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잠깐 스쳐가는 말씀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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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한 조각

터무니없는 말들, 망령된 말들

아리마대 사람 2024. 6. 24. 00:53

20년쯤 전에 "술을 마시고 운전을 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는 아이돌 그룹 멤버의 발언이 유행한 적이 있다. 본인은 처벌받지 않았지만, 결국 본인이 속한 그룹이 해체되었다.
유튜버로 유명한 어느 변호사는 불륜을 의심받는 상태에서 불륜 상대가 자신의 카드를 사용한 영수증이 발견되자 "카드만 빌려줬을 뿐 만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최근에는 동료 여경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유부남 경찰관이 "여경과 잤지만 불건전 이성 교제는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며, 자신에게 내려진 강등처분에 대해 항소했다는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다.
 
이렇게 비상식적인 발언들은 소위 인터넷 밈이 되곤 한다. 비상식적인 발언들이 자신을 변호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의 발로인지, 혹은 자신이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다 속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교만의 발로인지, 혹은 당황한 나머지 아무말이나 지껄이게 된 미성숙함의 발로인지는 모르겠지만... 때때로 뉴스를 통해 이처럼 터무니없는 발언들을 접하곤 한다.
어쩌면 세상살이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내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라는 강력한 자기 확신의 발로일텐데... 죄의식이나 상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런 주장을 한다면 인터넷 밈이 되어 조롱거리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물론, 이것은 오늘날만의 일은 아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태 속에서는 늘상 존재했던 상황인 것이다.
사사기는 역사 속 당시의 세태도 이런 상황 속에 놓여있었음을 정확하게 알려준다.
 
(사사기 21:25)
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각기 자신의 생각에 옳은 대로 행했던 사사기의 시대는... 혼란의 도가니요, 싸움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확실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위의 발언들과 같은 터무니없는 말들이 난무하는 시대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최근에 또 이런 발언을 접하게 되었다.
대형교단의 총회장이 여성 교인을 차에 태운 채로 무인 모텔 주차장에서 나오다가 발각되었는데, 이에 대해 "여성 교인이 조용한 곳에서 상담하기를 원해 무인 모텔 주차장에서 상담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과연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속담대로 우연한 일이 의심을 받은 것일까? 이는 이미 불륜을 의심받고 있던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우연한 일로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 또 새로운 밈이 만들어질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아...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기억 속에서는 어렴풋하게나마 기독교가 신뢰의 상징이었던 때가 있었던 것 같다.
교회에서 친구 초청 잔치를 할 때면, 친구에게 교회가자고 선뜻 말을 건네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교회나 목회자에 관한 좋지 않은 소문이라도 전해질 때면 사람들이 '아니, 그 교회가?', '아니, 그 목사님이?'라며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던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선교학적인 기준에서는 기독교인이 5% 이하인 종족을 미전도종족이라고 칭한다는데, 초중고대학생들은 이미 미전도종족의 범주에 속한다고 한다.
교회나 목회자에 관한 좋지 않은 소문이라도 전해질 때면 '또 교회네...', '하여튼 교회는...', '또 목사네...', '하여튼 목사는...'이라며 전혀 놀랍지 않다는 반응을 나타낸다.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불리고 있는 시대이다. '기독'이란 말은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러한 명칭은 인터넷상의 흔한 말장난이나 언어적 일탈로 보기에는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라는 말이 중국을 거치면서 '기리스두'로 발음되는 기리사독(基利斯督)이란 말로 음역되었다가 표기의 복잡성 때문에 기사독(基斯督)으로 변했고, 다시 기독(基督)으로 변한 것이다. 기독은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이는 곧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탈은 '망령된 말'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2:16)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출애굽기 20:7)
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게 맹세하는 자의 결국은 멸망이다.
 
(스가랴 5:4)
4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것을 보냈나니 도둑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의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나무와 돌과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망령된 말과 행실로 경건함을 벗어나는 세태도 그 결국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만일 교회나 목회자가 자신의 말과 행실로 말미암아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게 만들고, 이에 대해 '또 교회네...', '하여튼 교회는...', '또 목사네...', '하여튼 목사는...'이라는 반응을 만들고, 이로 인해 '기독'을,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망령되게 부르도록 만든다면...
교회나 목회자의 말과 행실로 말미암아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질 때, '하나님과 가장 가깝다는 목사들이 저렇게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없는 것이 확실하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저렇게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니 기독교가 엉터리인 것이 확실하다'는 세상의 망령된 말과 생각을 이끌어 내고 있음을 볼 때에...
...그 결국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걸음을 시작했을텐데...
언제 그들은 저렇게 되었을까...
어디쯤에서 그들은 저렇게 되었을까...
누구 때문에 그들은 저렇게 되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그들은 저렇게 되었을까...
어쩌다가 그들은 저렇게 되었을까...
안타깝고 불쌍한 마음과 더불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또 다시 조용히 읊조린다.
 
(잠언 30:7-9)
7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그리고 다짐한다.
헛된 것과 거짓말을 멀리 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를 가난하게 두지도 마시고, 부하게 두지도 마시기를 기도하면서, 내게 주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짐이, 그것도 굳은 다짐이 필요한 이유는...

내가 나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별히, 배가 부른 나를 신뢰할 수 없고, 가난한 나를 신뢰할 수 없다.
내 배가 불러져서... 그래서 내 정신이 포만감에 혼미해져서...
그래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봐 몹시 두렵다.
혹은 내가 가난하여... 그래서 양심이 상황을 핑계삼고...
그래서 도둑질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봐 몹시 두렵다.

 

두려운 마음으로 두려움의 원인인 내 자신을 응시한다.

 

(창세기 2:23)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하나님이 주신 여자를 가리켜 '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칭하며 자기 자신의 일부로서 소중하게 여기다가...

 

(창세기 3:12)
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상황과 맞닥뜨리자 '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를 핑계대는 그 비겁함에 게으름과 교활함이 뒤엉켜 밀가루 반죽처럼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는 내 자신을 응시한다.

나 자신이 하나님께 대해 터무니없는 말, 망령된 말을 지껄이게 될까봐 몹시 두렵고,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해 터무니없는 말, 망령된 말을 떠들게 만들까봐 몹시 두렵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닫지 못할까봐 몹시 두렵다.
 

 

입장문의 제목을 보면 애초에 '총회장'으로서의 입장문이며, 입장문의 내용을 보면 지속적으로 '총회'가 계속 언급되고 있다.

입장문을 내신 분의 입장에서는 총회가 중요한 것이다.

발생된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모두 보셨고 보좌 앞의 책에 기록이 되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문제에 대한 판단을 세상의 사법적 판단과 역사의 평가에 맡기고 있다.

세상과 역사의 판단이 중요하다는 뜻이거나 세상과 역사의 판단을 통해서 상황을 벗어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저의 연약함과 부족함'이라는 말은 이미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든다.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