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잠깐 스쳐가는 말씀 한 조각

말씀 한 조각 만으로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 생각 한 조각

점점 달라지기 시작하면... 절대 안된다...

아리마대 사람 2024. 6. 29. 00:51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이와 같은 한 줄이 언급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사람의 변질이 시작됨을 언급한 적이 있다.
과연 목회자의 경우에는 어떨까...

'성직주의'라는 말이 있다.
목회자에 대해 '성직'이라고 인식하고 주장하는 사고방식이나 태도를 가리킨다.
목회자에 대해 '성직'이라고 인식하고 주장함으로써 목회자가 거룩하게 살아가는데에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은 일이겠으나, 빛이 비치는 면의 뒤편에 그림자가 생기듯이 성스러운 직분이나 직위 또는 직책을 강조하는 이러한 주장의 뒤편에는 필연적으로 어두운 구석이 생겨나기 십상이다. '성'과 '속'의 구분에 따라 나타나는 '성직'의 그림자는 바로 '평신도'이다.
(평신도라는 용어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유래를 따져보면 잘못된 용어라고 볼 수 있지만,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용어이기에 목회자 이외의 교회 구성원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도록 하겠다)
이와 같은 구분의 관점에서 성직주의를 생각하면, 이는 한마디로 성직자인 목회자와 평신도가 다르다는 말이 된다. '평'신도는 '평'범한 사람들의 무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니 성직자는 이에 비해 특별하다는 주장이 된다. 이 주장의 이면에는 목회자는 거룩한 일을 하고,평신도는 속된 일을 한다는 인식이 배어 있고, 그 기저에는 목회자는 거룩한 직분이고 평신도는 그렇지 않다는 인식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본다면... 목회자도 평신도와 동일한 사람이고, 세상 가운데 거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입장이라는 면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야고보서 2:1)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따라서 목회자와 평신도에 대한 차별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물론 목회자와 평신도의 기능과 역할은 다르며, 이에 따라 더 큰 수고를 감당한다는 점은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디모데전서 5:17)
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그러나 목회자에 대한 존중은 교회 공동체를 위한 수고에 대한 평신도의 인정과 감사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목회자 스스로가 존중받고자 한다면, 이는 꼴불견일 뿐더러 그 정도에 따라 우상숭배와 다르지 않은 꼴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욕구를 가지고 있다.
삶의 현장에서 목도하는 사실들로부터 욕구의 원초적인 몸부림을 보게 된다. 국회의원 선거 등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사실은 가장 원초적인 형태라고 인식되는 생명유지를 위한 욕구보다 돈과 명예를 향한 욕구가 더욱 원초적이고 원색적으로 발휘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먹고사는 데 필요한 충분한 분량 이상의 돈을 가진 사람들이 명예를 얻고자 버둥거리며, 명예를 가진 사람은 돈을 얻고자 버둥거린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았던 사람이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부정과 비리가 발각되어 망신을 당하거나 이미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 부정한 돈을 받다가 발각되어 망신을 당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좀 더 학술적으로 정리할 수도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과 소속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로 구성되는 욕구5단계설을 발표했으며, 보편적으로 하위단계의 욕구가 우선권을 갖으며 하위욕구가 충족되면 그 다음 단계의 욕구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허기를 면하고 생명을 유지하려는욕구이다. 의복, 음식, 가택을 향한 욕구에서 성욕까지를 포함한다.
- 안전의 욕구(Safety): 위험, 위협, 박탈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불안을 회피하려는 욕구이다.
- 애정·소속 욕구(Love/Belonging): 가족, 친구, 친척 등과 친교를 맺고 원하는 집단에 귀속되고 싶어하는 욕구이다.
- 존중의 욕구(Esteem):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욕구이다. 자아존중, 자신감, 성취, 존중, 존경 등에 관한 욕구가 포함된다.
- 자아실현 욕구(Self-actualization): 자기를 계속 발전하게 하고자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욕구이다. 욕구가 충족될수록 더욱 증대되므로 '성장 욕구'라고도 한다. 인지 욕구나 심미 욕구 등이 포함된다.

직접적으로 표현하든 학술적으로 표현하든 이 욕구라는 것은 자연인으로서의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것이고, 이의 유혹을 떨쳐버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
혹시라도 성령으로 거듭나서 사람의 욕심을 버리고 완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현실에서는 그저 성령으로 거듭남을 출발선으로 삼아 사람의 욕심을 버리고 완전히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평생토록 애쓰면서 살아가는 정도이고, 그것은 사람인 평신도뿐만 아니라 사람인 목회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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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주의와 욕구를 바탕으로... 목회자가 점점 달라지는 모습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를 생각해 본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목회자는 교회라는 공동체의 유지와 질서를 위해 필요한 지도자이고, 교회를 보살피는 역할을 하며,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사람이다.

(사도행전 20:28)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목회자는 이와 같은 기능적인 측면을 담당하지만, 이와 같은 기능적인 측면을 제외하면 목회자도 평신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목회를 처음 시작한 목회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 때의 목회자는 대화나 설교 중에 자신을 가리켜 말을 할 때에 '저는...', '제가...'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권면의 말씀은...'과 같은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이다. 목회를 처음으로 시작할 때에는 파릇파릇한 겸손함을 지니고 있고, 많지 않은 성도들 한 명 한 명이 소중하기 때문에 오래 끓인 소뼈에서 곰탕국물이 우러나듯 섬기려는 자세가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우러나게 마련이다. 물론, 다른 목회자를 가리켜서는 '목사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다가 시간이 좀 지나서 스스로 목회자로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되면, '저는...', '제가...'라는 호칭이 '목사님이...'로 바뀐다. 주어가 더 이상 '제가...'가 아닌 '목사님이...'로 바뀌었기 때문에 동사도 '목사님이...'에 어울리는 존대말로 바뀐다. 마치 부모가 어린 자녀들을 돌보면서 '아빠가 도와줄께', '엄마가 챙겨줄께'라고 말하듯이 '성도들은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와 같은 어투의 말이 사용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부모가 어린 자녀들을 돌보는 과정에서 책임감이나 보람과 함께 부모로서의 정체성을 느끼게 되면서 자신을 가리켜 이와 같은 호칭을 사용하듯이 목회자도 목회의 과정에서 책임감이나 보람과 함께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을 느끼게 되면서 자신을 가리켜 이와 같은 호칭을 사용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엄밀히 들여다보면, 이 때의 '목사님'은 목회자 자신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를 돌보는 목회자의 직책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직책은 직책으로서만 존재하는 빈 의자이다. 현재 목회자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를 돌보는 목회자라면 누구나 앉을 수 있는 의자인 것이다. 물론, 현재 자신이 목회자로서 몸담고 있는 교회를 돌보는 목회자는 자기 자신이므로 실제로는 전철의 임산부배려석이나 교통약자배려석처럼 비록 비어있더라도 아무나 앉을 수 없는 의자이다.

때로는 '목사님이...'라는 말이 '목사님께서...'로 바뀌기도 한다. '성도들은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와 같은 어투의 말로 바뀌는 것이다. 주어가 바뀐 까닭에 동사가 바뀌게 되고, 동사가 바뀌었기 때문에 다시 동사에 어울리는 조사가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투는 존대말의 기능을 따라서 직책을 좀 더 높이면서 권위를 부여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그러나 스스로가 스스로를 높이는 표현이기 때문에 평신도, 즉 성도들의 공감대에 기반한 표현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뻔뻔하게 이러한 표현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다보면 처음에 느꼈던 이질감이 줄어들고 성도들도 익숙해지게 된다. 이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다음 단계를 내다보고 일종의 빌드업을 진행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군가가 앉아있는 의자를 높이는 것보다는 빈 의자를 높이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그동안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를 돌보는 목회자라는 타자의 직책을 가리키던 '목사님'이라는 말이 목회자 자신을 가리키게 된다. 목사님을 위해 놓아두었던 빈 자리에 자신이 앉게 되는 것이다. 이제 빌드업은 끝났고 교회의 우두머리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권면의 말씀은...'과 같은 말이 '오늘 목사님께서 강단에서 설교를 통해 성도 여러분께 말씀하는 것은...'과 같이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목회자가 교회를 자신의 나와바리로 인식하기 시작하고, 성도들도 자의든 타의든 이에 동의하게 되면 목회자 자신과 성도들에게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점차 목회자와 교회를 동일시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목회자가 자의적으로 성경말씀을 해석하여 전달하는 '설교'라는 것을 성경말씀 자체와 혼동하여 마치 설교가 설경말씀과 동일한 것인 양 인식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는 목회자 자신과 성도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현상이다.

이 상태에서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목사님'이라는 직책이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기 시작한다.

목회자가 자신을 가리켜 '주의 종'이라고 한다면, '종'이라는 단어가 본래 지니고 있는 의미와 같이 열심히 일하겠다는 작은 다짐이 담겨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중이라는 홍보의 의미가 담겨있기도 하고, 높고 거룩한 목회자가 자신을 낮추어 이렇게 수고하고 있으니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목회자인 자신을 섬기도록 하라는 암시적인 권면의 의미를 담고있는 경우도 있다.

목회자가 자신을 가리켜 '성직자'라고 표현한다면, '죄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죄인'인 평신도들은 '성소'인 교회와 '성직자'인 목회자로부터 더욱 분리된다. 그리고 목회자 자신과 성도들은 설교와 성경말씀을 보다 더 일치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위험이 있다.

목회자가 자신을 가리켜 '제사장'이라고 표현한다면, 목회자는 구약에 터파기 공사를 하고 자신의 권위를 세움으로써 자신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성직자임을 묵시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며 이는 평신도들을 교회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분리시키는 것이다. 목회자 자신과 성도들은 설교라는 것과 성경말씀을 더욱 더 일치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목회자가 자신을 선지자로 인식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사람에 대한 권세, 영적인 권세, 물질에 대한 권세를 주셨고, 따라서 축복권을 주셔서 자신에게는 성도들을 축복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세가 있으니 반드시 자신에게 기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때는 축복기도와 헌금을 맞교환하자는 묵시적인 제안이 담겨있는 경우가 있다.

목회자가 자신을 가리켜 교인들의 '영적인 목자'요, '영적인 아버지'라고 표현한다면, 목회자 자신과 성도들 모두가 목회자의 말과 성경말씀을 동일시할 위험이 대단히 높아진 것이다. 이제 목회자는 본분을 망각하고, 정체성을 상실한 상태가 된 것이다. 이 상태는 일종의 '교주화'가 진행되는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성직주의의 폐해가 이렇게 진전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목회자도 평신도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때문이다. 물론 목회자는 투철한 신앙과 소명의식을 바탕으로 신학교육을 받고 목회를 위해 전문적으로 교육된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모습으로 살아감을 보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법을 공부한 사람들이 모두 법을 잘 지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의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모두 환자를 위해 헌신하며 사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목회자든 평신도든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말은 언제든 적용될 수 있다.
자꾸만 변질되려는 죄의 포자가 곰팡이의 포자와 같이 사람의 속과 주변에 흩날리고 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5:19-21)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패를 막을 치료제 또한 우리에게 주셨다.

(갈라디아서 5:16-17)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창조된 처음부터 변질되어 불순종과 죄를 저지른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그나마 덜 변질되며 살아가려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밖에 없다.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놀려 성령을 따르려 애쓰고, 동시에 어리석은 나를 성령께서 돌아보시고 인도해 주시도록 부지런히 구하는 방법밖에 없다.
...구하면 주시는 하나님께...
...의심하지 말고...
...쉬지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