 설레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계속 교회를 다녀서 그런가 봐요. 그때가 되면 서로 선물을 주고받고 가족이나 연인들끼리 같이 모여 식사하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죠. 비기독교인들도 그렇게 합니다.
우리나라는 성탄절과 석가탄신일을 모두 지키는, 세계적으로 드문 나라입니다. 기독교와 불교가 공존해 있다고 하는 것이 공휴일로 나타납니다.
우리 사회에서 성탄절은 참 잘 지키는데 부활절은 좀 덜 지키는 것을 보면, 기독교 국가랑 차이가 좀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해는 언제일까요?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BC와 AD를 나눕니다. BC는 비포 크라이스트(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이고, AD는 아노 도미니(Anno Domini = in the year of our Lord, 주님의 해)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서기가 이렇게 나뉜다는 걸 아니까 학생들에게 제가 가끔 질문하거든요. "예수님이 언제 태어난 줄 아냐?"고. 그럼 학생들이 "0년에 태어났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0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죠. 그대로 그 기준법을 받아들이면 AD 1년 정도에 태어났다고 대답하는 것이 상식적이겠지만, 여러분이 이미 교회에서나 다른 분들에게 많이 들어왔던 것과 같이 AD 1년에 태어나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짜는 언제일까요? 

언제 이 분이 태어나셨고, 몇 월 며칠에 태어나셨는지는 정말 잘 몰라요. 언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몇 월에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며칠에 태어났는지는 더더구나 모르고요. 오늘날처럼 달력이 보급되어 있고, 시계가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으니까 그걸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 작가들의 기록을 보면 아주 초기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는 절기가 있었던 것 같지가 않습니다.
신약성서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이 바울의 편지들이거든요. 근데 바울의 편지들에는 예수께서 언제 태어났는지 대한 이야기가 단 한 군데도 없습니다. 로마서 1장을 보면 예수께서 다윗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나셨다 정도만 있지 언제 어디서 태어나셨다고 하는 말은 구체적으로 없습니다. 또 마가복음이 복음서 중에 제일 먼저 기록된 것이라고 학자들이 생각하는데, 마가복음에도 성탄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마태나 누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복음서 중에서는 요한복음이 맨 마지막에 기록되었고, 여기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만, 요한복음은 요한복음의 신학에 따라서 예수님이 언제 어떻게 태어났는지에 대해서 별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살펴보면, 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보다 예수님의 고통과 부활에 대해서 훨씬 더 상세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언제 돌아가셨는지는 비교적 잘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서 사이에 차이가 좀 있지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언제 태어나셨는지는 사실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초기 기독교회는 예수님의 탄생보다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십자가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것이 신앙의 기둥이었다라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로 믿고, 또 성자 하나님으로 믿는 예수님이 언제 태어나셨는지 그것을 모르고 지낸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면 궁금하니까. 언제 태어나셨는지 궁금하니까 사람들이 그것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약 성서나 이후에 나온 그리스도 교회의 작품들을 봐도 그런 관심사가 점점 늘어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탄생을 축하하는 일을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구세주의 탄생을 모르고 지나간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
더군다나 로마 황제의 생일 있잖아요? 이 생일을 뭐라고 불렀냐면, '복음'이라고 불렀거든요. (복음을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고 합니다.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로 로마황제의 탄생에 사용했습니다. 현재는 '복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고대 로마시대 비문을 찾아보면 로마 황제의 탄생을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진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인데 말입니다.
 
2-3세기 이후: 4월, 5월, 8월
 
2세기, 3세기 넘어오면서 예수께서 언제 탄생했는지에 관해 드디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3세기 들어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티투스 클라비우스 클레멘스, 50-95, 로마 제국 집정관) 같은 분이 기록을 남겼는데, 당시에 남긴 기록을 보니까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추정하던 예수님의 탄생월은 4월이나 5월, 혹은 8월입니다. 요즘이랑 완전히 다르죠. 12월이 후보로 거론된 적은 없습니다.
 
4-5세기의 경우: 12월 25일의 출현
 
12월 25일이 성탄과 관련하여 첫 번째 기록에 나타난 시기는 4세기 중반입니다. 이것이 확인할 수 있는 것 중에 거의 첫 번째 기록입니다.
12월 25일이 명확하게 나타난 것은 5세기였고, 우리가 잘아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초기 기독교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 주교께서 그것을 기록했습니다. 이분이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였는데, 그곳의 도나투스파라고 하는 사람들이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켰다고 합니다. 이 도나투스파라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이단으로 규정된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은 신학이나 교리의 문제가 있어서 이단으로 판정받은 것이 아닙니다. 로마제국 시대에 박해가 있었는데, 그때 신앙을 배신하고 배교한 사람들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비타협적인 자세를 보인 아주 깐깐하고 완고한 분들이죠. 정말 철두철미한 분들인데 이 분들이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켰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록을 합니다. 방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도나투스파는 원칙과 전통에서 조금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은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그들이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켰다는 것은 그들 이전에 이미 북아프리카 교회에서는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켰다고 하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한 것을 보더라도 절대로 12월 25일을 추정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복음의 경우에는 목자들이 밖에서, 그러니까 들에 나가서 양을 치는데, 팔레스타인에서 이런 일은 주로 봄에 합니다. 12월은 팔레스타인에서도 겨울인데, 그때 들에서 양을 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전에 추정했다시피 4월이나 5월, 혹은 8월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12월 25일의 유래
 
이걸 두고 인터넷을 비롯하여 이런저런 곳에서 말들이 많이 나와요. 예를 들면 12월 25일은 사실은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로마의 농신제, 곧 농업을 관장하는 신의 축제였는데 그것을 본땄다고 하는 얘기죠. 인터넷 찾아보면 아주 많이 나옵니다. 12월 25월이라는 날짜가 똑같으니까 폄하하고 싶은 분들은 로마의 농신제를 베낀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말하고 싶은 분들은 로마의 농신제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농신제가 12월 25일이기는 한데 그것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방교회인 로마 가톨릭이 유럽으로 번져 나가면서 어떤 지역이나 어떤 나라에 갔을 때 그 지역에서 신으로 숭배 받고 있던 존재 등에게 이른바 세례를 주어서 그리스도교로 편입하는 이른바 그리스도화가 일어나거든요. 그런데 이때 4세기 중반은 그런 일이 아직 일어나기 전입니다. 그러니까 농신제에서 유래했을까, 그리고 도나투스파가 농신제에서 유래한 12월 25일을 지켰을까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분들도 있습니다.
농신제에 대한 주장만큼 오래된 주장이 하나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농신제가 아니라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수태 소식을 알린 날을 계산해서 성탄절을 12월 25일로 추정하는 전통도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날 것이라고 하는 수태고지, 이것은 일본식 말이긴 한데요, 이 수태고지를 받은 날이 유대인 달력으로 니산월 14일이라고 추정하는데, 니산월 14일을 로마의 태양력으로 바꾸면 3월 25일입니다. 사람의 임신 기간이 9개월 조금 넘죠. 근데 대략 9개월로 쳐서 12월 25일이 예수께서 탄생한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수태 고지가 3월 14일에 있었고, 그때 마리아가 임신한 것이고, 9개월 뒤인 12월 25일에 탄생하셨다라는 주장이 있는 것입니다.
마침 니산월 14일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탄생과 죽음이 해를 달리하지만 같은 날인 겁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분은 그날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육체의 생명을 얻은 날인 동시에 어머니의 자궁에 유비되는 무덤, 곧 요셉의 무덤에서 새 생명으로 부활하신 날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12월 25일을 농신제와 연결해서 보는 그런 시각들이 많지만, 실상 그리스도교 초기에도 이미 예수님의 수태고지와 예수님의 죽음을 연결지어서 12월 25일을 추정하는 그런 흐름도 있었다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성탄절의 신앙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을 기념하는 데에 역사학적인 논의를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신앙적 의미 역시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길게 말하고 있는 복음서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마태복음하고 누가복음인데, 강조점이 조금 다릅니다.
 
◇ 마태복음
마태복음은 가장 먼저 족보부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서 나옵니다. 그리고 헤롯 대왕을 소개하고 헤롯 대왕의 폭정을 얘기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부터 쭉 열거하는 그 족보를 통해서 무엇을 느끼시나요? 저는 그 족보를 쭉 읽어가면서 사람들의 기다림을 생각합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구현될 것이라는 약속을 기다렸던 사람들, 비록 자기 눈으로는 구원을 보지 못했지만 약속을 믿고 성실히 살면서 자신의 후손에게 그 약속을 유업으로 물려준 그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기다림의 결정체지요.
두 번째로 마태복음은 누가 참된 왕인가, 참된 왕은 어떤 분인가를 알려주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을 그들이 지은 죄로부터 구원할 분으로, 또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소개가 됩니다. 당시에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 제국이나 헤롯대왕 같이 폭정과 폭압을 일삼는 왕이 아니라 아기로 태어난 왕, 그 왕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하는 것이 마태복음의 고백이거든요. 아기로 오셨다, 희생자들과 함께 오셨다, 희생자들의 운명을 함께 하신다고 하는 것이 마태복음이 말하는 성탄절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비록 나의 눈으로 주님의 구원의 완성을 보지 못했지만 내 후손과 내 이웃에게 내가 받은 약속을 나누는 절기라는 것이 성탄절의 의미가 되겠고, 또 하나는 참된 왕을 기다리고, 이 참된 왕을 닮아가는 것이 성탄절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참된 왕은 어떤 왕이냐면요, 자신의 권력과 지위와 부와 명예로 다른 사람을 압살하고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도구화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어린 아기로 와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과 운명을 같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고, 성탄절을 기뻐한다는 건 바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을 공유하는 것을 기뻐한다는 의미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누가복음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색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잘 알려져 있는 누가복음의 탄생 이야기에는 '마리아 찬가'라고 알려져 있는 누가복음 1장 46-55절이 나옵니다. 이것을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그대로 읽으면, 나사렛의 한 소녀가 어떻게 이런 노래를 불렀을까 싶습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노래합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시고,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습니다.'
(누가복음 1:46-55)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마리아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골에 사는 한 여인, 실은 요즘으로 하면 한 소녀죠. 이 소녀가 혼자서 '아, 어떻게 될까?' 하는 고민과 고통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를 자기의 태에 두면서 모든 사람이 고대하는 구원자의 모습을 고대하면서 노래를 불러요. 저는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성탄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신앙이 개인화되고, 사유화되고, 기복화 되었다라고 얘기하거든요. 그렇죠.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복을 빌고, '나'라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일을 많이 해요. 그런데 이 소녀가 부른, 구원자를 기다리는 이 노래를 한번 곰곰히 들어보면, '아, 주린 자, 고통받는 자, 비천한 자를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노래 부르는 것이 성탄을 맞이하는 자세였구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소녀는 완전히 자기 자신을 내어준 거잖아요. 자기 몸을 하나님의 역사에 내어 주잖아요. 이런 것을 보고 '아, 이것이 참 성탄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죠.
마태복음을 보면, 동방의 박사, 동방의 현자들이 아주 대단한 예물을 갖고 오잖아요? 황금, 유향, 몰약을 가지고 와서 경배를 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목자들이 옵니다. 목자들은 당시에 존경받는 직업은 아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스도의 구원의 소식이 제일 먼저 선포된 것이 이 목자들이고, 이 소식을 받은 목자들이 달려와서 아기 예수를 찬미합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가장 평범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이 알려졌잖아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반응하고요. 한 사회에 기쁨이 있으면 대부분의 경우 먼저 그 사회에서 부유하고 힘있는 사람들의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넘치고 넘치면 비로소 아래에 가서 차고요. 한 사회에 고통이 들이닥치면 이른바 하층, 그러니까 고통받는 사람들이나 비천한 사람들부터 고통이 들어차고요, 맨 위까지 올라가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소식을 듣고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기쁘기 때문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도, 비천한 사람들에게도, 주린 사람들에게도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탄은 이런 사람들의 축제였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 안 되죠.

요한복음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을 보면 성탄에 대한 얘기가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참 아름다운 구절이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요한복음 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장 14절은 요한복음의 성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누군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언뜻 엿볼 때 참 감격스럽습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그렇지는 않을 수 있겠지만, 어떤 한 순간, 어떤 한 장면에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줄 때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참 행복했을 것 같아요. 예수님을 보니까 하나님의 외아들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님을 보니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 분을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의심, 두려움, 좌절, 절망, 허무, 이런 것들을 다 떨쳐버리고, '이 사람을 보니 외아들의 영광을 보게 되는구나', '이 사람을 보니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보게 되는구나' 이렇게 감격했으며 좋겠습니다. 이 간절한 바램을 담아내는 것이 성탄인 것입니다. 저는 올해 성탄절을 맞이하여 여러 가지 불길한 이야기, 전쟁과 고통의 이야기, 빈곤과 슬픔의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에게 외아들의 영광을 보게 하옵소서.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이 성탄절에 보게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