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잠깐 스쳐가는 말씀 한 조각

말씀 한 조각 만으로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 생각 한 조각

재물의 축복

아리마대 사람 2017. 11. 15. 15:24

"우리 교인들, 부자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교인들, 물질의 복을 받게 해 주시옵소서"

혹은 대단히 구체적인 동시에 성도들의 귀와 가슴에 쏙쏙 들어오도록

"우리 교인들, 복을 주셔서 삯월세는 월세로, 월세는 전세로, 전세는 자가로, 자가는 더 넓은 곳으로 이사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예배 중에 목사님들께서 이와 같은 기도를 하시는 경우가 있었다.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 인용하는 것은 흐름과 동떨어진 논쟁거리를 만들 수 있으므로 올바른 태도는 아니지만, 기도의 전문은 기억하려 해도 떠오르지를 않고 그저 저 문구들만이 귀에 박혀 머리 속에 또렷하게 남아있는 상황이다 보니... 피치 못하게 언급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그만큼 저 문구들이 인상적이라는 의미이며, 그만큼 저 문구들이 매력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바라는 바 '복', 구체적으로는 '물질의 복'과 관련이 있고, 특별히 남녀노소 모든 사람의 장래희망인 '부자'라는 말이 언급되기 때문일 것이다.

 

복...

의도적이든 아니든 저 기도의 문구가 들려지는 그 순간만큼은 복은 '물질의 축복', '부자가 되는 것'으로 정의가 되고 있다. 물론, 저 문구들은 전체 기도문의 일부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내내 '물질의 축복', '부자가 되는 것'만이 복의 전부로서 언급되고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저 인상적인 문구의 순간 동안에는 복의 정의가 그러하다.

 

복...

저 문구가 또렷하게 남아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교회에서 기도 중에 언급되는, 그러니까 하나님께 올려지는 복의 정의가 우리 사회의 전통적이며 전근대적인 복의 정의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서 재미있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것, 그래서 부자가 되는 것...

이 재미있음은 한밤중에 상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달을 보며 자식이 잘 되기를 빌던 옛 어머니, 할머니들의 무지하고 안타까운 기원의 내용과 교회의 강단에서의 기도문의 내용이 비록 잠시나마 겹쳐진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화수를 떠놓고 그저 잘먹고 잘살게 해달라고 비는 원초적이고 무지한 바램은 소위 '기복신앙'의 행위이다. 그러니까, 물질의 복, 부자가 되는 복은 우상숭배인 '기복신앙'과 '기독교 신앙'의 교차점이자 공통점이 되는 것이다.

어쩌다가 '기독교 신앙'이 이처럼 '기복신앙'과의 교차점에 뻗어있기까지에 이르게 되었을까...

 

'번영신학'.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아서 성공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신학'이다. '신학'이라고까지 불리는 까닭은 복에 관한 성경말씀을 끌어다가 이를 신학적 토대의 근거로 밟고 서있기 때문이다.

'신학'은 신과 관련된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한 지적활동의 결과로서 나타난 학문의 일종이다. 따라서 '신학'은 '신앙'이 아니며, 더우기 '믿음'과는 전혀 별개의 분야이므로 'OO신학'이라는 명칭에 시비를 걸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지적활동에 불과한 '신학'을, '신앙'을 옹호하는 지식 활동으로 생각하거나, '신앙'을 이성적 기반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체계화시켜 주는 학문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만일 그릇된 신학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착각 속에 빠뜨리고 그릇된 신앙으로 인도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것은 실족하게 하는 자와 실족하는 자 모두에게 비극이다. 이것은 착각 속에 빠진 사람들의 책임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신앙'이나 '믿음'과 혼동시키기 위해 교묘하게 성경 말씀을 이론적 토대로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은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마가복음 9:42)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번영신학은 미국에서 발달했다고 하니,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많은 이들에게도 전달되었을 것이고, 또한 이들에게서 교육받고 인도받은 많은 사람들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번영신학이 단순히 '신학'의 일부에 불과하다면 성경과 무관하더라도 괜찮을텐데, 귀에 또렷하게 들리고 머릿 속에 깊이 새겨지는 특성 탓에 목회에 도입되어 설교 중에 전달되다 보니 성경 말씀을 그 근거와 토대로 삼았다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 말씀은 요한삼서 1:2 말씀이라고 한다. 

 

(요한삼서 1:2)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그리고, 사람들을 실제적으로 교육하는 데에는 말라기 3:10 말씀이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말라기 3:10)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말씀들을 이용해서 '십일조를 비롯하여 헌금이나 물질을 바치면 이것은 믿음의 증거로서 영혼이 잘되는 것이며, 이것은 번영의 씨앗이 되어 하나님께로부터 쌓을 곳이 없도록 부와 건강을 포함한 범사의 축복을 받는다'는 이론이 만들어 진 것이다.

요한삼서의 말씀은 "네 영혼이 잘됨 같이"를 말씀하고 있다.

"영혼이 잘 됨".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의 구원을 받았다면 영혼으로서는 더 이상 잘 될 수 없는 것이다. 영혼의 구원은 믿음의 결국, 곧 믿음의 최종 목표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전서 1:9)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렇게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면, 기쁨 가운데 내게 믿음을 주셔서 내 영혼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이는 내 영혼이 믿음의 최종목표를 이룬 것이며, 그것으로 충분하게 된다. 내게 충분함이 넘치므로 더 바랄 나위가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니, 비록 삶 가운데에 부족한 것이 있더라도 삶은 즐겁고 기쁠 뿐이다. 여기서 삶 가운데의 부족함이라는 것은 그저 사람의 보기에 그리 보이는 것일 뿐, 내 속에는 그와 비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함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한다.   

 

(하박국 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요한삼서의 말씀은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는 축복의 인사말이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여기서의 네 영혼은 아직 잘되지 읺은 상태일 수도 있고, 이미 잘된 상태일 수도 있다.

네 영혼이 아직 잘되지 않은 상태라면,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우선이고 긴급한 문제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범사에 있어서 잘되고 강건한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며, 혹시 영혼이 잘되는 것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영혼이 잘되는 데에 종속된 문제에 불과하다. 이것은 영혼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축복의 인사말이다.

네 영혼이 이미 잘 되어 있는 상태라면, 가장 중요한 것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인 것이다. 나머지는 덤이다.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면 좋은 것일 뿐이다. 혹,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지 않더라도 영혼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불평 불만은 없다. 또한, 네 영혼이 잘되는 만큼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는 구절의 국어적 의미를 생각한다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정도는 결코 영혼이 잘되는 정도를 앞서지 못한다. 기껏해야 영혼이 잘되는 만큼만 잘될 수 있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 기준이 되는 것은 영혼이 잘되는 것이다.

요한삼서가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쓴 편지이므로, 이 구절은 사랑하는 자를 위한 축복의 인사말이다. 범사에 잘 되기를 간구한다고 했으니 '부자가 되는 것'이 포함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편지를 쓴 요한이 '부자가 되는 것'이 가이오에게 유익한 것이며 '잘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경우에만 그러하다. 이 부분은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 말씀을 가지고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진다'거나, '영혼이 잘되는 것 못지 않게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게다가, 범사가 잘되는 것을 주로 '부자가 되는 것'으로 한정한다면 더더욱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부자가 되는 것'.

성경은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는 매우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9:23-24)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물론, 여기서의 '부자'가 무조건 재산이 많은 '부자'를 가리키지는 않을 것이다. 가진 재산을 기준으로 '부자'인지의 여부를 판단한다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못들어가느냐의 기준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자'라는 개념과 기준 자체가 상대적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자의 뜻은 아마도 그 앞에 이루어진 부자청년과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19:16-22)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까지도 지켰다고 말하는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그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면 온전해 진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의 고민에 대한 답을 얻었음에도 기뻐하기는 커녕 근심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그가 '가진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청년은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왔다고 말하지만,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에는 근심했다.

청년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으나,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는 떠나 버렸다.

청년은 영생을 얻고 싶다고 하였으나, 하늘에서 보화가 주어지는 방법을 알려줘도 예수님을 떠났다.

청년은 자신이 원하던 영생을 얻는 온전한 방법의 답을 구했음에도 기쁨 대신 근심하게 되었다. 

부자인 청년이 가난한 목수 출신의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상황을 기준으로 생각할 때, 청년은 그의 말대로 살아오면서 계명을 지키고 살았을 것이며, 이웃도 사랑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은 자신의 소유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 혹은 극히 적은 비용이 드는 범위 내에서 사랑하고 살았을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소유가 늘어나거나, 적어도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만 베풀고 살았을 것이다.

이것이 청년이 보여준 '부자'의 모습이요, 또한 말씀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부자'의 정의인 것이다.

가진 재물에 마음이 매인 모습.

이 세상의 것에 마음이 매여 영생의 길을 고민하는 모습.

이 세상의 것을 버리지 못해 영생을 포기하는 모습.

그러니, 이런 모습의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영생을 포기하는 모습을 볼 때,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자는 도무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가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9:25-26)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부자로 하여금 부자이지만 부자되지 않게 하실 수 있는 분이다. 부자로 하여금 자신의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기꺼이 예수님을 따르는 마음을 주시고, 이 세상의 것들보다 영생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게 하실 수 있다. 이 세상의 재물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고, 나는 그저 청지기, 충성된 청지기로서 관리하는 것뿐이며, 재물은 이 세상 가운데에서 하나님 나라를 넓혀가는 데에 쓰이는 도구일 뿐이라는 마음을 확고하게 심어주실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부자를 '재물을 통해 일하는 그리스도의 충성된 일꾼'으로 만들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4장)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이와 같이 부자도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는 있으나...

현실에서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현실에서는 재물을 손에 쥔 사람의 모습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떠나간 청년의 모습과 같다.

기네스북을 보면 사람들이 어렵다고 하는 일에 도전하여 자신의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있지만, 과연 천국을 가는 데 있어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에 도전할 사람이 있을까?

 

번영신학은 성경의 말씀을 비틀어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길을 축복의 길이라고 외치며 사람들을 이끌어 가고 있다. 그것은 결코 축복의 길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재물과 관련한 진정한 축복의 길을 이미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잠언 30:7-9)
7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그 길은 나를 먹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데에 있어서 오직 필요한 만큼의 양식만을 구하는 것이다. 가난하지도 않게, 부하지도 않게, 때를 따라 먹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다. 그 길에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늘 보면서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늘 깨달으며 살 수 있다.

흔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며 걸었던 광야를 고난의 길로 생각한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하며 그 길을 걸었고, 불편과 불만으로 인해 결국 가나안 땅에 발을 디뎌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출애굽의 광야 길은 순종하고 인내함으로써 빨리 통과해 버려야 할 고난의 길로 가르쳐지고,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눈을 들어 다시 바라보면 그 길은 놀라운 기적의 길이요, 놀라운 은혜의 길이다.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광야에서는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였고, 성막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으며,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 강림하셨다.  

광야에서는 의복이 해어지지 않고, 신발이 낡지 않았으며,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

광야에서는 목이 마르면 물을, 배가 고프면 만나를, 고기가 먹고 싶으면 메추라기를 보내주셨다. 만나를 주시는 데 있어서 얼마나 세심하게 배려하셨는지 하루 먹을 만큼만 주셔서 많이 보관하면 상하게 하시되, 여섯째날 거둔 만나는 안식일을 지킬 수 있도록 이틀 동안 보관해도 상하지 않게 하셨다.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돌보심을, 이렇게 세심한 하나님의 기적을 볼 수 있는 곳이 광야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함꼐하심을 깨달을 수 있는 곳이 광야였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곳,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곳, 하나님을 완전하게 의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곳,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광야였다.

그러니, 이러한 광야의 기적과 은혜를 생각할 때, 구원을 생각하고 영생을 생각한다면 '번영신학'이 아니라 '광야신학'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교인들, 부자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교인들, 물질의 복을 받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교인들, 복을 주셔서 삯월세는 월세로, 월세는 전세로, 전세는 자가로, 자가는 더 넓은 곳으로 이사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이 문구만 기억이 날 뿐이지만...

분명히 저 문장의 뒤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부자가 되어도, 물질의 복을 받더라도 재물에 욕심내지 않고 하나님께 다 드릴 수 있는 부자, 가난한 자에게 다 줄 수 있는 부자, 하나님만 사랑하는 부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 분명히 가장 중요한 복, 가장 절대적인 복을 놓지지 않기를 구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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