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잠깐 스쳐가는 말씀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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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한 조각

'하여가'와 '단심가'

아리마대 사람 2024. 11. 20. 23:16

일본의 정형시인 센류를 통해 쓰여진 책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정형시라고 하면 역시 시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말에 딱 들어맞는 3-4-3-4 / 3-4-3-4 / 3-5-4-3의 규칙적인 운율을 따라 읽다보면 어느새 입안에는 노래가 흥건하게 고여 흘러내리고, 초장의 발단과 중장의 전개를 거치면서 고조된 감정이 종장에서 절정에 도달하여 마침내 종장 둘째 음보에서 분출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시조 중에 참으로 유명한 작품이 '하여가'와 '단심가'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하여가'는 훗날 조선 제3대 태종이 된 이방원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 왕조를 세우는 일에 정몽주가 가담할 것인지를 묻는 시조이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단심가'는 이에 대한 답가로서 정몽주가 고려의 신하로 죽겠다고 대답한 시조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싈 줄이 이시랴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는 전혀 다른 정치적 입장에 놓인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조로서 전혀 다른 생각을 담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상반된 두 시조가 묘한 짝을 이룬다.
일반적으로 짝을 이룬다고 하면 대개 유사한 주제와 감정을 담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게 마련이다. 복음성가 중에 짝을 이루는 것으로 유명한 곡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과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이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1997년 이민섭 목사가 작곡한 곡이다. 본래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곡이라고 하는데, 주로 교회에서 새신자들을 환영하거나, 생일 등을 축하할 때 많이 사용되는 곡이다.  작곡자 이민섭 목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노래가 불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저작권료를 받지 않았다고도 한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에 대한 답가로서 설경욱 목사가 작곡한 곡이다. 답가답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에 대해 '감사해요 꺠닫지 못했었는데...'로 대답하는 가사로 이어진다. 후렴구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라는 가사가 동일하며, 멜로디도 유사하다.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날 향하고 있었다는 걸

고마워요 그 사랑을 가르쳐 준 당신께
주께서 허락하신 당신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더욱 섬기며
이제 나도 세상에 전하리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랑 전하기 위해
주께서 택하시고 이 땅에 심으셨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이처럼 짝을 이룬다고 하면 닮은 꼴인 두 곡이 서로 주고 받거나 이어지는 내용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하여가'와 '단심가'는 정형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므로 서로 닮은 형태이고, 또한 서로 주고 받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하여가'를 읊은 후에 '단심가'를 듣고 나서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일 마음을 먹었다고 하니... 짝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난감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두 편의 시조를 생각해 보면... 생명이 걸린 절박한 상황에서도 이처럼 절묘한 표현을 보여주는 여유가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여가'와 '단심가'를 읽고 있다보면, 성경 속의 한 가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것은 마태복음 4장 1-11절에 기록된 내용으로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시험받으신 이야기이다.

(마태복음 4:1-11)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이 이야기가 떠오른 이유는 이 이야기 속에 '하여가'와 '단심가'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귀의 '하여가'는 다음과 같다.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예수님의 '단심가'는 다음과 같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를 시조 형태로 만들면 어떻게 될까?
마귀의 '하여가'는 다음쯤 될 것 같다.

하나님 아들이면 돌들로 떡만들라
하나님 아들이면 성전서 뛰어내려라
엎드려 나를 경배하면 천하만국 다 주리라
 
예수님의 '단심가'는 다음쯤 될 것 같다.

떡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며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했다
하나님께 경배하고 사탄아 물러가라
 
이방원과 정몽주의 이야기의 결말과는 달리, '하여가'를 읊조린 마귀는 예수님의 '단심가' 앞에서 떠나고 만다.
 
(마태복음 4:11)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에덴동산에서는 뱀의 '하여가' 앞에서 아담과 이브가 '단심가'를 부르지 못하고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마귀가 흔들 때 흔들리지 않으시고, 유혹할 때 유혹당하지 않으시며 '단심가'를 부르심으로써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다.
 
(창세기 3:15)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신채호는 역사를 가리켜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활동 상태의 기록"이라고 말했지만, 어쩌면 역사는 "마귀의 '하여가'와 성도의 '단심가'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활동 상태의 기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