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더 이상 호흡하지 않게 되는 순간, 그 순간을 우리는 '죽음'이라고 부른다. 호흡이 멈추면 조만간 육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이는 곧 육신이 활동을 멈추는 순간이다. 우리의 사고작용은 뇌의 활동으로 알려져 있으니 이후에는 육신과 더불어 사고작용도 멈추게 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죽음'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죽음은 흔히 '삶의 끝'으로 생각된다. 죽음 이후에는 육신, 그리고 육신에 의존하는 사고가 더 이상 활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육신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죽음은 명백히 사람으로서의 '삶의 끝'이 될 것이다.
만일, 사람이 육신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면, 육신과 함께 '육신 이외의 또 다른 무엇'이 사람을 이루고 있다면,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다. 비록 육신은 활동을 멈추더라도, '육신 이외의 또 다른 무엇'은 지속적으로 존재할 것이며, 그 존재함은 곧 삶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죽음은 '육신이 활동을 멈추는 지점'이 되어 버린다.
사람이 육신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면, 죽음은 마치 우주로 쏘아 올려진 로켓이 연료탱크를 분리시키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사람의 육신은 로켓이 지구를 탈출하도록 돕는 역할을 다 마치고 더 이상 필요없는 상태가 되어 분리되는 연료탱크로 생각할 수 있다. 연료탱크를 분리시킨 로켓은 이제 지구 중력의 영향을 벗어나 미리 계산된 우주공간의 궤도를 따라서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계속 날아갈 것이다. '육신'이 활동을 멈추는 지점에 도달하여 육신을 분리시킨 후, '육신 이외의 또 다른 무엇'은 육신의 영향을 벗어난 세계의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계속 날아가는 것이다.
육신 이외에 사람을 이루는 '육신 이외의 또 다른 무엇'을 '영혼'이라고 지칭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은 육신과 영혼의 분리의 순간이며, 이후에는 영혼만이 존재하게 되는 과정으로의 진입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죽음은 무엇일까...
왜 그렇게도 죽음을 무서워할까...
과연 죽음은 무서운 것일까...
성경은 죽음을 어떻게 기술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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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창조의 무렵부터 존재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2:15-17)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수정하여 명령의 절대성에 틈을 만들어 버림으로써 뱀의 꾐에 빠져 선악과를 먹게 된다.
(창세기 3:2-3)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이후에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이 어떤 형태로 실현되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창세기 3장 내에서 선악과를 먹은 이후 발생한 현상, 혹은 변경된 사항들을 살펴보도록 한다.
첫째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을 때, 자신들이 벗었음을 알고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게 되었다.
(창세기 3:8-10)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고, 아담이 "내가...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선악과를 먹은 후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는 7절의 말씀을 볼 때, 이처럼 하나님을 피해 숨는 일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 처음으로 발생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창세기 3:7)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둘째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결과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처분'을 통고받는다.
하와는 임신의 고통과 출산의 수고, 남편을 원하나 남편으로부터 다스림을 받게 된다.
(창세기 3:16)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고 평생 수고를 통해 땅의 소산을 먹게 된다. 또한 흙으로부터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
(창세기 3:17-19)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셋째로,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아담은 땅을 갈게 된다.
(창세기 3:23)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 세가지의 변화 가운데에서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의 실현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 곧 '육신이 활동을 멈추는 순간'과 관련한 사항은 위의 둘째 말씀에서 직접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 3:19)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은 '흙으로 돌아갈 때', 곧 '육신이 활동을 멈추는 순간'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이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아담은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매장이라는 장례풍습을 겪고 살아가는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지만, 창조된 이후 한번도 죽음과 매장을 경험하지 못한 아담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아담의 입장에서는 '그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을 수 있겠구나'라며 이 말씀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아담으로서는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의 흙으로부터 자신이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는 정체성 발견의 순간인 동시에, 자신의 앞날을 알게 되는 운명의 순간인 것이다. 이 말씀 자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의 의미와 매우 흡사하다. 아담은 사람으로서 살아있는 자신이 실은 흙으로 만들어졌고 결국 다시 흙이 될 것임을 알게 되었고, 흙이었던 때에는 자신이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므로 결국 다시 흙으로 돌아갈 때에는 자신이 더 이상 현재와 같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어렴풋이나마 짐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담이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담이 머리가 좋았음은 다음의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창세기 2:20)
20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가축과 새와 짐승에게 중복되지 않는 적절한 이름을 주었다는 기록으로부터 기억력, 창의력, 이해력, 관찰력, 판단력, 추리력, 논리력 등이 모두 뛰어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는 처분의 말씀을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의 실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흙으로 만들어진 아담의 육신에만 국한된 말씀일 뿐이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그의 코를 통해 생기를 불어넣으신 생령이었으므로, 육신에만 국한된 존재가 아니었다.
(창세기 2:7)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를 염두에 두고 아담이 흙으로 돌아간 상태를 생각해 본다면, 이 상태는 곧 첫째 말씀에 나타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상태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흙으로 돌아간 아담의 육신이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어도 생령으로서 살아가게 했던 그 속의 생기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어도 그의 존재가 여전히 유지되는 것과 유사하다.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것은 벗었음을 두려워한 아담의 선택일 뿐이었으며,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애초에 흙으로부터 취함을 입은 아담에게 억울하거나 가혹한 처분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두가지는 그저 보이지 않게 되었다라는 상태변화만을 나타낼 뿐이다.
셋째 말씀은 이와 다르다.
아담과 하와는 그동안 살아 왔던 에덴 동산에서 나가게 된 것이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아담과 하와를 두신 곳이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고향이자 집인 곳이다.
(창세기 2:8)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그리고, 무엇보다 에덴 동산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곳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거니셨고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대화하며 살고 있었다.
(창세기 3:8)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보내셨다는 것은 단순히 아담과 하와가 고향을 떠났다는 의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창조주이자 보호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살지 못하게 되었다는 의미에 이르게 된다. 즉, 하나님과의 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함께 살면서, 부족한 것 없는 완전한 돌보심을 받던 생활로부터, 땅을 갈고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더 이상 하나님과 대화할 수 없는 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표면적이고 물질적이고 자연적인 죽음이라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는 것은 보다 관념적이고 정서적이고 선택적인 죽음이고, 에덴 동산에서 내보내어짐으로써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은 생명을 주신 창조주와의 분리라는 측면을 생각할 때 본질적이고 근원적이며 저항할 수 없는 강제적인 죽음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생명'을 주셨을 때 사람을 보시며 심히 좋다고 생각하셨고, 에덴 동산을 만들어 그 곳에서 살게 하셨다.
(창세기 2:8)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에덴 동산에 두셨다'는 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할 때, 사람은 에덴 동산으로부터 내보내지게 된다.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가 된 것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한다. 참으로 적절하게 선택된 어휘이다.
이를 차용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상태'의 반대말은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신 상태'가 될 것이다.
이 개념을 염두에 두고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여 선악과를 먹은 이후의 아담과 하와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에덴 동산에서 살던 때'는 생명의 때이며, '에덴 동산을 떠나 하나님과 대화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신 때'는 죽음의 때로 생각할 수 있다.
근원적인 죽음은 하나님의 무관심, 곧 '하나님과의 분리'인 것이다. 이것은 억지스러고 관념적인 정의가 아니며 지극히 타당하고 자연스러운 정의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기 때문에,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면 그것은 곧 생명의 지속을 의미하는 것이고,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 하나님과 단절된다면 그것은 곧 생명의 정지와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을 통해 죽음의 근원적 의미와 죽음의 출현을 살펴봄으로써 다음과 같은 분명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 죽음은 하나님과의 분리이다.
-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 반드시 하나님과 분리된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을 '죄'라는 용어로 지칭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죄를 지으면 반드시 하나님과 분리된다.
위에서 살펴 본 '죽음'의 정의를 도입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죽는다.
죽음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죄를 없애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죄를 없애면 태초의 에덴 동산으로, 창조주 하나님께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이미 죄를 저지른 상태에서는 그 죄를 없앨 수가 없다.
그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죄를 저지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죄를 저지르지 않은 상태'인 것처럼 취급받는 것 뿐이다.
'죄를 저지르지 않은 상태'인 것처럼 취급받는다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
'죄를 저지르지 않은 상태'인 것처럼 취급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수단과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요한복음 14:6)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을 되돌릴 수 있는 분이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의 당사자 외에는 이를 되돌릴 수 있는 이가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을 되돌리는 길을 만드셨다.
사람이 '죄를 저지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죄를 저지르지 않은 상태'인 것처럼 취급받게 해 주셨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과 분리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고, 이는 곧 우리로 하여금 생명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신 것이다.
(히브리서 10:20)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을 없애실 것이다.
'하나님과의 분리'가 죽음임을 생각할 때, 모든 이가 창조주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서 에덴 동산에 거하던 아담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게 된다면, 그것은 '죽음의 죽음'의 실현이 될 것이다. 이 일은 마침내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4)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사망, 곧 죽음과 함께 죽은 자들이 수용되던 음부도 불못에 던져져 소멸된다. '죽음의 죽음'인 것이다.
'죽음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분리'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과 분리된 자들, 하나님의 무관심 속에 있던 자들, 곧 죽음 가운데 있던 자들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0:15)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이후에는 태초의 아담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자들만이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된다.
(요한계시록 21:26-27)
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이후로는 더이상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없는 세상, 그래서 결코 하나님 앞에서 숨는 법이 없는 세상이 영속된다.
(요한계시록 22:3-5)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이것이 죽음이 죽어버린 하나님의 나라, 오직 생명만이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인 것이다.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피조물이자 생령으로 창조하신 사람들과 함께 영속하는 안식을 누리시고자 하시는 것이 아닐까 싶다. 죽음을 생각해볼 때, 사람으로 창조되었음이 너무나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됨이 너무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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