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잠깐 스쳐가는 말씀 한 조각

말씀 한 조각 만으로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 생각 한 조각

양심, 상식, 교양, 그리고 주의 종

아리마대 사람 2024. 7. 18. 00:09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꽤 먼 거리의 중학교를 배정받아 버스와 전철 등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후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대중교통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참으로 다양한 일들을 보고 겪을 수 있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시장 근처에 위치한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 역에서 장을 본 아주머니들의 무리가 타시는 경우였다.
"언니, 자리났어, 이리와"
한 분이 빈자리를 발견하면 동료들을 큰 소리로 부른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선포되는 이 말은 동료들에게 빈 자리가 있음을 전달하는 안내의 목적과 함께 빈 자리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빈 자리에 앉지 말라는 경고인 동시에 빈 자리 주변의 어린 혹은 젊은 사람들에게는 자리를 비워달라는 강요의 의미도 은근히 담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연세가 있다 보니 짐을 가지고 버스로 이동하기에 힘드신 부분도 있었을테고, 또 여럿이 다니다 보니 왠지 조금씩은 용감해지는 습성 때문에 그러신가 보다라고 생각하지만, 대중교통 안에서 겪는 일들 중에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이와 거의 동일하면서도 훨씬 당황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동일한 상황에서... 교회에 다니시는 아주머니들의 무리가 타시는 경우였다. 교회에 다니시는지는 그분들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었다.
"권사님, 자리났어, 이리와"
"집사님, 자리났어, 이리와"
그 당시에도 교회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원칙에 따라... 최대한 호의적으로 생각하려는 노력을 시도했다. 어쩌면 순수한 안내의 목적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경고나 강요의 의미는 전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것은 내가 교회에 다니는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버스나 전철의 어느 누구도 내가 교회에 다니는 줄은 몰랐겠지만 말이다.

냉장고에 넣어둔 식혜 속의 밥알들이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사람의 머리 속에는 생각과 행동의 원칙으로서 가라앉아 있는 의식이 있다. 이런 원칙들을 일반적으로는 양심이나 상식, 또는 교양이라고 부른다.

"양심"은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를 말한다.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인 가치관의 근거가 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판단하고 비판하며 반성할 수가 있다.
"상식"은 일반적인 사람이 다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어야 할 지식 혹은 이에 근거한 판단력을 말한다.
상식은 전문적인 지식은 아니지만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이라면 알아야 할 일반적인 지식이나 이에 근거한 이해력, 판단력, 사리분별 능력 등을 가리킨다. 아마도 본래 의무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상식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교양"은 교육을 통한 지식이나 학문, 사회생활을 통한 정서나 도덕 등을 바탕으로 길러진 고상하고 원만한 품성을 말한다.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지식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주변의 사람들이나 환경과 보다 원만히 살아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문화적인 품성과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양심과 상식과 교양은 절대성과 상대성, 선천적인 면이 큰지 후천적인 면이 큰지, 혹은 토대가 되는 교육의 분량 등의 다양한 측면에 있어서 서로 다르지만, 또한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어렵기도 하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사람으로서 혼자가 아닌, 사회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소양이라는 점이다. 이를 갖추지 못했을 때, 주변의 사람들이나 환경과 불협화음을 일으키게 되고, 사람으로서의 품위가 떨어지며, 다른 사회구성원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된다.

일반적인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이 이러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은 어떠할까?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은 일반적인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을 포함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도 사회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그리스도인으로서만의 특별한 양심, 상식, 교양을 추가적으로 갖추어야 한다.
일반적인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이 교육에 의존하는 특성을 지닌다고 볼 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도 교육에 의존하는 특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교육의 근본은 무엇일까? 두말 할 나위 없이 그것은 성경말씀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생각과 행동의 원칙으로서 가라앉아 있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의 근본이 되는 성경말씀은,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사회구성원으로 오셔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직접 가르쳐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따라서 위의 정의를 참고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바를 기록한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생각과 행동의 원칙으로서 가라앉아 있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간략히 말하면 '성경말씀' 자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양심, 상식, 교양이 마음씨나 판단력이나 태도 등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양심적이라고 말하거나 상식적이라고 말하거나 교양이 있다고 말 할 수 없듯이, 성경말씀이 그저 가라앉아 있기만 해서는 이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이라고 말 할 수 없으며, 이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 생각과 행동으로서 나타나야 한다.

(야고보서 2:26)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을 갖추지 못할 때, 즉 알고 행하지 못할 때에는 세상의 사람들이나 환경과 불협화음을 일으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지 못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지 못하게 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품위가 떨어지며,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는 커녕 다른 사회구성원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된다.

어릴 적 버스 안에서 "언니, 자리났어, 이리와"라고 외치던 아주머니들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은 아마도 교양있는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권사님, 자리났어, 이리와", "집사님, 자리났어, 이리와"라고 외치던 교회에 다니시는 아주머니들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은 아마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교양을 갖춘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며 살아야 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생명의 냄새를 전해야 하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죄와 어둠을 물리치는 역할을 감당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이 땅을 살아가야 한다. 삶의 모습을 통해 덕을 세움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을 갖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와 같은 삶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며, 그것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과 같이 '겸손'한 모습으로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삶과 사역의 클라이맥스에서 보여주신 것이 '겸손'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과의 마지막 저녁식사 자리에서 당시의 시대에 종들이 담당하는 일이었던 발을 씻어주는 일을 행하심으로써 겸손의 본을 보이시고, 겸손을 가르쳐 주셨다.

(요한복음 13:4-5)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또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구약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심으로써 겸손의 본을 보이시고, 겸손을 가르쳐 주셨다.

(스가랴 9:9)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그리고 마침내 죄인들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겸손의 극한을 보여주셨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을 갖추고 쌓아올린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따라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을 충분히 갖추고 그 위에 더욱 더 쌓아올렸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목회자들을 가리켜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또한 목회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가리켜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드높이 쌓아올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을 진리의 빛으로 삼아 스스로 '종'이 되어 '종'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이 본이 되고 덕을 세우는 일이기에 목회자들을 존중하는 것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주변에서 직접 보거나 뉴스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의 다양한 모습을 접하게 된다.
때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일반적인 양심, 상식, 교양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모습으로 감동적일 만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따라 행하며 살아가는 분들의 이야기를 접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모습으로, 심지어 단순히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마저도 갖추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기도 한다. 일반적인 사회구성원들의 양심, 상식, 교양을 넘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더 큰 양심, 상식, 교양을 갖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본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한 모습에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만일... 만일, 그것이 목회자의 모습이라면... 감추고 있을 수가 없을 만치 막대한 당혹스러움이 입 밖으로 새어나오기까지 한다. 욕으로서.

명백히 그것은 종의 모습이 아니다. 과연 종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종은 낮은 자리에 머물러야 했고, 헌신해야 했다. 예수님께서는 탄생 때부터 사망 때까지 가장 낮은 자리에서 헌신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것이 진짜 '종'의 모습이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부지런히 일해야만 했다. 예수님께서는 부지런히 기도하시고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를 고쳐주시며 사역하셨다. 그것이 진짜 '종'의 모습이다.

종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따라 살아야 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원치 않으셨지만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그것이 진짜 '종'의 모습이다.

종은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지녀야 했다. 그래야만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존재의 의미를 품고 살 수가 있었을 것이다. 주의 종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지녀야 한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 살 수가 있다. 그것이 진짜 '종'이 되기 위한 '주의 종'의 모습이다.
또한 종은 사회적 신분이다. '종'은 종일 뿐이다. 아무리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주인의 종이라고 해도 '종'은 종일 뿐인 것이다. 결코 이집의 종이 저집의 주인보다 높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주님은 한없이 크고 높으신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종" '은 '종'일 뿐인 것이다. 누구에 대해서나 '종'일 뿐인 것이다. 자신의 주인이 명령하는대로 남을 제 주인 대하듯이 섬겨야 하는 '종'일 뿐인 것이다.

종이 종으로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분수를 모르고, 주제를 모르는 종이 되고 만다. 쓸모없는 종이 되고 만다. 쓸모없게 되면 짠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밖에 버려질 뿐이다. 

(마태복음 5:13)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밖에 버려지고 나면 결국은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뿐이다.

(마태복음 25:30)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스스로 '주의 종'이라 자처한다면, 이를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도외시한 채 그리스도인으로서 양심없이, 상식없이, 교양없이 살지 말고, 반드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을 갖추고 살아야 할 것이다. 사회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양심, 상식, 교양을 갖추지 못하면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품위가 떨어지며, 비난을 받는 정도에 그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을 갖추지 못하면 이는 부족한 믿음의 증거가 되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모습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것은 소위 평신도에 대해서도, 그리고 특별히 '주의 종'으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목회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며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양심, 상식, 교양을 갖춘 '주의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