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믿는 사람도 고난을 겪는가?
며칠 전 회사에서 몇 해 전 이직한 젊은 직원의 근황을 듣게 되었다.
"그 사람이 암에 걸렸다고 하더라구요... 아이들도 아직 어린데... 교회도 열심히 다녔는데,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어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로부터도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곤 하는데, 그런 경우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때는 이때다 싶은 투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교회 다니면 잘 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을 믿는데 왜 그런 일을 겪는 건지..."
"하나님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그런 병에 안 걸리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살아가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하나님이라는 전지전능한 신이 계시다면,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나 믿음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지켜주셔야 하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이것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일 뿐만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사람의 생각이기도 하다.
도대체 왜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도, 왜 믿음생활도 열심히 했는데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일까?
"쿨함"의 이해
중고물건을 사고 파는 중고나라라는 사이트가 있다. 좀 더 비싸게 팔고 싶어하는 판매자의 마음과 좀 더 싸게 사고 싶어하는 구매자의 마음이 상충되면서 생겨나는 재미있는 대화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이런 대화로 인한 에너지 소모를 원치 않는 판매자들은 자신이 팔고자 하는 물건을 소개하면서 이런 방식으로 거래하자고 말한다.
"쿨거래"
프로듀서이자 싱어송라이터로도 활동하며 복면가왕에서 가왕의 자리까지 차지했던 왕밤빵 뮤지와 옹달샘 개그맨 유세윤이 결성한 유브이(UV)라는 그룹이 발표한 노래가 있다.
"쿨하지 못해 미안해"
...정말 예쁘게 아름답게 헤어져놓고 드럽게 달라붙어서 너무 미안해
...합의하에 헤어져놓고 전화해서 미안해
...합의하에 헤어져놓고 문자해서 미안해
이처럼 예전에는 없었던 "쿨하다"라는 표현이 어느새 널리 사용되고 있다.
본래 이 말이 유래가 분명한 영어단어 "cool"의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냉각 ②시원한 ③식히다 ④멋진 ⑤좋다
①, ②, ③번의 뜻이 사람의 태도에 관한 표현으로 사용되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 ④, ⑤번의 의미로 일반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문화가 세계화된 지금의 세상에서 이 외국어가 외래어가 되고 이제는 우리말화되어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국어사전을 통해서 이 말의 뜻을 찾아볼 수 있기도 하다.
쿨하다 : 꾸물거리거나 답답하지 않고 거슬리는 것 없이 시원시원하다
"쿨거래"도, "쿨하지 못해 미안해"도 이런 의미에 바탕을 두고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쿨하다"라는 표현은 사람의 성격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 '답답하지 않고 시원시원하다'는 시전적인 의미로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시원하다, 차다'는 의미가 확장되어 '냉정하다, 차분하다, 침착하다'로 발전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쌀쌀맞다'를 거쳐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를 눈여겨 본다면,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도, 믿음생활도 열심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쿨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쿨하신 하나님 (1)
하나님께서 쿨하신 분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는 분이다, 치우치지 않는 분이다'라는 의미로 우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원칙대로 행하시는 분이시며, 따라서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시는 엄격한 법치주의자이자 원칙주의자이시고, 또한 정확하게 설계하시고 운영하시는 수학자이자 엔지니어이시다.
쿨하신 하나님은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고 해서 인간의 세상살이 가운데 개입하여 특별히 감싸 주신다거나, 믿음생활을 열심히 했다고 해서 특별히 혜택을 주시지 않는다.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도, 믿음생활도 열심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큰 어려움을 겪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쿨하신 분이 아닐 경우를 생각해보면 도움이 된다.
서두에서 얘기한 현실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고, 사람들이 예상하고 기대하는 대로 살아가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즉, 교회를 열심히 다녔기 때문에, 믿음생활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복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이렇게 말하면 추상적이고 모호하므로 이해하기 쉽도록 보다 명확하고 정량적인 기준으로 생각해 보자. 만일 교회를 열심히 다녔기 때문에, 믿음생활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100살 이상을 살게 된다면... 혹은 100살 이하로는 죽지 않게 된다면...
100억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고 살게 된다면... 혹은 100억 이하의 재산을 소유하는 정도로는 살지 않게 된다면...
100평 이상의 집에서 살게 된다면... 혹은 100평 이하의 집에서는 살지 않게 된다면...
암에 걸리지 않게 된다면... 혹은 감기 이상의 질병은 앓지 않고 살게 된다면...
이렇게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과연 우리의 삶은 복될까?
만약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이런 식으로 '복'을 받는다고 한다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 출석을 기준으로, 또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신앙고백을 기준으로 당장 위에 언급한 구체적인 복을 받아 누리며 살게 될 것이고, 또한 그것이 표적이 되어 교회에 다니지 않던 사람들,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도 교회에 출석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거나, 혹은 그것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아마 시늉이라도 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거나 적어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복을 받기 위해서라도.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쉬울 것 없는 평안한 삶 속에서 배가 불러 이내 하나님을 떠날 것이다. 그것은 사람 속의 죄성으로 말미암은 속성이기 때문이다.
(잠언 30:8-9)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이런 경우, 복을 받더라도 다 놓쳐버리는 결과가 되고 만다. 결국, 복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또한 복을 받은 사람들은 사람의 속성을 따라 각자가 받은 복을 다른 사람이 받은 복과 비교하게 될 것이다.
'나도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데, 나도 열심히 믿는데, 왜 내 재산은 저 사람보다 적은 것이지?'
'나도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데, 나도 열심히 믿는데, 왜 난 저 사람보다 건강하지 못하지?'
'우리 아버지도 교회에 열심히 나갔고, 열심히 믿었는데, 왜 저 사람보다 오래 살지 못하셨지?'
'나도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데, 나도 열심히 믿는데, 왜 우리 집은 저 사람의 집보다 작은 것이지?'
그리고는 이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을 토해내기 시작할 것이고, 마침내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 복을 받더라도 다 놓쳐버리는 결과가 되고 만다. 결국, 복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혹은 하나님이 복을 주셨음에도 스스로가 복을 망가뜨리는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장수의 복을 받고서도 스스로 생명을 포기한다면...
재물의 복을 받고서도 절도를 당하거나, 도박이나 사기를 당해 재물을 잃게 된다면...
넓은 집의 복을 받고서도 홧김에 집에 불을 지르거나, 사고로 집을 잃는다면...
본인 혹은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을 토해내기 시작할 것이고, 마침내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 위와 동일하게 복을 받더라도 다 놓쳐버리는 결과가 되고 만다. 결국, 복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처럼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복을 받더라도,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한계 때문에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말 것이다. 복을 간직하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세상은 더욱 혼란스럽게 되고, 믿음이 무가치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쿨하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해서,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복을 주시거나 팔이 안으로 굽듯이 무조건 치우치지 않으시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렇게 쿨하실 때, 그래서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만날 때,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오히려 굳건하게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잠깐 동안 존재하는 세상의 복을 위한 보험이 될 수 없다. 믿음은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영원한 복, 곧 구원의 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더라도 명백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세상에서 복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위험 가운데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 그 사람이 구원받고 하나님 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실 것이고, 이를 위해 그 사람의 삶을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지의 한계와 교만의 속성 때문에 복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생각과 달리 오히려 고난을 겪게 하시는 것을 선호하실지도 모르겠다.
하나님께서는 쿨하실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쿨하신 하나님 (2)
하나님께서 쿨하신 분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을 넘어서는 분이다'라는 의미로 또한 이해할 수 있다.
(이사야 55:8-9)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람들은 늘 '~하면 ~해야 한다', '~하니까 ~하다'라는 생각의 틀 속에서 살아간다.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교회도 열심히 다녔는데...", "그 사람이 믿음생활도 열심히 했는데..."라는 생각을 한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왜 "교회 다니면 잘 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을 믿는데 왜 그런 일을 겪는 건지...", "하나님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그런 병에 안 걸리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동일하게 '교회를 다니면 좋은 일이 생겨야 한다', '믿음생활을 하니까 나쁜 일이 생기면 안된다'라는 틀 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면 ~해야 한다", "~하니까 ~하다"라는 방식으로 원인과 결과의 구조 속에 갇혀있는 사람들의 생각의 틀을 '인과관계'라고 한다.
인과관계라는 1차원적 구조는 3차원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해하기에 매우 쉽고, 3차원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의 틀에 매우 적합하다고 이해된다.
인과관계가 이와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음은 선악과를 먹을 때부터 드러난다.
선악과를 먹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알게 될 줄을 하나님이 아신다'라는 뱀의 말이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있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원인과 결과의 구조로 겹겹이 치장한 뱀의 거짓말에 즉각적으로 현혹된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은 이내 뱀이 심어준 인과관계의 구조 속에 갇힌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 '하나님처럼 되니까 못 먹게 한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인과관계의 구조를 갖추고 있지 않다. 이 말씀은 사실을 전달할 뿐이며, 그 속에는 논리적 판단의 근거와 그에 따른 결과가 들어있지 않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거짓말을 통해서 뱀이 만들어 낸 인과관계를 처음으로 접했던 것이다.
인과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구조를 갖는다. '원인과 결과의 구조'라는 것은 원인의 작용에 의해 결과가 발생한다는 의미이며, 이 말은 원인을 조작함으로써 결과를 조정할 수가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사람이 원인을 바꿈으로써 결과를 조정하는 하나님의 자리로 갈 수가 있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지혜로워진다'는 결과를 얻기 위해 '선악과를 먹는다'로 원인을 바꾸어버렸던 것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채.
인과관계는 인간의 지혜의 표상처럼 보이지만, 실은 인간의 교만을 대표하는 생각의 틀인 것이다. 이러한 사례로서는 인간의 생각의 구조 속에서 발전해 온 '과학'을 통해 쉽게 볼 수 있다. 성경은 이 세상의 존재와 운행의 원인이 '창조'이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이라고 말하지만, 인간은 이 세상의 존재와 운행의 원인을 '우연'으로 바꾸었고, 이를 통해 결과를 '하나님없이 진화하는 세상'으로 조정해 버렸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뱀이 거짓말을 했듯이 교육과 매스컴을 통해 이를 주입해 왔고, 또한 지금도 하고 있다.
인과관계의 틀에 갇혀 버리면 이를 벗어난 영역에서 발생하는 일에 대해서 당황하게 되고, 반감을 품게 된다. 낮설고 불편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인간 이해의 통제 밖에 있기 때문에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더 이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을 돌아보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 사고의 틀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 '포도원 품삯'의 비유이다.
(마태복음 20:1-16)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사람의 생각에는 '일을 하면 그 만큼 품삯을 받아야 한다'는 인과관계가 논리적이고 타당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인과관계 속에서는 사람이 '일을 한다'는 원인을 조정하여 '품삯'이라는 결과를 조정할 수 있게 된다. '더 많은 품삯'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일'이라는 원인을 조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쿨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사고의 틀 안에서 일하시지 않는다. 일을 한 시간, 일의 분량과 관계없이 동일한 품삯을 주시는 것이다. 이에 인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인과관계의 영역을 벗어난 결과에 대해 당황하여 반감을 품고, 결국은 '원망'을 한다. 인간의 사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0:11)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며 우리가 갇혀사는 인과관계를 넘어선다.
(마태복음 20:15)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하나님의 쿨하심
하나님은 쿨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을 넘어선다. 또한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주관하신다.
하나님이 이와 같으신 것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전지전능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따라서 세상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다. 따라서 세상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공평하게 대하시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또한 전지전능한 분이시다. 따라서 세상 모든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따라서 만물을 주관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을 각자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 따라서 눈앞의 것만 볼 줄 아는 인간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이 마침내 자신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을,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을 유익한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쿨하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욥기를 보면, 욥에게 고난이 닥친 후, 욥과 친구들과의 기나긴 문답의 대화 끝에 욥과 하나님의 대화가 이어지고, 마침내 마지막 장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은 욥의 고백을 볼 수 있다. 이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과도 같다.
(욥기 42:5)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이 귀로 듣기만 하다가 눈으로 뵈온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실까?
하나님의 질문이 어어진 후에 욥이 이 말을 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질문을 살펴보면 욥의 말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의 질문은 욥이 미처 알지 못하는 내용들, 곧 만물의 시작과 현재에 관한 것들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신 것이다. 모든 주권과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데 있어서 사사로이 치우치지 않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욥기 40:8)
8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그리고 욥은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말하기 직전에 이렇게 말한다.
(욥기 42:2-3)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이로부터 욥이 뵈온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며, 못 하실 일이 없고 못 이루실 계획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데 있어서 사사로이 치우치지 않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욥은 인과관계에 갇혀 고난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자신의 사고를 넘어서서, 만물을 공의로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깨달은 것이다. 곧, 쿨하신 하나님을 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공의로 만물과 인생을 다스리시는 쿨하신 분이다.
그래서 세상은 혼란이 없고 질서 가운데 운행되며, 인생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어쩔 수 없는 인과관계의 틀 속에서 하나님을 뵈려고 버둥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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