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서울 노량진국민학교에 재학 중일 때, 소풍장소는 주로 사육신묘가 아니면 숭전대학교 뒷산이었다.
사육신묘는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 공원화되면서 단장이 되었는데, 그 이전까지는 소풍을 가면 봉분 옆에서 놀곤했다.
소풍을 묘로 간다는 점에 대해서 당시에 전혀 거부감이 없었는데, 장소가 어디든지 '소풍'은 그 자체로 즐거웠기 때문이었고, 또한 사육신 중의 한 분이 웃대의 집안 할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보니, 사육신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생육신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내쫓았을 때 이것이 바르지 못하다하여 세조와 그의 측근들을 제거할 계획이 발각되었던 사건 자체에 대해 알아보고 생각해 볼 시간을 갖기도 했다.
사육신은 유교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에 유교사상에 근거한 가치관을 갖게 되었고, 눈앞에서 벌어진 왕위 찬탈 과정과 이후의 세조의 독선이 유교사상에 비추어 옳지 않다는 판단으로 인해 거사를 계획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반면에 세조의 편에서 도왔던 신하들도 있었고, 세조를 제거하려던 계획을 고해 바친 신하들도 있었고, 세조의 명에 따라 단종과 사육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신하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과연 사육신은 무엇에 그토록 비분강개함을 느껴서 현실에 타협하지 못하고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죽음에 이르게까지 되었을까...
사육신묘로 소풍을 다니던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훨씬 더 많이 자란 어느 날, 개나리가 활짝 핀 어느 봄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문득 '아, 그래서 그렇구나...'를 깨닫고 무릎을 치게 되었다. 단종의 복위를 계획했던 여러 신하들이 어떤 연유로 그리 행동했는지를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중의 한 분의 이유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나는 싫다'는 마음임을.
자신이 배우고 익힌 학문과 사상의 관점에 비추어 옳지 않다고 판단되는 일을 보았을 때, '저것은 옳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고, '옳지 않은 것은 싫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싫다'는 것보다 더 명확한 거부의 이유가 있을까.
'옳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만 해도 혹시 타협을 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싫다'는 마음이 들면 타협의 여지는 없어지고 완고한 거부만이 남게 된다. '옳지 않다'와 '싫다' 사이에 시간 간격이 존재한다면 혹시 타협의 과정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옳지 않다'는 생각에 뒤이어 거의 동시에 '싫다'는 생각이 든다면 타협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육신 중의 한분은 '옳지 않다'는 생각과 동시에 '싫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봄 날, 내 자신을 들여다보다가 그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사육신묘가 떠올랐고, 왜 그분은 사육신 중의 한 분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를 깨달았고,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다. 그랬구나, 세조가 하는 행동은 옳지 않았고, 그게 싫었으니까...
대대로 내려오는 이런 성격이 겉으로 드러나는 때문인지... 피곤한 회사생활을 하며 살게 되었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하기가 싫었고, 또한 하기가 싫은 일을 실제로 하지 않다보니 피곤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업무 이외의 일들, 소위 길들이기 목적의 지시에 대한 대응, 비위를 맞춰야 하는 말이나 행동같은 것이 그러하다. 억지로 해보려고 노력해도 잘 되지가 않는다. 그러니, 상사들이 좋아할리 만무하다. 그나마 한가지 다행인 점은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내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나를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점에 대해 내가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싫다'는 것보다 더 명확한 거부의 이유는 없다는 걸 나도 너무나 잘 아니까.
나를 닮은 행동을 하는 것이 여러 해 동안 관찰된 내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런지... -_-;;;;;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창세기12:1-3)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위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하브라함을 부르시기 전, 창세기 11장을 보면 아브라함에게서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창세기 11:26-32)
26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27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아브라함이 사래와 결혼했고 자식이 없었다는 점,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아내와 조카를 데리고 아버지를 따랐다는 점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여기서는 이 말씀만으로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후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후의 아브라함을 행동들을 볼 때, 또한 아브라함을 부르시기 전의 일에 관한 성경의 기록들 속에서, 무엇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부름을 받게 하였는지를 파악할 수가 있는 실마리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부르신 후 -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감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하란에서 거류하던 중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창세기12:1-3)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난다. 이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살이었다.
(창세기12:4)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아내와 조카와 자신에게 속한 재산들을 모두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이동한다.
(창세기12:5)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라는 구절을 볼 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명하신 명령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라는 구절을 볼 때 이것이 큰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1:31)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본래,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아들, 며느리, 조카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려다가 하란에 머물러 살게 되었으며, 205세의 나이로 하란에서 죽게 된다.
(사도행전 7:2-4)
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사도행전에 기록된 위의 말씀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르에서 이미 아브라함을 불러 내셨고, 아브라함의 권유 또는 주장에 따라 데라가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려했던 것이며, 데라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가나안 땅으로 가도록 다시 말씀하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물론, 위의 말씀 덕분에, 데라가 205세에 죽고난 후에 아브라함이 75세의 나이로 하란을 떠났으니 아브라함은 데라가 130세에 얻은 아들이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기도 하다.
창세기의 말씀만으로는 왜 데라가 아들 아브라함과 며느리, 조카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 했는지는 알 수가 없고, 또한 왜 데라가 하란에서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그의 아들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이 '마침내'는 가나안 땅으로의 이동이 2대째에 완료되었음을 알려주며, 이 이동이 간단치 않았음을 알려주며, 이 이동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음을 뜻하며, 이제 하나님께서 진행하시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으로 간 것에 대해 성경은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라고 기록했다. 특별히 '이에'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아브라함이 고민하거나 생각하지 않고, 즉시 따랐음을 나타낸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시고 마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따르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말씀과 매우 흡사하다.
(마태복음 9:9)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행했는지 기록했다. 그는 "일어나 따르니라"라고 기록했다. 고민이나 주저함, 생각이나 계획에 시간을 쏟지 않고, 일어나 따른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행동했다.
(2) 하나님께서 부르신 후 - 할례를 행함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13세로 자란 이스마엘이 아니라, 90세인 사라가 낳을 아들 이삭과 영원한 언약을 세울 것을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처음 이 말씀을 들었을 때는 자신과 아내 사라의 나이를 떠올리고 웃었으나, 그는 곧 이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전적인 신뢰는 대대로 할례를 행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다. 이날,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날,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에 속한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였다.
(창세기 17:23-27)
23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24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25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26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27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아브라함은 할례를 행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고민이나 주저함, 생각이나 계획에 시간을 쏟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집안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였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행동했다.
(3) 하나님께서 부르신 후 -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보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얻은 후, 이삭이 젖을 뗄 무렵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본 사라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기를 아브라함에게 요구했다. 이삭이 태어날 때에 이스마엘이 14살이었으니, 이 무렵에는 이보다 나이를 좀 더 먹었을 것이고, 이스마엘을 아들로서 키워오며 정을 준 세월을 생각할 때 사라의 요구는 아브라함에게 큰 고민이 되는 문제였다.
(창세기 21:11)
11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행할 바를 알려주신다.
(창세기 21:12-13)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고민이나 주저함, 생각이나 계획에 시간을 쏟지 않았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 보냈다.
(창세기 21:14)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아브라함은 그렇게 행동했다.
(4) 하나님께서 부르신 후 -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
이는 너무나 잘 알려진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지정한 산에서 번제로 드리도록 명령하셨다.
(창세기 22:1-2)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고민이나 주저함, 생각이나 계획에 시간을 쏟지 않았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번제 준비를 갖주고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것으로 향했다.
(창세기 22:3)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이 뜬금없고 억지스러우며 엽기적이고도 충격적인 하나님의 지시에 대해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다지도 맹목적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놀라운 순종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이삭을 번제로 바치고자 했던 아브라함의 이러한 순종은, 예수님을 십자가 상에서 죽기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님께서 변형되시고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던 것을 생각해 보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 아브라함의 순종을 분명히 생각하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태복음 26:39)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태복음 26:42)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아브라함은 그렇게 행동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 반응했다. 그 반응은 철저한 순종이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이러한 모습은 어디서 왔을까?
(5) 하나님께서 부르시기 전 - 방주를 만든 노아
아브라함의 족보를 거슬러 10대를 올라가면 노아가 있다. 노아가 살던 당시의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했고, 사람들의 모든 생각이 악한 때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다.
(창세기 6:5-7)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비록 세상은 그러했지만, 노아는 달랐다.
(창세기 6:8-9)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하나님께서 한탄하시고 근심하실 정도로 죄악이 가득하고 사람의 생각이 악할 뿐인 세상에서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로서 살아갔다. 흔히 이러한 태도를 모두가 '아니오'라고 할 때, 혼자 '예'라고 말할 수 있는 모습에 비유하지만, 세상 모두가 하나님을 떠나 옳지 않은 생각과 행동으로 살아갈 때, 혼자서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은 몇백 배, 아니 몇백만 배 어렵고 힘든 일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예수님께서도 말씀해 주셨다. 다시 오실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누가복음 18:8)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러한 노아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멸하겠다는 계획을 알려주시고, 노아의 가족과 생물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방주를 만들도록 명하셨다.
(창세기 6:13-21)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16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20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21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하나님의 지시를 들은 노아는 지시대로 준행하였다.
(창세기 6:22)
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하나님의 명하신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기록이 이렇게 간단한 것은 노아의 행동이 간단명료했기 때문이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행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와 같은 노아의 행동과 아브라함의 행동은 매우 흡사하다.
(창세기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창세기 17:23)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창세기 21: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창세기 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에 여러가지를 명하셨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신속하게 순종했다. 낮에 들었으면 그날 행했고, 밤에 들었으면 다음날 아침 일찍 행했다. 아브라함이 이런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이런 모습, 이런 성격의 실마리는 노아로부터 발견할 수가 있다.
아마도, 햇볕이 따사로운 어느 봄 날 무렵,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택하여 부르셨을까를 생각하던 아브라함은 문득 '아, 그래서 그렇구나...'를 깨닫고 무릎을 치지 않았을까 싶다. 어쩌면, 오랜동안 고민하지 않고 깨달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브라함은 어릴 때에 할아버지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자랐을테니까.
아브라함이 애굽에 갔을 때나 그랄 땅에 갔을 때,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했던 것을 보면, 아브라함도 겁이 많은 사람, 따라서 소위 잔머리를 굴리는 사람임이 드러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단순하고 신실한 사람이었다. 노아를 떠올릴 때, 아브라함의 그러한 면은 다분히 유전된 기질과 성격의 영향이 큰 것처럼 생각된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으로서의 삶만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그러한 기질과 성격을 후세에 물려주는 조상으로서의 삶을 산 사람이었다. 바로 이 지점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신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 많은 유대인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알리야 운동'인데, 이 과정을 지켜보면 개나리가 활짝 핀 봄 날이 아니라도, 햇볕이 따사로운 봄 날이 아니라도 무릎을 치지 않을 수가 없다.
알리야 운동은 이사야서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사야 43:5-6)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부르실 때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불려지는 자들이 자신이 이스라엘 자손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누구를 부르시는 거야...?', '나를 부르시는 것 같지는 않은데...?'라고 생각하며 눈만 멀뚱멀뚱 뜨고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다거나, 자신을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저요? 저는 아니에요'라고 손사래를 친다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안타까운 장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알리야 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놀라운 것은, 동쪽, 서쪽, 남쪽, 북쪽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천년, 혹은 천 오백년 이상에 걸친 이방 땅에서의 삶으로 인해 비록 얼굴은 거주 지역의 원주민을 닮게 되었지만 자신들이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이스라엘의 풍습을 지키고 있으며, 언젠가는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랜 세월 동안, 자손에게 '이스라엘'을 전하고 가르치고, 언젠가는 그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전한 그들의 조상들의 말과 행동 덕분인데,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며, 또한 대대로 자손에게 이 점을 전해온 유전적인 신실함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러시아의 유대인, 에티오피아의 유대인은 이미 잘 알려져 있고, 최근에는 므낫세 자손의 후예라고 알려진 인도 동북부 지역의 브네이므낫세, 중국 카이펑의 유대인들도 알리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인도 브네이므낫세
중국 카이펑 유대인
비록 그들의 외모나 생활습관을 볼 때 완전한 유대인이라고 느끼기에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천년 이상에 걸친 이방 땅에서의 생활 속에서도 유대적 뿌리를 잃지 않고 이스라엘의 관습을 이어오며, 언젠가는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을 이어온 그들을 볼 때, 비록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완벽하다고 할 수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신실했던 아브라함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민 혹은 외국생활 1년 남짓이면 입을 벌려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엄~'으로 시작하곤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자주 보게되는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며, 사육신 중 한 분을 이해하게 된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역사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기질을 자손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서 꼭 필요로 하신 사람, 그리고 자신이 분명하게 그러한 사람임을 그의 삶을 통해 보여준 사람. 그래서 오랜 세월 뒤, 멀고도 낯선 땅 한구석에서 이제는 더이상 그곳의 사람들과 구분이 어려워진 그의 후손으로 하여금 자신이 어떻게 유대인으로서 살 수 있었는지를 깨달아 무릎을 치게 만드는 조상.
아브라함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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