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잠깐 스쳐가는 말씀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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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한 조각

전도거부카드

아리마대 사람 2017. 5. 24. 11:22

지금은 포커플레이어로 전향한 스타의 황제 임요환 선수의 한창 때 플레이를 보면 유닛 컨트롤이 매우 세심했다. '살아있는 마린'이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유닛 컨트롤에 신경을 많이 쓰는 플레이를 펼쳤다. 부상의 정도가 심해 방어력이 떨어진 유닛을 하나 하나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 죽지 않도록 컨트롤을 해주었다. 컨트롤에 신경쓴다는 것은 그만큼 손이 많이 가는 일이므로 대개의 스타 선수들은 세세한 컨트롤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임요환 선수는 세세한 컨트롤을 보여주었으며 어쩌면 그러한 플레이를 통해 황제라는 별명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적은 수의 유닛들도 컨트롤을 통해 살렸다는 것은  그만큼 유닛을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유닛이 곧 공격력이기 때문에 플레이 상의 필요성에 의한 작업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유야 어찌됐건 그만큼 유닛을 아끼고 보살피는 플레이를 펼쳤다.

 

'사람이 가장 소중하다', '사람 먼저', '인재제일', '인권우선'... 이와 같은 현 세태의 구호는 사람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는 사람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구호의 의미가 과연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인명을 경시하고, 도구화하고, 수단화하고 있지만... 어쨌든 겉으로 강조되고 있는 현 세태의 구호는 사람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전제가 작동하다보니 마치 임요환 선수가 적은 수의 유닛들을 컨트롤하기 위해 신경을 썼듯이 "적은 수의 사람의 무리" 즉 소수집단이나 "적은 힘을 가진 사람의 무리" 즉 약자집단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고 중요시해야 한다는 주장도 지지를 얻고 있다. 사람이 중요하므로 그 수가 많든 적든 사람과 사람의 무리가 소중하다는 점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렇지만, 사람이 그 자체로서 중요시되어야 한다는 것과 사람의 집단(소수집단이큰 다수집단이든...)이 무조건적으로 가치있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평등'이 강조되어 가면서 과거에 소수집단, 약자집단으로 여겨지던 집단도 점차 법적인 보호를 받고 있으며, 점차 발언권을 얻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세계적인 추세인데다가 다수의 지지를 얻는 상황이지만, 그 변화는 분명히 한계를 가져야만 한다. 소수집단, 약자집단의 권리와 힘은 다수집단, 강자집단의 권리와 힘과 동일한 크기까지만 커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쪽의 권리와 힘이 다른 쪽을 능가했기 때문에 발생한 부조리와 차별을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최종적인 상태는 양쪽의 권리와 힘이 동일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만일 어느 한쪽의 권리와 힘이 다른 쪽을 능가하게 된다면 그것은 또다른 부조리, 역차별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 균형상태는 사실 달성하기가 매우 어렵다. 전지적 관점에서 균형상태임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늘 시끌벅적하고 뉴스가 끊이지 않는 것 같다.

 

오늘 보도기사 중에 매우 특이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대학생 자유사상가 모임인 ‘프리싱커스’라는 곳에서 "No Thanks"라는 문구가 적힌 전도거부카드를 전국 대학가에 배포하겠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도도 일종의 종교의 자유인데, 지나친 대응 방식"이라는 의견과 "오죽하면 카드까지 만들겠느냐"는 의견이 있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프리싱커스'라는 모임은 전국 14개 대학생 200여명의 모임이라고 한다.

이 기사를 보면서... 몇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처럼 집단의 주장이라면 일단은 주목하는 세태임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주장이 기사화되어 보도까지 되는 것을 보면... 작금의 인터넷 시대의 뉴스의 성향, 더 나아가서 요즘 세태의 성향을 일부나마 파악할 수가 있다.

 

여기서 특별히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소위 '전도거부카드'의 명칭과 도안이다.

'전도'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의 뜻만을 본다면 '도리를 세상에 널리 알린다'는 일반적인 뜻을 가진 단어에 불과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기독교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단어이다. 그래서 사전에도 일반적인 뜻 외에 븍별히 '기독교의 교리를 세상에 널리 전하여 믿지 아니하는 사람에게 신앙을 가지도록 인도하는 일'로 그 정의가 나타나 있다. 기독교 외에는 '포교'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전도'의 적극성으로 인해 '전도'라는 단어는 기독교를 떠올리게 만드는 단어가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카드의 이름이 '전도거부카드'이고, 카드에는 '저에겐 당신의 전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으니 이 카드가 주로 기독교의 '전도'를 대상으로 사용될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억지는 아닐 것이다.

또 한가지 눈여겨 보게 되는 것은 카드의 도안이다. 't'라는 글자만이 유독 빨간색으로 나타나 있으며, 't'의 글자체도 곡선이 없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t'라는 글자는 마치 십자가처럼 보이고 있다. 어찌 보면 세워져 있는 십자가 같으나, 가로로 길게 뻗은 획을 보면 옆으로 넘어진 십자가로 보이며, 무슨 이유인지 중간에 꺾인 부분을 만들어 둠으로써 't'라는 글자는 부러지고 쓰러진 십자가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게다가 No라는 글자와 이어짐으로써 이는 마치 부러진 십자가를 진 사람이나, 십자가를 부러뜨린 사람처럼 보이고 있다.

'싫다'라는 감정은 본래 논리적이지 못하다. '싫다'라는 감정은 본질적으로 감정적인 것일 뿐이며, 그에 대한 이유나 논리는 그저 포장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논리적으로 '싫다'라는 감정을 설명하는 경우, 직접적으로 싫은 대상이 숨겨지는 경우가 많다.

'전도가 싫다'는 주장은 '싫다'는 감정에 기반한 것이며, '최근 대학 내 포교행위가 일상생활을 방해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강요하는 것이 비상식적인 의사소통임을 알리겠다'는 취지는 명분이고, 실은 '기독교가 싫다'는 주장이 그 뒤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만일 그 주장이 맞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이 싫다'는 주장에 다름이 아니다.

(로마서 1:28)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기독교를 거부하는 것.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 그것이 현 세태의 성향이다.

신문기사를 읽고 세태가 점차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혀를 찬다면...지나친 추측일까.

(누가복음 18:8)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갈수록 믿음을 보기가 어려워지고, 갈수록 믿음을 지키며 살기가 어려워지며, 갈수록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가 어려워져 가는 세상의 그림자를 전도거부카드에서 엿보았다고 하면...지나친 비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